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폭포 / 이산하
나이에 맞게 살 수 없다거나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때마다
난 얼어붙은 겨울 폭포를 찾는다.
한때 안팎의 경계를 지웠던 이 폭포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
자신의 모든 틈을 완벽하게 폐쇄시켜
폭포 바닥에 깔린 돌들의 외침이며
사방으로 튀어 나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물방울들의 그림자며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저 헛것들의 슬픔까지
폭포는 물의 마디마디 꺾어 가며
자신을 허공으로 던진다.
그러나 던져지면서도
폭포는 왜 정점에서 자신을 꺾는지
자신을 꺾어 왜 단숨에 비약하는지
물이 바닥을 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내 눈과 내 귀의 모호한 결탁임을
그것이 마침내 공포에 떠는 내 헛것의 정체임을
불현듯 깨닫는다.
폭포는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치며 하나로 체결되는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 / 이산하
베를린의 유년 시절 어린 벤야민은 설핏 잠들었다가
창으로 달빛이 들어와 방 안을 가득히 채우자
그 방이 달빛과 둘이서만 있고 싶은 것처럼 느껴져
슬며시 다른 방으로 자리를 피해 준 뒤
베개에 얼굴을 깊이 묻고 혼자 아침까지 울었다.
정신착란 증세로 10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신 없이도 죽을 수 있었던 니체는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토리노의 골목을 산책하다가
늙은 마부의 모질고 잔인한 채찍질에도
비명 없이 꼼짝도 않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
반달 / 최태랑
인적이 드문 지리산 들무골
방사한 반달가슴곰이 밀렵꾼 덫에 걸렸다
앞발로 열매를 흔들다
납작 엎드려 있는 악마의 이빨을 읽지 못했다
사람보다 천배의 청각과 시력, 후각도 소용없었다
산달이 얼마 남지 않는 암컷
일러 주지 않아도
더 먼저 더 많이 지방을 채워야 했다
발목이 조여들어 뼈가 으스러지고 힘줄도 끊어졌다
배 속 새끼는 갈풀처럼 시들어 가고
가을비는 선혈을 물고 흘러간다
빗소리가 곡비처럼 들려오고
도토리가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떨어진다
진달래 화동이 축하해 주던 그 봄에
찾아왔던 그놈이 생각난다
단풍잎 방석을 깔고 앉아 발톱을 다듬어 주고
순결한 씨종을 택배처럼 담아 두고 갔다
어디쯤에서 발정 난 암컷을 찾아 코를 불고 다니겠지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제 짝을 그리워한다
여드레가 되는 날
태아도 지는 달처럼 태동을 멈췄다
관리소에 탐지기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앞발로 도토리 알을 움켜 모아 놓고
새끼를 담고 있던 달을
땅바닥에 엎드려 따뜻하게 품고 있었다
완성의 시간 / 권진희
매미가 울음 우는 사흘은
땅 밑 캄캄한 십 년을 완성하는 시간이다
제 몸 찢어 낸 푸르름 모두 버리고서야
나무는 한 해를 완성한다 신생을 위하여
몸을 틔운 그 자리까지
길고 고단한 살의 물길을 거슬러 연어는 오른다
울음은 땅 밑까지 내려가서
빛나는 어둠을 곰삭혀 한여름 열고
무성한 잎들 모두 거두어들여
적시고도 남을 새 그늘을 마당 가득 펼쳐 놓는다
필생의 물살 거슬러 오르며
그 많은 울음 하나하나 떨궈 내
마침내 생의 첫 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이 안간힘으로 펼쳐 보이는 몸은
소리와 크기가 다를 뿐
완성을 향한 투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것이다
벽돌 한 장 / 권진희
새벽길 리어카 위에
벽돌 한 장
검정 고무줄 억센 힘으로 끌어 매 놓은
푸른 비닐로 감싼 지친 하루
그래도 금세 떠내려가 버릴 것 같은 내일 위에
무겁게 무겁게 눌러놓았을,
누군가의 손길 가만가만 간직하며
동지 밤 고스란히 새우고 앉아 있는
의젓하구나, 벽돌
저 한 장의 힘!
사랑 / 이재무
낮에도 별은 반짝이고
낮에도 별똥별은 떨어지고
낮에도 달은 떠 흐르는데
어둠을 바탕으로 피는 것들은
낮에는 볼 수 없다네
사랑도 이와 같아서
너랑 나랑
한낮을 살 때는 뵈지 않다가
네가 지고 홀로 깜깜해지면
네가 내 생을 반짝였거나
내가 네 생을 흘렀다는 걸
뒤늦게 회한처럼 알게 된다네
잠시 머무는 시간이 오래 머문다 / 이강산
매포역 강변 나루터 오두막에서 고추와 된장만 먹은 날이 있었다
등록금이 없어 노를 저으며
길 잃은 흑염소처럼 울면서
강물처럼 사라진 그 청년이 노를 저어 생의 하류에 나를 부려 놓았다
나는 어느덧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어느 강변에서든 나룻배를 띄울 수 있으니,
그즈음 깊어졌을 손금 같은
은백양 달빛이며
눈물의 굉음이며
이토록 잔인하게, 오래
내게 머무는 것이란
첫돌에 떠난 쌍둥이 동생처럼
하룻밤 살 섞고 나를 버린 정선 구절리 여인숙처럼
아직 곁에 남아 있는
잠시 머문 시간들이어서
나는 어쩌다 고추를 먹는 나도 모르게
흑염소처럼 우는 것이다
순간 / 이태관
그대가 내게 한 아름의
사랑이란 이름에 꽃을 던져 주었을 때
난 들길을 걷고 있었네
그래, 짧지 않은 삶에
간장 고추장 이런 된장까지 다 버무려
한 끼의 식사
한 잔의 커피,
하룻밤은 언제나 누추한
순간이란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만남은 허점투성이의 약속일 뿐인데
꽃이 터져 오르는 순간
난 그대에게
눈길만 주었을 뿐이네
바람은 불어 가더군
꽃은 지더군
지는 꽃들이 거름 된다는 걸
훗날, 알게 되었네
간격마다 곡선이다 / 정해영
탁자 위에 놓인 마요이
자꾸 눈길이 간다
줄기 사이의 공간이
세상에 없는 편안한 집
같다
피곤한 눈길을
그 속에 눕히거나
비스듬히 기대 본다
잎과 잎이
멀지 않은 거리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다
눈이 줄기의 두 끝을 따라
올라가 보면
어느 먼 별빛 아래서
만날 것 같다
일 년 혹은 수십 년을
돌아오는 만남도 있어
숙연하고 애틋하다
기다리던
마음과 마음이 지은
공간의 집
벽도 문도 없다
『시작 』 (2021년 여름호)
- 펴낸 곳 / 천년의시작
- 펴낸 때 / 2021년 6월
[출처] 678. 천년의 시작 -『시작』2021년 여름호|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