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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섭 보건복지전문기자
해마다 5월이면 강원도 속초 엑스포 공원의 유정충 선장 동상 앞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한 손으로 기울어져 가는 배의 키를 잡고, 한 손으로는 무전기로 조난 위치를 알리는 모습이다. 유 선장은 난파하는 배에서 그렇게 최후를 맞았고 그의 덕분에 선원 21명은 모두 무사히 구조됐다.
1990년 3월 1일 오후 1시, 속초 선적의 100t급 어선인 602 하나호가 동중국해로 복어잡이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갑자기 4m 높이의 파도에 배 후미가 물에 잠기면서 배는 순식간에 45도 왼쪽으로 기울었다. 유정충(당시 44세) 선장은 "빨리 구명보트를 내리라"며 선원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 선원 21명은 선실에서 급히 빠져나와 구명보트에 올라탔다. 하지만 유 선장은 반쯤 물에 잠긴 조타실에 홀로 남아 무전기로 구조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삼각파도가 배를 덮치면서 배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선장의 조난 신고를 받고 인근에 있던 어선들이 몰려왔고, 선원들은 표류 12시간 반 만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선장님도 우리와 함께 대피할 수 있었어요. 만약 선장님이 구조 신호 보내기를 포기하고 탈출했다면 우리는 캄캄한 겨울 바다에 수장(水葬)됐을 것이에요." 당시 선원 중 막내로 지금은 원양어선 선장으로 일하는 최호(48)씨는 이렇게 유 선장을 추모했다. 당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던 유 선장의 아들 승렬(43·현대글로비스 근무)씨는 "아버지는 '내가 책임을 맡은 것은 선원 21명이 아니라 그들 가족을 합쳐 80명'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는 배와 함께 명예로운 선장의 길을 택하셨던 것이지요"라고 했다.
사망·실종자 302명을 낸 세월호는 하나호 젊은 선장의 최후와 달랐다. 승객들의 안전 호송 책임을 맡았던 이준석 선장이나 선원들은 아무도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선장은 구속되면서도 "승객들에게 탈출 명령을 내렸고 내가 먼저 탈출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세월호에도 영웅은 있었다.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며 "너희를 모두 구한 뒤 나가겠다. 승무원은 마지막"이라고 하던 임시 승무원 박지영(22)씨. 제자들이 대피하는 것을 돕다 숨진 남윤철(35) 교사. 그의 아버지는 2대 독자인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울음을 삼키며 "의롭게 죽은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들을 의사자(義死者)로 기려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971년부터 지금까지 의사상자(義死傷者)는 모두 688명이다. 이들에 대한 혜택도 단순히 보상금이 아니라 '의사상자 연금'을 탈 수 있게 해 유가족에게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 유 선장도 당시 의사자로 지정됐지만 마흔 살이던 그의 부인은 혼자 외아들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왔다. 지금은 의료급여 혜택을 주지만 당시는 그런 혜택도 없어 노후에 더 어려운 삶을 꾸리고 있다.
우리는 유정충 선장의 의로운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그처럼 책임 의식과 직업윤리를 갖고 사는 것일까. 혹여 우리는 고속 성장 사회에 살면서 그런 덕목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유 선장의 동상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냐고.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28/2014042803512.html
첫댓글 감동적이네요~~~21명의 선원들 가족까지 생각하시다니요~~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이런 행동을 하기가 힘들텐데
그래서 위에 두분은 의사자로 정해서 잊지 않았음 좋겠어요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