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冷麵)은 한반도 고유의 찬국수 요리 중 하나로 삶은 국수를 찬 육수에 넣고 양념과 고명을 얹은 요리이다. 냉면은 칡, 메밀, 감자, 고구마 등의 다양한 가루를 이용하여 만든 면(麵)과 썬 오이 등의 생채소와 배 한조각, 그리고 고기와 삶은 달걀로 이루어진 음식이다.
냉면(冷麵)의 기원은 고려시대 중기의 평양에서 유래한다. 1973년 북한에서 간행된 요리 서적에 의하면, 평양냉면은 현재 평양의 대동강구역 의암동 지역에서 처음 나왔다고 하며, 메밀 수제비 반죽을 국수로 뽑은 것이 시초라 한다.
고려 중기의 냉면을 기록한 고문헌에는 '찬 곡수(穀水)에 면을 말아 먹는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조선의 문헌에서는 17세기초 조선 인조 때 활동한 문인인 장유(張維)의 <계곡집, 1635)>에 냉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보통 냉면하면 평양 냉면과 함흥 냉면을 떠올리곤 한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평양냉면의 시원한 육수와 함흥냉면의 얼큰한 양념 속에 듬뿍 묻어나온다.
냉면은 북한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창의력의 결집으로 만들어낸 우리 고유 전통 음식이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은 김일성이 그 맛을 길이 보존하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평양 제일의 맛을 자랑한다.
(평양의 옥류관) (평양 냉면)
냉면의 국수는 메밀을 뽑아서 만드는데, 메밀이 처음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당나라 때이다. 이후 송나라 때 널리 재배되었으며 우리나라에도 오래전에 들어와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메밀밭 하면 요걸 빼놓을 수 읍지요 ㅋ~)
메밀은 서늘하고 건조한 땅에서 잘 자란다. 가뭄에 강하고 생육기간도 60~100일 정도로 짧기 때문에 남부 지방보다는 토양이 척박하고 날씨가 서늘한 북한 지역이나 평창과 같은 고위 평탄면에서 재배된다.
우리의 조상들이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은 이유는 메밀의 약효 성분을 경험으로 깨달은 선조들의 지혜 덕분이었다. 메밀에 대해 <동의보감>에는 비위장의 습기와 열기를 없애주며 소화가 잘되게 하는 효능이 있어 1년동안 쌓인 체기가 있어도 메밀을 먹으면 체기가 내려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그것도 북한 지방에서 의원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메밀을 이용한 음식을 개발해서 건강을 위해 먹어둔 것이었다.
요즘은 여름에 냉면이 불티나게 팔리지만 원래 냉면은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다. <동국세시기>에도 11월조에 냉면과 관련한 기록이 있다.
"메밀 국수를 무 김치와 배추 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또 잡채와 배, 밤,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썰어 넣고 기름 간장을 쳐서 메밀 국수에 비빈 것을 골동면, 비빔냉면이라고 한다. 관서 지역 냉면이 제일이다."
이 기록을 보면 현재 우리가 즐겨 먹는 냉면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현재 우리가 먹는 냉면에 올리는 고기는 모두 소고기인데 19세기의 기록인 <동국세시기>에는 돼지고기를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소고기를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세시기)
북한지역에서는 추운 겨울날에 동치미에 메밀로 뽑아낸 면발을 넣어 냉면을 만들어 먹었으며, 특히 술을 마신 후에 해장국 대신 속을 풀어 주기 위해 먹었다고 한다.
⚜ 조선시대에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던 면발 뽑기
조선시대 선비들은 5언시나 7언시를 즐겼는데 그 중에는 냉면과 관련한 시도 있다. 다산 정약용이 해주에 수안 군수와 함께 방문하여 고시관(考試官)을 하고 돌아가면서 서흥 도호 부사에게 장난 삼아 지어 주었다는 시에는 겨울철에 먹는 냉면의 서늘한 맛이 잘 나타나 있다.
서흥의 도호는 너무나 어리석어 조롱에 새 키우듯 방에 기생 가둬두고 금실 같은 담배와 반죽설대 담뱃대로 기생 시켜 태워 올리라 그것이 멋이라네.
시월 들어 서관에 한 자 되게 눈 쌓이면 이중 휘장 폭신한 담요로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의 냄비에 노루고기 전골하고 무김치 냉면에다 송채무침 곁들인다네.
노루고기로 전골을 만들었고 냉면에는 동치미가 더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면과 노루가 시에 나왔으니 최영과 이성계의 우정을 강조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소개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최영)
우왕 때 최영 앞에서 사람들이 이성계를 모함하는 말을 하면 최영은 노하여 이를 꾸짖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래와 같은 돈독한 우정을 보였다.
....매양 빈객(賓客)을 연회하려 할 적엔 최영이 반드시 태조에게 이르기를, "나는 면찬(麵饌)을 준비할 것이니 공은 육찬(肉饌)을 준비하시오."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어느날 태조는 이 일 때문에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하는데, 노루 한 마리가 높은 고개에서 뛰어 내려왔으나, 지세가 가파르고 낭떠러지인지라, 여러 군사들이 모두 내려갈 수가 없으므로 산 밑으로 비스듬히 따라 돌아서 달려가 모였는데, 갑자기 대초명적(大硝鳴鏑, 전쟁 때에 쓰던 화살의 하나)의 소리가 위에서 내려옴을 듣고 위로 쳐다보니, 곧 태조가 고개 위에서 바로 달려 내려오는데, 그 기세가 빠른 번개와 같았다. 노루와의 거리가 매우 먼데도 이를 쏘아 맞혀서 죽였다. .........그 사실을 최영에게 말하니, 최영이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한참 동안이나 하였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73번째 기사 -
이 기사를 보면 자급자족의 시대였던 만큼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을 직접 사냥을 해서 구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최영이 뽑아온 국수 면발에 올락간 방금 잡아 온 노루의 쫄깃쫄깃한 살로 만든 고기 편육은 현대에는 정말 먹기 어려운 음식이다.
여기에서 최영이 국수를 준비한다고 했는데 그가 준비한 국수가 냉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냉면을 만들기 위해 메밀 반죽에서 가는 면발을 뽑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실보다 약간 도톰한 냉면 면발을 뽑기 위해서는 '면자기(국수틀)'가 필요했다. 서유구가 지은 백과사전식 박물학서인 <임원경제지>에 이 면자기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큰 통나무의 중간에 지름 4~5치의 둥근 구멍을 뚫고, 구멍 안을 무쇠로 싸서 바닥에 작은 구멍을 무수하게 뚫는다. 이 국수틀을 큰 무쇠 솥 위에 고정해놓고 국수 반죽을 넣어 지렛대를 누르면 가는 국수발이 물이 끓고 있는 솥으로 줄을 이어 흘러내린다."
(국수틀)
면자기에서 면을 뽑는 것은 매우 고된 노동이었다. 개화 이후 풍물을 다양한 풍속도로 남긴 기산 김준근의 그림 중에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는 그림이 있다. 가는 면발의 국수를 내리기 위한 인간의 중노동의 강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이다. 한 남자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기를 쓰고 힘을 주어야 국수 반죽이 눌려지면서 기계 속으로 들어갈 면발의 국수가 탄생할 수 있었다.
(국수 누르는 모양)
훗날 1932년에 함경남도 함주군의 금강 철공소 주임이었던 김규홍이 기계식 면자기를 개발하면서 냉면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오늘날의 국수기계틀)
👩🎓 '함흥에는 없는 함흥 냉면'이 이어집니다. 예향유(睿香幽)가 정리한 글입니다. 출처 - 음식 속 조선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