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은 이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일각에서 또라이, 돈키호테, 미친놈으로 불린다. 이런 또라이가 1990년 10년 동안은 ‘혜성과 같이 나타난 별’, ‘장안의 지가를 높인 사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사람’으로 통했다. 조중동은 물론 수많은 신문에 칼럼을 썼다. 그래서 생전 알지도 못하는 김대중이 사람을 집으로 보내 꿀단지와 금일봉을 보내면서 아태재단 강사로 초청했다.
1994년에는 김영삼이 전쟁난다며 라면을 사재라 했다. 하지만 필자가 중앙일보에 2회로 연재한 칼럼을 보고 사람들은 라면 사재기를 중단했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라 큰 업적이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장안의 지가를 높이고 있다고 칭찬했다. TV 프로에 필자가 나온다 예고가 되면 시청자들이 쏠렸고, 아무리 복잡한 사회적 이슈가 있어도 지만원이 나타나면 간단하게 “땅땅땅” 결론이 난다고들 했다.
1991년 KBS2 김창근 PD가 필자를 “인생 이얘기 저얘기”에 초청하여 60분 동안 필자의 저서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를 소개했고, 필자가 쓴 “멋”(지금의 나의 산책세계 또는 뚝섬무지개)을 읽고 거기에 나타난 인물 세 사람을 필자 몰래 수소문하여 ‘깜짝 쇼’식으로 만나게 해주었다. 그 사례가 인기를 얻게 되자 이후로는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로 발전했다. 며칠 전 그 김창근 옛 PD로부터 전화가 왔다. 두 사람은 너무 반가워 오랜 동안 대화를 했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순진한 학자”였다는 것이 그가 필자를 본 처음 인상이었다고 했다. 서울에 오면 대포 한잔 하자 했다.
1991년 필자가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처녀작을 냈을 때 필자는 그야말로 사회적 프리마돈나요 시대적 총아가 되었다. 그 당시의 수많은 독자들이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 있을 것이며 그들은 지만원이라는 신선했던 사람이 어째서 극우 또라이가 되었는지 의아해 하면서도 가슴 아파할 것이다.
필자는 사회적 또라이, 미친놈으로 인식될만 했다. 몇 개만 기억한다 해도 지만원이 지금까지 버텨온 것을 기적처럼 느낄 것이다. 필자의 풍파 인생은 중령시절부터 시작됐다. 중령과 대령 시절, 필자는 홍릉에 있는 국방연구원에서 국방자원의 효율화 분야를 연구하는 간부였다. 필자가 연구소에 들어간 시점은 1981. 7월경, 그 다음해 초부터 조용했던 군에 일대 회오리바람이 잠잘 날 없었고, 그 회오리바람은 모두 필자가 일으켰던 바람이었다.
예산을 다루던 군의 간부들, 무기체계 구매를 담당하는 간부들, 군수분야 간부들, 방공포, 레이더, 작전분야 간부들, 조달본부, 원가계산 담당자들, 수리부속구매관들, 계약을 주관하는 간부들 모두가 필자를 미워하고 비난했다. 지금도 군수부대 사람들은 필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금단의 문 뒤에 감추어진 병리현상들과 비밀들을 겁 없이 파헤쳤다. 좌충우돌, 그야말로 겁 없는 사나이, 풍운의 사나이였다. 필자의 연구결과에 따라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전국적으로 예산개혁, 군수개혁, 율곡사업 개혁을 주도 했고, 필자는 전군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개념에 대해 강의를 했다.
필자를 ‘국보’라고 극찬하는 군의 어른들도 있었지만, ‘문제아’라며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드디어 공군이 휴즈사로 부터 구매한 방공자동화 사업이라는 금단의 문을 부숴버렸다. 1975년부터 당시 2억 5천만 달러에 구매한 장비를 25달러 가치도 없는 폐물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 보고서는 보안사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이는 군에 그야말로 핵폭탄 급 충격을 주었다.
1987년 윤성민 장관에서 육사11기 이기백 장관으로 바뀌었다. 당시 공군총장 김인기는 이기백 국방장관에게 가서 지만원을 택하던지 공군을 택하던지 택일을 하라는 최후통첩 식 주문을 했고, 그로부터 필자는 연구소를 떠나 국방대학원 교수로 가라는 압력을 받았다. 필자의 눈에 그 당시 무기 구입을 관장하는 공군 장군들은 도둑놈들이었다. 지금 김상태라는 인간을 보자. 그는 공군총장을 지냈고, 성우회 회장을 지난 81세의 노인이다. 이런 인간이 10여년 동안 외국 무기업체에 우리의 무기조달계획을 훔쳐 팔아먹다 덜미를 잡히지 않았는가?
필자는 이때가 군을 그만둘 시기라 생각하고 과감하게 전역지원서를 냈고, 1987년 2월말 예편을 한 후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모교에서 교편을 잡는 것으로 인생의 길을 바꾸었다. 1989년 말에 귀국하면서부터 “영원한 자유인”을 표방하며 저술, 강연, 방송, 기고 등으로 한 10년간 아주 순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면서 이 사회에 수많은 표현들을 해왔다.
“70만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 처녀작이었는데 이 책은 우리사회에 엄청난 충격차를 던졌다. 모든 언론들이 ‘신선한 충격’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필자는 일약 유명해지기 시작 했다. 율곡사업 이라는 금단의 문을 근본부터 부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지적된 비리 메커니즘이 지금도 똑이 자행되고 있다. 오히려 지금이 더 썪었다.
그 후 지금까지 필자는 수많은 금단의 문을 부수어 버렸다. 박정희를 짓밟아야 인정을 받던 시대에 박정희를 존경한다, 숭배한다며 띄웠다. “문서 공개할수록 박정희는 빛난다.” 이 글은 아마 두고두고 고전으로 인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당하게 격상돼 있던 김구를 빈 라덴 같은 사람이라 격하했고, 부당하게 격하돼 있는 이승만을 추켜올렸다.
민주화 세력을 가면을 쓴 빨갱이 공산세력으로 규정했다. 김대중을 김정일에 충성하는 빨갱이라 했고, 2001년 SBS 심야토론에서는 청와대와 군에 빨갱이들이 들어차 있다고 하여 진행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제는 나서야 한다.” “김대중 정부, 적과의 내통을 의심한다.” (2001. 2. 한국논단) 누구도 할 수 없는 이런 일,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이런 일을 필자가 했다.
5.18 역사를 뒤집었다. 민주화 세력이라는 빨갱이들이 민주화의 성지를 공격당하자 '지만원은 미친놈'이라며 온 사회에 방송을 했다. 일제시대의 일본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언급했다. 양반들은 대청마루에 있고, 하인들은 양반집 일을 하는 세상에서 누가 발전소를 세우고 철도를 놓는다는 말인가? 당할만 해서 당한 것을 놓고 강한 자만 욕을 하면 부끄러운 일 아닌가?
위안부의 왜곡된 아성도 허물었다. “위안부”, “정신대” 이런 말들이 나올 때마다 한국인들은 흥분부터 한다. 2005년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위안부는 양 색시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가 혼이 났다. 그의 글 역시 거두절미한 언론의 희생물이었다.
여배우 이승연이 위안부 역할을 하느라 누드 사진을 찍었다해서 벼락 맞듯이 당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라면 아예 손사래를 치며 멀리 하려 한다. 위안부 문제 역시 예전의 5.18처럼 금단의 구역이 되어 있었다. 그런 금단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곳일수록 문제가 많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위안부에는 엄격히 3가지로 구분돼 있지만 필자를 포함해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를 구별하지 못해 왔다.
(1) “일본군위안부”: 일본인들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일본에 반항하던 집안의 규수들, 시집을 미처 가지 않은 규수들이다. 밥을 짓다가, 김을 매다가, 빨래를 하다가 또는 학급에서 공부를 하다가 잡혀간 규수들이다. 이 여인들이야 말로 가장 억울하게 잡혀가 일본군인들에게 윤간을 당한 여인들이며, 그래서 일본을 증오하는 마음이 뼈에 사무쳐 있다. 일본의 통계나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위안부”는 20%, “종군위안부”는 80%를 차지한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부대 주변에는 돈을 벌기 위해 나선 일본 창녀들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로 끌려온 한국 여성들은 돈도 받지 못하면서 성을 제공했다.
(2) “종군위안부”: 이들은 살림이 극히 어려워 스스로 군표를 받고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 창녀라 한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했던 말은 바로 이런 측면을 말한 듯 하다.
(3) “정신대”(挺身隊): 이는 ‘여자근로정신대’의 준말로, 15-40대에 이르는 근로여성으로 돈을 받고 간호사, 군수공장 등에서 일한 여성들이다.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나이 든 남성들도 있다. 끝까지 정조를 지킨 사람, 때에 따라 몸을 팔기도 한 사람, 또는 ‘종군위안부’로 변신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정신대는 근본적으로 위안부와 다르다. 정신대를 위안부로 동일시하는 것은 정신대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이 세 부류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일본군위안부”들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일본군이 한국 여성 20만을 강제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았다고 하면 이는 정직하지 못한 한국의 수치다. 당시 12개 동양국가들이 일본에 점령됐는데 모든 나라들에서 한국처럼 위안부가 동원됐다면 일본군 1명에 위안부 3명씩은 거느리고 다녔을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도 한국인의 양심을 일깨우려 했다.
이어서 2005년 3월의 한승조 사건, "지만원이 위안부는 은장도로 자결했어야 했다고 강연했다"는 SBS의 사기보도 행각, 이 사기보도 행각으로 SBS는 필자에게 2,500만원을 물어주는 수모를 당했다. 이런 SBS가 또 앙심을 먹고 2008년에 문근영에 대해 사기보도를 했고 재판결과 SBS는 또 반론보도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능력은 없으면서 오직 대통령 한번 해보자는 천하의 거짓말 장이요 비겁자인 이명박이 거느린 고대출신 검사 윤웅걸에 걸려들어 감옥까지 갔다.
“구글에서 ‘이명박 출생비리’를 검색하면 50만개의 글이 뜨고, ‘이명박 병역비리’를 검색하면 35만개의 글이 뜬다. 출생비리는 어머니가 일본여자라는 것이고 병역비리는 군의관과 결탁하거나 속여 면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이 벌써 4사람이나 고소를 당했으니 우리 회원님들은 이런 글 쓰지 마십시오”
이런 글로 감옥에 갔다. 판사들은 같은 내용이라도 파괴력이 있는 지만원이 요약하면 범죄가 된다는 희한한 판결문을 썼다.
이명박은 지만원이라는 군사평론가를 희생시켜 깨끗하게 신분 세탁을 했다. 아무리 필자를 희생시켜 대통령이 됐다 해도 그가 대통령 노릇을 잘했다면 필자는 그 희생을 보람으로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광화문 촛불 시위가 나서 국가를 뒤흔들어도 가만, 제주도의 불법을 보고도 가만, 부산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고도 가만, 좌익들이 시위만 하면 숨죽어 지내는 특성이 있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에도 가만, 검찰과 국회가 힘으로 맞대결하면서 국가적 추태를 보여도 가만, 복잡한 일만 있으면 저절로 문제가 소멸되기를 문 뒤에서 기다리는 특성이 있다.
북한이 우리 병사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연평도에 보란듯이 포를 날려도 이를 수모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김정일을 만나려 별 짓들을 다한다. "북한사람들에는 사과처럼 보이지 않고, 남한 사람들에는 사과로 보이게하는 그런 문장을 만들어 사과의 장애물을 극복"하자?
그러면서도 대불공단에 가서 전봇대를 뽑고, 일산 경찰에 달려가서 눈을 흘기고, 원전 수주에 나타나 내 업적이라 자랑을 했고, 일본 국회의원이 울릉도에 온다 하자 ‘입국시키지 말라’며 촐랑대고 나선다. 한 마디로 대통령 할 수 있는 능력이 절대 부족한 천민근성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하얀 들쥐 게으른 들쥐들은 이런 이명박에 대해서는 대통령이라 하고, 진실을 바로 알려주는 지만원은 또라이라 말한다. 이들은 게으름에 대해 ‘부끄러운 줄 알아야’할 것이다.
-2011.8.8.지만원 http://systemclu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