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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3일 월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 : 에페 2,19-22
복 음 :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처음으로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했을 때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여행이었지만,
자전거를 잘 타지도 못했고 또 자신도 없어서 마음만 먹고 있었지요.
그러나 더 나이 들어서는 할 수 없겠다 싶어서
30대 중반에 갑곶성지에서 부산까지의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튼튼해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대전까지 갔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구를 지나면서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무릎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걷지도 못할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자주 가는 선배 신부님께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의 정형외과에 들어가서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푹 쉬라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시골 읍내에 들어가니 허름한 정형외과가 눈에 보였습니다.
워낙 손님이 없다 보니 접수하자마자 곧바로 진찰받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친절하셨습니다.
이 더운 날 고생한다면서 냉커피도 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받았습니다.
약사 선생님 역시 이 뜨거운 여름날에 고생한다면서 약값을 깎아주십니다.
자전거 여행 중에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곧바로 ‘사람 만난 일’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참으로 살맛 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된 사건들이
자전거 탄 것보다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만남으로 힘든 것도 잊고 목표했던 부산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계속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를 잊게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거부하면서 고통과 시련이 더 크게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불신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고는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교회의 부활 신앙을 선포하였습니다.
어쩌면 불신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상황에서
곧바로 주님을 통해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면서,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끊임없이 표징만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보다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먼저 해결해달라며 불평불만 속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희망이 되어 자기 신앙을 고백했던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면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의 고백
류해욱 요셉 신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가 듣는 복음의 내용은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었던 토마스의 불신과
주님을 뵙고 나서 이어지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해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이층 다락방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줄행랑을 친 이후
이층 다락방에 모여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나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이 공포에 떨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외부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시지요.
문이 잠겨 있지만 거침없이 그 방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여러분도 제자들과 그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평화’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평화의 은총이 가슴에 흘러넘치도록 청하십시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온화한 미소로 못 박힌 자리와 창으로 찔린 자리를 보여주시며,
당신이 그들의 스승임을 확인시켜주시는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다시 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여러분도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을 함께 느끼십시오.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것에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듣고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외치는 토마스를 바라보면서 어떤 느낌이 옵니까?
토마스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처럼 느껴집니다.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성서의 다른 대목을 통해 토마가 용기와 열정을 지닌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자로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에게로 가자.”고 하셨을 때
토마스는 동료들에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열정을 지녔던 토마스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유를 잠시 헤아려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처형을 당하자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놓았지요.
한때 “죽으러 갑시다.”라고 큰소리쳤었던 일을 생각하면 동료들에게 면목도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커다란 슬픔에 빠져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지요.
하지만 종내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동료들에게 돌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주님을 뵌 토마스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 감동 안에 머물면서 토마스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느껴지는 느낌들을 바라보십시오.
토마스는 열정적인 만큼 회의론자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런 믿음은 거짓 포장된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 회의하고 의심하면서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의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우리의 참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도 토마스가 지녔던 정직함을 지닐 수 있도록 wnbsla께 청하십시오.
또한 토마스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된 다음에는 철저하게 주님께 투신합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온 마음으로 주님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는 토마스의 투신에 오래 머물러보십시오.
여러분도 토마스처럼 그렇게 투신하고자 하는 원의가 생겨나면 그 원의를 고백하십시오.
우리도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숱한 의심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은총을 체험할 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그런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기로 해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순례를 가면서 매일 반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침이면 짐을 다 정리해서 버스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버스에 탑승하면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권, 스마트폰, 지갑’입니다.
다른 것들은 혹시 깜빡하고 놓고 나와도 되지만
‘여권, 스마트폰, 지갑’은 반드시 챙겨야 하는 목록입니다.
저녁에 다음 숙소에 도착하면 호텔 로비에서 ‘열쇠’를 받게 됩니다.
이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WiFi’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이 순례자들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인터넷에 접속하려고 합니다.
가이드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선인터넷 비밀번호를 알려줍니다.
순례자들은 무선인터넷에 접속한 후에 방으로 들어갑니다.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중요한 메일을 확인하기도 하고,
낮에 들었던 성지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기도 하고,
순례 중에 찍었던 사진을 단체 카톡 방에 올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속도’입니다. 무선인터넷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접속이 되더라도 속도가 느리면 사진을 나누기도 어렵고, 메일을 확인하기도 어렵습니다.
느린 속도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천천히 하루를 돌아보고 다음 순례를 준비합니다.
느린 속도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직원에게 확인하기도 하고, 애꿎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탓하기도 합니다.
저도 순례 중에 가능하면 ‘WiFi’에 접속을 합니다.
신문사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기사를 점검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그다지 필요 없는 메일이지만 습관적으로 메일을 확인합니다.
순례 중에도 매일 묵상 강론을 나누려고 합니다.
순조롭게 무선인터넷에 접속이 되고 강론을 나누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지만 어떤 호텔은 ‘WiFi’의 속도가 느리거나 아예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 순례를 준비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가 있습니다.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애꿎은 컴퓨터를 탓하기도 합니다.
컴퓨터가 오래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참에 컴퓨터를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큰 도시에서 ‘WiFi’에 접속하면 컴퓨터는 그동안 자신이 억울했음을 드러내듯이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접속합니다.
저도 아직은 빠르게 작동하는 컴퓨터를 보면서 입가에는 웃음이 퍼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10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가 정보를 찾아내고, 메일을 검색하듯이
예수님과 접속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용기의 꽃이 활짝 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접속하지 못했던 토마 사도는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예수님과 접속하고 싶습니다. 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처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보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접속한 동료들이 부럽기도 했고, 예수님과 만나보고 싶은 그리움도 있었습니다.
토마사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치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WiFi’에 연결되지 못해서 정보를 검색할 수 없었던 것처럼
토마사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예수님과 접속하지 못해서 여전히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내 옆구리를 만져보아라!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아라!”
예수님과 접속한 토마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든지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능력, 재능, 업적이라는 비밀번호로는 예수님과 접속할 수 없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비밀번호로는 예수님과 접속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비밀번호가 있으면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의 골짜기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의 믿음은 또 다른 ‘WiFi’가 되어서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토마사도는 그 믿음으로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근심, 걱정, 불평, 불만이 있는 하루였다면 ‘믿음’의 ‘WiFi’를 다시 켜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어 희망과 기쁨의 하루가 될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 거기에 있었고,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였으며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용맹심과 충성심이 높은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힘과 능력에 믿음을 두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믿음을 둡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에 다시 오셨는데 그것은 토마스에 대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신 말씀이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토마스가 했던 말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제자는 토마스가 처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던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토마스의 훌륭한 점은 형제들의 증언을 의심하면서도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싸울 때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토마스는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기에 믿음의 최종적 자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고 도전받아야 합니다.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예수회 존포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사도 성 토마스 축일이다.
토마스라는 말은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토마스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는 말로 보인다.
쌍둥이라는 것은 형제가 있는 쌍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토마스 사도는 페르시아와 인도에 가서 선교하던 중, 마드라스(현: 첸나이)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에 성 토마스 성당을 지어, 지금 중앙 제대 아래 안장되어있다.
인도에서는 성 토마스가 인도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신자가 세례명으로 토마스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는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에 토마스에게 나타나신다.
왜 곧바로 나타나시지 않고 그렇게 늦게 나타나셨을까?
그것은 토마스가 다른 사도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듣고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뵙고 믿게 될 준비를 하시느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소망을 들어주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이 고백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의심하는 제자가 스승의 몸에 난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였다.
토마스는 우리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서 얻으신 영광이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도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로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쳐서 얻으신 영광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새로운 태어남을 의미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태어남이다.
이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 토마스 사도와 같이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계실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우리도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토마스 사도께 도움을 청하면 좋겠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피정 센터를 찾는 분들 가운데, 수도자인 제가 부러울 정도로
진한 하느님 현존 체험 속에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철저한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답답해하고 힘겨워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찐한 하느님 체험일 것입니다.
저 역시 수도자로 살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 한가지는,
제 신분상 언제나 하느님을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야 할텐데,
하느님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텐데, 그래서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이렇다 할 체험이 없이,
그 어떤 확신도 없이 살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물에 물 탄 듯한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가끔 신자들께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할 때면
더욱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한가지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 되는 프리미엄이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기도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성직자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처럼 지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최근 제가 느끼는 갈증 가운데 가장 큰 갈증은 하느님께 대한 갈증입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그분 얼굴을 뚜렷하게 뵈올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텐데...
단 한 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강렬하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말 잘살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는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불신에 가득 찬 우리 인간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죽어도 못 믿겠다.’는 외침은 바로 오늘 우리의 외침입니다.
하느님은 고통과 눈물 그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거냐?’고 외칠 때
우리는 또 다른 토마스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보다 각별한 하느님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는 따로 없습니다.
오직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우리를 보다 강렬한 하느님 체험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여러분은 토마스 사도의 믿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른 사도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주님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토마스 사도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사도들은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문을 잠그고 숨죽이며 모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인 것이 드러나 사도들도 십자가형을 받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공포가 사도들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는 말 자체가 사도들의 공포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오셨을 때 토마스 사도는 없었습니다.
어디 있었을까요?
토마스 사도는 그러한 공포를 뚫고 왜 밖에 나가 있었을까요?
누군가는 민심을 살펴야 하지 않았을까요?
누군가는 먹을 것을 구해와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유가 어떻든 간에 토마스는 사도 중에서도 용감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돌아왔을 때 사도들은 주님을 만난 것을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때 토마스 사도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대들이 진정 주님을 만났다면 무엇이 두려워서
아직도 다락방에 머물려 공포에 질려있는 것입니까!
살아계신 그분을 만났다면 왜 아직도 어둠에 갇혀 있는 것입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더 이상 더움에 머물지 않고, 더 이상 공포나 두려움 혹은 자신 안에 갇혀 지내지 않습니다.
오늘 토마스 사도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대는 주님을 만나고 따르는 사람입니까?
가끔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고해소에 앉아 있다 보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고해소, 저와 신자분 사이에 문을 열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귀한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포기 말고, 너무 울지 말고
다시 한번
걸어가 보세요.
라고 말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6)
박 마리 안젤로 수녀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0,26)
제자들이 모인 집,
굳게 잠겨 있는 문 만큼이나, 마음이 잠겨져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도
받아들이기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 속으로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집의 문도, 마음의 문도 다 잠겨 있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빌어 주십니다.
오늘은…
다른 말이 더 필요 없네요.
마음이 지치고 완고해져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그 굳게 잠겨 있는 문을 넘어
내 마음 한가운데로 찾아와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참 위로가 되고, 지친 저에게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오늘도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하루를 살아갑니다.
[출처] 요한 20,24-29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