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투우사
소나 돼지가 반체제 인사라도 되는 듯
날마다 땅에 파묻고 격리시키고
망명자 행세를 하는 개들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이 바보 같은 사회에서
서정시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노래방에서 밤새 일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몇 푼어치의 위안인가?
아침이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폐가가 허물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무엇인가?
오빠, 나한테 인간이 되라고 하지?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종말론자야.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는 거야.
영혼을 모두 돈에 팔아버렸거든. 밤은 나의 대륙이고 나는 종말의 박물관이야.
나는 홀로 우체통처럼 빨개져서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부렁대는 시계를 바라보며
서정시 같은 말을 뱉는다.
너에게 시집을 보낼게. 네 밤을 지켜줄 거야.
오빠, 시가 밥 먹여줘? 오빠도 알지. 내 꿈이 투우사라는 거.
커다란 경기장에서 카포테를 들고 서 있는 투우사 말이야. 여자 투우사!
누이는 자신의 대륙에 홀로 서서
그런데 오빠, 밤마다 야근을 하는 달은 시급이 얼마나 될까?
나 같은 년의 아픔 때문에 지구가 무거워지면 안 되는 데...... 그치, 오빠!
그 순간
투우사의 칼이
나의 시
한복판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플라타너스
오늘은 예이츠가 죽은 날
그날처럼
눈 내리고 춥다.
바람이 어둠과 범벅이 되어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거리에서
떨고 있는
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
아직 나는
유년의 대륙을 찾지 못해
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
증오를 직업으로 삼은 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그리움은 쉽게 마모되고
희망은 마약인가.
가진 자들이 사이코패스가 되어 눈을 부라리는
엄혹한 세상에서
나는 저주받은 시나 쓴다.
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
내 유년의 대륙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 가서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다.
오늘은 예이츠가 죽은 날
불평 많은 나의 시를 데리고
이니스프리로 가고 싶다.
풍금
초등학교 동창생이 죽었다.
<나자리노>를 즐겨 부르던 아이
누구를 만나든
유리 가가린의 “어둠을 즐기십시오”라고 하던 아이
우리들 사이에 별에 대해 가장 많이 알던 아이
요셉처럼 꿈 장사를 하던 아이가 죽었다.
연극에서처럼 인생을 급전시키기 위해
창녀가 되었던 가난한 아이
"나는 별의 친구야 별을 읽는 법을 가르쳐줄까?"하면서
밤의 메뉴판을 내밀던 아이가 자신의 별로 갔다.
어떤 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어떤 책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옛날이야기는 모두 신성하며
옛 말들은 모두 신비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그 아이가
창녀가 되어 간다면서 자랑하던
화장을 진하게 하고 동창모임에 나타나
세상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신나게 얘기해주던
세상을 돈짝보다 작게 생각하던
아이가 죽었다.
친구야,
별이란 다른 시간 속에서 달려오는 거야.
나는 네 밤의 장기투숙자가 될게.
네가 보고 싶으면
외로운 공중전화 부스에서
너의 별에 전화를 걸게.
예이츠의 보름달이 뜨면
하루를 반으로 찢어서 너에게 편지도 쓸게.
그런 날 밤
너와 나의 학교에서
저 홀로 신음하던 풍금이 울고 있을 거야.
부러진 봄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날
경찰서에서 누이를 데리고 나왔다.
누이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뱉고는
저만치 뒤따라왔다.
이번이 몇 번짼 줄 알아! 누이는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왜 그렇게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는 거야. 불행한 과거를 들쑤시지 마.
누이가 뭐 억울한 죄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가 본데, 제발 서울 나오지 마.
불빛으로 치장한 거리는 무참했다.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변장한 사람들이
주절거리고 다니는 거리에서
설익은 불빛들이 눈을 부라렸다.
한참 만에 돌아보니
누이를 잃은 불행한 과거가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저만치 따라오고 있었다.
누이는 서울의 오지 무질서한 풍경 속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거기
홀로 변기통에서
은도끼 금도끼라도 건져 올리려고 끙끙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날은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었다.
가진 자들이 맞춤형으로 만든 법률 속에서
꽃망울은 죄 없이 벌벌 떨었다.
누이야, 나도 권선징악이 있고
해피엔딩이 있는 세상으로 가고 싶어.
누이의 방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갔다가
아내가 0이 너무 많이 달린 옷을 집으며 나를 힐끗하기에
어떻게 우리 형편에 그렇게 배짱이 좋으냐고 쏘아붙이고는 휙 나와 찬바람 속을 걷는데
여동생의 얼굴이 몇 십 개의 동그라미로 어른거린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전세금이 올랐는데 빌릴 데가 없다며
0을 모두 말하지 못하고 두 장을 얘기하기에
내가 이천이냐고 물으니
깜짝 놀라며 0을 하나 빼고
다섯 장이 올랐는데 어떻게 두 장 안 되겠느냐고 하던 누이
0을 하나 더 빼고 보냈더니
고맙다고 수십 번도 더 한 누이
어머니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 누이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팔십만 원짜리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누이
아내는 저만치
까맣고 조그만 0을 달고
하나짜리 0을 달고 수많은 0들 사이로 뒤따라온다.
둘이서 말없이 지하철을 타는데
그날따라 지하철은 왜 그렇게 롤로코스터인지.
앞자리에 앉은 까만 0들은 또 얼마나 무참히도 찌그러져 있는지.
오빠, 물속에서 누가 오래 참을 수 있는지 내기할래?
백만 원이다!
낙원시장 89호 금이네 집
아버지 얘기는 꺼내지 마.
누이는 표정 없이 콩나물국을 푼다.
나는 젯밥에 꽂힌 숟가락처럼 우두커니 앉아
막걸리에 어린 누이의 얼굴을 본다.
사람과 유령의 경계, 진실과 거짓의 경계로 다니는
이복누이
내 인생은 도둑맞은 하루 같아.
족발이 나오고 뚝, 뚝, 김치 써는 소리가 들리고
도깨비에게 홀려 본 적 있어? 귀신들이 돌을 던지는 특급열차는 타봤어?
나는 아버지에 대한 미사여구로 가득한 기억을 주렁주렁 매달고 앉아
88호와 90호 사이
바람들이 말다툼하는 89호에서
책형을 당한 자처럼 벌게져서
하고 싶은 말들을 얼굴에 묻고 있는데
나는 절망의 장사꾼이야. 아버지는 매물로 낼 수도 없는 귀신이라고.
세상이 내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인간들은 방언만 지껄여대.
왜 나한테는 이렇게 급커브 길밖에 없는지……. 시간은 돌팔이 의사더라.
아버지의 제삿날을 꺼내보지도 못한 채
연거푸 막걸리 몇 사발을 마시고 간단 말도 없이 밖으로 나와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서 펼치니
낭떠러지에 한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나를 쳐다본다.
법주사의 밤
친구의 젯날
아직 앳된 부인을 따라간
겨울 산사
고양이가 운다.
아기 울음소리를 내며
운다. 한밤 내
한 고양이를 따라
또 한 고양이가 운다.
울음이 한밤을 적신다.
가로등 불빛에 밤이 뒤척인다.
고양이가 울리는 밤
밤이 끝도 없이 울음을 토한다.
밤이 밤으로 울고
밤이 밤을 만나서 울고
밤이 밤 속에서 운다.
밤이 고양이를 울린다.
고양이 울음 속으로
젖어드는 밤
고양이가 울리는 밤
깊어지는 울음
지상의 모든 잠들이 흔들리는
법주사
겨울 한밤
시인의 영토
한 시인이 죽었다. 일흔도 넘은 시가 죽었다.
어둠과 추위만이 찾아오는 이십만 원짜리 쪽방이 죽었다.
관념의 미로가 죽었다.
여기 무늬진 한 시인의 심장박동 몇 구절을 번역해본다.
나는 시 없는 시인이라네.
청탁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시를 써 본 적도 없는 시인이라네.
세상의 끝에 매달려 있는
로맹가리의 카페에
뿌리를 내리고 허공에 낙서를 한다네.
아침이면
비애로 세수를 하고
짓밟힌 어둠을 친구 삼아
모든 양심들에게 전화를 한다네.
나는 노트 한 구석에서 떨고 있는 우울, 거울 속을 걷는 유령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나를 읽을 수 없다네.
달로 이민을 가려고
야곱의 사닥다리를 오르며
죽은 자들과 친구 하고
산 자가 그리우면
산 너머
떡갈나무에게 하소연하는
나는 불운의 연습장
고독의 전단지라네.
그림자마저 벗어놓은 고독한 생이여,
나이가 많은 산에게 물어보면 그림엽서 너머에 있다고 하고
찢어진 영혼이 걸려 있는 고사목들에게 물어보면 “환상 속에는 바람이 붑니다”* 노래한다.
나의 시는 어둠을 아는 장님이 읽고
절망 너머를 볼 줄 아는 자만이 읽는다네.
지구가 도는 소리를 듣는
나는 이 세상의 낙오자라네.
한 외로움이 죽었다. 어느 시간 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가 죽었다.
나는 낯선 시간 속을 떠돌았다. 도시의 발바리들이 설치는 거리,
우울이 드나드는 술집, 담쟁이가 지나간 길
*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의 가사.
버스 정류장
버스 정류장에 앉아 루쉰을 읽는다.
어두운 상점들이 가을 한복판으로 머리를 들이밀자
가을이 앓는 소리를 낸다.
건너편 파리바게트가 휘청한다.
국수집이 끙끙거리고
플라타너스가 엉금엉금 걷는다.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고
나는 루쉰 속을 헤맨다.
저 멀리
빌딩 꼭대기에선 북풍이 깃발을 꽂고
가을을 털어낸다.
상점들은 하나 둘 불을 꺼버리고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가을 몇 장
빨간 클랙슨을 떨어뜨리며 날아간다.
가을 한복판
아직도 버스는 오지 않고
루쉰은 내 안을 내내 떠돈다.
실천시선 208
『누이의 방』
- 지은이 / 전기철
- 펴낸 곳 / 실천문학사
- 펴낸 때 / 2013년 2월
전 기 철
- 1954년 전라남도 장흥 출생.
- 전남대학교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 박사.
- 1989년 『심상』으로 등단.
-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로깡땡의 일기』, 『누이의 방』 등이 있음.
- 현대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 수상.
-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679. 전기철 -『누이의 방』|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