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김준오님의 『詩論』에서 비유에 관한 것들을 찾아보기로 하지요. 국내에 시론이 아주 많이 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사에서 나온 『시론』이 제일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도서관마다 다 있는 책이니 필요하신 분은 빌려다보시기 바랍니다.
1)동일성의 원리
시인들은 어떤 묘사를 위해서만 이미지를 사용하진 않습니다. 비교에 의해서 관념들을 표현하고 전달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비교가 비유적 언어, 즉 비유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룩스와 와렌의 이론이 아니고도, 비유가 일종의 비교인 이유는 반드시 이질적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이기 때문이지요.
수사적 용어를 사용하면 원관념(元觀念)과 보조관념의 결합을 말하는데요. 지난 시간에 이미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지칭하는 용어가 다르거든요. 원관념을 주지(主旨),본의(本義), 취의(趣意), 주상(主想), tener, primary meaning,으로 보조관념은 매체(媒體),유의(喩意), vihicle,secondary meaning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원관념은 비유(되는)이미지 또는 의미제이고 보조관념은 비유하는 이미지 곧 재료제입니다. 이 때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같이, ~처럼,~듯이>의 매개어로 결합되거나 (이와 같은 비유를 직유라 합니다), 의 형태로 결합됩니다. 다시말하면 비유의 근거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연속성에 있습니다. 즉 두 사물의 동일성에 의하여 비유가 성립됩니다.
이쯤 이론 무장이 되셨으니 이제부터 하는 강의는 더욱 알아듣기 쉬우실 것입니다.
2)비유(比喩)는 시 창작의 원리
시인은 비유를 통해서 시인이 발견하고 창조한 의미나 진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시적 공간에 형성해놓기 때문에 비유는 수사적 기교나 장식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시 창작의 원리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비유는 시인의 상상력과 직관에서 나옵니다. 스파크처럼 빛나는 불꽃입니다. 이 비유의 빛이 사물에 가 닿을 때 사물은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들에게 경이감과 충격을 주게 됩니다.
조태일님 같은 분들은 비유를 모르는 시인은 결코 참다운 시인이 아니며, 비유 없는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래서 시인을 판단할 때는 그가 사용한 비유의 힘과 그 독창성에 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1.비유란 무엇인가
비유는 어떤 대상의 모양, 성질, 특성, 상태 또는 추상적인 의미나 관념 등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것과 유사한 다른 대상에 비교하여 표현하는 언어적 법입니다. 즉 서로 다른 두 사물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결합시켜서 구체적인 이해나 인식을 얻는 언어적 표현인 것입니다.
일단 예문을 보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노래로도 많이 불리웠던 김동명의 <내 마음>을 한 번 읽어보기로 하지요.
(한자는 제가 한글로 옮깁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잘 아는 시이지요. 아마 읽으시면서 속으로, 또는 콧소리로 노래로 부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노래로나 시로 부르거나 읽기만 했지 비유 같은 어려운 말은 생각해보
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에서 원관념은 무엇이고 보조관념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원관념이구요. 보조관념은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입니다.
얼마던지 우리가 만들 수 있겠지요. 내 마음이란 원관념을 두고 하늘, 바람, 바다,.....등등
여러분들이 보조관념을 만들어 보세요. 그러나 이런 다른 이질적 대상들이 결합할 때 아무 근거가 없으면 안되겠지요.
그 근거가 앞에서 말한 동일성 혹은 유사성이란 것입니다. 내 마음과 호수는 분명 이질적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 두 대상 사이에서 우리는 동일성, 유사성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끔 호수처럼 고요하고, 잔잔하고, 깊고, 맑고 푸르른 것을 느낄 때가 있지요. 분명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호수와 내 마음이 닮았습니다.
다른 예문을 하나 더 읽어보겠습니다.
정희성님의 <버스를 기다리며>전문입니다.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이 나온다
100원을 뒤집으니 세종대왕이 나오고
50원을 뒤집으니 벼이삭이 나온다
퇴근길 버스 정거장에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 선 여자 궁둥이도 훔쳐 보며
동전밖에 없어 갈 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선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나으리들은 배포가 커서 끄떡도 않는데
신문에 나온 여공의 죽음을 보고
동전밖에 없는 제 자신도 잊은 채
울먹이는 나는 얼마나 작으냐
말 한마디 큰 소리로 못하고
땡볕에서 동전이나 뒤집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보탑 뒤집으니 10원이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면 먼지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땡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엇이든 한 번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일없이 일없이 동전을 뒤집는다
한 때 암울했던 시대에 이런 시들이 많이 씌어졌습니다.
다시는 이런 시들이 쓰이지 않는 시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에선 동전과 신문 기사에 실린 여공의 죽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화자는 각각 다른 이질적 대상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이질성 속에서 그들이 지닌 유사성 혹은 동일성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이 무엇일까요. 한번 말해보세요. 그렇지요. 그것은 이 사회로부터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지니는 비애감이며, 별 볼일 없는 먼지와 같은 존재들이 느끼는 소외감일 것입니다.
문학 이론도 중요하지만, 늘 강조하지만 좋은 시를 읽는 것 이상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시가 좀 어렵고, 새로운 형식이 나오더라도 그냥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형식이 다르다는 것은 낯설게 하기 위해서인데요. 뛰어쓰기를 않는다든지,행과 연을 무시한다던지, 글 체로 삼각형이나 어떤 도형을 만든다든지, 여러 형태가 습니다.요즘 젊은 작가들이 실험적으로 발표하는 작품들은 더욱 다양하지요.
허수경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어 오늘은 지난 여름호『문학동네』에 나온 시<달내음>을 올립니다.
다음은 『문예연구』2001,가을호에 실린 임영조님의
<나무는 죽어서도 나무다>를 읽어보겠습니다.
아주 잘 쓴 시이군요.
누가 저 논두렁에 박힌 말뚝을
죽은 나무라고 단정할 수 있으랴
누군가의 완력으로 처박힌 뿌리를
그 무슨 비유로 정의할 수 있으랴
잔가지 다 치고 군살도 빼고
꼿꼿한 근성만 땅에 박고 서 있는
저 나무의 生死를 왈가왈부
조서를 꾸미기엔 아직 이르다
산에서 징발된 나무로 보면
일개 이름 없는 볼모가 되지만
산에서 출가한 나무를 보면
으스러진 머리에 하늘을 이고
알몸으로 버티는 순교가 된다
-번뇌와 보리는 본시 하나라
미혹하면 번뇌요 깨달으면 보리다
말뚝 안의 네 협잡은 로맨스이고
말뚝 밖의 내 이념은 치정이라고?
말뚝의 저쪽은 인민공화국이고
말뚝의 이쪽은 대한민국이라고?
날마다 말뚝에 매인 염소는
제 목줄로 잰 땅이 감옥이리라
저 말뚝도 한때는 이웃과 함께
눈부신 햇살로 나이테를 불리고
푸른 바람 소리로 산을 키웠으리라
이젠 죄없이 유배된 땅에 박혀
앙상한 통뼈로 모진 세월 견디는
말뚝을 보면 坑儒(갱유)가 생각난다
육탈로 맞선 환한 옹고집
당당하게 벌 받는 생이 보인다
나무는 죽어서도 나무다
오늘 읽은 시들이 좀 어렵네요.
황금찬님의 <사랑이 자라는 뜰>을 읽기로 하지요
아직도
내 체온이 식지 않은
풀씨를 한 웅큼
창 앞에 뿌려 놓고
새를 기다린다.
늙은 참새 한 쌍이
날아와
마음 놓고
내 체온을 다 주워 먹었다.
따사한 정에
허기를 면하고
몸이 풀려서 서늘한 표정으로
목례를 하고,
얼마간 졸다가
구름밭을 지나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지금 창 앞에는
새가 두고 간 사랑이
풀잎으로
자라가고 있다.
다음은 김석규의 <사랑에게>를 읽어보겠습니다.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류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기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마지막으로 오규원님의 <한잎의 여자>를 읽겠습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
의 솜털,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
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
자 같은 슬픈 여자.
정말 좋은 시이지요?
2.죽은 비유와 살아 있는 비유
여러분들도 아마 좋은 시를 읽으시면 인지(認知)의 충격과 경이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시란 감상적인 시로 감동을 주는 시 말고요, 비유와 상징, 그런 적절한
시의 장치가 많이 되어 있는 시를 말합니다. 이런 좋은 시들은 우리의 삶과 체험을 활성화시켜주고 풍요롭게하여주지요.
전에도 "낯설게하기"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에 대해 잠깐 말씀드렸는데요. 그 이론도 깊이 들어가면 어려우니까 우리와 관계 있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우리들의 일상은 대부분 고정되고 관습화되고 자동화된 인식에 길들여져 있지요. 말하자면 모두다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이 겁니다. 사물의 피상적인 모습을 보고 마치 우리는 그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위의 모든 사물들은 더 이상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며 새로움을 주지 못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덤덤하고 낯익고 진부할 따름입니다. 서울에 산 사람들이 남산 타워나 6.3빌딩이라고 해보아야 무덤덤하고 낯익고 진부할 따름이지요. 그러나 섬마을 소년들을 거기에 풀어놓으며, 온갖 생경함과 호기심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낯 익은 것들 안에서 또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듯이, 예를 들면 남산을 가지 않아서 그렇지 그 안에 수 만, 식물과 동물들이 있습니다. 서울 시민 대부분이 무심하게 지나는 동안 그 안에서 날마다 그 생명을 확산시켜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지금 가보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이 있지요.
시인의 눈은 이렇게 관습적인 태도와 자세에서 벗어나 사물이 숨기고 있는 미지의 부분을 찾아내고 독자들 앞에 처음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때 타성에 젖은 관습적 인식은 깨어지고 사물의 새로은 모습과 의미 앞에서 독자들은 경이감과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남산 안에서 새끼를 친 산토끼나 꿩의 둥지를 보여준다면 아마 서울 사람들은 많이 놀랄 것입니다. 천연기념물 식물이 몇 그루 있는 것을 처음 발견한다면 온통 신문에서 또 대서 특필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낯설기를 하는데 물론, 그 형식에 변화를 주어 부호를 없앤다거나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거나, 행갈이를 마음껏 하는 등,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이런 것들은 또 요즘 너무 많이 시도 되어 그들 자체가 자동화되어버리는 감이 있지요.
그래서 그 내용에서 많은 비유적 장치를 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비유는 시인이 자신만의 독특한 인식과 상상력에 의해 미지의 사물을 우리 앞에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시적 원리이며 표현 방법인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사물의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발견, 새로운 의미,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모두가 결혼을 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롤 부부간의 신비감이 없어집니다.더 이상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해요. 무덤덤하고 낯익고 진부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렇게 지낼 수는 없지요.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오기 전에 방 안의 가구를 바꾸어 놓는다는지, 맛있는 음식과 술 한 잔이라도 준비해놓는다든지 이런 것도 참 좋은 방법입니다, 머리를 예쁘게 하고 멋진 옷을 입고 기다리는 것, 무드 있는 음악을 틀어놓
는 것, 이런 것이 다 낯설게 함으로 남편에게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나의 내면에, 전혀 남편이 모르던 것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멋진 시를 한 편 써서, 도시락에나 손수건 안에 수첩 안에 노트북 안에 사알짝 넣어 놓고, 당신의 칭찬만이 나의 가슴을 살찌게 하네요. 이런 글 하나가 그날은 아마, 남편이 감격할 것입
니다. 그러다가 여기 저기 응모해서 합격하고 또 그러다가 등단하면, 아 내 아내가 시인이었구나, 그 마음 안이 온통 꽃밭이었구나 감격할 것입니다.
이 것이 시 안에서라면 아주 훌륭한 낯설게 하기입니다. 그 낯설게 하기의 제일 좋은 방법이 비유와 상징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써먹던 것도 한 번 써먹은 것은 잘 안통하듯이(여기에 주로 주부들이시라 이런 예를 드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남편들도 아내를 위해서 물론 이런 방법을 써야 하거든요)
비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비유를 이루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상상력을 필요치 않는 상식 수준이거나, 습관화된 인식 속에서 나온 것이거나, 너무 낯익어서 진부한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세계와 사물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경이감과 충격을 안겨주지 못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죽은 비유에 대해서 알아보지요. 우리는 이 죽은 비유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개와 같은 인생", "세월은 유수와 같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네", " 쏜살 같은 세월"," 샛별 같은 눈동자".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살결". "목석 같은사내", "여자는 여우",남자는 늑대", "여자는 갈대""쟁반 같은 달", "사랑은 불꽃" "토끼 같은 아이들", 등은 이미 죽은 비유입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이미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습관화되고 상투화되었기 때문에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시에서는 이런 자동화된 비유, 죽은 비유를 멀리하고 배척하는 것이 좋습니다.
박두진의 <꽃>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靜寂(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湖心(호심)아
조태일님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위 시에 나타나 있는 '꽃'의 모습을 보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름다움, 정열, 사랑, 황홀 등 자동적,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던 꽃의 모습이 아니다. 눈에 의하여 발견된 '속삭임', '울음', '핏방울', '정적', '호심' 등의 비유는 우리가 예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꽃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때 솟아나느 정서적 충격과 황홀한 경이감이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확대시키고 타성에 빠진 우리들의 시각을 깨뜨리게 한다."
그러면 이런 결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것은 당연히 시인이 관습적이고 자동화된 죽은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살아 있는 비유를 사용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박인환님의 <얼굴>을 싣습니다. 좋은 시 올리는 것들은 모두 전문(全文)입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랴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를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홍윤숙님의 <눈 내리는 길로 오라>를 읽겠습니다.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서 눈처럼 하얗게 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 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운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늙어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밭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다음엔 『시와사람』2001.가을호에 실린 시 한 편을 소개하겠는데요. 목포에 있는 여성시인입니다. 아마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일 것입니다. 저하고는 대학원 동기생이기도 하구요.
이 미경 시인도 여기에 들어와서 이 강의를 가끔 듣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경님의 < 바람 속에 보낸 노래>
유달산 외곽도로 따라 갔더니
잎 지는 나무들 서 있었네
아침 안개 속에 서 있었네
나 상수리 나무 옆에 섰네
딸이여 안녕
당신도 안녕
깃털처럼 드디어 무게도 버리고
상수리 나무 한 잎으로
바스러지고 싶었네
유달산 외곽도로
외길 따라 갔더니
바다 있었네
비단 치마폭 바람에 살랑이듯
그렇게 있었네
나 목선 옆에 누웠네
효부도
현모양처도
그리고 매력을 꿈꾸던
내 여성도
신발 옆에 나란히 나란히
벗어놓고 가라앉고 싶었네
머리도 가지런히 눕고 싶었네
3.비유의 힘과 효과
비유는 우리가 외출할 때 아름답게 화장을 하듯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닦아서 인간 자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계 기구의 활용법을 잘 알아야 그 것들을 이용하기 쉽듯이 비유의 진정한 힘과 효과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오늘까지 강의를 들으셔서, 쉽게 설명하긴 어렵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이 것이다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 바로 그 것이지요. 사물, 상황,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 즉 추상적이고 불투명한 관념까지를 가장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지름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학문적으로 다루니까 그렇지 시가 아니고도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도 얼마나 많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눈이 작은 사람보다 간재미 같은 눈, 단추구멍 같은 눈이라 한다던지, 꾀꼬리의 목소리라 하는 것, '바람처럼 사라지다' 라는 영화제목, 아마 말의 종류만큼 많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도 비유라는 말이 있는데 그 구절 말고도 수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아으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뿐 아니고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그렇다하니, 비유는 우리에게 보다 알아듣기 좋게 하는 표현의 방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 가운데 그 형식의 대부분이 시적 형식을 취한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 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성경도 비유문학이라 할 정도로 비유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곁에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일일이 예를 들지 않으니 여러분께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위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어떠한 집착이나 망상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창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비유를 통해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아주 장황스러운 설교조의 말보다 휠씬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유를 통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그 뜻을 함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TV에 나오는 유명 강사들의 강의도 마찬가지인데요. 모두 다 좋은 비유를 통해 청중들이 쉽게 알아듣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지요.
그렇듯 시 역시 시인의 통찰력과 인지력, 그리고 시인의 정신이 생동하는 언어로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비유는시 세계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면서 독자들을 시인의 세계 속으로 흡인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시인이 의도하는대로 비유가 시 속에서 강력히 힘을 발휘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한 기능과 에너지가 최대한 살아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좋은 비유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집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비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드러내줍니다. 비유에 의해 사물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확대 심화시켜 나감으로 우리의 인습과 고정관념의 무지와 타성에서 벗어나게 한다고까지 말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시가 지니는 리얼리티(사실성)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둘째)
좋은 비유는 시인의 독창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을 쉽게 가시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대웅님의 <가을 산>을 한 번 읽어보시지요.
술취한 아버지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어딜 그렇게 올라 가세요.
낙엽 긁어 모으며 바람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계곡
녹슨 세월의 송전탑
숨은 아들 대답하지 않는데
되돌아오는 메아리만 가슴을 태우는 山
자꾸 뭐하러 올라가세요
그게 아니다 애야 그런게 아니라고
붉은 손 흔들어 길 막는 너도밤나무
온통 아픈 울음 가득 토해내도
아버지 넘어지며 자꾸 넘어지며.....
아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비유이지요. 술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얼굴로 가을 산을 비유했습니다. 왜 이 시가 좋은 시가 되냐하면요. 우리는 보통 가을 산이라하는 시를 쓰거나 내용에 가을 산이 들어가게 되면, 불타오르는 산, 불꽃 같은 산, 열정, 열애 등을 금방 떠 올리거나 그렇게 표현하기 쉽지만은 이 시인의 독창적인 눈으로는 아주 색다른 비유로 아버지의 술 취한 얼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 것도 술에 취해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 울면서도 자꾸만 넘어지는 아버지의 슬픈 초상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시면서 아들이 아무리 붙잡아도 자꾸만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는 세월의 산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늙어가시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습니까?
셋째)
좋은 비유는 풍부한 시적 의미를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비유는 어떤 모양일까요? 그 것은 하나의 점이나 선일까요? 평면이나 어떤 도면 같은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비유는 입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다양해집니다. 우리는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비유를 잘 아십니다. 보이지는 않고 코끼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코를 만진 사람, 다리를 만진 사람, 꼬리나 배를 만진 사람의 코끼리에 대한 설명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듯이 독자들이 그 시를 읽는 상황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시가 일단 발표되면 이젠 독자의 몫이 된다고 늘 강조하는 것은 나의 해석과 다른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성복님의 <당신은 짐승, 별>을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이방)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같 밑으로 大地(대지)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좀 어려운 시이네요.그러나 분석해보지요. 여기서 원관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입니다. 그 원관념에 대한 보조 관념이 '짐승', '별', '정적'.'꽃씨', '정적', '죽음','순간','머나먼 곳','내 손가락 끝' 등 여러가지이지요.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우리가 짐작해 볼 바 밖에 없지만 이 시에서는 당신이란 원관념에 대해 다양한 보조관념으로 전이시키면서 '당신'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결합하는 보조관념의 대상들까지도 하나의 의미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좋은 비유는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지 않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지요. 시를 읽어서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 시라면 그 것은 죽은 시 아니겠어요? 요즘은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실험적인 경향이 있어 현재의 시경향을 해체시켜버리려는 의도도 있고요. 감동보다는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효용론에 입각한 주장도 있지만 저는 일단 시는 감동을 주어야한다는 것이 주장입니다. 좋은 비유로 쓴 시는 마치 수문을 열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 우리의 감동이, 정서가 밀려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대흠의 <봄은>이라는 시의 전문을 읽겠습니다.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
상 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 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그
곳에서 탕, 탕, 탕, 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너무 잘 쓴 글입니다. 봄을 '전쟁'과 결합시킨 이 당돌한 비유는 놀라운 발상입니다. 봄을 맞은 나무들이 꽃망울을 머문 것은 장전한 총이고 마침내 사격 개시와 더불어 사방의 꽃들이 나무들이 꽃을 피워내는 것을 탕, 탕, 탕, 탕 사격하는 것으로 비유해냈습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힘은 우리의 정서를 강한 충격으로 때려줍니다. 우리가 전쟁이라 하면 혐오하지만 이러한 꽃들의 전쟁에는 함께 하고싶지 않으십니까?
다섯째)
좋은 비유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성원근님의 <이슬>전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밤에
눈물이 많았던 누군가
목선을 타고
바다로 간 것일까?
풀잎마다 가득
바람을 먹고 있는
돛자락들.
이 시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겨봅니다
"우리가 '이슬'이라는 대상을 생각할 때 맑고 투명한 것,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위 시에서는 이 '이슬'에서 '돛자락'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돛'은 바람을 받아 배를 가게하기 위하여 돛대에 높게 펼쳐 매단 넓은 천인데, 이슬을 돛자락에 비유함으로 예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광활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이슬에서 발견하게 된다. 마치 푸른 바다의 한 가운데서 펄럭이는 흰 돛자락인 양 '이슬'이 한없이 크고 넓게 느껴지기 조차 한다."
여섯째)
좋은 비유는 시적 대상을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내는 힘이 있습니다. 역시 시를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동주님의 <강강술래> 전문입니다. 고정희, 김남주 시인의 고향인 해남이 고향이신 이동주님의 시로 해남 대흥사 입구에 시비로 서있습니다. 다음에 해남 대흥사에 가시는 분들은 주차장 앞에 이 시비를 보시면 강의를 받던 기억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레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강강술래를 돌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지요? 그들을 여울에 몰린 은어떼로 비유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상입니까? 달빛에 비추인 가녀린 팔목들을 여린 삐비꽃의 하얀 속살로 비유한 것이라던지, 강강술래의 원을 하늘에 떠 있는 달무리
로 비유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비유들은 훨씬 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특질을 선명하게 드러내줍니다.
또한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나 '열두발 상모가 돈다'나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등의 비유는 춤을 추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할 뿐만 아니라 그 춤의 역동성을 잘 나타내주어 독자로 하여금 절정감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좋은 비유가 얼마나 시를 살려주는가 위의 여러 예들로 잘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대로 옮겨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런 비유를 독창적인 것으로 창조해 표현한다면 여러분들도 분명 좋은 시를 쓰시게 될 것입니다.
좋은 비유와 죽은 비유에 대해서는 대충 이해하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시가 아니고도 우리가 보통 잘 쓰는 죽은 비유를 몇 개 더 들어볼테니 여러분도 더 찾아보시고, 이런 류의 죽은 비유를 시에 사용하시면 안되겠습니다.
-사랑의 불꽃, 교통 전쟁, 입시 지옥, 증권 파동, 무거운 침묵, 달콤한 말, 자연의 숨결 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런 은유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고 처음엔 아주 멋진 표현이며 살아있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듯 은유는 언어를 새로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언어의 창조자가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