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집(외 2편)
이인주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받거나
처마 끝 낙숫물이 궁글린 물방울을 헤아리고 있으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집 속에 들어앉아
내가 둥근 알을 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부풀린 물방울로 지은 집 한 채가 있어
둥글고 온전한 방 속에 몸을 푸는 내가
안과 밖이 잘 어우러진 창의 굴곡을 훑고 지나갈 때
마음과 달리 나는 물방울집 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좀처럼 뚫고 들어갈 틈입을 주지 않는 물방울집은
갓 구워낸 빵처럼 부드러워 보이나
온 힘을 다하여 밀치고 들어가려 하면
그만큼의 반동으로 나를 미끄러뜨리며
단단한 경계가 반짝 일어서는 걸
그때 알았다
아무렇게나 굴러 살점이 발겨진 뼈 하나를
기둥처럼 붙들고 중심 잡을 수 없을 때
울림 큰 바람의 세계는 중심이 텅 비워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면벽하는 정신 하나 투명한 연잎 위의
이슬로 맺히려 하고 있을 때
풍경은 그때서야 가장 깨끗한 경계를 세워두는 것이 아닐까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집은
갈고닦은 뼈로도 깨뜨릴 수 없는
부풀린 생각의 모서리를 보기 좋게 다듬은
둥글고 단단한 물방울다이아처럼 빛나는데
다시 생각의 중심을 비우고
부딪쳐 생채기 난 몸집 둥글게 말아
구심력을 잡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둥글고 단단한 물방울집 한 채가
내 안에 들어와 있음에
흠칫 놀라는 것이다
- 백매도白梅圖
색 없는 빛이 가지 끝에 앉았습니다
단옷날 윤 고운 아침
유난히 바람을 많이 타 볼품없는 어린 매화나무 한 그루
당신이 내어준 품이었습니다
바람을 이겨내려면 잔가지를 더 분질러야 한단다
새들이 와서 똥을 눌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니
엄동설한 매운 겨울
바람 속에 뛰는 나의 혈기를 당신은 자꾸만 꺾었습니다
색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지 속에 꿈틀거리는 싹을
어떻게 밀어내야 하나요
어떤 몸짓은 땅으로 떨어졌고 어떤 몸짓은 허공을 딛고 올라갔습니다
말을 뱉어내지 못하게 한 당신의 묵비는
세상의 구덩이에 떨어진 걸음을 희디흰 빛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 안에 캄캄한 무채색의 울음도 잠겨 있다는 걸 짐작하게 되었을 무렵
북풍 속 환한 촉이 파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꽃눈 화사의 비밀을 온몸으로 겨워했던 날이었습니다
기나긴 칩거를 한눈에 알아본
탈태는 흰 겨울을 벗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봄의 잔가지에 올라앉아 물기를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모든 색들은 다 나무로 돌아온단다
오직 한 가지 궁극을 열어주신 당신 화첩이었습니다
점입가경이었습니다
- 클림트의 키스
황금 스팽글이 반짝, 여자를 빚는다
뇌살의 기울기를 재고 있는 해거름
젖빛 가슴 어르는 찬란이 꺼져간다
다시 떠오르지 못할 형용사를 서쪽 목에 걸고
가위바위보, 아카시아 이파리를 편력 쪽으로 떨구는
여자의 낯빛이 홍초 그늘로 농염해진다
스스로 놀라 흩어지는 바람은 절개란 옷을 입지 않는다
나무가 품고 있는 욕망의 속살이 색소다
지붕 위에서
세상의 절반을 받아 안는 여자, 주름치마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아주 오래 전 외계로 날려 보낸 휘파람새가
아카시아 이파리를 물고 비행접시처럼 당도한 저녁
오렌지 혹성의 은어를 감는 여자가 굼실굼실 부풀어간다
달의 바다로부터 황금빛 파문을 굽는 여자
십만 광년을 달려와 겨우 1°의 시차를 내는
어제와 오늘, 입술로 포개는 여자
역마살 궁금한 사내의 물렁뼈를 뜯어
아른아른 비치는 쓰개를 만들고
깜빡 잊고 태워버린 짐승의 심장을 애교라 부르지
아흔아홉 지붕을 돌다 이성을 잃어버린 바람
황금보리를 눕히는
3억 년의 쾌락을 입 안에서 익힌 태양의 밀주
⸺시집 『백매도』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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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주 / 1965년 경북 칠곡 출생. 200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6년 《서정시학》 신인상 당선. 시집 『초충도』 『백매도』. 대구 정화여고 교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