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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산사순례 – 유홍준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위원회는 바레인에서 개최된 제42차 위원회에서 우리나라 법주사·마곡사·선암사·대흥사·봉정사·부석사·통도사 등 7곳의 산사를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도 아는 송광사·화엄사·봉암사·범어사·동학사 등은 빠져있다. 왜일까? 세계유산 심사기준에는 10가지 항목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 핵심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뛰어난 보편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사는 세계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불교 유산으로 인도와 중국과도 다르고 일본과도 다르다. 인도·중국은 사암 지대가 많아 석굴이 등재되었고, 일본은 평지 정원으로 인해 사찰과 정원을 묶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불국사와 해인사는 따로 세계유산으로 이미 등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제외된 것인데, 신라말 도의선사에 의해 선종이 전래되면서 전국 각지의 명산에 선종 사찰로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이 개창되었는데, 이들 선문은 이름 앞에 산 이름을 내세울 정도로 산사로서 뿌리를 내렸다. 하나같이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으나, 조선시대 폐불정책으로 거의 폐사되기에 이르렀고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 후대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로 인해 구산선문 산사는 이번에 한 곳도 세계유산에 오르지 못했다. 화엄사의 경우 일주문 안에 템플스테이 건물이 있다는 것도 제외 이유였다.
* 구산선문 중심사찰
¤ 실상선문 홍적, 남원 실상사(實相寺) ¤ 가지산문 도의, 장흥 보림사(寶林寺)
¤ 사굴산문 범일, 강릉 굴산사(窟山寺) ¤ 동리산문 혜철, 곡성 태안사(泰安寺)
¤ 성주산문 무염, 보령 성주사(性柱寺) ¤ 사자산문 철감, 영월 興寧寺(法興寺)
¤ 회양산문 도현, 문경 봉암사(奉岩寺) ¤ 봉림산문 현욱, 창원 봉림사(奉林寺)
¤ 수미산문 이엄, 해주 광조사(光照寺)
저자 유홍준 선생도 말했듯이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문화유산이고 문화다. 한때 그의 저서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들고서 답사 다닌 적도 있지만, 실제 답사를 가더라도 언제나 쫓기듯 겉만 훑고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를 따라가게 될 답사처도 아마 내가 몰랐던 것을 아는 계기는 될 것으로 기대해 보고, 또 너무 만만한 고향의 관룡사 등은 생략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미리 해 본다.
◈ 풍광과 어우러진 부석사(浮石寺)
많은 사람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소백산 풍광을 이야기하고, 창건주 의상과 선묘의 전설을 신기해하고 절 이름의 내력이 담긴 부석을 보고 그것을 어루만져도 보는 것 같은데, 부석사는 뭐니 뭐니 해도 무량수전이 아닐까 싶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1016년(현종7년) 원융국사가 중창할 때 지은 것으로 창건 연대가 확인된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주심포로서 아주 간결하다. 이미 최순우 선생이 말했지만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수덕사 대웅전처럼 필요미(必要美)에서 극치를 보여준다. 기둥머리 지름 34㎝×기둥 밑단 44㎝× 가운데가 49㎝로서 탄력과 곡선미는 수치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요즘 흔하게 보이는 카페 지붕들처럼 무량수전의 내부는 천장을 막지 않고 부재들을 노출 시킴으로써 기둥·들보·서까래가 리듬을 연출하듯이 하고 있고, 외부에서 볼 때보다 넓은 공간에 압도되기도 한다. 또 여기에 모셔진 아미타 불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불(塑造佛)로서 도금을 하였으며 전형적인 고려시대 불상으로 개성이 강하고 건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부석사가 다른 절과 다르다면 다른 특징 중 하나가 산신각과 닯은 선묘각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의상과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지금의 수원 근처 토굴에서 하룻밤 유숙하다가 원효는 거기서 해골의 물을 마시고는 깨친 바 있어서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은 당주(지금의 아산 남양)를 거쳐 등주에 도착해 한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에 선묘라는 딸이 의상에게 반했으나 의상의 마음을 얻을 수 없자, “세세생생 스님께 귀명하여 스님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의상이 종남산 지엄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선묘의 집에 들러 인사드리고 배를 탔는데, 이때 선묘가 옷가지 등을 전하려 했으나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선묘는 선물상자를 바다에 던지고 ‘이 몸이 용이 되어 저 배를 무사히 귀국케 하겠다’고 소원하고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로 귀국한 의상이 전국의 산천을 섭렵하던 중에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선묘 혼의 도움을 받아서 절을 세우고 화엄경을 강의한 곳이 바로 부석사다. 그런데 이런 전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전하는 곳은 일본 교토의 고잔자(高山寺)다. 12세기 가마쿠라 시대 묘에(明惠, 1173∼1232)스님이 제작한 것인데 정식 이름은 <의상전·원효전 도해>로 묘에 스님은 조잔지 아래 젠묘니지(善妙尼寺)를 세우고 선묘와 의상 관련 자료를 봉안했는데,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는 없다.
그런데 부석사는 의상대사 이후 큰 스님이 배출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석사 호방스런 기상이 그윽한 진리 탐구를 거추장스럽게 하거나 쩨쩨하게 느껴지게 할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봉암사 지증대사, 태안사 혜철선사, 성주사 무염화상이 모두 부석사 출신으로 구산선문의 개창주들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지. 부석사에서 공부하고 떠났지 머물지는 않았다는 것은 결국 부석사는 수도처는 될망정 상주처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말일까. 절집도 사람 사는 집과 마찬가지로 살기 편한 집과 놀러 간 사람이 편한 집이 다르다는 것 아닐까?
◈ 고찰의 품격 봉정사(鳳停寺)
얼마 전에 타개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녀감으로써 유명해지기도 한 봉정사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이 있다. 창건 연대로 보아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절집이 예산 수덕사 대웅전으로 1308년 창건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무량수전이 1376년에 중창되었다고 되어 있어서 창건은 이보다 1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량수전을 최고의 건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1972년 봉정사 극락전을 중수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상량문에서 ‘봉정사는 지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는 듯하여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 절은 옛날 능인대덕이 신라 때 창건하고(…) 이후 원감, 안충 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섯 차례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공민왕 12) 용수사 대선사 축담(竺曇)이 중수했으나, 다시 허물어져 수리하였다.’고 하였다. 창건 연대는 밝히지 않았지만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서 중수했다는 기록이다. 13년 앞서 중수했다고 가장 오래된 건축이라 할 근거는 되지 않지만, 극락전은 고구려식 건축으로 통하고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복화반(覆花盤-꽃잎을 뒤집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간결하면서 강건한 인상을 준다는 데 있다.
극락전의 아름다움은 창방 위의 복화반도 그렇지만 부재와 천장이 남김없이 다 드러나도록 결구가 마치 가벼운 변화의 리듬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붕이 높지 않아 안정감을 주고 야무진 맛을 풍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영훈* 선생은 “앞의 평주에서 고주로 대들보가 걸리는데 이 대들보를 다듬은 방식이 흔히 보는 살림집 것과는 다르다. 청자의 매병처럼 보의 어깨를 넓게 잡고 차츰 내려오면서 홀쳐서 홀쭉하게 하고 굽에 이르러서는 직선으로 다듬었다. 그래서 항량(缸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항아리 보는 주심포계의 구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이며 이것은 12세기 보 형태로 여겨진다.”고 했다.
*신영훈(1935년∼2020) 1959년부터 국가지정 국보·보물 보수에 종사했고, 1962년부터 1999년까지 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 산사의 미학을 보여주는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그렇게 뛰어난 풍광에 파묻힌 절도 아니고 특별한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그저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나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절이다”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떨어지는 찰라의 순간을 즐기는 뒷맛이 오래 남는 곳이라고나 할까. 들입에 있는 영산의 만년교를 닮은 승선교와 바로 절 앞에 있는 삼인당이라는 연못도 영산의 연지를 닮아 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거기에 전나무 한그루와 베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연못을 만든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삼인당이라고 이름 지은 데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세 가지 새김(印)으로 마음속에 불법의 원리를 각인한다는 뜻이다.
선암사는 한국불교 대표 종단이랄 수 있는 조계종이 아니라 태고종으로 조계종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데, 이유가 무엇일까? 2008년 조사에 따르면 조계종 사찰은 2,501개 승려 1만 3천여 명, 태고종은 승려 8천여 명이다. 태고종은 출가하지 않더라도 사찰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어서 조계종과 다르다. 태고종 사찰은 선암사 외에 서울 신촌의 봉원사, 완주 봉서사 등이다. 불교의 100여 개 종단 중에서 유독 조계종과 태고종 사이 분규가 빈발한 데 그 원인은 1954년의 법란 때문으로, 선암사의 소유권을 놓고 싸운 물리적 다툼이 법정으로 옮겨져 이후 30여 년 지난 지금까지 결말이 나지 않고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통일신라 시대 불교는 교종 5교뿐이었다. 하대 신라에 도의선사가 선종을 들여와 구산선문이 성립되면서 고려시대 5교 9산으로 나누어졌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천태종을 가져와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또 하나의 종파만을 낳았다. 이어 지눌(1158∼1210)이 송광산 길상사에서 정혜결사를 일으켜 통합을 부르짖자 희종이 이를 지지하여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길상사를 수선사(지금의 송광사)로 이름을 내려주기도 했고, 고려말에는 태고 보우(1301∼1382)가 임제종을 이어받아 5교 9산을 단일 종단으로 통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불교 탄압 속에 선교양종 모두 맥을 쓰지 못하고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임란 이후에는 무종무파가 하나의 전통처럼 되어 있었다. 1908년 일제가 통합원종을 발족해 총무원을 두면서 이회광을 대종정으로 추대하였으나, 영호남 승려들이 송광사에 모여 임제종을 세울 것을 결의하고 선암사 경운스님을 종정으로 모셨으나, 나이 많아 젊은 한용운이 종정대리를 맡으며 서울의 원종과 맞서 ‘조선불교조계종’을 표방하면서 한국불교의 법맥을 고수했다. 해방과 더불어 이들이 태고사(현 조계사)에서 조선불교 전국승려대표자회의를 열어 교헌을 제정하고 중앙총무원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불교계를 정화를 위해 7차례에 걸쳐 대통령 유시를 내려보내면서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가 시작되었다.
대통령 유시에 따라 선암사 대처승은 공권력에 의해 절에서 쫓겨나고 비구승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쫓겨난 승려들이 돌아와 서로 주인이라며 대치했다. 각목 대결이 벌어졌고 동조한 스님들이 원정을 와 아수라장이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1962년 2월 비구·대처 통합을 위한불교재건비상총회가 열렸으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월 비구측은 단독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을 발족해 지눌을 종조로 삼았고, 대처 측은 1970년 태고 보우를 종조로 한국불교태고종을 세웠다. 이것이 태고종의 시작이다.
불교 종단은 소의경전이 무엇이고 법맥과 종조가 누구냐에 따라 종단이 달라진다. 조계종이든, 태고종이든 소의경전은 『금강경』,『화엄경』으로 차이가 없고 법맥도 임제종 선을 맥으로 하므로 같다. 다만 종조는 조계종이 보조국사 지눌을 모셨자 혁신적인 종단 발족에는 동의하면서도 뿌리인 종조를 바꿀 수는 없다며 여전히 태고를 종조로 생각하는 승려들이 많았다. 이에 비구측 종정인 송만암 스님은 환부역조(還付易祖)할 수 없다며 정화운동에서 손 뗀 일도 있었고,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스님도 우리의 종조가 누구냐는 질문에 “두말할 것 없이 태고 스님”이라고 하기도 했다. 결국 조계종은 1994년 종헌을 개정 공포하면서 “본 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종맥이 면면부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조계종에서 태고종이 시조로 보는 태고 보우를 중흥조로 보는 데서 시비가 시작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속인인 내가 볼 때는 역시나 재산싸움이 아닐까 싶다.
선암사를 언제 다시 답사한다면 매화 피는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무우전 옆으로 홍매와 백매가 어우러져 더욱 흥치를 더하는 고목이 된 매화나무와 매화꽃 때문이다. 저자가 문화재청장으로 있으면서 이곳의 매화를 포함해서 강릉 오죽헌 율곡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 구례 화엄사 백매 등 네 곳을 천연기념물(488호)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600년이 넘은 산청의 정당매는 왜 빠졌을까.
◈ 해남의 고찰 대흥사(大興寺)
대흥사에는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보물 320호)과 두륜산의 정상 바로 아래 있는 북미륵암의 마애불(국보 308호)과 삼층석탑(보물 301호) 등이 모두 나말여초 양식임에도 안내판에는 아도화상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해남 백련사에서 정약용과도 가까이 지냈던 혜장스님이 그것이 아니라고 하고, 초의선사도 「대둔사지」를 쓰면서 “실록이 아닐까 두렵고, 옛 초석과 섬돌이 하나의 자취도 없으니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라며 대흥사 설화를 부정했는데도 버젓이 그렇게 안내되어 있다는 것은 논증을 버리고 허장성세로 허구를 말하는 것이니 세월이 흐른다고 모든 것이 발전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듬절’이라고 부른 보잘 것 없던 절이 ‘대흥사’로 일약 변신하게 된 데는 임란 이후에 서산대사(1520∼1604)의 유언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제자 사명당과 처영에게 당신의 의발을 두륜산에 둘 것을 유언하면서, 두륜산의 유지(遺志)를 설명한 뒤에 서산은 자신의 영정 뒷면에 “80년 전에는 내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하는 마지막 법어를 적고는 결가부좌한 채로 입멸했다. 향년 85세 법랍 67년이었다.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다비하여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에, 영골은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하고 금란가사와 발우는 대흥사로 가져왔다. 이후 대흥사는 크게 일어나 민간신앙으로 불교가 일어났던 시대적 추세에 힘입어 수많은 당우가 세워졌다. 대웅보전은 1667년 심수 스님이 3년간에 걸쳐 중창한 조선 후기의 전형적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현재도 크고 웅장하여 고찰의 면모를 보여준다. 1669년에는 서산·사명당·처영 등 3분을 모신 표충사가 지어지고 정조가 표충사 사액을 내렸다. 1811년에는 큰불이 나 대부분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2년 후 완효 스님이 다시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대흥사는 가람 배치도 계곡을 끌어안고 있어 우수하지만, 정조의 표충사 현판을 비롯해 조선 후기 서예의 집약을 보여주는데, 대웅보전·천불전·침계루는 원교 이광사, 가허루는 창암 이삼만,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 글씨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면서 초의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치자 초의가 안절부절 원교 현판을 내리고 추사의 글씨로 바꿨다. 그러나 7년 3개월 유배 중 부인이 죽고 회갑을 맞고 외로움을 맛보고 돌아오면서는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 못 보았어”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귀양살이 중에 깨달은 것일까. 지금도 대웅보전은 원교의 글씨가 그 옆 무량수각에는 귀양 가며 썼다는 추가 글씨가 걸려있다. 글씨를 비교해 보면 원교에서는 빳빳한 화강암의 골기가, 추사의 것에서는 탕수육 같은 맛과 멋을 느끼게 하는데 그것은 보는 사람의 느낌이 아닐까? 예술이란 보는 사람의 느낌이기에 말이다.
대흥사에서 두륜봉으로 40분쯤 걸어 올라가면 일지암을 만나는데 한국 다조로 불리는 초의가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은거에 뜻을 두고 거기 암자를 짓고 두문불출하며 지낸 곳이다. 하지만 동갑내기였던 추사와는 그 우정이 지극정성하여 추사가 우정을 예술로 승화하여 추사체의 백미로 꼽히는 ‘명선’(茗禪-차를 마시며 참선에 든다) 같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 글씨에 대해 저자는 ‘웅혼한 힘과 엄정한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필획의 변화가 미묘하게 살아 움직이는 추사 예서체 진수가 들어 있다’고 했다. ‘명선’ 옆에는 작은 글씨로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과 노아(중국의 유명한 차 이름)보다 덜하지 않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하는바, 백석 신군비(한나라 때 비석)의 필의로 쓴다”고 하고 ‘병거사예(病居士隸)’라고 했는데 추사 말년의 대표작이다.
◈ 동백꽃과 선운사(禪雲寺)
고창 선운사 하면 동백꽃과 꽃무릇이 생각나고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가 생각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기생 매창이 기생되기 전 11살 때 지었다는 ‘백운사’라는 시가 먼저 생각난다.
걸어서 백운사에 오르니
절이 흰 구름 사이에 있네
백운사 스님요 흰 구름은 쓸지 마소
내 마음은 흰 구름과 같이 한가롭다오
그렇다면 선운사의 원래 이름은 백운사였다는 말인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다.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 24년(577) 때 검단선사가 신라 의운조사와 협력하여 진흥왕의 시주를 받아 개창했다고 하나, 믿기는 좀 그렇다. 선종이 신라하대에 들어온 것이고 黔丹禪師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이 고장을 검단리라 하고 해방 전까지도 이곳 염전마을 사람들이 보은염을 선운사에 시주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도솔암 가는 길에 칠송대라는 벼랑이 있고 바위에 40m가 넘는 거대한 여래상이 새겨져 있는데 위용은 장대하지만 결코 원만한 인상이거나 미소 띤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니다. 우람하고 도발적인 인상에다 어떤 개성을 보여주는 것은 고려시대 지방호족들이 발원한 부처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여래상 머리 위에는 닫집이 지어져 있었던 것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으며 인조 26년(1648) 붕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도솔암 암각여래상이 지방호족의 자화상적 이미지라면 석굴암의 석가여래좌상은 통일신라가 국가 이상을 반영한 근엄함과 권위의 화신일 것이고, 조선 성종의 작은 아버지 덕원군 후원으로 선운사를 중창할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지장보살상은 사대부적 이상미를 반영한 것 같은 학자풍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지장보살을 가리켜 “꼭 경기고 나온 보살님”같다고 한단다. 보물 279호와 280호다.
◈ 개암사(開岩寺), 내소사(來蘇寺)
개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말사로 634년(무왕35)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676년(문무왕16)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서 우금암(禹金巖)밑 굴속에 머물면서 중수하였다.
1276년(충렬왕2)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元曉房)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쪽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쪽에는 팔상전(八相殿), 서쪽에는 응진당(應眞堂)과 명부전(冥府殿)을 지었으며,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楞伽經)』을 강독하여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이 때문에 산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414년(태종14) 폐허가 된 것을 선탄(禪坦)이 중창하였으나, 임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당우가 소실되었다. 1636년(인조14) 계호(戒浩)가, 1658년 밀영(密英)과 혜징(慧澄)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728년(영조4) 법천(法天)·찬견(贊堅)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 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을 중건하였다. 1737년 시왕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783년 승담(勝潭)이 중수하였다. 1913년 화은(華隱)이 선당(禪堂)을 짓고, 1960년 대웅보전을 복원하였다. 1993년 응향각을 복원하고, 이듬해 일주문을 짓고 응진전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보전과 인등전·응향각·응진전·일주문,월성대, 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로 황금전이 곧 대웅보전이다.
절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괴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한다. 또한 이 바위를 중심으로 한 주류성(周留城)은 백제 유민들이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옹립하고, 3년간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던 사적지기도 하다. 유물로는 1689년(숙종5)에 조성한 개암사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과 「중건사적기」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개암사(開巖寺))
내소사는 절보다도 입구 전나무 숲이 일품이다. 일주문 안으로 600m에 이르는 숲길을 걷노라면 누구나 심호흡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겉으로 봐서는 수백 년 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사실은 해방 후에 조성된 것이라고 하니 그때도 이런 안목을 가진 어떤 스님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감개가 무량해진다. 꽃창살 무늬가 아름다운 대웅보전은 ‘그곳에 이르기 어렵다’는 범어인 능가산의 암벽을 배경으로 한껏 날개를 편 보습이다. “강진의 무위사는 한적하고 소담한 만큼 스산하고 처연한 분위기가 서려 있어 거기에 부슬비라도 내리면 음울한 심사를 주체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내소사는 그런 처량기가 조금도 없다”저자 유홍준 선생의 말이다. 그것은 능가산이 병풍처럼 받쳐줘 의지하는 바가 미덥고 높다란 돌 축대 위의 팔작지붕 다포집이 차라리 평화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꽃창살은 오색단청이 아니라 나무결이 그대로 더러나게 한 소지(素地)단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예산 수덕사(修德寺)와 개심사(開心寺)
차령산맥이 서해로 흐르면서 마지막 용트림한 곳이 가야산(678m)이고, 가야산을 둘러싸고 예산·서산·홍성·태안 그리고 당진·아산이 있어서 이를 ‘내포’라고 부른다. 여기는 농사도 잘될 뿐 아니라 안면도·황도의 조기잡이, 간월도의 어리굴젓 등은 풍요의 상징이다. 기암절벽 없이 낮은 구릉이 굽이치는 평화로움은 일상과 평범함 속의 아름다움이라 할만한데, 하지만 이곳에는 ‘깡’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최영장군과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 이순신 장군, 추사 김정희, 구한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 김대건 신부.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김옥균, 상록수의 심훈, 남로당 박헌영, 만해 한용운, 화가 김응로… 이들 모두 쉽지 않은 분들로 제명을 다 하지 못해도 의를 다한 분들이다. 이는 아마도 가야산 정기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수덕사는 예전의 멋은 사라지고 무술영화에 나옴직한 돌계단으로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그전 마당이 너른 수덕사만을 기억하지만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되어 창건 연대가 정확한 대웅전은 화려하고, 장엄하고 흔한 중국계 다포계 팔작지붕이 아니고 주심포에 맞배지붕인데 간결함과 단순성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배흘림을 하고 있어서 안정감을 준다. 그리스 신전도 이런 형식으로 그것을 ‘엔타시스’라고 하는데, “기둥들은 탄력성있게 보이며, 기둥 모양이 짓눌린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 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라고 서양 건축가 ‘곰부리치’가 말했다.
개심사(開心寺) 오르는 길은 흙과 돌로 되어 있는데 그 길이 자그마치 800m나 되어 오르다 보면 열지 말라고 해도 마음이 열릴 것이라고 한다. 경내에 들어서면 연못이 앞에 있고 가운데로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어 운치를 더한다. 더구나 봄철에는 연못 주변으로 왕벚 또는 겹벚꽃이 장관을 이루는데, 여기 아니면 볼 수 없는 명품이다. 개심사는 산신각에 올라서 아래 경내를 굽어보는 것은 답사의 절정으로 산신각 오르는 길에 댓돌에 고무신 하나 가지런히 놓은 허름한 스님 방이 한 채 있는데, 안에 스님이 계신가 하고 가까이 가보면 “이제 그만 →”라는 표시가 있다. 화살표 방향으로 가라는 뜻이다. 이곳은 한때 경허스님이 거처한 곳이란다. 저자는 어느 해 여름 우연히 여기서 주지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물어서 그저 좋아서 자주 다닌다고 답하자 주지스님 왈 “어디 가서 좋다고 소문내지 말아요. 사람들 몰려들면 개심사도 끝이에요. 사람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죠?”하더란다.
◈ 부여 무량사(無量寺) 보령 성주사(聖住寺)
매월당 김시습이 만년을 보낸 무량사는 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성주사를 창건한 무염화상이 창건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한다. 무량사 앞마당의 오층석탑은 한눈에도 정림사지 석탑을 빼닮았는데 동시대의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석탑 앞 석등은 탑에 비해 너무 적다는 인상을 주는데 오히려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게도 한다.
완주 화암사, 장성 백양사에도 있는 우화루(雨花루)라는 건물이 무량사에도 있는데 부처님이 설법할 때 우화, 즉 꽃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기인하는 것으로 설법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이 우화루 주련은 임란 병화를 겪은 뒤 무량사를 중창한 진묵대사(1562∼1633)의 시로 그 시적 이미지가 세상에서 가장 스케일이 크지 않을까 싶다.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산은 베게
(天衾地褥山爲枕 - 천금지욕산위침)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독
(月燭雲屛海作樽 - 월촉운병해작준)
크게 취해 거연히 춤을 추고 싶어지는데
(大醉遽然仍起舞 - 대취거연잉기무)
장삼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되네
(却嫌長袖掛崑崙 - 각혐장수괘곤륜)
보령의 성주사는 당일치기로 갔다 오고 830㎞를 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산골 너른 마당에 법당과 회랑은 사라졌지만 회랑자리가 정연하고 석탑이 넷, 석등이 하나, 비각이 하나 자그만 석불이 하나가 버티듯 서 있어서 마치 설치미술을 보는 듯 감동을 주는 성주사지다.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하나로 김양이라는 보령지역의 호족과 낭혜화상 무염국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어 전성기 때는 불전이 50칸, 행랑이 800칸 고사(庫舍)가 50칸이었다. 무염국사의 일대기는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13세 출가하여 21세 때 당나라에 유학해 20여 년간 중국에서 대보살행을 실천해 동방의 대보살이라는 명성을 얻고, 845년에 귀국해 성주사에 주석하면서 40년간 오로지 설법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힘썼다. 문성왕때부터 헌안왕, 경문황,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이 그의 법문을 들었고, 문성왕은 아예 그를 궁으로 불렀으나 이를 사양해 한 말이 여유롭다.
“산승의 발이 대궐에 닿은 것이 한 번도 지나치다 할 것인데, (만약에 그렇게 되면) 나를 아는 자는 성주(聖主)가 무주(無主)로 바뀌었다 할 것이고 나를 모르는 자는 무염(無染)이 아니라 유염(有染)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88세에 입적하니 진성여왕이 시호를 대낭혜, 사리탑을 백월보광이라 내리고 국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해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 중의 하나로 지금도 그 자리에서 성주사를 빛내고 있다(국보 제8호)
◈ 문경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1년에 단 한 번 사월초파일에만 문을 여는 봉암사는 신라말 지증대사가 창건했다. 지증대사비는 최치원의 사산비 중의 하나로서 서예가 김응현 선생은 ‘남한에 있는 금석문 중에서 최고봉’이라고 했다. 비문 맨 끝에 분황사 83세 스님 혜강이 썼다고 했는데 상상만으로도 뭉클하다. 비문의 정식명칭은 ‘유당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으로 신라말 선종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 적조탑을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최치원은 도의선사에 의해 선종이 뿌리내리고, 문화능력이 배양되면서 지증에 이르러 구산선문 등으로 불교가 안정되자 지증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별도로 지게문을 나가지 않고 들창을 내다보지 않고도 대도(大道)를 보았으며 산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도 최상의 보배로움을 얻음이 있었으며 저 언덕에 가지 않아도 이르렀고 이 나라를 엄하게 하지 않았어도 다스려졌으니 그 누구와도 비정하기 어려운 그분이 지증대사이다.”최치원은 신라의 선종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선종이 처음 신라에 들어온 것은 도의선사보다 150년 전인 7세기 중엽 법랑스님이 중국 선종의 4대조인 도신에게 전수받고 돌아와 지리산 단속사지에서 준범, 혜은 두 스님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손제자 지증에 의해 큰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봉암사의 선풍은 구산선문 중 해외파인 남종선이 아닌 국내파 북종선의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882년(헌강왕8) 지증대사가 입적하자 이듬해 봉암사에서 다비하여 사리탑을 세운 3년 뒤에 헌강왕이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했다. 그러나 자료의 방대함과 게으름?으로 8년이 지나서야 탈고했는데, 이때는 진성여왕 시대였고 그리고도 33년이 지난 924년에야 지증대사 적조탑가 세워졌다. 왜 이렇게 늦어졌을까?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한 892년은 변방에서 호족들이 반기를 들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던 해로 이런 혼란 속에서도 탑비가 세웠다는 것은 봉암사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탑비가 세워지고 5년 후 봉암사는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견훤이 가은땅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929년, 이때의 기록은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이 봉암사로 피난을 왔다는 것과 왕과 관련된 지명이 봉암사 초입에 늘려있다. 와중에 봉암사를 다시 일으킨 고승은 정진대사(878∼956)로 봉암사에는 지증대사와 정진대사 관련 유물들이 아주 많다.
◈ 청도 운문산 운문사(雲門寺)
일연스님이 운문사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짓고,(출간은 군위 인각사에서 했지만 집필은 운문사에서) 지금은 250명의 비구니 스님들의 교육도량인 운문사는 절 입구에 민족의 한이 서린 소나무 숲과 절 담장과 벚나무가 가히 일품이어서 봄 한때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고, 전국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처진소나무가 있는 곳이지만, 내가 볼 때는 조금은 평범한 그냥 멋없이 크기만(근래에 새 건물을 지어서 더욱 그렇다) 한 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사리암에도 올라가 보고, 복호산과 학심이골을 등산하면서 산 위에서 내려다보기도 했지만 소담한 산사의 멋이 없는 것이 운문사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본래 절 마당은 아무리 크도 석등은 하나만 모시도록 되어있다. 그것은 불문율이 아니라 〈시등공덕경〉에 “가난한 자가 참된 마음으로 바친 하나의 등은 부자가 바친 만 개의 등보다도 존대한 공덕이 있다”는 구절에 기인한다. 그런데 운문사 대웅보전 앞에 선 쌍석등은 통일신라 때 만든 석등에 짝을 맞춘다고 그랬는지 새것을 하나 더 세웠는데 이게 뭔지? 또 대웅보전에 모셔진 불상은 비로자나불로 지인권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스님들이 계율보다 참선을 중시한다고 불가의 율법을 등한시해 그 바람에 이렇게 잘못된 것이 많다.
◈ 고향 창녕의 관룡사(觀龍寺)
삼한시대 변한의 불사국, 가야시대에 비화가야, 신라시대에는 비자벌 또는 하주라고 불렸던 창녕은 제2의 경주로 일컬어질 만큼 문화유산들이 아주 많다.(‘창녕을 알리는 재미로 쓰는 글’에서 이에 대해 소개했다) 삼국시대에는 많은 고분을 남겼는데, 만주의 고구려 돌무지 고분에서는 굳센 기상이, 부여 능산리 백제 고분에서는 단아한 아름다움을, 경주 대원릉과 황남대총에서는 화려함과 크기가 느껴지는데 비해 고령의 지산동 고분과 김해 대성동 고분, 함안 말이산 고분, 고성의 송학동 고분,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에서는 그저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남는다. 장대한 고분을 지은 세력들이 왜 더 멀리 뻗어나가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불뫼’가 화왕산으로 불리게 된 이 산의 정상(755m)은 제주도의 오름처럼 펑퍼짐하다. 둘레가 2.7㎞인 화왕산성은 이런 펑퍼짐을 둘러싸고 있는데 테뫼식도 포곡식도 아니고 말안장 같이 생겼다 하여 마안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비화가야 시대에 처음 산성을 쌓고 여러 번 중수하다가, 『세종실록』지리지에 “화왕산 석성은 둘레가 1,127보로, 그 안에 샘이 아홉, 못이 셋 있으며 군창도 있다”고 했으나 성종 때에 폐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당시 경상좌도방어사이던 홍의장군 곽재우가 밀양· 영산·창녕·현풍 네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을 수축하고 왜군을 대파했다. 그 뒤는 산성으로 사용된 적이 없고, 아홉 개 샘은 사라졌지만 못은 세 개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창녕 조씨(曺氏) 득성설화지라는 비도 서 있다.
화왕산성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매바위를 세 바퀴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는 주호 종형한테 들었는데, 주호형도 산을 좋아하지만 같이 산행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못했다. 봄 진달래, 가을 억새 모두 좋지만 2007년 어머니랑 같이 올라가 보았던 화왕산 억새 태우기는 2009년 대형사고로 이제 사라진 추억이 되고 말았다. 화왕산을 내려오며 만나는 용선대와 관룡사는 비좁은 비탈면과 바위 위에 세워져 있어 명품으로 손색이 없다. 관룡사 대웅전은 태종 원년(1401)에 창건되어 임란 때 불타 1740년(영조 25년) 중수했으며,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못지않게 좌대가 화려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바로 근처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만들어 옮겨온 것으로, 이 무거운 것을 어떻게 옮겼는지 자못 궁금하다. 좌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석굴암 이전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다.
뱃머리에 해당하는 용선대 위의 석불좌상이 바라보는 곳이 일망무제로 펼쳐진 옥천 계곡인데 여기에 1953년에 착공해 10년 만인 1963년에 완공된 옥천저수지 있고 저수지 끝 동네가 내 안태고향인 옥천리 고두방지다. 후손들을 위해 한 가지 적어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관룡사 오른쪽 산속에 극락암이란 작은 절이 있는데, 이 절은 목수였던 당숙 어른께서 요사채를 짓기도 하고 보수하기도 했다고 하며 큰집을 비롯하여 우리 일가가 불공을 드리던 곳이다. 나도 어머니랑 한 두번 찾은 적 있지만 그곳을 떠나 있으니 지금은 좀체 찾을 기회가 잘 없다.
◈ 지리산 연곡사(鷰谷寺)
삼량진에서 물금까지 내려오는 낙동강의 풍광도 아름답다지만 섬진강 하구는 가히 일품임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산수유, 매화, 벚꽃이 한창인 봄에는 어떤 노래로, 시로도 다하지 못할 것 같다. 한낮의 섬진강은 진초록의 쑥빛이지만, 저녁노을을 받은 섬진강은 보랏빛이다. 이 경이로운 모습은 고은과 김용택 등 많은 시인이 노래했다. 모두 서정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이시영 시인은 서정만으로만 보지 않았는데,
고향은 형님의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단단한 어께
이마가 서리처럼 하얀 지리산이 나를 낳았고
허리 푸른 섬진강이 나를 키웠다
낮이면 나를 낳은 왕시루봉 골짜기에 올라 솔나무를 하고
저녁이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먼 곳을 그리워했지
(…)
우리가 떠난 들을 그들이 일구고
모두가 떠난 땅에서 그들은 시작한다
아침노을이 이마에서 빛나던 지리산이
저녁 섬진강의 보랏빛 물결에
잠시 그 고단한 허리를 담글 때까지
〈형님네 부부의 초상〉이란 시다.
돌아오는 길에 억수로 소나기가 퍼부어 식겁했던 기억이 있는 어느 해 딸아이와 찾은 적이 있는 연곡사를 지리산에 있는 어느 절보다 나도 좋아하는데, 그것은 세상에 이보다도 더 아름다운 부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 부도 북부도와 동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연곡사는 1983년과 85년 사이에 중수된 것으로 그전에는 한국전쟁으로 폐사된 조그만 절로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연곡사는 통일신라시대 연기법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연곡사 말고도 화엄사, 대원사 등을 세운 스님이다. 부도 중 북부도가 연기법사의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부도 주인공이 누구냐가 큰 관심사이기도 하다. 속전에는 도선국사(827∼898)라는 설이 있으며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석은 사라지고 용머리(이수)와 거북 받침만이 남아 있는 탑비는 현각선사 부도로 고려 경종 4년(979)에 세워진 것으로 북부도 옆에 동부도가 이 현각선사의 부도로 꽤 닮았다고 하나 조금 귀품이 떨어져 보인다. 1597년 4월 10일 정유재란 때 왜적 400명이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악양을 거처 쌍계사, 칠불사, 연곡사에 들어와 살육과 방화를 자행했다고 「임진잡록」은 기록으로 보아 연곡사는 이때 폐허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부침을 겪다가 영화 ‘남부군’에서처럼 근대가지도 많은 부침을 겪은 연곡사다.
◈ 월출산 도갑사(道岬寺)·무위사(無爲寺) 강진 백련사(白蓮寺)
남한의 3대 기도처 중 하나이기도 한 월출산은 봐도 봐도 신비롭기만 하다. 호남의 그 너른 평야 가운데 우뚝 선 것도, 그 산의 자태도 그렇다. 도갑사 일주문이랄 수도 있을 ‘해탈문’은 조선초기 건축물로 주심포와 다포 양식이 공존하는 건축적 의미 때문인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저자는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오래되면 다 국보인가 하고 말이다. 대웅전 뒤쪽 대밭을 지나 오솔길을 오르면 작은 당우인 미륵전이 있는데, 낮게 둘러친 담장도 허름한 모습이지만, 미륵전 안에 모셔진 것이 미륵이 아니라 고려시대 제작된 석조여래좌상으로 향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석가를 모셔 놓고 미륵전이라 부르던 것이 조선 후기 불교였다.
무위사는 노자 무위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수덕사 대웅전을 연상케 하고 꼭 빼닮은 극량보전은 조선 성종 7년(1476)에 지은 목조건물이다. 이것은 국보 제13호로 그 영예를 유감없이 보인다.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조사당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극락보전에는 아미타 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가 보전되어 있는데(지금은 따로 벽화보존각에 옮겼다) 20년 전쯤에 갔을 때 벽화를 그대로 올려다본 기억이 난다. 조선시대 중기 작품으로 고려시대 불화의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고 백의관음보살의 손에 버드나무와 정병을 들고 있던 모습까지는 기억이 가물하다. 월출산 아래에는 조금 인위적으로 만든 왕인박사 유적과 구림마을, 월남사지도 있는데 아련히 탑과 부재가 기억나지만 책에서는 소개하지 않고 있다.
강진의 백련사는 다산초당을 답사하면서 만덕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둘러본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절 주변의 동백꽃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백련사 대웅전 앞의 베롱나무 꽃을 잊을 수 없다. 아마 안동의 병산서원 만대루 앞에 있는 것과 쌍벽을 이룰만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백련사는 보령의 성주사를 창건한 무염국사가 839년에 창건해 고려 무신정권 때 의해 크게 번창했다. 지눌이 송광사에서 수선결사를 맺으며 조계종을 확립하던 때 지눌의 도반이었던 원묘가 백련결사를 조직하여 천태종을 이어갔다. 이때 강진 호족들이 무신정권의 후원을 받아, 1211년부터 7년간 대역사 끝에 80여 칸 백련사를 중건하고, 이후 120년간 8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등 영광을 이어갔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해안에서 40리 안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백련사도 어쩔 수 없이 폐사되고 말았다. 강진만 구강포 맞은 편 사당리 고려청자 가마도 이때 문을 닫았다. 백련사와 고려청자는 고려왕조와 함께 몰락한 것이다.
조선의 숭유억불로 백련사를 중흥할 스님이나 토호는 없었다. 다만 임란 이후 민간신앙으로 불교가 중흥하자 금산사 미륵전,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같은 거대 법당이 세워지던 때 행호스님에 의해 중수되기 시작해 행호산성이라는 토성도 쌓이게 되었다. 지금 그 자리는 동백나무 숲을 이룬다. 1760년 화재로 모두 불타고 2년에 걸친 역사 끝에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만경루와 대웅보전에는 당대의 명필 이광사의 글씨가 걸리고, 다산이 유배왔을 때는 혜장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둘의 이야기는 〈다산의 후반생〉이란 책에 그려져 있다.
◈ 정선 정암사(淨庵寺)
정암사로 가는 길은 아주 험했던 것 같다. 꼬불꼬불한 외길 산길을 달리고 달려서 겨우 도착했던 기억이 난다. 정암사는 언덕 위 수마노탑이 먼저 생각나고 그 탑에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정암사를 답사갔을 때 전설 같은 일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창건주 자장율사의 지팡이가 자라서 아름드리 주목나무가 되었으나 명이 다하여 고사되었는데 고사목에서 근래에 다시 나무 싹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흔히 5대 적멸보궁을 정암사를 비롯해 통도사, 법흥사, 오대산 중봉, 봉정암을 꼽는데 《삼국유사》에는 통도사, 월정사, 정암사 그리고 황룡사와 울산 태화사를 꼽았다. 자장이 가져와 쌓았다는 전설의 마노석과 탑의 모습은 알 수가 없고, 지금의 탑은 1653년 중건된 것으로 1972년 해체 복원한 것이다. 진골 출신인 자장은 당나라 유학 중 643년 선덕여왕이 귀국토록 하여 분황사에 머물게 하고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불경과 불상에까지 법식을 내려 계율을 세우게 했다. 이로써 백성 대부분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며,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100립을 황룡사 구층탑, 통도사 계단, 태화사, 정암사 등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자장율사는 정암사에서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입적했는데, 그것은 시자가 어떤 늙은이가 스승의 이름을 부르고 뵙자고 한다고 하자 “미친 사람인가 보다”라고 하여 시자가 내쫓자 늙은이가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이 있으니 어떻게 나를 볼 것이냐”고 하고 돌아가 버렸다. 시자로부터 그 말을 들은 자장이 뒤쫓았으나 늙은이는 사자보좌에 앉아 이미 떠나고 없었다. 사자보좌는 문수보살을 의미한다. 『금강경』제25회분 ‘화무소화’(化無所化-교화하여도 교화함이 없다)와 같은데 거기에는 부처님이 수보리 장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보리야! 너희들은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여기지 마라. (…) 진실로 어떤 중생도 여래가 제도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을 여래가 제도할 것이 있다면 이는 여래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아상이 있다고 한 것은 곧 아상이 아니건만 범부들은 아상이 있다고 여기느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니라.”
◈ 북한의 산사 보현사(普賢寺), 표훈사(表訓寺)
◉ 산은 향산 절은 보현
“묘향산 보현사는 북한에서 가장 큰 절일 뿐 아니라 북한 불교의 총림격이다. 남한으로 치면 조계사에 송광사나 해인사를 합친 위상이라고나 할까.”이렇게 시작하는 저자의 묘향산 보현사답사기는 신문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1997년인가 당시 신문을 스크랩해 두기도 했었으며, 내가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보현사사적기’였다. 보현사 창건 내력을 자세히 소개한 이 사적기는 김부식이 찬하고 문공유가 글씨를 썼는데 문공유가 나의 중시조 경절공 문익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묘향산 보현사는 탐밀, 굉곽 두 대사가 처음으로 이룩한 절이다. 탐밀의 본성은 김씨인데 황주 용흥군 사람이다. 25세에 출가하여 힘든 고행을 계속했다. 옷 한 벌과 발우 하나로 여간 춥지 않아서는 신발을 신지 아니하고 하루 한 끼로서 계를 지니고 배움을 부지런히 하였다. 이름난 고승들을 찾아 화엄교관을 전해 받고 현종 19년(1028) 연주산에 들어가 난야(蘭若-조용한 수행처)를 짓고 살았다. 정종 4년(1042) 탐밀의 조카로 그의 제자가 된 굉곽이 이곳으로 와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학승들을 수용할 절을 짓게 되었다. 이때가 정종 8년, 저 동남쪽으로 100여 보 되는 장소에 땅을 택해 정사를 무려 243칸이나 이룩했다. 그리고는 산 이름은 향산, 절은 보현이라 하였다. 두 스님이 죽은 뒤에는 제자들이 상속하여 불사를 더욱 일으켰다. 문종 21년(1067)에는 임금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땅과 밭을 내렸다.”
이후 보현사는 나옹선사가 주석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머물면서 한국 불교사에 우뚝한 존재로 남았다.
불국사 석가탑을 보면 참 안정적이고 비례가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만, 월정사 8각 9층탑은 그만큼 높아서 웅장한 맛에도 이렇게 이런 안정감이 들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보현사의 것은 8각 13층으로 크기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8각탑은 고구려 양식으로 평양 영명사와 보현사, 월정사 등에만 있는 문화재다. 근래에 부산의 해동용궁사, 초읍 삼광사, 장산 성불사에도 모방한 8각탑이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고졸한 맛은 들지 않는다.
◉ 금강이라는 이름
금강산이란 이름은 참으로 걸맞다 싶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금강산에는 55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금강산 4대 사찰 중 신계사는 작은 3층 석탑만 외로워 보였고, 장안사는 황량한 빈터에 사리탑 하나가 외롭다고 한다. 또 유점사는 잿더미로 변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나 표훈사만은 건재하다. 정양사와 보덕암이 남아 있으나, 이들은 표훈사의 말사고 보면 표훈사 공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표훈사 자태를 두고 육당(최남선)은 “옛 스님네들은 법안뿐만 아니라 산수안도 갸륵하심을 알겠다”고 했고, 김삿갓은
소나무 소나무 잣나무 잣나무 바위 바위를 돌아서니
산 산 물 물 가는 곳곳마다 신기하구나
(松松栢栢巖巖廻 山山水水處處奇) 라고 했다.
표훈사에서 특별한 건물은 판도방이라는 것인데, 절집에는 본전을 보통 대웅전(석가모니), 극락전(아미타불), 대적광전(비로자나불) 등으로 부르고, 부속건물은 명부전(지장보살), 관음전(관세음보살), 산신각(산신) 등이고, 누마루는 만세루나 보제루, 살림집은 심검당, 스님방은 적묵당·설선당 등 별칭을 가지며 손님이 묵어가는 방을 선불장 또는 판도방이라 하는데, 이를 운치 있게 청류헌 혹은 침계루 등 당호를 붙인다. 그런데 판도방이라고 한 것은 ‘객실’이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판도방 하나로 금강산 유람객들에게 표훈사의 위치를 남김없이 알린 것이다.
흔히 금강산을 1만2천 봉이라고 하는데, 이는 태조 왕건이 고려 임금 되기 전에 금강산에서 고갯마루에 당도하자 법기보살이 권속들 1만 2천을 거느리고 나타나 광채를 발하므로 황급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하는 데 기인한다. 절한 지점을 배재령이라고 하고, 법기보살이 빛을 발한 곳을 방광대라고 하며 거기 아래에 정양사를 짖게 했다. 방광대 너머 보살을 닮은 봉우리를 법기봉이라 하며, 표훈사 법기보전에는 법기보살을 모시되 북쪽 법기봉을 향하게 했다. 《화엄경》에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라는 곳에 있어 법기보살이 1만 2천 무리를 거느리고 상주하고 있다’고 한데 기인 한 것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풍악산이나 개골산이라 불리던 이 산을 금강산으로 고쳐 불렀고, 1만 2천 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표훈사는 이처럼 금강산의 핵심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