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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민 14:24)
- 백장흠 목사 (독립문교회)
성공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공한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 왕이며 자선 사업가인 카네기는 실패한 사람들의 열 가지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핑계하기에 급급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매사에 책임적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열등의식과 자기 비하에 젖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3)실패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다르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4)쉽게 포기합니다.
어렵다고 다른 사람의 여론이 좋지 아니하니까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 합니다.
5)과거 지향적입니다. 항상 후회하고 잘못한 것을 탓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힘있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6)독창력이 없는 이들이 실패합니다.
성공하는 이들은 다릅니다. 항상 창조적입니다. 새 것을 생각하고 찾습니다. 안되면 되는 방법을 찾아서 시행할 줄 아는 이들이 성공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불신앙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같은 넥타이를 삽니다. 색깔도 같고 모양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값이 다릅니다. 이유는 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성경 민수기 14: 24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종 갈렙은 그들과 다르다" 고 말씀하십니다. 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선민의 대표로 뽑혔습니다. 같은 목적으로 일한 사람들입니다. 민족성이 같았고 목적이 같으면 모든 게 같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갈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1. 관점이 달랐습니다.
관점이란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다는 말 한 마디가 여러 각도에서 사용됩니다. 여인들이 시장을 보고 왔다고 했을 때는 시장에 다녀왔다는 말입니다. 다른 남자를 보았다는 말은 여자가 탈선했다는 말입니다. 맛을 보았다는 말은 먹어보았다는 말입니다. 체험을 말할 때에 보았다고 합니다. 매운 맛 좀 볼래. 관(�이란 분명한 견해요, 명확한 판단입니다. 삶의 철학이요, 자기의 확고한 태도입니다. 잘못 보는 것은 편견 때문입니다. 어머니들이 아들을 보는 눈과 며느리를 보는데 편견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아들이 부모에게 잘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아들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며느리 그 애가 자꾸 제 남편에게 말해 가지고 아들이 그런다는 것입니다. 혹 잘하면 모두 아들이 잘해서 효자라고 합니다. 편견을 가지고 보면 잘못 보게 됩니다. 사견도 문제입니다. 자기가 좋은 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초기에 복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평양에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성경 마태복음 16장 13절을 읽으십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라는 말씀을 읽으시니까 보신탕을 좋아하는 어느 분이 예수께서도 보신탕을 좋아하셔서 가이 사러 빌립보까지 가셨는가? 그곳에서는 개를 가이라고 한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말합니다. 이는 사견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잘못을 했습니다. 요즈음은 큰일이랍니다. 젊은 아이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그런 거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단 견이요 망견입니다. 우리는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물건을 잘 사는 사람은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집이 좋다. 그것만으로는 잘못 사기 쉽습니다. 교통이 좋으냐 주거환경이 어떠한가? 이것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불신앙인들과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면 분명히 관점부터 달리해야 합니다.
1) 미래 지향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도 아무런 생각 없이 놓은 이는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이고 고수일수록 판을 길게 보고 바둑알을 놓는다고 합니다. 최고의 고수라면 바둑의 마지막 끝 수를 보면서 한 알 한 알을 놓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이 보는 관점이 일시적이요, 찰나적이 아닙니다. 먼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만 보는 게 아닙니다. 그 날을 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상대를 볼 때에 인물이 잘생겼는가? 오늘 경제적으로 윤택한가? 만 보면 잘못 볼 수 있습니다. 장래성이 있는가? 우리는 오늘만 보고 판단하고 말하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보아야 합니다. 한국만 보는 게 아니라 중국도 보고 일본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유럽도 보고 미주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힘드십니까? 신앙생활 하는데 어렵습니까? 우리는 오늘을 보고 사는 게 아닙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 날에 면류관이 있습니다. 농사꾼의 심리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봄에 씨를 뿌리는 농부는 힘이 듭니다. 계속 땀을 흘립니다. 그러나 가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게 농부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유달리 다른 이들보다 열정을 가지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바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날을 생각하고 하는 겁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왜 멀고 먼 길 광야 길을 걸어왔습니까? 약속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나안이 보이지 아니한다고 뒤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돌아갈 힘이 있으면 앞으로 더 힘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2)관점이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열 지파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보았습니다. 갈렙은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 땅 백성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 현실만 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어린아이가 교회 건물 위에 십자가를 보면서 아버지 저 교회는 더하기(+)를 하는 가봐요. 그때 아버지는 구걸하려고 그러는가 보다 보태달라고 하는 말이지. 예전에 더하기를 보태기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관점이 믿음인가? 아닌가 다릅니다.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반응이 생기는가? 미국에서는 경찰관이 제일 먼저 나타나 수습을 한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보험회사 직원이 달려와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보상조처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먼저 견인차가 나타나고 마스크를 한 뻥튀기 아줌마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무엇을 하던지 이익을 챙기는 방향에서 보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를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다른 성도님들에게 유익이 되는 건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믿음의 관점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빌립이 본 것은 5천명을 먹이는데 배불리 먹지도 못하면서 200 데나리온이 있어도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 잘 보고 계산한 것입니다. 현실적인 관점으로는 아무런 기적과 축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안드레 같은 이는 어린아이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발 앞에 가져옴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현실주의자들 합리적인 사람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보면 절망이 없습니다. 갈렙은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3)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과 가룟 유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가 먼저 부름을 입고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가룟 유다의 가치는 돈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예수를 배신하고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분토같이 여기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이 머무는 곳 그곳은 어느 시골이나 어느 도시이든 그 순간부터 예수의 영향력을 나타내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 달라지지 아니하고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인정되어야 신앙도 성장하고 건강하여집니다. 수고하여 소득을 더 얻고 신앙적인 것보다는 세상적인 즐거움이 가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2. 말이 달랐습니다.
사람은 말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말을 통하여 전쟁이 시작되기도 하고 말을 잘 함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10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말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15:1절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열 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습니다.(민 14:1) 원망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던지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었다고 탄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3:30절에는 갈렙은 “백성들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올라가자” 라고 하였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 모습입니다. 말에도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말이 은혜롭습니다. 갈렙은 말이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1)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민수기 13:28절을 보세요.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에서 아낙 자손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31절에서는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33절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열 지파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올라가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말이 전혀 다릅니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말은 자동차의 기어와 같고 배에서는 키와 같습니다. 안 된다는 말로 작동시켜 놓았으니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안 되는 방향으로만 가게 됩니다. 같은 선택받은 지도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말에도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판적인 말을 합니다. 남을 해롭게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자칭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아니하면 물 한 방울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그때 신앙의 사람은 말합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작은 미물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 아닙니까? 말이 다릅니다.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무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좋게 하시려고 그럽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꿈자리가 사납더니 재수 없게 되어가는구먼 그럽니다.
2) 우리는 믿음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말이 문제입니다. 인본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말할 때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지금보다 더 좋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게 믿음의 말입니다.
민수기 14: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말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 말 한 마디마다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되어집니다. 믿음의 말을 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십니다. 나를 도와 주십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생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이 생산적입니다. 어느 분이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의사의 말에 간에 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혹이라는 겁니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한다. 입맛도 없고 잠이 오지 아니합니다. 한 주일만에 몸이 수척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의사가 하는 말입니다. 그건 암이 아닙니다. 물혹은 병도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얼굴색이 달라집니다. 밥맛이 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하고 낙관적인 말을 하여야 합니다. 밝은 면을 보고 말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 좋다는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3)확신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현대인의 말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무엇 같아요. 그런 것 같아요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불확실한 시대인가를 증명해 줍니다.
요즈음 자기 남편을 보고 오빠라고 합니다. 남편의 동생은 무어라고 불러야 합니까? 오빠 아닌가요? 남편이 남편인지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하지 못한 시대의 언어 사용입니다. 기도하는 분들이 기도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정말로 설교하는 분들 중에도 정말로 라는 말을 합니다. 얼마나 불확실하면 이것만은 정말이라는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우리의 말은 확신이 있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능히 이기리라.” 그 병은 하나님께서 고치십니다. 확신이 있는 말을 하는 신앙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말은 달라야 합니다.
3. 충성이 다릅니다.
열 두 사람들이 똑같이 지파의 대표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맡은 임무에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순간부터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충성해야 합니다. 거룩한 의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충성입니다. 충성하는 데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1)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요즈음 말로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회사의 사장님이 출근하면서 청소를 한다면 이는 회사를 위해 일을 하는데 자기 할 일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을 격려하고 새 힘을 얻게 해주어야 합니다. 방향을 제시하여야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지도자는 뒤로 가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가야 합니다.
2)충성은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은 하고 싶은데 할 줄 모르면 문제입니다. 전문성이란 계속적으로 하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3)불변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욕망이며 에너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할 일임에도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피하려 하고 미루고자 합니다. 연기력은 있는데 열정이 없으면 충성을 못합니다. 물론 연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많이 하는 것처럼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 것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 14:10-12절을 보면 그가 나이 85세 때에 여호수아 지도자를 찾아가 전과같이 건강하니 산지를 내게 주어 아낙자손을 쫓아 내리이다 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것이 열정입니다. 갈렙을 보세요. 여호수아와 같이 정탐하였고 동행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되었고 자기는 아무 것도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음에 섭한 생각도 들고 속된 말로 속이 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충성은 누구는 무엇이 되고 나는 못되었기에 나는 안 한다 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변함 없이 자기 임무에 충성하는 것 이것이 달랐습니다.
4)갈렙은 끝까지 충성하였습니다.
그의 충성에 대하여 신명기 1:36절에서는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순종하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여호수아 14:9절에는 “온전히 좇았으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신앙도 변함이 없어야 하고 충성도 변하지 않아야 충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차별화 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가치가 있습니다.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충성됨이 달라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게 외형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요청됩니다. 이기주의를 버리고 예수 중심의 일꾼이 필요한 때입니다. 다른 사람들, 다른 신앙인과 다른 점이 있는 특색 있는 귀한 성도가 되어 영원히 기록에 남는 복된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마음이 온전히 구별된 사람 (민 14:20-25)
어떤 여행자가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로 들어가 몸을 씻고 잠자려 하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연주소리가 들립니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자야겠는데 그 연주 소리 때문에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종업원을 불러 항의를 했습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으니 소리 좀 안 나게 해 달라”
그러자 그 종업원이 자초지정을 이야기합니다.
“손님, 내일 이 동네에서 음악 연주회가 있는데 지금 저분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무개입니다. 저분이 내일 연주를 하는데 좀 힘들더라도 참아주세요.”
정중히 양해를 구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바이올린 연주소리를 들으니 좀 전에는 그렇게 짜증이 나던 소리가 명연주라는 느낌이 들어 얼마나 듣기 좋은지 기분이 좋아졌답니다. 사람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다는 것입니다. 변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이 달라지면 환경도 달라지고 미래도 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마음,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이 마음이 사람의 모든 것을 통제합니다. 흔히 ‘성품’이 좋다, ‘인격’이 좋다하는데 그것은 전부 마음의 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하는 말이 모든 인생사는 마음먹기 달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전쟁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평화도 ‘마음’먹기 달렸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이 마음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그 중심, 그것이 뭡니까? 우리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가기준은 외모(外貌)이지만 하나님은 중심, 즉 마음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의 주인공은 ‘갈렙’입니다. 이 사람은 모세 시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모세를 따라 나온 유다지파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선택된 12명 속에 유다지파 대표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는 어떤 사람인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다시 보세요.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를 “내종”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던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온전히 따랐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른 사람, 마음이 구별된 사람” 그 사람이 갈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행동도 달랐고 언어도 달랐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누린 복도 다른 사람이 누렸던 것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가 이런 평가를 받게 된 배경은 민수기13:30절입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하나”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보고를 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능히 이긴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은 정반대 이야기를 합니다.
31절을 보세요.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합니다.
그들은 백성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합니다. 그리고는 그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고 그 땅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황을 보고 왔는데 결과 보고는 정반대였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마음이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전인격을 통제하는 센터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말도 행동도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갈렙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고 할까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기에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셨을까?
1. 그는 말씀을 온전히 좇았습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보세요.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말씀을 온전히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렙은 모세를 40년간 따르며 시중 든 사람입니다. 그의 친구 여호수아는 그 모세의 시종으로 따랐고,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자로 모세를 따랐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누굽니까?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세를 하나님 대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취급하시고 무섭게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게를 향해 돌을 들어 치려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진명시키려하자 모세가 중보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 놓고 용서를 받게 합니다.
모세를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들어볼까요? 민수기12장에 보세요.
‘미리암’이라는 모세 누이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갈대상자에 담겨져 강에 버려질 때 그 상자를 멀찍이 따라가다가 애굽 바로왕의 공주가 그 상자를 발견하였을 때 나타나 천연덕스럽게 자기 엄마를 유모로 소개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친엄마 젖을 먹일 수 있게 했던 여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미리암의 눈에는 모세는 육신의 동생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도자 모세가 구스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때 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나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시더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시더냐?”하며 비방합니다. 아마도 모세가 처신한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를 동생으로 생각하고 함부로 비방하고 험담했던 것입니다. 실상 모세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함께 비방하는 말을 하나님이 들으셨는데 그 미리암에게 무서운 벌을 내립니다. 문둥병, 나병이 들게 하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분명 모세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상하리만큼 일방적으로 모세 편을 들고 미리암을 심판하십니다. 결국 아론이 나서서 모세에게 용서를 요청했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병이 치유 받게 하십니다. 왜 아론은 건들지 않고 미리암만 쳤을까 그것도 이해가 안 되지요? 아론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해야 하기에 그냥 봐 준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이토록 일방적으로 모세편일까요?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를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에 허물이 있어도 그를 책망치 않고 미리암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오늘 갈렙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갈렙이 주님을 온전히 따랐다는 것은 갈렙이 모세를 온전히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온전히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세우신 종은 허수아비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종이 아닙니다.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은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따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습니다. ‘온전히’ 따랐다는 것이 뭡니까?
어떤 말씀이든지 순종하고 철저히 복종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하는 것은 온전히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지 않아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았습니다. 그러기에 다 이루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가 뭡니까? 온전히 따르는 사람입니다.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눅9:23절을 보세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져라”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제자가 되려면 내 생각 내 경험 내 형편 앞세우지 말고 다 내려놓고 ‘예’하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목사를 따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은 제자가 아니고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제자가 못됩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에 무조건 “예”해야 합니다. “아니요”라고 하면 언젠가는 등을 돌리게 됩니다. 가롯 유다가 그래서 떠난 것입니다.
옥합 향유사건 때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자들 주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할 때 예수님이 가만두라하시며 오히려 그를 칭찬하고 그 일을 기념하라 합니다. 그때 가롯유다가 속에서 ‘아니요’ 했단 말입니다. 성경에 없어요. 그러나 분명 아니요 했습니다. ㅎㅎㅎ 그러니 등을 돌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징이 뭔가를 보세요.
공부 잘 한 사람들입니까? 똑똑한 사람들입니까? 돈 많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평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좀 단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주님의 요구를 그저 망설이지 않고 수용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심지어 그물도 버려두고 부모도 버려두고 따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평범한 사람들을 위대한 지도자들이 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주의 종이 가르치고 명하는 것도 잘 따르시고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게 떨어지면 내 형편과 처지에 맞지 않아도 따라야 합니다. 내 능력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해도 따라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다는 말 속에는 “기쁨으로 자원하여 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할 수 없이하고, 억지로 하고, 불평하며 하며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헌신은 하나님도 거북해 하십니다.
따라서 하세요.
/나 같은 부족한 사람에게 /이런 영광을 주시다니 /황공무지로소이다/ 하고 자원하여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본인도 복이 되고 받으시는 하나님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37: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했습니다. 기뻐하여 섬기면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갈렙도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섬기고 있나요? 어떤 기쁨이 있고 어떤 감사가 있나요?
모든 섬김과 헌신에는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와 마지못해 드리는 예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왕에 예배드립니다. 이왕에 드릴 것이라면 기쁨으로 드리셔야 합니다. 옆사람 좀 쳐다보세요. 기쁨이 있습니까? 얼굴에 감사가 있습니까.
예배시간에 찬송을 드리는 것도 그렇고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배드리는 얼굴을 보면 오만상을 찌그리며 부르면 그 예배를 받으시겠나요?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마세요. 기쁨으로 드려야 하고 감사함으로 드릴 때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습니다. 어린아이는 이거해라 저것 해라해야 합니다. 그러나 권사 정도 되고 안수집사 되고 구역장, 강사, 교사 정도 되면 스스로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왜 같은 시간에 나와 예배하는데 하나님은 누구 것은 받으시고 누구 것은 안 받으시나요?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서는 받으셨나요?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과 그 제물은 안 받으신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이왕에 드리면서 억지로 드리거나 인색하게 드리면 그것이야 말로 미련한 자의 모습입니다. 기뻐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도 영광이 되고 드리는 본인도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배 누굴 위해 드립니까? 헌금, 누굴 위해 드립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요?
천만에요……. 마6:20절을 보세요.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너희를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은행에 저축은 누굴 위해 합니까? 은행장을 위해 하나요? 국가를 위해 하나요? 천만에요.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대통령을 위해 예금하나요? 정신 나간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도 자신을 위해 온전히 기쁨으로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행복해지고 받으시는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 그는 끝까지 지도자를 따랐습니다.
갈렙은 모세를 40년간 따릅니다. 그리고 모세가 죽자 그의 친구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따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동기생입니다. 가나안땅 정탐에 함께 나섰던 동기생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대권을 넘겨받습니다. 그런데 그때 갈렙은 성경 어디를 보아도 불평이 없습니다.
그도 인간입니다. 동기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데 자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불쾌하잖습니까? 아니 배가 아프잖습니까?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변함없이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시작은 좋았는데 끝이 흐지부지하고 뒤끝이 안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정치세계를 보세요. 배신 갈등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한참 대두되는 정치인들의 말 바꾸기, 자기가 처한 위치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주인공 ‘갈렙’은 시종일관 변함없이 따릅니다.
갈렙은 유다지파의 대표자입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지파 출신입니다. 그런데도 한마디 불평도 안합니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점입니다.
다만 그는 말씀의 언약대로 자기 권리는 누립니다. 과거 모세가 갈렙에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수14장에 보면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찾아와 말합니다.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모세가 맹세를 했습니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그러기에 그는 여호수아에게 당당하게 헤브론 산지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때가 85세 나이인데 아낙자손이 살고 있는 산지를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든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는데 그 특권을 버리고 오히려 험한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수아는 그를 축복합니다.
수14:13~14절을 보세요.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따라서 합시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할렐루야!
이렇게 마음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인가요?
1) 건강과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갈렙의 고백을 보세요.
수14:10~11절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85세 나이에도 여전히 강건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강건케 하셨다는 간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가 잘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 영이 건강하면 육체도 복을 받고 건강과 장수가 따르는 것입니다. 아멘?
성경을 잘 살펴보세요. 운동을 열심히 하면 장수한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새벽기도는 못 나와도 등산은 열심히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면 장수하고 건강이 찾아옵니다.
2) 믿음의 복을 받습니다.
24절 하반 절을 보세요.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가 갔던 땅이 어딥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하나님이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땅을 12명이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12명중 10명은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그 땅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3) 자손도 복을 누립니다.
24절 하반 절에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그렇습니다. 부모가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고 기뻐하며 순종하고 살면 본인도 믿음의 복을 누리지만 그 자손도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우리 당대에도 복을 주시지만 우리 후대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당대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우리 후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약속한 복을 400년 후에 후손이 누리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는 우리가 이렇게 살지만 우리 후손의 100년 후 200년 후는 어떨까요? 우리가 짧은 50년 세월 만에 이렇게 선진국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100년, 그리고 200년 후에는 우리나라는 어찌될까요?
아마도 세계 최강대국중 하나라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왜죠?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절대주권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앞에 어떤 세력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앞에 문제를 비관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시고 하나님 절대 주권적 신앙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복이 없습니다.
로마서 말씀처럼 마음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이 좋고 성품이 좋으면 그러면 우리 앞에 놓인 여리고도 문제가 안 됩니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지 여자라 하잖습니까?
마음이 여호와를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온전히 구별된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 앞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