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국수 소회
점심에 아내가 끓여준 칼국수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저는 그래서 빵, 국수, 수제비, 라면 등을 가리지 않고 잘 먹습니다만..
오늘 웬일로.. 칼국수를 먹으면서는.. 저 어릴적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칼국수가
문득 그리고 아련히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 시절에 칼국수도 참 많이 해먹었지.. 동회(동사무소)에서 밀가루를 동네 주민들에게 배급하여 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배급받을 수 있는 자격이 따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같이 그래도 단독집이 지니고 있는 가정들도 나가서 배급을 받은 것을 생각해 보면.. 그래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그래서 모르기는 해도 원하는 이들에게는 자격구분 없이 밀가루 배급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 엄마들과 동네 아주머니들이
각각 빈 자루와 들통 또는 양동이 같은 것들을 들고 동회 앞에 길게 줄을 서고는 했는데 거기에 저의 엄마도 있었지요.
그렇게 받아온 밀가루를 가지고 어머니는 칼국수, 수제비
그리고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을 큼직한 들통에다가 쪄낸 ‘들통빵’을 만들어 주시곤 하였지요..
휴.. 그때 그 시절을 현재로 살았던 분들 중에는 “난 밀가루 음식은 안 먹는다.”고 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 하도 지겹도록(!) 먹어서 질렸다는 것이지요.
허허 하게도 되고 쯧쯧 하게도 됩니다. 저 역시 그 시절에 밀가루를 지겨울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자주는 먹었습니다.
그렇게 그때 지겹도록 먹지 않은 때문이겠지요.
저는 지금도 밀가루 음식을 아주 좋아하고 특히 칼국수 수제비가 그렇습니다.
그때 정부시책으로 ‘분식장려’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주식으로 먹던 것이 쌀이라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그때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으로 끼니를 먹고 지낸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웬만하면 ‘피하려’하였습니다.
쌀처럼 끈기가 없어서 금방 허기가 난다고도 하였지만
사실은 그보다는 ‘가난의 상징’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무개 집은 쌀이 없어서 밀가루 국수만 해먹는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도 들은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말씀들을 하시면서 뿜어내던 긴 한숨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하지만 정작 ‘쌀밥’을 먹는 이들은 드물었고
거의 모두가 정부에서 방출하는 묵은 쌀 ‘정부미’를 사서는 거기에 보리와 조 콩 등을 넣은 것 곧 ‘잡곡밥’을 먹었습니다.
또 정부에서도 보리혼식과 잡곡밥을 하여야 건강하다고 권장과 홍보를 계속하여
그 방면에 각종 정부시책 구호를 적은 표어들이 골목 마다 붙어져있었지요.
또 밀가루를 먹을 것을 많이 장려하고 권하였는데
‘분식으로 얻은 건강, 나라살림 기초 된다’ 라던가.. 하는 내용의 작은 표어들이
골목길 판자담장과 블록담장에 덕지덕지 붙어서 찢기고 빗물에 불어
이리저리 뜯기어진 모양으로 너덜거리며 붙어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동회에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밖에 내놓았던 밀가루 포대 겉면에는 UN 이라는 영문글자가 선명하였고
두 손이 서로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그것들이 다 6.25전쟁을 겪은 우리나라를 도와주려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내 준 것들이라고 하였지요. 그래서였겠습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우유가루’ 배급을 주곤 하여서
모자와 주머니 또는 신발주머니에 담아가지고 집에 와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뽀얗고 고운 가루가 아니라
빛깔도 누르스름하였고 덩어리들이 진 것들이 많아서
문지방에 꽝꽝 내리쳐서 깨먹기도 했습니다.
그 또한 어른들은 ‘멀리 외국에서 배에 실려 오랫동안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그렇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 과연 그랬겠지요..
그러나 아무려면 어때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지.. 어머니는 그렇게 동회에서 받아온 ‘배급밀가루’를
한 바가지 퍼서 물을 풀어 반죽을 하고는 국수방망이로 죽죽꾹꾹 눌러서 널찍하게 만들어 진 것을
다시 둘둘 말아서는 칼로 썰었지요. 바로 칼국수 면발의 탄생입니다.
제가 그렇게 잘 보았던 것은
가끔씩 그렇게 부엌에 있는 엄마 곁에 서서 콧물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바라보곤 했기 때문인데
아마도 빨리 칼국수를 먹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으시고는 “나가 놀아라,
이따가 다 되면 부르마.”라고 하시곤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은, 간절히 듣고 싶은 엄마의 그 목소리..
얼마 안 있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단숨에 달려 들어와 올라선 마루에는 접이다리 목상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있는 붉은 깍두기와 열무김치..
엄마가 듬뿍 퍼준 칼국수를 후루룩 냠냠 짭짭 먹을 적에는
세상에 부러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지요..
나와 형과 여동생이 그렇게 맛있게 분주히 먹는 모습을 얼핏 보니 엄마가 묵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셨지요..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 나이가 되니까 자꾸만 그 얼굴이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1960년대 초중반 즈음에.. 집에서들 그렇게 칼국수를 해먹었기 때문이었을까..
따로 ‘칼국수’를 파는 식당이 있었는지는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그 대신 짜장면을 파는 중국집이 외식의 대명사였지요.
그래요. 중국집과 곰탕 설렁탕.. 식당들이 많았는데
그때 조금 지나면서 ‘햄버거’라는 것이 나온 것을 처음 보았고..
그렇게 본지 한 일 년 쯤 지나서 나도 한 개 먹어볼 기회가 생겼는데
큼직한 고깃덩어리가 들어있어서 좋아라 먹기는 하였지만
뭐.. 크게 ‘잊지 못할 맛’의 반열에 올려 지지는 않았습니다.
허허 아무래도 “김칫국에 밥 말아먹고 장구 치며” 놀던 시절이라서 그랬겠지요.
역시 내입에는 엄마의 칼국수.. 된장찌개.. 가 최고였던 때..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중국집들 수만큼이나 많은 ‘칼국수’집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을 ‘입맛의 복고’라고나 할지.. 혹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이 ‘옛 맛의 기억’에 대한 향수를 갖게 된 것일까..
어릴 적의 맛, 가난했던 시절의 맛, 싫든 좋든 먹어야 했던 맛..
그래서 어쨌거나 입에 배이고 그래서 또한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은 맛이 되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맛집’의 이름을 걸고 ‘맛있게’ 끓여내는 칼국수들의 변화와 개량의 모양들이 한 몫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이곳 원주에도 칼국수를 맛있게 하는 집들이 몇몇 있어서 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고 저도 한 주일에 두 번 정도는 가곤 하지요. 허허. 칼국수는 그렇게 한 시대 속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버무려 주었는데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느 날 청와대에 입성하여 ‘청와대 칼국수’ 시대를 열기도 하였지요.
그 칼국수는 더 맛있었을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았을 것 같은데
왜냐하면 어머니가 늘 말씀하신 바가 “배가 고프면 무엇이라도 맛이 있다.”였는데
그 청와대에 들어가서 칼국수를 앞에 놓고 앉은 이들 중에는
‘배가 고픈 사람’은 없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인사로 먹고 예의로 먹고 국사를 논의하며 먹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그렇듯 마땅히 구분 되어져야 할 칼국수의 감칠맛은 어쩐지
그 청와대 뒤 뜰 쪽 저기 어딘가에 서서 옷고름을 물고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청와대 칼국수라.. 하지만 역시 저에게는 모처럼 재미있고 좋았던 모양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하루 세 번의 끼니.. 식사.. 주로 무엇을 드십니까?
오늘 점심때에 칼국수 한 그릇 어떻습니까..
역시 칼국수는 점심끼니에 잘 어울리지요.
혹 옛날 ‘배급밀가루’시절을 기억하시는 세대이시라면
‘UN구호품 밀가루’ 칼국수나 수제비를 떠 올려 보시면서
또 혹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든 현재를 지내시고 있더라도
크고 긴 심호흡으로 심기일전하시며 새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by/산골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