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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30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창세 17,1.9-10.15-22
복 음 : 마태 8,1-4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교 합격 소식을 받고 처음으로 교구 신학생 선배들에게
인사하는 자리가 서품식 성가 연습 때였습니다.
1월에 있는 서품식에 아직 신학교 입학도 정식으로 하지 않았지만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서품식 성가 연습부터 함께 했었습니다.
성가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선배들이 모여와서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그때 한 선배님께서 “그러면 얘네는 몇 년에 서품받는 거야?”라고 하십니다.
이에 “1999년이죠.”라고 다른 선배님께서 대답하자, 또 다른 선배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했는데, 너희는 신부 되자마자 인생 끝이구나.”
당시에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세계사에 기록된 큰 사건들을 계속 예언했었다면서,
인류 멸망의 예언도 맞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야기했었지요.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현재 2023년을 살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인류가 멸망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999년 1월에 사제서품을 받아 지금까지 신부로 잘살고 있습니다.
지구는 망하지 않았고, 저도 멀쩡합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측대로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지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레짐작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닌,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삶이 우리의 마지막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당시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혐오의 대상이었고, 더구나 이 병의 치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어떤 단체나 격리 수용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요.
스스로 사람이 있는 곳을 갈 때,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쳐야 하는 의무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삶,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희망을 둡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주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었기에,
자신의 병도 깨끗하게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의 시선만 신경 쓰고 있었다면,
주님께 말씀을 드리지도 또 주님 앞에 나아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만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면 됩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김구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외모가 반듯한 것보다는 몸이 건강한 것이 좋다.
몸이 건강한 것보다는 덕이 있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살면서 반듯한 외모와 건강한 몸에 더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기에 그런 것들이 성공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균형 잡힌 몸매를 보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강인한 체력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한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험난한 세상을 살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젊어 보이려고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기도 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여전히 하루 3시간 정도는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덕을 쌓는 데는 소홀한 면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라.”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삼국지에는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서 3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간 것을 뜻합니다.
유비에게는 강건한 무장이 있었습니다. 관우, 장비, 조운은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습니다.
무장과 함께 작은 싸움에서는 능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략과 전략이 필요한 큰 싸움에서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싸움을 이끌 지략과 전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다스릴 큰 싸움을 논할 전략가가 없었습니다.
유비는 제갈량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작은 싸움은 물론 큰 싸움도 이길 것 같았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능히 천하를 건 싸움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수모를 감수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3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늦은 가을에 찾아갔고, 추운 겨울에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따뜻한 봄에 찾아갔고, 제갈량은 유비를 받아들였습니다.
솥단지가 3개의 발이 있어서 균형을 잡듯이
유비가 제갈량을 얻으면서 드디어 삼국지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유비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체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자포자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영혼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나병환자가 된 것은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 건강만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로 외면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0세가 되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많은 땅과 자손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1-4)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일과 구원하신 일도 당신이 원하셔서 하신 일들입니다.
병자 쪽에서는 예수님의 의향을 알지 못해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을 했는데,
병자가 청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그러신 것처럼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청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청하는 것은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일입니다.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또는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또는 처음부터 받기를 원하지 않아서 청하지도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과 가장 좋은 것을 주셔도 받지 못합니다.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나는 원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자비’는 원래 아무런 조건 없이, 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받는 쪽에서 잘 받아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잘 받아서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 이야기 전체를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병’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죽음의 어둠 속에 앉아 있었던’ 인간들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신 일은
메시아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으로 사신 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깨끗하게 되다.’ 라는 말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병에 걸리면 아프고, 아프니까 당연히 병을 고치기를 원하고,
그것을 원하니까 당연히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게 그렇게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병에 걸렸는데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병에 걸린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고,
병을 고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고치기를 원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께 청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또는 다른 무엇인가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
신앙인은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인정하고, 믿고, 고백하고(사도 4,12),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요한 5,6).
건강해지고 싶다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 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 5,7).”
그가 못 가에 누워 있으면서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린 것은,
또 물이 출렁거릴 때 남들보다 먼저 못 속으로 들어 가려고 한 것은,
병을 고치고 건강해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들보다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또 자기보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자기가 왜 그곳에 누워 있는지, 또 자기가 왜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잊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함으로써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버렸습니다(요한 5,15).
복음 말씀에 나오는 병자는, 침묵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마르 1,45).
그의 불순종은 그가 몸의 병을 고친 것으로만 만족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몸의 병을 고친 일은, 즉 치유의 은총을 받은 일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만일에 몸의 병을 고친 것으로만 만족하고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몸의 병을 고친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한센병 환자의 치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한센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
자신이 치유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은 예수께 달렸다. 치유의 권한은 주님께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한센인의 추정을 확인해 주신다.
이 치유 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다.
사제가 그것을 확인하면 깨끗한 삶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의 품으로 갈 수 있었다.
사제에게 그런 확인을 받는 것이 당신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당신이 행하셨지만,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을 사제에게 맡겨
당신이 행한 기적을 판단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 환자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으로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강요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이 한센병 환자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몸이 썩어가는 한센병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을 모두 썩게 하는 무서운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성체,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대사건인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복음서 안에는 죄많고 허물투성이인 우리 인간을 쓰다듬는
주님의 모습이 자주 소개되고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환부를 존귀하신 당신 손으로
어루만져주시는 장면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한 나병 환자와의 만남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 가련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습니다.
나병 환자는 얼마나 절박했던지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가장 가련한 사람들이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결과 나병에 걸린 대죄인 취급 받았습니다.
불경스럽고 부정 탄 인간, 상종하거나 접촉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병에 걸리면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병 판명을 받으면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만,
살고 있던 주거지를 떠나 성 밖으로 나가 살아야만 했습니다.
움막을 짓고 들짐승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생사가 궁금했던 가족은 멀찌감치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던져놓고,
목이 터지도록 나병 환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운이 좋으면 겨우 챙겨갈 수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나병환자들은 즉시 목청을 높여 ‘여기 부정 탄 사람 있으니 조심하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준수하려 하셨다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나병 환자를 향해,
‘당장 내 앞에서 물러가라!’라고 외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나병 환자의 가련한 모습에 예수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프셨습니다.
자동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예수님 손이 자동으로 그의 썩어 문드러진 환부에 가 닿았습니다.
이윽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1,41)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대사건인지요?
하느님께서 한 가련한 인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몸을 굽혀 그의 고통과 상처를 바라보십니다.
존귀하신 하느님의 손이 흉측한 인간의 피부에 직접 와닿았습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고름투성이인 우리 인간의 피부에 터치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런 접촉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존귀하신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를 터치하시러, 우리 안에 머무시려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저 기쁘고 감사한 마음, 황공스런 마음으로 정성스레 영성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깨끗함은 사랑의 기본 조건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산상설교의 대단원을 마치신 예수께서 下山 하신다.
산상설교의 청중이었던 제자들과 군중 모두 벅찬 감슴을 억누르며
가르침의 정신과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으리라 믿는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에서 보이신
율법학자들을 능가하는 권위를 이제 행동으로 보이실 것이다.
가르침의 놀라운 권위를 인정한 군중과 제자들은
이제 실제로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님 행위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이에 마태오는 복음서 8-9장에 10가지 이적 사화를 집성해 놓았다.
마태오는 10가지 이적 사화 중간중간에 유다인의 멸망 예고(8,11-12),
예수 추종의 자세(8,18-22), 세리 마태오의 소명과 식사 공동체(9,9-13),
그리고 단식 논쟁(9,14-17)을 곁들여 기적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자칫 기적을 통한 열광주의나 기적 만능주의에 빠질 수도 있을
제자들과 군중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것이다.
나병환자의 치유는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의 치유와 죽은 사람의 소생,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 수용과 함께
근본적인 메시아 사명(이사 29,18-19; 35,5-6; 61,1)을 성취시키는 표징에 속한다.
왜 그럴까?
우선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에 대한 메시아 사명의 성취는
“다시 봄, 다시 걸음, 다시 들음”이라는 구원의 첫 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병환자의 치유는 “부정함”을 씻고, “정함”을 베풀어줌으로써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마련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음의 깨끗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소생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하는 메시아의 궁극적인 사명에 속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우선적으로 겨냥된 이유는
진복선언의 첫 번째 진복자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5,3)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이 가장 선호하는 제1의 청중이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나병환자의 치유는 이해되어야 한다.
마태오는 마르코 원전(마르 1,40-45)을 옮기면서 이야기의 규모를 상당히 줄여버렸다.
허나, 핵심적인 내용은 같다.
“주님, 주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예수 앞에 절을 하며 무릎을 꿇은 나병환자의 애달픈 간청이다.
이는 가족과 사회와 종교로부터, 나아가 하느님에게서까지
버림받은 소외된 자의 마지막 절규요 마지막 희망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병이 나았다.(3절)
예수님의 손길은 나병환자의 不淨함을 淨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수께서는 일어난 일에 대하여 엄중한 함구령을 내리셨다.
다만, 율법이 정한 대로(레위 14,2-32) 곧장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후, 예물을 드림으로써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미루어볼 때 사실상 이런 증명은 필요 없다.
그러나 치유 받은 자의 공적인 사회복귀를 위해 필요한 절차임을 마태오가 알려주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손길 하나가 절망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소외된 자에게 和親을 다시 선물했다.
그런데 희망과 화친의 조건이 깨끗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깨끗함이 없이는 사랑도 희망도 화목도 헛된 기대와 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전 요세피나 수녀
복음 속에서 많은 군중으로 표현되는 이들, 그들은 자주 예수님을 따른다.
따름의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때로는 예수님을 앞서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한 군중 속에서 오늘은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로 다가온다.
그는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을 바로 "주님!"이라고 부른다.
가족은 물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던,
죄인 중에서도 중죄인 취급을 받는 삶을
죽지 못해 매일을 살아내고 있었을 그에게
예수님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찾은 "주님!"이었을 것이다.
주님의 원의가 나병 환자의 원의와 맞닥드려지는 아름다운 만남,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만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몸에 대실 때
나병 환자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순간을 맛보았을 것이다.
말 없는 접촉만으로도 충분히 완전한 이 치유의 순간을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완결하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셨을 나병 환자의 바람,
그 바람을 당신의 바람과 일치시켜 주시는
모두에게 좋으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는 오늘의 복음,
하느님 향한 신망애 삼덕을 청하며
우리 각자의 바람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바람이 우리의 삶을 깨끗이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출처] 마태 8,1-4 연중 제12주간 금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