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형(象形)
(기본의미) [언어] 그림에서 성립되었다고 보는 표의 문자(表意文字)를 통틀어 이르는 말.
고대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를 비롯해서 마야(Maya)나 아스테카(Aztecas)의 문자,
고대 한자,
지중해 고대 문자 등이 있다.
상형 문자는 동물이나 사물, 신체의 모습을 본뜬 문자이다.
현재 알려진 것 중 가장 최초의 문자인 수메르인의 쐐기 문자도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사용된 상형문자이다.
고대 이집트의 사람들도 강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를 활용하여 종이를 만들고,
상형 문자를 사용해서 기록을 남겼다.
중국의 상 왕조에서는 갑골 문자를 통해 점을 쳤는데,
이는 한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물체의 형상을 본떠 만든 그림 글자로서,
고대 이집트의 경우 기원전 3000년경부터 서기 394년까지
3,400년 동안 사용되었다.
초기의 상형문자가 획으로 이루어진 쐐기문자로 변형된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집트의 경우 상형문자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필기체로서 사제문자(hieratic)가 같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신전 벽이나 비문, 벽화에는 정자체로,
그리고 일반 파피루스 문서에는 필기체 사제문자로 사용되어
정자체가 오랫동안 그 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원전 600년경 상형문자의 필기체인 사제문자는 더욱 흘려 쓴 민중문자(demotic)에 의해 서서히 교체되었다.
상형문자는 서기 4세기부터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그 후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1799년 프랑스군에 의해 발견된
로제타(Rosette) 석비의 프톨레마이오스와 필레(Phile) 섬의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프톨레마이오스 및 클레오파트라 왕명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의 샹폴리옹(J. F. Champollion)은 1822년 소리 글자로서의
상형문자 알파벳을 완전히 해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형문자로 적힌 문장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그리고 위에서 밑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읽는 방향은 사람이나 동물의 머리가 향하는 쪽이다.
단어의 구분이나 문장의 구분이 공간으로 표시되지 않는
상형문자의 특성상 결정 글자는 해석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동물과 인물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의 경우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측면을 향하도록 기록하여
사물의 특징과 방향을 뚜렷하게 표시하였다.
모두 850여 개의 그림들로 구성된 이 문자는 그 기능에 따라
소리 글자(phonogram)와
그림의 모양으로 의미를 전달해 주는 뜻 글자(logogram)로 양분된다.
또한 뜻 글자 중에는 단어의 맨 뒤에 붙어서 단어 전체의 이미지를 정해 주는 결정 글자(determinative)도 있다. 소리 글자의 경우 일종의 알파벳 역할을 하는 23개의 ‘한 소리 글자(uni-consonantal sign)’와
100여 개의 ‘두 소리 글자(bi-consonantal sign)’, 그리고 50여 개의
‘세 소리 글자(tri-consonantal sig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 고대 이집트
고대 이집트 문명이 하필 거기서 발달한 데에는
나일강 의 특성이 크게 기인했는데,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한다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일강은 '정기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범람의 이유는 청나일강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
5월경에 내리는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이런 범람은 9~10월쯤에 나일강 하류 이집트에 도달해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주고
홍수에 잠겼다가 11월쯤부터 다시 드러난 땅은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
이처럼 나일강의 범람시기는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만들고,
강물로 인해 잠겨있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잘 자라게 된다.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10월에 다시 홍수가 와서 지력을 보충해주었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는 농경사회를 이어나가기에 좋았던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6,000년 정도 전(약 B.C. 3,600년,
기원전 36세기)부터 상이집트, 하이집트[로 나뉜 국가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시대가 인용된다.
즉 아직 북구 끝자락에 메머드 가 남아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피리오가 등장하였다.
최근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7,300년 전, 즉,
기원전 5316년 시기의 도시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약 B.C. 3100년경에 처음으로 통일된 이집트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쓴 기록에 의하면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였다.
다만 유적 발굴조사에 의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나르메르란 인물인데
이 인물이 메네스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혹은 나르메르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여하간 이집트 사람들이 단군 처럼 믿고 있는 것은 메네스이다.
이후 널리 알려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여
당시의 기술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토목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하였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빵과 오븐을 만들었으며,
히에로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정말이지, 유구한 역사로
인류 역사에서 최강의 자리를 가장 오래 차지하고 있던 나라.
이집트와 메솦타미아 문명 성립 이후부터 역사를 계산할 경우
이집트가 인류 최강의 문명집단이었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기보다 더 길다.
고대 이집트의 통일 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처음 통일된 시기부터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B.C. 2200년경까지의 고왕국 시대,
혼란이 수습된 이후부터 힉소스인에 의해 정복당할 때까지의 중왕국 시대,
그리고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후 아시리아에 정복당할 때까지의 신왕국 시대이다.
실제로 고대로마 시절 로마인들에게도 피라미드는 이미 고대의 문화 유적으로 취급 받았으며,
그 시절에 이미 관광 상품의 대상이었다.
그 고대 로마인들이 남긴 건축물들도 현대인들에겐 고대의 문화 유적으로 취급받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그 간격이 긴지 알 수 있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와 현재 이집트 주민이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에서 검출한 DNA를 다른 지역 고대인들의 DNA와 비교해 보면
사하라 이남 지역보다는 레반토 지역 주민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현재 이집트인의 DNA를 고대 미라의 것과 비교해 보면 현대 이집트인의 DNA에는
알렉산드로스나 로마의 침입을 거치면서도
고대 미라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영향이 15~25% 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크라우스 박사팀에 의하면 이는 나일 강 유역에서 노예 무역을 포함한 교역의 증가에 인한
상호 교류의 결과이거나, 중세에 이슬람이 사하라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사하라 이남 지역과의 접촉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