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ㅡ 부모는 자녀의 거울
이 배 근ㅡ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회장
거울과 같이 맑고 잔잔한 물을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하며, 물을 맑은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 구리거울이 나오기 전까지 물은 옛 사람들을 비춰주는 거울을
대신하였다. 묵자(墨子)가 말한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 鑒於人)은, 물과
같은 거울에 나를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비춰보라는 뜻이다. 타인에게 비춰
보면 자신의 인간적 품성이 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물을 비춰주는 거울은
맑아야 하고, 사물의 경중(輕重)을 가늠하는 저울은 균형을 지켜야 한다.
거울이 흐리고 움직이면 대상을 그대로 비출 수 없고, 저울이 균형을 잃고
흔들리면 가벼움과 무거움을 제대로 잴 수 없다. 세상은 인격을 지닌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정직과 성실은 도덕의 거울이며, 사회의 기본이다.
토마스 바샵의 '파블로 이야기'에,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져보라는
글이 있다. 진정 자신의 꿈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혹여 자기 자신은 아니었는
지. 남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가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마음에
새기라고 말한다. 돌을 갈아서는 거울을 만들 수 없고, 멍하니 앉아서 좌선만
한다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정조대왕은 홍제전서(弘齋全書)에서
옥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캐내야만 얻을 수 있고, 거울은 저절
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비춰야만 보인다고 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평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생의 비밀은 단 하나,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도 너를 대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거울과 같아서 세상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면 세상은 나에게 험상궂은
모습을 보이고, 세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 세상은 또한 나에게 미소를 보여
준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자녀도 부모를 닮아간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다.
중앙일보의 대한민국 중학생 리포트(2013. 9. 24)는 인성지수 조사에서,
자신에 대한 잣대인 정직은 61.7점으로 낮고, 타인에 대한 잣대인 정의는
81.3점으로 높았다고 한다. 스스로는 정직하지 못하면서, 남의 잘못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학생들의 인정지수(69.8)와 부모들의 인정지수
(73.6)는 별 차이가 없다는 데 있다. 자녀는 발가락만 닮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도 부모를 닮아간다.
부모가 늘 웃어주고 미소로 대하면, 아기는 자신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가 안아주지도 않고, 말도 걸어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도 않는다면 아기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 아이는 한 발짝을 띠고는 반드시 부모의 얼굴을 쳐다본다.
부모가 웃으며 손뼉을 치면 아이는 스스로 대견해 하고, 부모가 얼굴을 찌푸
리면 잘못한 게 아닌가 하고 낙심을 한다. 부모의 얼굴 표정과 몸짓, 말투는
자녀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는 여전히 아이의 거울이
된다. 지나치게 보호하면 아이는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에 부모가 대신 해준다
고 생각하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마마보이'가 되고, 너무 지나치게
간섭하고 통제하면 아이는 누구도 자신을 미덥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 책임을 지지 않고 남의 눈치만 보는 사람이 된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반응을 자녀는 거울삼아 배워가며 어른이 되고, 그 또한 배운대로 과잉보호를
하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가 된다.
부모들 중에는 자녀들의 나쁜 거울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로 배려가 없고 공감능력이 없거나, 자녀와의 애착형성에 실패한 무관심한
부모들이다. 방임하는 부모, 지나치게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부모,
자기주장만 하는 부모, 너무 완벽만을 강조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거울이
될 수 없다. 자녀가 유아기 때부터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부모가 아이에 대해 긍정해주고 공감해주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부모는 또한 자녀들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을 갖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은 생각하는 방식이나 행동하는 방식까지도 부모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일을 저지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너무 생각이 많아 망설이기만 하는 사람인가를 자신의 거울에 비춰볼 줄
알아야 한다. 돈키호테처럼 환상과 현실을 착각하여 생각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햄릿처럼 회의적이고 우유부단하여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좋은 부모, 튼튼한 자녀는, 부모가 자녀의
어떤 거울인가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고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바로잡는다.
우리 아이들도 그들의 거울이 되는 부모를 하루에도 여러 번 쳐다보며 자란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대와 연민이 뒤섞인 부모의 웃음 뒤에 감추어진
눈물을 읽을 줄 알 때가 되면, 자녀는 거울에 오버랩 되는 부모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게 된다. 부모가 자녀의 거울이라는 것을 깨닫는 부모는 좋은 부모
이며, 부모라는 거울을 보며 바르게 자라나는 자녀는 내일이 기대되는
청소년이다.
10월 13일은 니치렌대성인 입멸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은사덕의 인생을
"대원(大願)이란 법화홍통(法華弘通)이니라." (어서 736쪽)
"맹세한 원(願)은 깨뜨리지 않겠노라." (어서 232쪽)
말법의 어본불(御本佛)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불행의 늪에 빠져
괴로워하는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결국은 천(天)도 버리시고 제난(諸難)도
당하여라. 신명(身命)을 바칠 뿐이로다." (어서 232쪽)라는 각오로,
대법(大法)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세상에 널리 홍통하셨다.
이렇듯 대성인의 대원은 전 세계에 이 법화경을 넓히는 것이었다.
이 니치렌대성인의 민중구제를 위한 불타오르는 열정은, 지금 세계 각지에서
일어선 '창가 지용의 동지'에게 흘러 통하고 있다. 1253년 4월 28일, 입종선언
(立宗宣言)을 하신 이래 일생을 광선유포에 바친 니치렌대성인은 1282년 10월
13일, 사신홍법(死身弘法)의 생애를 마치고 입멸하셨다. 올해(2018년)는
그때로부터 736년에 해당한다. 대성인은 39세 때인 1260년 7월 16일에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해, 당시 막부의 최고권력자에게 국주간효
(國主諫曉)를 하셨다. 그 이유에 대해 '어서(御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법을 위하며, 사람을 위해서이지, 자신을 위해
이를 말함이 아니로다." (어서 35쪽)
이 간효가 있은 뒤, 대성인에게는 두 차례의 유배 등 목숨을 위협하는 대난과
박해가 이어졌고, 문하에게도 탄압이 가해졌다. 이것은 법화경에 설한 그대
로 '삼류강적(三類强敵)'과 벌이는 투쟁을 신독(身讀)한 것이었다.
대성인은 그 치열한 투쟁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운 마음을 갖지 마시라"
(어서 1091쪽) 하고 제자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나타내 보여주셨다.
만년에는 병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정안국론>을 강의하며, 영법구주
(令法久住)를 위해 마지막까지 후계 육성에 심혈을 쏟으셨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에 정법(正法)을 확립하고, 불법(佛法)의 자비정신을
사회의 기조로 한다. 이것이 바로 SGI(국제창가학회)가 실천하는 입정안국
운동이다. 창가학회 초대 회장 마키구치(牧口) 선생님은 국가신도의 잘못을
파절하고, 신찰을 받으라는 강요에 단호히 거부하다 체포되었으며, 정법정의
를 사자후(師子吼)하다 결국에는 옥중에서 순교하셨다. 선사(先師)와 함께
투옥된 제2대 회장 도다(戶田) 선생님은 출옥한 뒤 창가학회 재건에 힘써,
75만 세대 절복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학회의 기초를 구축했다.
은사(恩師)의 투쟁을 계승해 온갖 장마(障魔)를 모두 물리치며 세계 광선유포
를 지휘해 오신 분이 제3대 회장 이케다(池田)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말할 나위
도 없다. 지금 SGI는 세계 192개국 지역에서 청년을 선두로 지용의 벗들이
스승과 함께 당당하게 세계광포의 드라마를 엮어가고 있다.
광선유포는 니치렌대성인의 유명(遺命)이다. 니치렌대성인의 문하인 우리는,
날마다 대성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은사덕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다.
여성에게 드리는 100자의 행복
이케다 다이사쿠
자녀를 위한다면 궂은 일도, 괴로운 일도
어른이 직접 해 주면서, 아이에게 경험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잘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참된 교육은, 누구와도 공정하게 사귈 줄 아는
폭넓은 인간,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강한 인간'을 만드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