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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대구강의 14 - 지옥의 하나님 15
06,12,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이스라엘 내부로 번진 전쟁 !!
이스라엘 내부로 번진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제가 방금 '이스라엘' 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인간의 대표자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체'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인간이 자기를 다듬고 다듬어서 제일 나중에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결국 자기라는 주체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주체가 중요한고 하니,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은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주체가 되지 못하다면, 하나님은 어디 있는고 하니까, "하나님은 너 안에 있고, 내 안에 있고, 나무 안에 있고, 돌 안에 있고, 바다 속에 있다" 라고 되어버리면, 그것을 범신론이라고 하는데, 이런 범신론의 시대에서는 주체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 돌 속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 자체가 하나님이고, 바람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인디언들은 주체가 없다 ??
이런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자들이 '인디언' 인데, '늑대와 춤을' 이라는 영화를 봐도 그러한데, 인디언들은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바람 따라 생기는 현상으로, 즉 자연이 만들어준 현상으로 다시 반납해야 될 인생이라는 것이다. 인디언들이 사냥을 할 때 무슨 마음가짐으로 하는고 하니, 만약 사냥의 대상이 노루라면, 그 노루는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노루를 사냥하는가? 그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노루가 되어서 잡아먹히도록 해주어야 자식들이 먹고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가 노루고기가 되어서 후손들에게 먹이를 제공해주면, 후손들이 그것을 먹고 그 은덕을 아버지의 은덕이라고 여기는데, 그렇게 됨으로서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히 떠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후손들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데, 이렇게 인디언들이 주체가 없으면 아버지의 품에서, 즉 대자연의 품에서 이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자연에서 이탈되지 않는 '나', 즉 대자연과 함께 가는 '나', 이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자연세계를 설명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인디언에게는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디언들이게 현대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빙그레 웃는다는 것이다. 성경에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딱딱한 것은 먹지 못하고 연한 것만 먹는 말이다. 흔히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이야기는 것으로, 어린아이 신앙에서 어른 신앙으로 자라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어린아이 신앙이 무엇인고 하니, 현대 21세기 사고방식이 바로 어린아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 청교도들과 인디언들 !!
이런 어린아이들은 특징이 무엇인가?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어른이 되면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으로 쫓겨온 청교도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까, 인디언들을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은 어른이고 말이다. (사실 배려하는 차원에서 보면, 자연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더 어린아이가 아닌가?)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자기' 라는 주체가 확립이 되어버리면, 성경에서 제 아무리 어린아이 신앙이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두고서 자기가 당연히 어른이고 상대방은 어린아이라고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화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제일 미운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본인이 신앙이 없으면서도 그런 신앙 없음을 감추기 위해서 자꾸만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저는 신앙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끝날 일을 말이다. 자꾸만 상대방에게 무엇을 '하라' 라고 하는데, 자기는 무엇을 했는지 숨겨놓고서 말이다. 매일 자라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상대방이 "당신은 어른입니까?" 라고 하면 침묵해버리고 말이다. 교만해 보인다고 할지 몰라서인지 모르겠는데, 사실 이런 것이 다 자존심 문제라는 것이다.
◈ 왜 전쟁이 내부로 퍼졌는가?
오늘 공부할 이야기가 이스라엘 내부로 퍼진 전쟁인데, 이것이 왜 내부로 퍼졌는고 하니, 인간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인간은 아담에 속해있기 때문에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인간자체 내부가 하나님의 언약과 얼마나 위배되는가를 드러내는 전쟁을 벌리신다는 것이다.
이 주체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제사를 드리고 하지만 이것이 점차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 이것이 하나의 주체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야 하고, 물론 제사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이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 우상 - 하나님도 하나의 대상으로 !!
여기서 바로 우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래서 이 우상의 특징이 반드시 그 앞에 들어가는 것이 '자기를 위하여' 인데, 이것은 바로 '자기' 라는 본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굳혀주는 쪽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더욱 더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깊이 섬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런 순간 순간마다 더욱더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마치 눈길에 자동차가 미끄러지듯이 말이다. 그래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전혀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자기' 라고 하는 한 고정된 점으로 굳혀지고 만다는 것이다.
◈ 초점에 의한 도형의 다양성 !!
여기서 좀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하면,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라는 것이 있는데,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이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바로크 시대인데, 이 바로크는 "화려하다, 기교적이다, 복잡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는 아직 신비적인 것이 좀 남아있지만, 이 바로크 시대는 철저하게 주체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크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주체' 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인데, 예를 들어서, 여기 원뿔이 있는데, 이 원뿔을 이렇게 또 이렇게 절단을 하면 단면들이 여러 개가 나타나는데, 제가 지금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주체가 어디서 발생하는지를 말하고 싶어서인데, 이렇게 원뿔을 칼을 가지고서 자르면 단면이 생기는데, 이렇게 자르면 이런 단면이 생기는데, 이것은 곧 하나의 타원형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르면 삼각형이 되고, 이렇게 정면으로 자르면 원이 되어버리고 말이다.
이러한 입체와 그어지는 직선이, 즉 입체라는 3차원과 2차원인 직선의 만남을 2차원의 도형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되는데, 이 도형을 X와 Y의 곡선에 해보면, 이것이 타원형 같으면 초점이 2개 되어서, 즉 F1과 F2가 되는데, 이런 곡선이 될 때는 -F1이 되어서 포물선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크 시대에 이런 수학이 발달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원래 무한이라는 것은 어떤 중심이 없다는 것으로, 그렇게 그 이전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무한에는 중심이 없고 신의 시선이 멈추는 자리, 즉 신의 응시점, 즉 신이 보는 안목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만든 세상의 모든 물체는 입체인데, 그리고 그것은 직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마치 개미가 한 줄로 갈 때는 직선이듯이 말이다.
신이 만든 피조물은 기하학적으로 보게 되면, 기껏해야 3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코끼리가 걸어가면 입체이기에 3차원인데, 이렇게 입체(3차원), 직선(2차원), 점(1차원),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입체와 입체가 만나서 보니까, 제 아무리 원이 크고 타원형이 된다고 해도, 초점과 초점 사이, 즉 X의 선 위에서 초점의 이동에 따라서 만들어진 도형은 무한대로 크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드디어 무한의 중심점을 발견하다 !!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려졌던 무한은 초점이 없다고 하는 이론은 깨어지게 되는데, 즉 무한도 이 세계 안에서 중심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이 3차원이든 그 어떤 형태이든 간에, 즉 직선이든 곡선이든 간에 따지고 보면 초점과 초점이 연결되고 퍼졌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모형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갑자기 수험생이 된 기분...)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 다양성이 있는데, 즉 피조물들의 형태나 모양이 말이다. 그러한 다양성이라도 X 선 상에 있는 하나의 초점에 양적인 비교와 거리, 그리고 더하기와 빼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양한 곡선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것은 무한의 중심, 즉 무한한 선, 무한한 거룩, 무한한 영광, 무한한 양(量), 무한한 빠르기, 무한한 부피 등등, 그 어떤 무한이라고 해도, 이 모두가 다 신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 미분적분에 이런 이단성이 ??
그런데 이러한 신의 작품의 초점이, 라이프니찌에 와서는 이미 사람이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초점으로 규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X와 Y로 말이다. 그래서 이 초점만 발견하게 되면 무한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분적분인데, '무한대' 라는 것도 지금의 조금씩 조금씩 하는 것에 수학공식을 집어 넣어버리면 무한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인데, 여기 있는 둥근 원의 표면적을 계산하라고 하면 전에는 못했는데, 물론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은 가능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둥근 곡선이라고 해도 그 면적을 알아내는데, 이 미분적분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을 쪼개고 쪼개버리면 그야말로 오차가 무한대로 줄어들어 버리니, 오차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확률인데, 이 확률을 무한대로 가져가 버리면 확률이 없는 것이 되는데, 즉 쪼개고 쪼개버리면 진리의 가장 근사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분적분의 정확성 때문에 10리밖에 있는 파리의 왼쪽 눈알을 그대로 맞추는데, 지금 주몽의 활 솜씨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의 휴스턴 본부에서 발사하는 로케트가, 지구가 이렇게 움직이고 달이 움직이는데도 정확하게 계산해서 달에 도착하도록 맞춘다는 것이다. 그 움직이는 속도가 보통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것을 아프리카의 미개인들이 알면 기절할 일인데, 달은 신에게 속한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러시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달이 움직이게 되는 중심점, 즉 달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시선점, 즉 그러한 응시점은 지상에 있는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수학적으로 설명을 했는데, 모든 도형도 초점의 변동에 의해서 다양하게 생긴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초점에 의해서 모든 사물의 형태가 결정되는 것을 알았다면, 이것은 과거에는 신께서 알아서 주신 것으로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 인간이 파악해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초점에 따라서 새로운 도형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렇게 기존의 모든 형태를 초점화시켜서 만들어놓았다는 것은, 이제는 초점만 잘 조절하면 기존의 어떤 도형도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이 하셨다고 하는 그 신비가 깨어지고, 즉 이제는 신의 창조능력이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말이다. 옛날에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이제는 인간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자식들, 화학도 모르면서 !!
우리 상식적인 생각에는, 물리나 화학이나 생물의 경우에, 인간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는 없고 이미 만들어진 물질이나 하나님께서 만든 물질에 대해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차후에 분석하고 규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저쪽에서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러나 화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먹히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은 실험실에서 자연세계에 없는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지금 이 지구상에 원소가 100개가 더 넘는데, 그런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87개인가 그렇고, 그 이후에는 모두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탄소가 64개인 탄소동위원소를 인간들이 실험실에서 만들었는데, 마치 축구공처럼 생긴 것을 말이다. 이것은 자연 세계에는 없는 물질이지만 인간들이 만들고자 하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과학기술아, 창조의 비밀을 풀어다오 !!
그러니 흔히 말하는 주체가 자아의식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이렇게 수학이 자연의 구조와 창조의 감추어진 비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과학기술은 창조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다" 라는 것이다. 이 창조의 비밀은 창조주가 아닌 창조물의 비밀인데, 이 창조물에 놀랍게도 인간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학기술이 없었을 때는 인간이 어디에서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형상을 만드시고 물질은 부모의 육체를 통해서 만든다고, 즉 물려받는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를 통해 받은 육체에 하나님께서 미리 생각한 형상, 즉 영혼을 집어넣으면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16세기까지 다 동의한 것인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이다. 그래서 동양에서 신이 내린 그 날짜가 바로 사주(四柱)인데, 그래서 사주팔자(四柱八字)가 되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너의 팔자와 나의 팔자가 왜 다른가?" 라는 이유를 설명하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합리적 방식이라는 것이다. 서로 같은 날에 태어났는데 왜 팔자가 다르냐는 것이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사실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
그 당시에 이미 현미경이 발명되어서 정자와 난자를 발견했기에, 그래서 정자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형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데, 이런 정자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난자는 밭이고 남자의 정액 속에 이런 정자 안에 이미 아기가 들어있어서, 그래서 아기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정자가 그 밭에 떨어지는데,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해서 열매를 맺고 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씨뿌리는 비유(?)인데, 여자는 수동적인 밭이고 남자가 씨인데, 즉 적극적인 자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의 정자 안에는 온전한 사람이 있는데, 다만 크기가 작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밭에 떨어져서 '탁' 하고 깨어지게 되면, 그 아이가 점점 커져서 나중에 엄마 배속에서 나와서 더 커져서 결국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할매들에게 물으면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멘델' 이라는 신부에 의해서 깨어지는데, 그 안에 온전한 인간이 들어있지 않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 안에 온전한 인간이 없다고 하면 심각한 일이 발생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지금 제가 창조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간들이 왜 이렇게 창조에 대해서 집착하는고 하니, 물론 십자가는 전혀 모르고, 신학이든 철학이든 간에 신이 피조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거기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종교든 교회이든 말이다.
◈ 어떻게 신이 필요 없는 시대로 돌입했는가?
그렇게 해서 창조의 비밀을 풀게 되면, 이제는 신의 역할도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바로 그렇게 진행되었다는 것인데, 즉 현대 시대가 어떻게 신이 필요가 없는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는지, 지금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모두 다 '주체' 라는 것에서 나왔고 말이다.
아무튼 정자와 난자와 결합이 되었을 때, 그렇게 해서 엄마의 뱃속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에는 단 한번도 온전한 인간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머리(?) 속이나 인간의 정자 속에 들어있다고 보았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니고 정자와 난자가 결합을 해야, 그렇게 해야만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넘어가면서, 즉 수정을 해야 비로소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그 어떤 형태로도 인간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 아무튼 온전한 형상은 없다 !!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의 형상을 주었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주장이기도 한데, 물론 그 사람은 이런 과학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인간의 성격이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이루어진다면,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정자에게 반이 있고, 난자에게 반이 있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데, 온전한 형상은 없다는 것이다. 반반으로 나누어져서 있던지 해야 하니 말이다.
아니,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누구하고 결혼할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어느 놈하고 붙을지, 어느 년하고 붙일지 말이다. 그래서 이 놈이 자기 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안다고 했지만 말이다. 남자의 정자에 여자의 난자가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냥 밭으로서, 일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이니 말이다. (사모님에게 물어봐?)
◈ DNA - 이제 신이 없어도 창조는 OK !!
그런데 이제는 1953년에 크릭과 왓슨에 의해서 DNA구조가 드러나면서 알게 되었는데, 남자의 것과 여자의 것이 합쳐서 짝을 이루게 되면, 지금까지의 신 안에 온전한 것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것이 엉터리임이 드러났으니, 그렇게 해서 신 안에 온전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배제해도 창조는 창조대로 설명이 가능하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신이 없어도 창조는 된다는 말이다.
지금도 복잡하지만 그래도 좀더 나아가면, 만약에 인간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코끼리나 원숭이, 그리고 코스모스나 나팔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을 멘델은 완두콩으로 실험을 했는데, 초파리도 그렇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신이 인간에게만 창조에서 손을 떼는 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신의 역할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자연 나름대로의 자체적인 잠재능력, 즉 수정능력과 번식능력에 의해서 저절로 번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그대로 '自然' 인가?)
◈ 하나님이 지금도 창조하고 계신다면, 그 근거는?
만약에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면, "창조만 하고 손을 떼었는가? 아니면 지금도 창조하고 있는가?" 라는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창조만 하고 손을 떼었다면, 그런 신에 대해서는 그들도 인정을 하는데, 그런데 지금도 창조하고 있다고 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만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지금도 창조하는지 물으면, 그것은 답변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창조하시는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셨다고 하면, 그냥 그렇게 말하지 말고,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을 했는데, 그런데 성화론자의 경우에, 그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거룩이 되는지, 바로 그런 점이 언급이 되어야, 그렇게 해야 성화론이 제대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론을 주장하는 놈들이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주체에게 개입을 해서, 그렇게 해서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든지 착하게 만들든지 간에, 도대체 어떻게 개입을 했는지, 바로 그것을 설명해주어야 되는데 말이다.
◈ 라이프니치 - 신은 말씀을 주고 떠나고 !!
라이프니치의 경우에 이것을 어떻게 설명했는고 하니, 즉 신께서 인간을 어떻게 구원했는고 하니까, 신께서 일단 인간에게 말씀을 주면, 그렇게 되면 이제 신은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라는 것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말씀이 남게 되는데, 이 말씀은 성경이고 성경은 문자로 되어있는데, 그래서 이 말씀을 인간이 마중을 나간다는 것이다. 신은 이미 떠났고 말이다.
◈ 은행에 가서 벌금 3만원을 내세요 !!
그러면 인간은 마치 교통법규를 만들 듯이 규칙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래야 벌금을 매기든지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속도위반을 해서 잡았는데, 그러면 "당신은 도로교통법 제 몇 조 몇 항 위반입니다. 그래서 벌금이 3만원입니다" 라고 해야, 즉 그러한 법규들이 '도로교통법규' 라는 책에 다 적혀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운전자도 "여기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벌금을 갖다 바치고 말이다. 그런 것도 없이 어떻게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이 주어졌다면, 우리 속에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측정능력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교통순경이 히브리어로 이야기를 했다면, 우리는 알아듣지를 못하니 벌금을 낼 수가 없는데, 그런데 한국어로 말하니까 알아듣고서 벌금을 낸다는 것이다. 스티커에 적혀있는 것도 한글이고 말이다. 그것이 단순히 'ㄱ,ㄴ,ㄷ...' 라는 정도가 아니라, 의미를 전달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속도위반은 범칙금이 3만원입니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것이 자기에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 돈 3만원을 바치세요" 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해도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우기면서 무작정 버티는 인간들도 많지만 말이다. 돈이 아까워서 말이다.
◈ 의미화 -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
그렇다면 성경의 경우에도, 서로 의사소통이 되어야, 즉 하나의 정보체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의미화' 라고 하는데, 즉 자기에게 의미가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신께서 말씀을 주고 손을 떼었다면, 그러면 말씀과 인간 사이에는 이제 '의미화'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에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들을 조사해봐야 하는데, 이렇게 인간들을 조사해보면 인간 자기들끼리의 사고방식이 있는데, 그것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것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황당한 북한관광 답사기 !!
누군가가 북한에 관광을 갔는데, 너무나도 다급해서 김일성 동상 앞에서 그만 실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북한공안요원에 의해서 체포를 당했는데, 그래서 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제가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그렇게 실수를 했는데, 벌금이 얼마입니까? 제가 다 내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남한에서처럼 공공장소에서 노상방뇨를 생각하고 말이다.
그런데 북한 공안요원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의 노상방뇨가 문제가 아니라, 김일성 주석의 동상 앞에서 그러한 짓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벌금 몇 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감옥으로 바로 좀 가야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쪽 사람에게는 납득이 안 되는데, 즉 그것이 자기에게 그런 감옥으로 갈 정도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 더욱 중요하지 말이다. 하지만 북한의 입장은 다른데, 그래서 재판에서 10년형을 받았다면, 얼마나 기가 차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금강산에 가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 라캉 - 의미는 타인이 결정한다 !!
그렇다면 여기서 도대체 이 '의미' 라는 것이 어디서 생기는가? 그 의미를 자기가 결정하는 것인가? 이것을 두고 라캉은 "의미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결정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형성되어있는 기준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유행가를 부르면 안 된다" 라는 것을 누가 결정했는가? 만약에 처음부터 교회에서 유행가를 불렀다면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사실 찬송가에도 유행가가 제법 있는데, 그래서 예배시간에 100장 이전에 있는 찬송가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 의미 - 자기가 속해있는 영역에서 합의사항 !!
이렇게 하나의 '의미'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이미 속해있는 영역에서 정보소통을 위해서 서로간에 합의를 본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합의를 말이다. 이것을 '정치적 합의' 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북한에서 그런 짓거리를 하면 그야말로 사형감이고, 남쪽에서는 그냥 벌금 3만원만 내면 된다는 것이다. 아니, 5만원인가?
◈ 나의 '의미' - 나의 무의식적 욕망의 선택 !!
이런 것은 그렇게 이 사회에서의 합의에 의해서 되는데, 그리고 인간 개인에게, 즉 주체에서 의미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합의를 본 것들을 인간내부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그때 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골라잡아서 따로 따로 챙긴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내부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말이다.
◈ 개구리복의 위력 !!
남자들의 경우에 직장생활을 할 때는 넥타이 매고 아주 점잖하게 폼을 잡고 있다가 예비군만 입혀놓으면 그만 개판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오줌을 누고, 아가씨가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고 말이다. 그렇게 일탈을 하는 것은 사실 평소에 하고 싶은데 자기 체면이 있어서 참다가, 개구리 복을 입으면 그렇게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동네의 분위기에서는 그러한 일탈이나 방종이 어느 정도 허용이 되고 말이다.
왜 잠언서에 보면 자식을 교육할 때 매를 아끼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런가? 왜 자식을 때려서 키워야만 하는가? 때리지를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말이다. 때리지 않으면 아담의 속성들이 마치 무저갱에서 마귀들이 쏟아지듯이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때린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뭔가 미리 방지하는 의미가, 즉 깨우치고자 하는 계기를 주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잠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합의를 성경에 집어넣으니 !!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서 인간들끼리 합의를 도출해서 나온 의미를 가지고서 바로 이 성경말씀에, 그렇게 연결을 시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제가 십자가을 빼고 이야기했는데, 그 자리에다 창조의 비밀을 집어넣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신은 천지를 창조했는데, 그렇다면 그 창조의 비밀이 성경에 있을 것인데, 우리는 창조에 관심이 있는데, 그 창조물 속에 나도 포함되니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성경말씀을 통해서 신을 알고자 한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내가 알고 있는 의미와 일치를 시키면 신의 뜻을 이룬다" 라는 것이다.
◈ 인간의 합의 - 주체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
방금 제가 한 이야기에는 십자가가 빠져있는데, 이렇게 십자가를 빼버리면 결국 인간은 자기가 속해있는 영역이나 사회를 항상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 이후에 새롭게 발견된 것인데, 이것을 좀 더 이야기하면, 의미를 만들 때는 합의에 의해서 도출된 의미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것을 칸트 이후에 현대에 들어와서 연구를 해보니, 특히 틸리히 같은 경우에 아주 강렬한데, 주체(자아)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하는 방향으로 이 합의를 이용하더라는 것이다.
◈ 나는 미국으로 간다 - 그런데, 왜?
강남의 아파트의 경우 시가가 6억이 넘으면 '종부세'를 내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싫어서 미국에 간다면, 그것은 한국에서의 합의는 거부하고 미국의 합의에는 찬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은 자기의 자아 긍정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아절대' 라고 하는데, '자아의 추상화' 라고 하기도 하고, 아무튼 인간을 추상적으로 극도로 높여버리면, 모든 의미나 모든 행동들이 자아를 긍정하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가지고 그대로 성경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경을 자기만 혼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옆에 또 다른 '자아긍정'이 성경을 보게 되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자아긍정'이 성경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무조건 이런 사람들이 만든 신학에 동의하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자아긍정이 분명히 있는 이상은, 자기가 긍정한 바로 그 신학에 동의해서, 그런 신학에 의미를 두고서 성경책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우리가 이런 것을 먼저 알아두어야만, 과연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작용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제가 강의하는 것이 결코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휴, 갑자기 더워지는데, 옷을 좀 벗고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
먼저 이야기한 첫 번째 논리는, "신께서 말씀을 주고 떠나버린다" 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게 하고 신께서는 떠나버렸는가? 이것부터 문제가 되는데, 정말 그렇게 신이 떠나버렸다고 하면, 인간이 해석의 주도권을 쥐고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 말씀은 여기 있다. 알아서 해라. 이제 나는 간다" 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맞고, 바리새인들이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말씀을 주고 떠나지 않았다면, 그런데도 인간이 해석을 하겠다고, 그래서 말씀을 지키겠다고 덤비게 되면, 여기서 반드시 신과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주의 성화론이 이 문제를 설명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성화론을 주장하든 말든 하지 말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인간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면, 거기서 반드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너거들, 왜 그리 설치나?
* 말씀을 지켜야 한다면서요?
* 그렇지.
* 그래서 제가 말씀을 지키려고 이렇게 애를 씁니다.
* 그런데 왜 그러세요? 지키지 말까요?
* 거룩하게 하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거룩하게 했잖아요.
* 니들이 십자가를 알어?
* ? ? ?
◈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하기 때문에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그 말씀의 주도권자가 따로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한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처음 창조적 입장에서는 자기 존재를 긍정하기 때문에, 말씀을 두고 무슨 물건을 지키듯이 그렇게 지키려고 덤벼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주님께서 쥐고 있으면, "이 놈들이 어디에 손을 대는가" 라고 하면서 그들의 손을 쳐버린다는 것이다.
◈ 십자가 사건 - 너희는 말씀을 지키지 못해 !!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들이 이런 본성을 가지고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그러한 모든 시도들이 보여주는 것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서 말씀을 단 하나라도 결코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저에게 왜 그렇게 쉽게 함부로 결론을 내리느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하지만 그 근거가 어디 있는고 하니,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이 세상에 집어넣어서, 즉 이 십자가는 주님이 저주받은 저주의 사건인데, 이것을 유발시킨 이 세상 모두가 죄 아래에 있고 저주아래에 있음을 까발리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흔히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이전과 이후를 구별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수직적으로 이 세상은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이미 죽은 세상이란 것이다. 그러니 시간적으로 이전과 이후가 구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수직적이니 말이다.
예를 들어서, 목욕을 하려고 사우나에 갔는데, 거기에서 탕 안에 들어간 것과 탕 밖에서 때를 민 것은 시간적으로 구별이 되지만, 그러나 사우나 밖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어차피 목욕을 하려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니 말이다.
◈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 라는 의미는?
이렇게 안에 있다는 것은 시간적인 전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그 안에 있으니 말이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담만 죄를 지은 것인가? 아담 이후의 모두가 다 죄를 지었다는 말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우리는 선악과를 본 적도 없는데, 그러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것인가? (사실 우리는 그때 거기에 없었는데, 우리 알리바이는 부모가 입증해주는데...)
그런데 성경은 그런 우리의 알리바이도 무시하고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in adam'에서는 시간의 전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동일한 원리원칙이 통할뿐이지 말이다.
◈ 아담 안 + 예수님 안 = 십자가 안 !!
이런 '아담 안'을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저주 안' 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은 '십자가의 축복 안'이 되고 말이다. 그러니까 '아담 안'과 '예수님 안'을 몽땅 합치면 '십자가 안' 이라는 것이다. 맞지요?
그러니 이 십자가라는 것은, 죄를 지은 아담에 속한 자들이이 지키자고 덥석 물었는데, 그러나 물은 그 순간부터 그들은 자기들이 미처 몰랐던, 즉 아담 안에 속했던 사실을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순간 순간 이미 죄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왔고,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십자가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허물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허물어버리면, 옛날에는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저주를 받고 우리 이방인들은 상관이 없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몽땅 다 십자가 안에서 저주를 받는 자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런데 개혁주의자들은 뭐라고 말하는가? 이제 십자가로 다 허물어버렸으니 저주가 없다는 것이다. 저주는 율법이 주는 것이지, 십자가는 저주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가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 인간들이 어디 안에 갇혀있는지,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이전에는 못 지키다가 이후에는 지킬 수가 있다" 라는 식으로, 자기가 무엇을 지키고 못 지킨다는 방향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자꾸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어떤 영역을, 필드, 혹은 장(場)을 의미하니 말이다.
◈ 인간은 왜 창조의 관점에 집착하는가?
이렇게 되면 말씀의 주도권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인간이 아닌 십자가인데, 그런데 인간은 이 말씀을 지킬 때 무슨 관점으로 하는고 하니, 창조의 관점에서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면 왜 이렇게 창조를 주장하는가? 왜 창조에 집착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창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음을 믿기에 말이다. 즉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어서 그분의 명령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선한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는 것이다.
◈ 창조의 관점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 !!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십자가의 관점이 아니라 창조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라는 존재가 창조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런 창조의 비밀을 알게되면 "나는 나답게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십자가 앞에 들이대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창조의 관점이 바로 이 땅에서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도대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누가 죽였는가? 코끼리가 밟아 죽였는가? 개미가 물어뜯어서 죽였는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기까지 복종을 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 대 인간을, 마치 혹성 대 혹성의 충돌이 일어난 것처럼, 그런 대충돌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쾅! 쾅!!
쉽게 예를 들자면, "오 신이시여, 새털 같이 나풀나풀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뭔가가 정면으로 날아와서 '쾅'하고 대충돌을 일으키는데, 그렇게 해서 양쪽이 모두가 다 깨어졌는데, 그 충돌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다.
◈ 도대체 사도바울에게 무슨 일이?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도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다' 라고 하는 순간에 '쾅'하고 부딪쳤는데, 누구하고 말인가? 예수님하고 박았다는 말이다. 그때부터 이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자기 말고 다른 누구와 함께 동거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렇게 자기가 잘났다고 하던, 그야말로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 중에 진짜 바리새인이라고 하던 자가 말이다. 아니, 이 사도바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러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성도 - 십자가의 사랑과 은총만을 !!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십자가를 지신 분이 말씀의 완성이니까, 말씀에 손을 댄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에 손을 대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만 말하면 되는고 하니, "나는 왜 죽어야 하는가?" 라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총을, 즉 예수님의 공로만, 그런 하나님의 의(義)만 드러내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신약과 구약이, 즉 성경말씀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주도권은 이미 십자가를 지신 분이 가지고 있지, 창조에만 관심이 있는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곧 새언약이 들어있는, 새언약을 맞이하는, 새언약을 반겨야 될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결국 '나' 라는 존재와 십자가의 대결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은 십자가가 오기 전까지는 자기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하는데, 이렇게 자기 존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자기' 라는 존재가 뭉치고 뭉치고 보니 결국 주체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은 하나의 객체가 되는데, 그래서 주체와 객체 사이에 서로 관계를 취하게 되면, '나' 라는 존재는 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아무리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장로님이 이야기한 그 이레니우스가 언약에 대해서 최초로 말했지 싶은데, 구속사도 언급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제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고 언약을 이야기해도, 그 밑바탕에는 이미 객체가 되어버린 신이 있고 주체가 된 자기가 있다는 것이다.
◈ 자기를 긍정하면서 무슨 언약을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제 아무리 언약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나' 라는 피조물을 긍정하고, 보존하고, 완성시키려고 한다면, 즉 흠 있는 '나'를 흠 없는 '나'로 만들기 위한, 그런 자아실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신의 말씀에 접근한 결과로서 나온 것이, 그것이 바로 언약이고, 구속사이고, 주권사상이고, 예정론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해서 나왔고 말이다.
이러한 전체가 소위 개혁주의신학인데, 사실상 다른 모든 신학들도 다 그렇고 말이다. 물론 여기서도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말이다. 그러나 진짜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창조원리로 생각하는, 즉 창조원리를 기초로 한 모든 것을 죄(罪)로 규정시켜버린다는 것이다.
◈ 창조의 회복이 아닌 창조의 박살 !!
그래서 성경말씀은 창조를 회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창조를 박살내는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회복' 이라는 말은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가 말하는 것인데, 통일교도 그렇고 말이다. 이레니우스도 회복이라는 말을 했고 말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을 베풀어주었으면, 그렇게 해주었는데도 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언약에 복종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 '나'를 부인하는 '나'는 어떻게 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남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자기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이 안 되면 우리도 역시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는 또 남아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고 여기는 그런 '자기' 말이다. 그것마저 부인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백 번을 천 번을 해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이것이 바로, 가문의 부활 !!
조금 전에 인간의 정자 안에 미리 갓난아이가 들어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갓난아이의 정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역시 갓난아이인데, 그 아이의 정자 안에는 또 갓난아이가 들어있고, 이렇게 해서 끝이 없는데,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 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인간에게는 잠재된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것이 소위 '가문의 부활' 인데,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가문을 강조하고 주장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즉 "니가 태어나는 것은 조상덕분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밭이기에 여자는 시집을 올뿐이지, 이 여자 쪽에서 아들을 만들든지 딸을 만들든지 하는 영향력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 가문의 뼈대가 좋아서 그렇지, 밭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동서양이 동일한데, 왜 이런 사고방식이 나왔는고 하니, 창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의 비밀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항상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즉 모든 응시하는 관점이 시선이 자기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창조의 관점으로 십자가에 접근하고 말씀까지 설명하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리한 신학이냐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외우고 도르트 신조를 모두 안다고 해도, 이렇게 창조를 기본으로 해서 성경말씀을 캐내려고 한다면, 결국에 남는 것은 창조의 회복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십자가라는 결론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대충돌이니 말이다.
◈ 하나님의 언약으로 시작해서 새언약으로 끝 !!
"그러면 목사님이 생각하는 구약성경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구약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시작해서 새언약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끝난다는 말인데, 이 새언약이 바로 십자가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곧 새언약이라는 것이다.
(막 14: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십자가의 원리가 이스라엘 내부와 충돌을 일으키면?
그렇다면 십자가의 원리가 이스라엘 내부라는 주체, 즉 자기를 위하여 있는 주체와 어떻게 충돌해서 무슨 일들이 일어냐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오늘날 21세기에 어떻게 복음으로 증거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구약을 아무리 보아도 그것을 모르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울왕의 경우에, 사울이 타락하는 것을 보고는 "아이쿠, 바보 같기는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나. 겸손할 때 왕이 된다고 하니, 이제 왕이 되어서 뭔가 좀 된다고 해서 잘난 척 하기는, 바보 같은 사울아" 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사울만 욕한다는 것이다.
◈ 모두가 니탓이요 !!
그것은 바로 아담 안에서, 언약 안에서 시간개념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르기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삼손의 경우에도, "아이쿠, 이런 삼손 봐라. 그 힘을 어디에 쓰나. 이제 봉사가 되니 정신을 좀 차리는구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다 돌린다는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마리아의 잔치집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디, 여자가 포도주에만 관심이 있고 말이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예수님을 알아본 자는 가룟유다가 유일한데,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들에게는 공유된 의미가 따로 있었는데, 그래서 "주님, 안 됩니다. 죽다니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면 안 돼요"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베드로가 지금 자기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이 가짜라는 것이다. 창조에서 나온, 즉 자기 주체에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러니 기존 개혁주의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그것은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선하고 거룩해 보여도 말이다. 그런 것들은 이미 기존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다 이야기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구약을 보고 신약을 보면서 아무리 구속사를 이야기하고 여호와 전쟁을 이야기해도, 돌아오는 것은 "내 잘났다" 라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십자가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런 예수님을 믿는 자기가 잘났다는 식이라는 말이다.
◈ 구약도 십자가의 원리로 보아야 !!
오늘 본문인 교재 58페이지의 '이스라엘 내부로 번진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것을 십자가의 원리로서 그대로 적용시켜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두 가지가 모두 나와야 하는데, 즉 창조의 비밀을 캐내겠다는 긍정의 입장과, 그것을 전쟁을 일으켜서 때려부수겠다고 하는 주님의 새언약에 입각한 전쟁의 양상,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소개함으로서, 십자가 이전에 있던 십자가 사건들을 제대로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들을 말이다.
저는 모든 성경을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살펴보는 해석방법이 옳다고 보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래서 이렇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마구 떠들고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교재 58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의 전쟁에서의 승자는 완벽한 의가 있어야 한다. 의가 있는 자가 승자요, 의가 없는 자는 패자가 된다. 그런데 그 의라는 것은 인간이 얻어낼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때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전쟁에서는 승리한 자는 완벽한 의가 있어야한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완벽한 의인데,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면 율법 외에 한 의인데, 그런데 이것을 두고 "그러면 율법의 의는 내가 믿자. 아니 내가 가지자"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의(義)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율법의 의가 있고, 율법 외에 한 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하고, 율법 외에 의도 가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둘 다 틀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해도 인간은 죄인이기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의 외의 의를 가지려고 해도 안 되는데, 그것은 율법의 의가 줄 때만 가질 수가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이렇게 방향을 자기 쪽에서 출발해서 의를 가지려고 하지만, 이 율법 외의 의는 그 방향이 율법의 의에서 나와서 인간을 데리고 가서 율법 외의 의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의(義) 안에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다 마구 넣어버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무엇을 가지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예, 그 안에다 들어있으니 말이다.
◈ 성도 - 난 자궁이 좋아 !!
예를 들어서, 어마 배속에 있는 태아가 더 이상 엄마로부터 무엇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서 누린다는 것이다. 누림이지, 더 이상 따로 무엇을 가질 필요도, 또 그럴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아, 이 탯줄은 내 꺼. 심장도 내 꺼" 라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태아는 비록 태아라도, 태아의 몸 자체가 엄마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상 지금 우리는 예수라는 자궁(?) 안에 들어있는데, 우리가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생산되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 의로 만든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의가 아닌,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성도' 라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하다는 것이다. 정말로 완벽한데, 어느 정도로 완벽한고 하니,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의인이 되는, 그 정도로 완벽하다는 것이다.
◈ 율법의 의와 율법 외의 한 의 !!
이 율법의 의에서는 죄를 지으면 미흡한 의가 되지만, 즉 죄를 지으면 그만큼 흠집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 외의 한 의에서는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완벽한 의로서, 그냥 그대로 남는다는 말이다. 율법의 의에서는 죄를 지으면 그 율법이 정죄를 하지만, 그러나 율법 외의 의에서는 율법의 정죄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즉 율법의 정죄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대 배치를 받으려고 장병들이 천 여명이 있는데, 1번은 부산, 2번은 서울, 3번은 대구, 4번 무안, 5번 원당, 이런 식으로 배치를 받아서 배낭 달랑 하나만 매고 가는데, 그런데 거기서 민간인이 한 명 나타나서, "저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라고 하면, "당신은 해당사항이 없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 외의 한 의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율법적으로 지키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율법을 불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마귀를 불러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은 이미 없어진 율법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 사울의 자승자박(自繩自縛) !!
사자성어에 '자승자박(自繩自縛)' 이라는 말이 있듯이, 스스로 자기에게 수갑을 채우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끄집어낼 필요도 없는 것을 일부러 끄집어내어서,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잡힌다는 말이다. 즉 시키지도 않는 일을 괜히 해서 허우적거리며 빠져있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울이 전쟁할 때 제사를 지내는 모습인데, "제사를 지내야 전쟁에 승리한다" 라는 것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울 자신이 들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전쟁을 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제사장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제사를 지내고 전쟁에 나섰다가 대패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 사무엘이 나타나서 뭐라고 하는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다. (어찌 성경내용이 좀 ??)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 주님이 너의 행위보다 낫다 !!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이 너의 행위보다 낫다" 라는 것인데, 지금 주님의 순종케 하시는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지금 주님의 하신 일을 믿지 않고 자기가 제사를 지내야 된다는, 그 자기의 행위를 믿지 않으면 안절부절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러면 목사님, 아무 것도 안 하면 되겠네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순간에 뭔가 한다는 것과 안 한다는 것이 구분된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은 뭔가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뭔가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말이다.
◈ 결국은 자기 행함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왜 이렇게 굳이 구분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고, 이것은 안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이러한 태도는 결국에는 자기 행함을 고수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코 순종이 아니라, "주여, 이것은 행하는 것이 맞지요? 혹은 이것은 제가 노는 것이 맞지요?"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왜 자기가 결정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마음대로 결정을 지어놓고는, 또 저에게 시비를 걸면서 덤벼들고 말이다.
◈ 목사님, 사과는 빠르지요? 맞지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기차는 맛있다" 라고 해놓고 저에게 비평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비평이 안 되는데 말이다. "사과는 빠르다" 라는 것이 비평의 대상이 되는가? 즉 이 말이 무엇이 틀렸느냐는 것이다. "사과는 빠르다" 라고 했을 때, 사실 '사과' 라는 의미 차원은 따로 있는데, "사과는 맛있다" 라고 해야 되는데 말이다.
이 사과의 경우에, '맛있다, 빨갛다' 라는 것은 되는데, 그러나 '빠르다, 훌륭하다' 라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의미의 계열화' 라고 하는데, 이제 배운 것이 좀 연결이 되나요? '빠르다' 라는 것은 비행기나 고속열차가 해당되는 것이지, 사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에게 "사과는 빠르다" 라고 해놓고는, 이것이 무엇이 틀렸느냐고 하는 것이다.
성경의 경우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는 것을 두고, "그러니 이제 내가 살았잖아" 라고 하면서, 그것이 무엇이 틀렸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보기에, "사과가 빠르다" 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죽고 사는 것과 주님이 죽고 사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데, 그런데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같다 붙여놓고는 무엇이 틀렸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라는 말은, 뭔가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인데, 그렇다면 뭔가 하면 거룩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방종인가?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순종보다 제사를 제대로 한번 드려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 외의 한 의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율법의 외의 한 의를 자기 행함으로 만들어내어서, 즉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이제는 주님의 의를 자기의 행함을 가지고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 당신, 정말 너무 일방적인 것 아니요?
지금 소위 개혁주의에 속한 목회자들이 이근호를 공격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왜 당신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성도가 하는 의를 인정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 제 말이 어디 틀렸어요? 저에게 거는 모든 시비는 바로 그것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의가 없어진다는 것인데, 그러나 나쁜 짓을 해서 없어질 의 같으면, 그것은 율법의 의이지 율법 외의 한 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의는 외부에서 그저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 냉장고만 있으면 OK !!
아니, 주님이 집에 냉장고를 하나 사놓았다면, 거기서 아이들이 발가벗고 놀든지, 방귀를 뀌든지, 똥을 싸든지, 그 냉장고는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고를 친다고 해서 냉장고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주님이 십자가를 진 것이 분명하다면,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가 우리에게 쳐들어왔다면, 우리가 그 어떤 악한 짓거리를 하더라도, 즉 율법에서 그 어떤 것을 어긴다고 하더라도, 이 율법 외의 한 의는 결코 최소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냉장고를 볼 때마다 "주여, 제가 지금 놀고 있나요? 착한 일을 하고 있나요?" 라고 하는 구분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무엇을 하더라도 "주여, 냉장고에 비하면 그저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저에게 시비를 걸기를, "이근호 목사는 설교하는 것도, 찬양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죄라고 하더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물론 죄이지요" 라고 하면, 그 사람은 "그러면 하지 말아야 하겠네" 라고, 결국은 자기 본색이 나온다는 것이다.
◈ 왜 굳이 구분하려고 하는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지적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를 구분하려고 하는 바로 그 태도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전혀 그렇게 구분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제가 모든 것을 죄라고 했다고 해서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 외의 한 의와 인간이 창조적인 관점에서의 긍정에서 나온 자기 의를 지키겠다고 하는 의, 이 두 가지 의가 언약을 통해서 보니, 이스라엘 내부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로소 "주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언약을 믿어라" 라고 하면, "예, 믿습니다" 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이 믿는다고 하는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
◈ 기드온과 대폭발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방앗간 주인인 기드온을 그 예로서 든다는 것이다. 이 기드온이 말하기를, "저는 칼싸움을 할 줄 모릅니다. 우리편이 숫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라고 하면서, 전부가 못한다는 소리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알아서 되게 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또 기드온은 "못합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은 "내가 되게 한다" 라고 하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은 모두 돌려보내고 달랑 300명만을 데리고서, 칼과 방패가 아닌 횃불과 항아리를 들고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하니 백성들이 뭐라고 하는가? "역시 기드온은 댁길이야. 우리 왕으로 삼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러니 오늘날 이야기나 그때 그 당시 사사기의 이야기나 너무나도 똑같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가 말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인간은 아담 안에서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은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인간들은 또 "아니, 놀면 안 되잖아요"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면 또 주님께서는 "왜 놀면 안 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왜 놀면 안 되는가?
우리가 왜 놀면 안 되는가? 노아는 방주 안에서 마구 먹고 놀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밖에 있으면 이런 소리를 해대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놀면 일이 안 되고, 자기가 뭔가 일을 해야만 일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악마적인 발상인지 말이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밖에 있으니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리스도의 지시에 순종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내가 노까? 일할까?" 라고 하면서, 자꾸만 자기 행동에 대해서 주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성경에 비슷무리하게 있는 착한 일을 했으면, "이근호 목사는 뭐 모든 것이 다 죄라고, 나를 좀 보라고 하지" 라고 우쭐거리다가도, 그런데 나쁜 짓을 했으면 자기 스스로 변명하고 반성한다고 생쇼를 다하고 말이다. "에이 나쁜 놈, 기도와 헌금을 좀 더 하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런 것 저런 것 다 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오늘 진도를 좀 나가야 되는데, 교재 58페이지에 나오는 출애굽기 19장 4절 말씀을 보자.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 언약은 단 한번도 취소된 적이 !!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즉 언약의 날개로 업는데, 사람은 떠나도 언약은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버린다고 해도 언약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제 빼도박도 못하고 언약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5절 말씀에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라고 하셨는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단코 언약을 지킨 적이 없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언약의 백성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십자가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언약은 단 한번도 취소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 기똥찬 해석 - 바벨론 포로 70년의 이유는 ??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70년 동안 포로가 되었는데, 그런데 왜 70년인고 하니, 그야말로 기가 차고 똥이 찰 노릇인데, 한번도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서 70년을 한꺼번에 모두 지켰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아이들이 숙제를 하지 않아서 선생님이 한달 숙제를 한꺼번에 모두 다 시켰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490년 동안 한번도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서 그래서 70년을 한꺼번에 다 지키도록, 즉 포로로 잡혀서 쉬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이런 내용이 과연 있는가? 왜 광야에서 40년인지는 나오는데, 가나안을 40일 동안 정탐을 했는데, 그것을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해서 40년을 광야에서 뺑뺑이 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왜 70년 동안을 포로로 잡혀있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 14:34)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이 B.C 580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렇게 해서 490년을 빼보면 이스라엘은 B.C 1070년부터 안식년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되는데, 그 사람의 주장대로 한다면 말이다. 그러면 B.C 1070년 이전에는 안식년을 지켰다는 것인데, 하지만 구약성경 그 어디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 한번도 십일조를 제대로 한 적이 없고, 안식일을 지킨 적도 없고, 물론 안식년도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런 것을 준 것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라, 결코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들은 성경말씀을 단 하나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누구도 말이다.
◈ 순종은 무엇이고,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그들이 말씀에 순종한 적은 있지만, 그러나 말씀을 지킨 적이 없었는데, 사실상 지킬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말씀에 순종했는가? 아니면 지켰는가? 마리아는 순종했는데, 주께서 자기에게 사건을 일으킬 때, 그 사건은 거부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말이다. 순종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도저히 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말씀에 순종했는가? 아니면 말씀을 지켰는가?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무엘의 아들들은 어떠한가? 말씀대로 잘 가르쳤는가? 아들들은 완전히 개판이라는 말이다. 순종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이 주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역시 순종했다는 것이다. 골리앗을 물리칠 때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이 터짐으로 말미암아서 순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말씀을, 즉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순종은, 그 사람이 이미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순종이라는 사건을 일으킴으로 순종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순종을 했는가? 아니면 말씀을 지켰는가? 역시 순종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했으니 말이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주님이 순종하도록 두 눈을 봉사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 구원은 말씀을 지켜서가 아니라, 그분이 은혜를 베푸셔서 !!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는 주님께서 순종토록 하시는데, 이렇게 순종토록 해서 나온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받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런 이야기를 다음 '언약의 의'를 이야기하면서 좀 더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미 마치도록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순종이라는 것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순종케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토록 하고,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고,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인 줄로 압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는 이 자체를 남에게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8,01,13 새벽 0시 20분에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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