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외 2편)
신용목
종이 위로 생각이 지나갔다 그걸 읽으려고 형광등이 빗소리처럼 흰 목을
그러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요하게
늘어뜨렸지만
생각은 이미 나를 지나가버렸고 지금은 종이와 손가락과 툭 끊어진 채
하얗게 굴러다니는 머리의 밤, 발을 끈다
어둠이
생각을 감싼 표지라면
제목은 지나갔다
제목 없는 표지면 어떤가, 아무리 찢겨도 맨 앞 장이 표지겠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서 찢어내고 찢어내도 그대로인
생각처럼
비,
젖는 일에는 입구가 없어서
책을 읽는다
죽은 자의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 글자가 남아 있다, 죽은 자를 깨웠다가 다시 죽인다
찢겨나간 페이지가 또 한 권씩 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한 장으로 이루어진 책
그러니까
무수한 낙엽들이 한 권씩 책의 무게로 떨어지고 있다 무수한 바닥을 찢으며
비,
가스불로 끓이는 것 같은 비
아무리 졸여도 결정되지 않는 글자로 자글대다 간신히 피어오르는
비,
짜질 줄도 모르고
바닥에 달라붙어
네,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생각인 줄도 모르고 꿈을
꿈속에서, 당신은 내 앞에서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어요 듣지 못한 채
비행기가 지나갔습니다 나에게 나를 묻는 당신
맞아요, 당신에 대해서라면 당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책이 아니라 문장이 아니라
바람이 흔들어보는 십자가,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
불빛은 빗방울처럼 떨어지는군요 은총에선 우산 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한 사람을 여러 칸으로 나눠담고 있었습니다 나는 꿈속에서도 깨어 있었는데
다음 버스에도 같은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모든 시에는 산문적인 이유가 있다
수평선을 번갈아 건너뛰며 줄넘기 놀이를 하는 해와 달. 황급히 다락에 숨겨놓은 구름.
나를 힘껏 나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배.
내 숨이 밀어놓은 그릇처럼
배,
식탁에
차려져 있다, 차릴 수 없는
말.
저녁에 대해서라면,
바다에 둥둥 떠가는 푸른 식탁보처럼 말하자. 사랑에 대해서라면, 거기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로
말하고
꿈에 대해서라면,
급식실에서, 먼저 먹은 아이가 기다리는 짝꿍의 식판처럼 어지러운 해초밭을 지나
인어들의 마을에 가서
나는 학교를 열고 싶다. 지직대는 형광등이 작은 거품을 만드는 물속의 교실에서
지금은 작문 시간, 원고지를 나눠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 칸에 한 자씩 문을 열고 글자들을 내보내자. 빨간 칸은
바다의 격자무늬, 창문 같은 것.
졸업식처럼?
그래, 졸업식처럼 나란히 송가와 답가를 부르고 우리는 우리가 아닌 곳으로 가자.
이별에 대해서라면,
물속에서는 눈물이 흐른다고 쓰지 않는다, 섞인다고 써야 한다.
가르치며,
파도는 발 없는 인어들의 발자국이었구나, 배우며 손을 흔들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라면,
식탁에 놓인 수저통은 꼭 관뚜껑 같아.
숟가락은 시체 같지.
먼바다에서부터 창문이 밤의 못을 하나씩 뽑고 있을 때, 맞은편에 앉은 이가 국밥을 말며 말했다.
배고픔이 늘 죽음을 이긴다,
고.
인어들 떠난 바다는 식탁보처럼 고요했다.
배.
누군가 빈 상여에 불을 붙여 밀고 있었다.
슈게이징
잠수를 배운다.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바닥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
물에게 목을 축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호흡으로 하늘의 허파를 계속 부풀리듯이
구름의 자세를 추측하며
비행을 배운다.
불쑥불쑥 그날의 내가 나타나.
비 오던 날
파란 신호등이 횡단보도를 밟으며 점멸하던 날, 섬에 닦은 거대한 활주로를 보면
배를 가르고 바퀴가 튀어나오지.
그날,
물이 하늘을 날아보려고 구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잠기고픈 구름이 비라는 이름을 가진다는 걸 알아버려서
나는 이름을 바꾸었다,
다른 곳으로 가보려고.
이곳의 비가 저곳의 눈인 것처럼, 구름이라고 하면 물은 하늘에서 사라진다.
비라고 하면 물은 빗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눈이라고 하면 비는 겨울 속으로
사라지고,
다른 곳으로 가면 다른 곳은 사라지겠지. 이름을 부르면 나는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지고 나면 어떤 이름으로 잊혀져도 좋은데,
공중의 활주로
물속의 바퀴로
불쑥불쑥 뛰어드는 그날의 나 때문에 일기를 쓰면 편지가 된다. 반성이 있는 편지와 추신이 있는 일기가 된다. 헤어지자고 말하고 나서는 보고 싶다고 말한다.
⸺시집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2021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