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력기원전 480년, 현 그리스 북부에 있는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주축이 된 그리스군이 크세룩세스의 수만 페르시아군과 싸우다가 전원 옥쇄한다. ‘지나가는 순례자는 가서 말하시오. 우리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싸웠고 여기서 묻혔노라고…’라는 유명한 구절이 남겨졌고, 서양전쟁사에서 장렬한 희생정신의 백미로 칭송되었다.
서양전쟁사에서 가장 ‘낭만적’인 전투를 소재로 하여 최근에 개봉된 영화 <300>에 대하여 평론가들과 네티즌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 비판의 중심은 서양인들이 헐리웃이라는 막강한 문화적 무기를 통하여 그리스 문명을 비롯한 서구 문명권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있으며, 그리스군과 싸운 페르시아군은 괴물군단을 방불케 하는 야만인들로 묘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의 후신을 자처하는 이란에서는 국가적인 모욕을 당했다며 연일 헐리웃과 아메리카를 성토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본인은 이 시점에서 되묻고 싶다. 과여 <300>이란 영화가 문화적 우월주의의 상징이라는 말을 들을 가치가 있는지? 과연 그 영화가 서구 우월주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다른 민족에 대한 멸시가 저변에 깔려있는가?
영화 <300>에 대한 비판을 인터넷과 지상(紙上) 여러 군데서 접할 수 있었는데, 하나같이 하는 말들이 피상적이었다. '헐리웃을 통한 세계의 문화적'지배 어쩌구하는 케케묵은 음모론의 재탕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영화 ‘300’은 애초부터 역사에 충실한 영화가 아니다. 아메리카 만화가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극화인 ‘300’을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이다. 테르모필레 전투를 각색한 만화를 다시 한 번 각색한, 말하자면 2차 각색품이다.
영화에서 페르시아군의 모습이 기괴한 것은 페르시아나 다른 문명에 대한 서구인들의 편견보다는 그래픽 극화(Graphic novel)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기인한 바가 더욱 크다. 원래 그래픽 극화는 하드보일드 장르에서 비롯된 것으로 캐릭터들의 극단적인 희화화(caricaturization)가 이루어진다. 그렇게 따지자면 같은 헐리웃에서 만든 영화 <알렉산더>에서의 페르시아군은 멀쩡한 인간들로 묘사가 되어있다. 영화 하나를 두고 이게 무슨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니 하는 것은 '오바'다.
캐릭터들의 과장이 많은 그래픽 극화를 대부분의 비판자들이 영화를 비판하는 기준이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접한 학술적 이론으로 세상을 처음보기 시작한 신입생의 'freshman logic'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이 된다. <300>은 심오한 영화도 아니고 사극의 외피를 쓴 철저한 오락영화인데 소위 비평한다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도한 분석을 하고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냥 두면 그저 그래픽과 영상미가 화려한 오락영화로 남을 것을, 과도한 관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띄워주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페르시아 제국이 스파르타에 비해서 그리 나아보이지도 않다. 무사계급이 농노(Helot)들 위에 군림하면서 과두정 체제로 집단독재하는 스파르타야 말할 것도 없지만, 수많은 민족을 정복하고 총독제(Satrap system)를 운용하면서 이민족의 이탈을 감시하는 페르시아도 그 정치체제의 비민주성이란 측면에서는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고대의 근동은 아슈르 제국 이래로 제국체제가 보편화되었고, 이탈하는 족속에게는 ‘제국’에 의한 처절한 파괴와 살육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문화적으로 페르시아가 이루어놓은 것은 많고, 서력 기원전 5세기의 시점에서 그리스가 문화수준이 떨어지던 것도 맞다. 그러나 단순히 문화적으로 (많은 유적, 도로, 가로수, 벽화) 이루어 놓은 게 많다고 해서 페르시아를 개명된 문명국으로 보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약소국인 그리스의 폴리스 (도시국가)들이 강대국에 맞서 자신들의 주권을 지킨 것이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여기까지 영화 <300>은 사상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극의 껍질을 뒤집어쓴 오락영화 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면 이 말을 뒤집어 보자. ‘오락영화’의 꺼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 사상성이 농후하게 포함된 영화가 있을까?
오락영화? No! 영화 <Starship Troopers>의 사상성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있다’이다. 1997년에 Paul Verhoeven이 감독한 Starship Troopers는 SF의 거장인 Robert Heinlein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Starship Troopers에서 묘사된 사회는 상당히 비민주적이다. 사회가 ‘시민’과 ‘비시민’의 양대 계층으로 분류되어있는데, ‘시민권’은 오직 군복무를 필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물론 이를 ‘파시스트적’ 사회라고 하는 이가 있지만 영화에서 그려진 사회의 모델은 사실 고대 그리스에 가깝다.
서양사, 특히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연구하는 고전학자(Classicist)들은 그리스를 서구 문명의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그리스적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중의 한 사람이 <살육과 문명>의 저자인 Victor Davis Hanson인데, 핸슨은 그리스인들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나 다른 문명권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인들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싸웠고, 다른 문명에서는 머릿수를 채우기 위하여 징집한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주장의 정확성은 둘째치고라도, 핸슨은 그의 책 첫머리를 Robert Heinlein의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아 두 사람의 생각은 일맥상통한다. 하인라인은 “역사상 수많은 이슈들은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노골적인 폭력에 의하여 해결된 것이 많다. 만약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심한 착각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잊는 족속들은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했다 (Violence, naked force, has settled more issues in history than has any other factor, and the contrary opinion is wishful thinking at its worst. Breeds that forget this basic truth have always paid for it with their lives and freedom)”라고 Starship Troopers에 쓰고 있다. 이 말은 영화에서 주인공의 담임 선생의 입에서 한 마디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나온다.
Robert Heinlein과 Victor Davis Hanson의 기본적인 생각은 ‘자유를 누리려는 자는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한 행동에 직접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보기에 자신들의 생각을 가장 잘 구현하였던 곳이 바로 고대 그리스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직업군인 대신 스스로의 의지로 무장하고 훈련하는 ‘시민군’의 전통이 강했다. 한마디로 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은 기꺼이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Heinlein과 Hanson은 이런 사실을 현대에 투영시켜, 시민의 권리를 누리려는 사람은 해당 국가의 군인으로서 먼저 봉사를 하여 자유를 지키는 일에 동참한 다음에 권리를 논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Heinlein의 경우는 한술 더 떠 자유를 지키려고 나서지 않는 사람들의 자유는 제한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한 사상을 자신의 소설인 ‘Starship Troopers’에 반영시켰다.
사실 Starship Troopers의 감독인 Verhoeven 감독은 하인라인이 설정한 미래사회를 오히려 희화와 시켜 간접적으로 비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등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그러나 비판을 하기 위하여 일단 원작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통하여 하인라인의 극단적인 사상이 드러났던 것이다.
결론
결국 <300>을 집중 성토하는 사람들은 초점이 빗나간 엉뚱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오히려 <300>에 대한 훌륭한 홍보가 될 것이다. 그러나 <300>은 그러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만큼 심오한 영화가 아니다. <300>은 그저 남성미 넘치는 배우들의 육체와 그 액션을 보고 즐기면 되는, 그저 그런 영화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Starship Troopers’를 내용 없는 오락영화로 치부하였다. 사실 스타크래프트의 인간족과 ‘저그’족의 대결을 방불케 하는 전투신, 그리고 젊고 힘 넘치는 배우들의 사랑놀음을 보면서,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Starship Troopers가 암시하는 미래사회를 한 번 들여다보자.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그 고도의 사상성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Starship Troopers(적어도 그 원작소설)가 훨씬 더 위험한 내용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天狼星主님 굿~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제 여친과 영화 <300>을 관람했는데, 솔직히 말해 B급 영화를 벗어나긴 어려울 것 같더군요. (그래픽이야 화려하지만 내용이나 여타 요소들 종합해 볼 때, B급을 넘는 수작이 될 순 없다는 이야기) 까놓고 말해 영화를 본 소감은 어릴 때 '마징가 Z' 를 본 소감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편=멋있는 '사람', 나쁜 편 = 사람같지도 않게 추한 괴물, 하는 식의 단순 이분법적 도식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여친은 크세르크세스가 남성과 여성을 섞은 중성적 목소리의 소유자로 묘사돼 기분나빴다는데, 문득 떠오른 건 마징가 백작의 '나쁜 놈' 아수라 백작이더군요. ㅋㅋ) 애국적 요소가 가미된 게 좀 다른가
그런데 天狼星主님이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의 저자이신 '김성남' 선생님 맞으신가요?
예 그렇답니다.
친구가 300 재밌는지 물어보길래 아무 생각없이 볼수 있는 킬링타임용... 이라고 말해줬습니다. 天狼星主님 말씀대로 왜 이 영화가 x-맨이나 스파이더맨등등의 만화원작 작품들과 달리 논란의 대상이 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만 혹시 영화사의 홍보전략일까요? 고화질 영상나오면 몰래 구해 보려고 했는데 괜시리 극장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참 말씀하신 Starship Troopers의 내용도 공감합니다. 2는 완전 c급 영화였습니다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__)
제 까페에 가져갑니다. ^^
퍼갑니다. ^^;;
소견입니다만, 원작의 의도야 어떠했든 그 묘사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까지 무시할 수 있는지는 다시 여쭙고 싶습니다. 굳이 평론가들의 입과 펜을 빌리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다보면 눈살을 찌푸릴 수 있는 부분들이 존재하고 있음은 사실이니까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는 비판이라는 것이 해묵은 제국주의적 시각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생존본능에서 기인하는, 각 개인의 '타자'에 대한 적대적 인식과 같은 주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락영화이든 뭐든 간에 300을 보고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리는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B급 영화를 띄워주게 되었다 해서 그게 꼭 빗나간 비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위안부 누드'를 찍은 모 배우가 아무 생각없이 오락물을 만들었다고 해서 비판하면 안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300의 전투신은 밀집대형을 이룬 보병전 등의 장면에서 나름대로의 역사성을 가미했다는 점에서 국내 사극이나 영화의 마구잡이 베고찌르기 보다는 분명히 한 수 위라는 점은 분명히 해둬야 합니다. B급 영화라고 치부하기엔 그 스펙터클이 주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빗나간(?) 비판이 없었다고 해서 과연 이 영화가 뜨지 않았을까요? ㅎㅎ
개인적으로 모대왕님과 청풍계님의 견해에 충분히 근거가 있다 여겨집니다. 아무래도 페르시아 사람들의 후예인 이란인들 입장에서는 그리 유쾌할 리가 없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