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11:1
한 달짜리 사랑, 몇 년짜리 사랑도 있고 평생의 사랑도 있지만 자기 부정의 영원한 사랑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나를 버리고 떠난 이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시험대에 오른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의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 11장은 호세아서의 최고 절정입니다. 신실한 남편을 버리고 음부를 따라 집을 나간 고멜을 포기하지 않고, 번번이 값 주고 다시 사 왔던 호세아의 사랑으로 예표 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죄악 중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회복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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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역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하고 회복시키고야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조건부이며, 한계와 많은 모순을 가진 우리의 사랑과 너무나 대조적지요. 하나님은 과거부터 이스라엘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원문에는 “이스라엘을 내
아들로 삼기 위해 애급에서 불러냈다(1)”고 나옵니다. 언약에 따라 원래부터 신분상 아들이기는 하지만 죄와 애굽의 노예로 살던 그들을 하나님이 아들로 삼아서 만백성에게 공포하기 위해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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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종을 삼아 일 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일은 천사들이 훨씬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불러내시는 목적은 아들을 삼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생에 찾아오셔서 내 삶을 축복하시고 나와 함께 교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내가 아버지의 모양을 나타내 편지가 되고 온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지요. 내가 종이나 일꾼이 아닌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일 잘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행복해 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사귀면서 즐거워하고, 주님을 닮아가고, 닮아간 속사람과 본질을 통해서 이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고 그 일을 통해서 온 세상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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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한 것이 없이, 내 편에서 어떤 자격과 조건을 구비함도 없이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적용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은 자기 신화를 깨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탁 깨뜨려져서 없는 것처럼 되어야 하는데 대개 교만하거나 자학하거나 둘 중 하나의 모습으로 탁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쉽게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기 합리화에 빠진답니다. 가끔 내가 우선 뭔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살아보면 그거 아무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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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부르실 때 기대하시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뻐하고, 그분을 닮아가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어떤 부분이 드러나고,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 세상에 복의 통로와 근원으로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처럼 사랑을 받은 나의 마음은 계속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에 동화되어 갔듯이 내 속에 죄의 본성을 따라서 자기 중심 성, 자신에 대한 미련과 애착 때문에 내가 잘 되어서 세상에서 사람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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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야망이지요. 하나님은 아들 삼으시려고 종 된 자리에서 부르셨건만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합니다(2). 누구에게나 따끈따끈한 찐빵 시절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은혜에 감격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 마음을 다 빼앗겨버리고 나의 욕구를 따라 살고자 우상을 쌓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게 됩니다. 실제로 물질적으로 풍성한 사회일수록 탐욕으로 치닫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탐욕을 적절히 합리화하면서 인생을 그냥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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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리들을 불러 하나님은 걸음마를 가르치십니다(3). 수백 년 동안 애급에서 종살이했기 때문에 그들의 걸음걸이와 마음가짐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통해 거듭났어도 오랫동안 죄에 대해서 찌들어 있기 때문에 나의 걸음은 금방 범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걸음걸이의 실천과 적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십니다. 한 걸음씩 가르치시고, 힘들어하고 지칠 때는 어미가 자식을 품듯이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고치시고 치료하시고 훈련시키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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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관심도 두지 않고 자기들이 힘든 것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옛날 방식으로 걸으면 편하겠지요. 사람들의 몸의 자세를 교정 받고도 익숙한 옛날의 자세로 금방 또 돌아가듯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귀한 걸음걸이를 배우면서 치료과정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수고롭다는 사실 자체로만 힘들어하고,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원망하고, 끝내 마음을 닫고 더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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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무리들을 보시고 짐승들의 목을 매는 줄로 당기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끄시고 인도하십니다(4). 멍에의 줄로 강제하고 억지로 뭔가를 하게 하지 않고 사랑의 줄로 이 말 안 듣는 것들을 향해 기다리십니다. 오, 아버지! 물론 때로 하나님이 당기기도 하시지만 강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줄로 어려움과 위험에서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나를 설득하시고 인내하시며 중심에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알기를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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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어쩌면 한 결 같이 인내가 없습니다. 너무 자주 조급하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불양입니다. 살아온 인생 자체가 실수투성입니다. 그런 나를 사랑으로, 기쁨으로, 종노릇하는 백성들 만드시기 위해 오래 기다리셨고 지금도 또 기다리십니다. 종들은 때리면 되는데 자식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오랜 인내와 수많은 수고와 눈물이 따라야만 그 자식이 사람이 되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압니다. 하나님은 저를 그렇게 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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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건만 이스라엘의 눈은 지금 애급을 향하고 있습니다(5절). 주님이 애타게 불러도 애급으로 고개가 돌아가 있으니 들릴 리가 없겠지요. 애급을 거듭 바라보다가 결국 앗수르와 세상과 사람의 종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눈이 어디를 향해 있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삶을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향은 훨씬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왜 그러는 것일까? 은혜를 받고도 그 사랑에 보답은커녕 오히려 죄를 짓고 더 멀어지는 이유는 뭔가? 다 자신들의 계책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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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최후의 보루인 성읍의 빗장이 깨뜨려지고 맙니다(6). 성도가 주의 도움보다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계책을 의지하며 배반과 아첨과 거짓을 행합니다. 재물에 끝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재물을 자신의 손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더 탐욕에 사로잡힌 채 세상의 방식을 따라갑니다. 사실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 말씀이 "결혼을 하면 염려 관을 쓴다. "고 하셨는데 과연 그렇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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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도 없고 내 짐에 배우자와 자식의 짐까지 얹어야 하는데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짐을 벗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보란 듯이 떳떳하게 뭔가를 구비해서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서도 안식이 없고, 하나님조차도 나를 짓누르고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 변함없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그 안에서 안식과 쉼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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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결심하고 끝끝내 하나님에게서 물러가 돌아오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7). 선지자가 아무리 “너희가 애급에서 종 되었을 때 그 땅에서 이끌어내어 아들 삼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쳐도, 땅에 있는 계획과 행동에 마음이 딱 붙어 들리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우선 당장 소용되는 것들, 내가 좋아하고, 내게 기쁨이 되는 것, 이 땅에서의 행복, 물질에 마음을 다 빼앗겨 땅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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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내가 어찌 너희를 아드마 같이 놓겠으며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나의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켜 나의 긍휼이 불붙는 듯하다”고 말씀하십니다(8). 아드마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로 심판 받아 멸망한 성들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잘못 가고 있을 때,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 마음에 많은 생각이 돌고 돌아서 하나님은 마침내 한 결론에 이릅니다. 당신의 공의를 접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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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그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9).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돌아서 저를 사랑하실 때, 누구나 다 들을 수 있게 사자처럼 쩌렁쩌렁한 소리를 발하며 그 백성을 부르시는데 그 소리를 들은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옵니다(10).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사람을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시몬 너는 들리는가?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물론 목소리를 듣고 비둘기와 새처럼 신속하게 날아오는 자들에게 각 집에 거하는 안식과 참 평강이 찾아옵니다(11). 그래, 이제 사랑을 말하자.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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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배반(1-4)
a.아버지께 등을 돌리는 아들:1-2
b.아버지의 사랑:3-4
심판의 선고(5-7)
a.앗수르에 의한 멸망:5-6
b.마지막 기회의 상실:7
진노를 억누르는 여호와의 사랑(8-9)
a.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8
b.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9
흩어진 자의 귀환(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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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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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어린 부성_
아들이 겪을 징벌_
버리지 못하는 사랑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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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불붙는 사랑을 생각하면 감사할 뿐입니다. 짐승처럼 뒤집어쓰고 있던 죄의 멍에를 벗기시고 주의 변함없으신 사랑을 사자의 포효로 온 열방에 알리셨으니 거부하지 않고 라이언 킹의 통치에 복종하겠습니다.
2024.11.30.sat.C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