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메시지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심을 기뻐하며 경배와 찬양을 하고 연극과 뮤지컬을 공연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기에 언젠가부터 태양이 가장 높이 뜬 날을 예수님이 태어난 날로 삼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날을 기념하기를 좋아합니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블랙 데이, 빼빼로 데이등 일종의 ‘데이마케팅’이라고 부르는 상술이 일년에 한번 어떤 날을 기념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크리스마스마저 선물을 주고받는 '데이마케팅'처럼 되어버려 아기 예수님의 탄생보다는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 트리가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 많은 교회당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오늘 같은 날을 기념하는데 과연 무엇을 기념해야 되는지 함께 생각하고 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본문 말씀에 영광, 기뻐하심, 평화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이 탄생하려던 때에 땅에 평화가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1-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예수님은 소나 말같은 가축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는데 헤롯 왕은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에 자기 이외에 다른 왕이 태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두 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는 다 죽이라고 합니다.
두 살이면 막 걸어 다니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어설픈 발음이지만 엄마 아빠를 부르며 이것 저것 만지며 노는 모습이 태어나서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울 때입니다. 그런 아기들을 왕의 명령에 의해 죽였습니다. 부모들과 가족 친지들은 눈 앞에서 어린 아기가 죽어 나가는 장면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슬픔과 고통이 이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이만큼은 되겠습니까?
그 날의 기록은 차라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원망이요 땅에서는 슬픔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자들에게 전쟁이로다."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참으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는 날이 평화롭고 기뻐할 수 있는 상황만은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2000년 전의 왕권 시대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즘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도 어느 지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폭격에 의해 죽음을 겪어야 하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내 자녀가 그런 곳에서 죽는다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은 비명과 고통이 계속되는 날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오랜 지배를 받고 있었고 관계가 안 좋았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들이 발생함으로 더 심한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보복의 칼날을 갈면서 메시아가 오면 새로운 왕국을 세워서 복수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땅에는 평화와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죽임과 미움과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미움과 증오와 두려움은 몇 천년이 지나도 바뀌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날의 상황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적용해 보겠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고통은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 생활의 고통은 심한 빈부격차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생활에서는 취직 혹은 실직이 스트레스와 고통이라고 생각되며
가정에서는 부부싸움이나 이혼 등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가장 큰 고통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 당시 헤롯 왕처럼 누군가 내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겼던 슬픔의 고통이 있습니다. 또한 근심과 고민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고 두려움과 미움과 슬픔을 가진 내 형제와 이웃들이 있지만 나와는 상관없다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러한 곳에서 메시아는 탄생하셨습니다.
천사의 도움으로 헤롯이 죽이려는 예수님은 살아나셨고 아이러니 하게도 메시아를 죽이려든 이 세상의 왕 헤롯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라난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유대인들이 그토록 원했고 자기들의 마음을 신원해줄, 로마의 압제에서 보복을 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워줄 분을 찾았는데 오히려 용서와 화해를 전하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어라 말씀하시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라고 하시는 등 바보스럽고 답답한 모습만을 보게 됩니다.
결국 제자들에게까지 배반을 당하고 털 깎는 양처럼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을 보십시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잠잠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는 기쁨과 안락의 자리이기보다는 고통과 분열의 자리였습니다.
바로 구유 안에서와 같은 음식물 찌꺼기 냄새 나고, 미워하여 죽이고, 이로 인한 슬픔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그런 자리에 그리스도께서는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시기와 장소가 어쩌면 우리 마음 속과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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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기서 그 메시아가 이 땅에 탄생하셔서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것같이 십자가를 지셨던 바로 그 십자가의 메시지가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18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평화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평화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화를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털 깎는 자 앞에 양같이 잠잠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원수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원수 관계를 끊어 버리는 사역을 위해서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히 계셨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을 기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두려움 가운데 살인을 행하던 나에게 그리스도께서 내어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빈부격차, 실업과 해고, 부부갈등과 이혼,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로 인한 슬픔의 고통이 가득했던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난 날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난 날들은 모두 다르지만 이렇게 오늘 이 하루를 정해 기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2000년 전에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과 비슷한 시기와 장소였던 바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셔서 자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형제들과 이웃들과 함께 평화할 수 있는 생명이 내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이렇게 기쁜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들 중에 혹시 아직 자기 마음에 그리스도가 태어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당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첫댓글 몇 년 전에 전하게 된 메세지인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어 미리 올려 봅니다.
마디사이님의 좋은 글에 감사하며, 주께서 이땅에 육신을 입고 오심을 찬양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 임마누엘 예수를 찬양합니다. 벌써 크리스마스가 되었군요. 숭사리라면 크리스마스에 대한 심층적인 고찰이 다루어지기에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다소 맹목적인 크리스마스 보내기에 앞서, 그 유래와 비성서적인 요소들이 검토되어진다면 어떨까 하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보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