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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주석/일반자료 스크랩 103강. 예수님의 기도
jtr28114 추천 0 조회 13 15.03.08 13: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3강. 예수님의 기도 (요 17장)

 

요 17:1-2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이를 대 제사장의 기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기도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죽음은 창세전에 이미 아버지와 약속이 된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이는 아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게 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그 때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이제 창세전에 언약된 그 때가 이르렀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하심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창세전에 아버지와 누렸던 그 영화를 누리게 해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한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이 하신 언약이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언약을 성취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니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고 영화롭게 되어서 아버지께로 가지면 자기 백성들은 세상에 남아 있으니 아버지께서 저희를 보존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 속에 기도란 무엇인가?

그 본질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기도란? 신(神)의 도움으로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안 되니까 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인식된 기도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아쉬운 자가 하게 됩니다.

 

만약에 말이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면 신을 찾지도 않을 뿐더러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인간들의 기도 속에는 애초부터 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신을 이용하여서 자기 뜻을 이루고자 하는 자기 욕망만 가득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종교를 만든 것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필요에 의하여서 만들어진 것이 종교에요.

그러니 세상 종교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만든 종교에는 자기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佛敎)입니다.

불교는 모든 종교의 총화(總和)라고 보아도 됩니다.

그만큼 불교 속에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행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어요.

 

불교의 신앙 바탕에는 치성이 있습니다.

치성(致誠)이란? 신에게 정성을 보낸다는 말입니다.

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부처 상 앞에서 빌든 탑돌이 하면서 빌든 비는 것이 종교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는 치성을 기도라고 합니다.

결국 기도란 무엇이냐 신에게 정성스럽게 비는 것입니다.

기도(祈禱)라는 말 자체도 빈다는 의미에요.

 

사람들이 왜? 절에 갑니까?

빌러 갑니다.

이걸 이 시대 교회 안으로 그대로 적용하여 봅시다.

교인들이 새벽이나 밤에 교회에 왜? 옵니까?

기도하러 옵니다.

 

제가 보통 밤 12시에 교회의 서제 실에 있다가 집으로 갑니다.

그럼 꼭 그 시간에 어떤 아주머니가 성경을 들고 교회로 가는 것을 봅니다.

저희 교회 바로 옆에 그 분이 다니는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야밤에 집에서 주무시지도 않고 왜? 교회에 갈까요?

기도하러 갑니다.

왜? 하필 그 야밤에 기도하러 갑니까?

이는 정성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정성스럽게 기도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정성은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금욕을 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철야를 하거나, 아니면 돈 다발을 갖다 바치거나 하는 것처럼 하여야 신이 감읍을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한다는 말입니다.

 

지극히 정성을 드리면 신이 감동을 받고 응답을 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인간적이지요.

목사들은 이를 경건이라고 포장을 해 놓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이 밤 잠 자지 않고 기도 하러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의 가르침은 이 아주머니의 배움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저도 과거 이러한 짓을 거의 매일 하였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하는 기도보다 더 정성을 쏟고자 산으로 가서 밤 이슬 맞아 가면서 기도하였어요.

 

교인들이 왜? 새벽이나 밤에 교회에 옵니까?빌러 옵니다.

이름도 새벽에 비는 것을 새벽기도라고 하고 밤에 비는 것을 철야기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절간에 빌러 가는 것이나 교회에 빌러 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쪽은 절에서 빌고,

한 쪽은 교회에서 빕니다.

장소만 다릅니다.

 

한 쪽은 부처에게 빌고,

한 쪽은 예수에게 빕니다.

대상만 다릅니다.

 

절간에서 기도해도 복 달라고 하고,

교회에서 기도 해도 복 달라고 합니다.

내용은 같습니다.

 

양쪽 다 그 기도의 내용을 까보면 똑 같아요.

오로지 자기 소원성취만 있어요.

한 마디로 비는 장소와 비는 대상은 달라도 그 내용은 동일합니다.

이게 이 시대 불교이고 기독교입니다.

신의 뜻은 없고 오직 인간의 소원만 난무합니다.

 

자칭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 안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는 기도처럼 창세전 언약이 없어요.

그러니 이 시대 교회나 절간이나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인(敎人)이나 불자(佛者)나 같다는 말입니다.

 

불쾌하다 화를 내지 말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우린 무얼 위하여 기도하고 있나요?

지금 저는 기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기도를 왜? 하느냐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기도 한다고 해서 기도가 아니에요.

기도하는 행위가 기도가 아닙니다.

쉬운 말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뜻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한번 보세요.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십자가를 지기 싫어서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아버지 십자가 안지면 안 됩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얘~ 아들아! 네가 그거 지려고 세상에 갔지 않느냐!

니가 십자가에 죽어야 니 새끼들이 살아날 것이 아니냐!

그러니 눈 딱 감고 십자가 지고 임무 마치고 귀환해라!

 

이에 예수님이 알았습니다!

제가 잠시 아버지 뜻을 잊고 내 생각만 했네요!

십자가 지겠습니다!

이 기도를 땀이 피가 되도록 했어요.

이게 언약적 기도에요.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이 이런 기도를 하나요.

안 해요.

아니~ 못 해요.

인간적으로 할 수가 없어요.

기껏 밤잠 자지 않고 교회에 와서 기도한다는 것이 복 달라는 것이에요.

그러니 백날 기도하면 뭣합니까.

 

그런 면에서 불자들이 절간에 가서 비는 것이나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비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비는 속을 들여다보면 불자들이나 교인들이나 똑 같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하여서 빌기 때문입니다.

 

왜? 빕니까?

달라고 비는 겁니다.

자기에게 없으니까 달라는 겁니다.

 

돈 없는 사람은 돈을 달라고 빌고!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 달라고 빌고!

출세하지 못한 사람은 출세시켜 달라고 빕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듯이 무엇인가 얻어야 할 것이 있는 자들이 신을 찾아요.

이렇게 신을 찾아서 비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인간은 힘들면 본능적으로 신에게 빌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기도는 인간의 본능으로 행하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누가 가르치고 시키지 않아도 급하면 하게 되어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돼지 머리를 놓고 비는 것이나!

아들 딸 잘 되게 해 달라고 새벽에 정한수를 장독대 위에 떠 놓고 비는 것이나!

새 차를 사고 무당을 불러서 명태 올려 놓고 비는 것이나!

가게를 개업하여 목사를 불러서 기도하는 것이나 다 같아요.

 

인간들의 종교 생활 속에서 가장 쉬운 것이 기도에요.

 

목사님들이 새로운 교인들이 오면 열심히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럼 그 교인은 목사님 말씀대로 열심히 기도합니다.

본능적으로 기도 합니다.

자기가 아는 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럼 그 교인은 무슨 기도를 할까요?

자기가 본능으로 아는 대로 기도하겠지요.

인간의 본능은 자기 욕망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러니 자기 욕망을 채우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단은 처음 교인이 오면 무조건 사흘씩 금식을 시켜서 기도케 해요.

그러다 시불렁 거리면 방언 받았다고 지랄을 떨어요.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흘씩 금식하며 기도케 하면 헤까닥 돌지 않고 배기겠어요.

헤까닥 돌아서 시불렁 가리는 것을 무슨 영험한 체험이라도 되는 냥 자랑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어요.

기도가 없는 종교는 없어요.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인간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기도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도하도록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탐심으로 인하여 결핍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꿈틀 거리기 때문입니다.

 

그 욕망이 주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본능적으로 기도하는 내용 속에는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과 완전히 다르지요.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합니다.

단 구하기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조건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때”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말씀이 그 안에 없으면 구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라는 것 속에는 인간의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 말씀이 그 안에 있으면 아버지 뜻을 구하고 아버지와 약속하신 것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모르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모르는 자는 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갖 교회에 온 사람을 사흘씩 금식을 시켜 기도케 하여 방언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지랄한다고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겠지요.

금방 교회에 온 사람이 어찌 아버지의 뜻을 알겠으며 창세전 언약을 알겠어요.

그러니 먼저 말씀을 가르쳐야지 기도부터 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다.

 

목사가 언약을 모르니 본능적으로 알아진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능으로 가르치는 목사이기 때문에 중들 앞에서 예수의 가르침이나 부처의 가르침이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천국이라고 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무지이고 무식이에요.

인간의 상식으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기도하고 인간의 상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에 대하여 말이 나왔으니까 잠시 성경 해석에 관하여 언급하고 갑시다.

성경 해석도 기도처럼 무지하게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어요.

비록 히브리어 헬라어 라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이 되었지만 그 속엔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이 뜻은 성령께서만 깨닫게 주세요.

 

그러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해석하여야 올바른 성경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어 헬라어로 성경 해석에 올인 하는 사람이 있어요.

원어(原語) 속에 뭔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만약에 원어 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을 쓴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성경을 자기 나라 말로 쓴 사람들이니까 성경을 가장 잘 알 것이 아닙니까.

마치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가장 잘 아는 것과 같잖아요.

성경에 하나님 뜻이 담겨져 있으니 히브리말로 성경을 쓴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뜻을 가장 잘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성경을 히브리인들이 썼잖아요.

그러니 히브리어를 하는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하나님을 가장 잘 믿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을 히브리말로 쓴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을 배도했어요.

그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몰라서 하나님을 배도한 것이 아니에요.

비록 히브리어로 성경을 기록하였어도 그 속에 성령께서 주입해 놓은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도하고 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율법사와 서기관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모두가 히브리어 박사들이에요.

요즘말로 원어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들이라구요.

그런데 이 놈들이 예수를 죽였어요.

 

아니 예수를 영접하라고 성경을 주셨는데 이 놈들이 성경으로 예수를 죽였다니까요.

그 히브리어 박사들이 말이에요.

이 사람들이 전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양산했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성경을 전문으로 해석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히브리어 헬라어 박사들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언약을 몰라요.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구요.

 

논리대로라고 한다면 그 원어를 잘 아는 사람들이 예수를 더 잘 믿고 복음을 더 잘 알고 증거 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헛 소리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짓거리를 일부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들이 하고 있어요.

원어 설교를 한답시고 성경을 전부 히브리어 헬라어 풀이를 하고 있어요.

원어를 파면 뭔가 나오는 줄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리하여 교인들에게 대단한 자긍심을 심어 주어요.

 

이렇게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지적 교만으로 하늘을 찔러요.

새로운 바리새인들로 양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만 특별하다고 하고 자기들 교회가 무슨 신령한 집단이라도 되는 냥 꼴값을 떨고 있어요.

 

진정으로 복음을 안다고 하면 엘리트 의식을 버려야 하는데 도리어 엘리트화를 고착하고 있어요.

어떨 때 보면 야! 히브리어 헬라어를 모르면 예수도 못 믿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 이런 짓들을 하는가 하면 성령의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 유창하게 원어로 설교를 하는데도 그 설교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 축적은 일어나 잘난 척 하는 자들이 양산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 신앙이 서로 많이 아는 척 하고 눈치 보기 하는 외식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 입이 더 큰가 시합하는 개구리들처럼 복음 아는 척 꼴값을 떨고 있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새겨서 들으세요.

 

제가 지금 원어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원어 설교를 하여야 성경을 다 많이 알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도들처럼 학문이 일천한 사람들도 능력 있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어요.

그것도 유식하다고 하는 율법사와 서기관과 제사장들 앞에서 말이에요.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만 해석이 되어요.

성령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러니 인간의 조건으로 뭔가 신령한 것이 있다고 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예를 들어서 금식이나 철야나 산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거나 또는 신학공부를 많이 하고 원어를 알아야 성경을 올바로 해석을 한다고 하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그건 자기 지식 자랑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에요.

사도 바울을 보세요.

자신은 자신의 말과 자혜로 전하게 될까봐 두려워했어요.

자기 잘남이 드러날까 봐 조심하였다구요.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 안에 거하고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 조건을 보이지 않게 하고자 하여야 해요.

교인들이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목사가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자기는 빠지고 예수님이 드러나도록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자기가 스승이 아니라 성령이 스승임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단 말이에요.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예수는 흥하고 나는 쇠하는 식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교인들 눈에 목사가 보이면 안 되어요.

예수가 보여야 해요.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이 예수를 가리고 있어요.

자기 자랑을 하고 있어요.

 

스스로 중보자의 자리에 앉아서 교인들이 목사를 거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식으로 교묘하게 만들어 놓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그 목사만 복음 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교인들은 그 목사를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그 목사를 떠나면 죽는 줄 알아요.

그리고 그 집단에서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그러니 조직을 위해서 충성 경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호가호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미혹이고 이단이에요.

우리 주변에 이런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선한 의미에서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목사를 살펴야 합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저도 복음 전한다고 잘난 척 꼴값을 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교만으로 미혹당하지 않도록 잘 살펴주어야 합니다.

좌우지간 혼자 복음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을 하듯이 기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의 감동을 모르면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가 그 언약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구하라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은 언약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어요.

그리고 언약을 위해서 성도들을 선택했어요.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언약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언약을 위한 기도만 받아요.

 

그러나 인간들은 이걸 모릅니다.

인간은 생래적(生來的)으로 자기 몸을 위해서 비는 것만 있습니다.

인간들은 언약을 몰라요.

언약을 모르니까 자연히 언약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 하신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겐 그 신이 어떤 신인지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냐 아니냐만 있습니다.

죄인에겐 신은 자기 욕망을 채우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바로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창세전 언약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사해져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자기 뜻이 없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와 창세전에 맺은 그 언약을 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를 비교하여 보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엉터리 인지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서 죄가 폭로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도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고자 내가 굴복당하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나옵니다.

과연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느냐 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죽은 자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산 자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건 마치 바퀴벌레가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 같아요.

바퀴벌레는 인간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어요.

바퀴벌레가 만약에 인간에게 기도한다고 하면 좋은 먹거리를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바퀴벌레가 사리지기를 바랍니다.

 

죄인과 하나님 사이가 이러합니다.

죄인은 하나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뜻도 몰라요.

 

기도란 하나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인간들이 올바른 기도를 할 수가 있을까요?

단언코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뜻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뜻을 알려면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하잖아요.

알다시피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인간과 단절하였어요.

하나님이 죄인을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쫓아냈어요.

그러니 죄인은 하나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모르니 기껏 기도한다고 하여도 자기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을 위해서 비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받지 않아요.

이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걸 구약에서 성막에 피워지는 향(香)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제사장들이 향(香)을 피우는 일들이 있어요.

이 향(香)을 신약에 오면 기도라고 해요.

그러니 구약의 성막에서 피워지는 향(香)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향(香) 속에 기도가 담겨져 있어요.

그럼 기도의 모형으로 나타난 향(香)을 통해서 기도의 본질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향(香)을 알려면 성막을 알아야겠지요.

 

그럼 성막의 구조와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일이 어떤 것인지부터 알아봅시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성막을 지으라는 명(命)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대로 짓습니다.

그리곤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일들을 가르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 성막은 하늘에 있는 식양(式樣)이라고 했어요.

하늘에 있는 성전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 성막이에요.

성막이나 성전이나 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어요.

즉 예수님이 성막의 실상이란 말입니다.

그럼 성막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예표적인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일들은 곧 예수님이 하실 일이란 말입니다.

 

오늘 설교는 성막과 절기와 기름부음을 받은 세 가지 직임을 가지고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에 정신을 좀 차리시고 들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말을 하여야 하니까 자칫하면 오해 할 수가 있으니 잘 이해하고 들으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수님의 사역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성막의 구조부터 봅니다.

성막의 구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보이는 곳은 “뜰”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소를 둘로 구분을 하는데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합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둘이면서 하나에요.

이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려놓은 휘장이 나중에 찢어져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크게 보면 뜰과 성소이지만 세분하여서 보면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어요.

 

이렇게 세 구분으로 하는 것은 모두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막의 세 구분도 예수님이 하실 일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성막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지요.

뜰은 보이는 곳이고, 성소는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근데 성막이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도 보이는 예수가 있고, 보이지 않는 예수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뜰처럼 바깥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서 일하는 것이 있고, 성소 안에서처럼 사람들 눈에 뛰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게 일하는 것이 있어요.

이건 엄청 중요해요.

 

성경은 보이는 것을 역사(歷史)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묵시(?示)라고 합니다.

보이는 것을 육(肉)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영(靈)이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도 보이는 역사에 속한 예수가 있고, 보이지 않는 묵시에 속한 예수가 있겠지요.

육에 속한 예수가 있고, 영에 속한 예수가 있겠지요.

 

이건 예수님이 두 분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보이는 역사에 오셔서 하신 일이 있어요.

그것은 십자가에 죽는 일입니다.

이건 모든 사람들이 다 보이게 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일하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성막의 구조로 말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성막의 뜰에서 하신 일이 되고 성령으로 성도 안에 오셔서 일하시는 것은 성소에서 일하는 것이 되어요.

 

그럼 성막의 보이는 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수님이 육체로서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성령으로 보이지 않게 우리 안에 오셔서 행하시는 일들을 예표하고 있음이 되겠지요.

무슨 뜻인지 잘 이해 하셔야 해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성막의 세 구분은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을 의미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성막 자체가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10장을 보면 율법을 장차 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요 실체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막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수님이 하실 일들을 보여주는 그림자란 말입니다.

그림자란? 원형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 원형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성막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원형이 예수님이 하실 일이란 말입니다.

 

성막의 세 구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으로 풀어봅시다.

 

성막은 세 구분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이 되어 있어요.

이걸 집으로 비유하면 마치 마당과 거실과 안방으로 나누어진 것과 같아요.

 

뜰은 백성들이 드나드는 곳이고!

성소는 제사장들이 드나드는 곳이고!

지성소는 대 제사장만이 드나들 수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뜰과 성소와 지성소에서 행하여지는 일들이 각각 달라요.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어요.

뜰에서는 짐승이 피 흘려 죽어서 태워지는 곳이에요.

 

성막의 뜰에서는 누가 죄를 짓고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제사장은 그 사람의 죄를 제물에게 대신 전가 시켜서 죽여요.

그리고 죄인의 죄를 대신한 제물을 불에 태웁니다.

이걸 번제(燔祭)라고 해요.

 

그러니 뜰에서는 죄사함의 제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해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서 번제물이 되어서 하나님에게 바쳐졌어요.

이 일을 예수님이 보이는 역사 속에서 만인(萬人)들이 보는 앞에서 육체로 하셨어요.

 

그러니 성막의 뜰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성막의 뜰에서 행하여지는 일입니다.

이걸 역사 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의 시제(時制)로 말하면 예수님의 과거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또 중요한데 잘 들으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입니다.

영생 하신다는 말은 시간 속에 가두어질 수 없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예수님을 세 시제(時制)로 말씀을 하세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합니다.

 

시제(時制)란? 시간을 토막 내어서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말을 시제(時制)적으로 말하면 과거(過去)에도 계시고, 현재(現在)에도 계시고, 미래(未來)에도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항상 계시는 분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어요.

 

항상 계시는 분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제와 전에와 장차 라는 역사적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항상 현재(現在)로 일을 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신다는 것을 시간적인 의미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에요.

이걸 시제(時制)로 따지면 이제와 전에와 장차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라는 이제는 현재(現在)이고,

“전에도” 계시고 라는 전에는 과거(過去)이고,

“장차” 오실 자라는 장차는 미래(未來)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현재도 계시고, 과거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분이란 말이 되지요.

맞아요.

예수님은 항상 계셨어요.

이를 영생이라고 하고 또는 영원이라고도 해요.

 

영생이나 영원은 시간 바깥을 말해요.

이걸 성경에선 묵시라고 합니다.

또는 영의 세계라고 합니다.

영생은 역사의 반대말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영원은 시간 개념이 없어요.

시간이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시작과 끝이 없어요.

성경에서는 이것을 오늘 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묵시 속에 계시던 하나님입니다.

항상 오늘로 계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어요.

그리고 전에와 이제와 장차 라는 시간적 개념 속에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 역사적인 언어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로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라는 곳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말씀 앞에서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이미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시고 있으며. 앞으로 행하게 될 사역적인 의미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이 있어요.

우리들의 역사적인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요.

현재 과거 미래로 가는 시간은 없어요.

시간이 오늘 내일 모레로 가지 오늘 어제 내일로 가는 시간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 하실 때에는 현재적 의미로 이제도 계시고, 과거적 의미로 전에도 계시고, 미래적 의미로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오늘 어제 내일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현재를 먼저 말하고 있어요.

 

인간들 세계에서의 논리로 시간 개념을 말하고자 한다면 과거 현재 미래로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 하실 때에는 현재를 먼저 앞세우고 과거와 미래로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논리에 맞지 않아요.

그럼에도 성경은 논리에 맞지 않는 시간 개념으로 말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이건 묵시성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묵시는 항상 오늘이에요.

현재에요.

 

그러니 예수님을 이제도 계시고 라면서 현재(現在)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은 항상 오늘로 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묵시적으로 일을 하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현재성을 말하고자 함이에요.

 

과거에도 계셨고,

장차에도 계시는 분이,

현재 역사 속에서 항상 살아서 현재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현재 입장에서 과거는 묵시에요.

장차도 묵시에요.

그러니 묵시와 묵시 가운데 현재 라는 역사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햄버거처럼 빵이 양 쪽에서 고기를 감싸고 있듯이 묵시가 양쪽에서 역사를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이제도 계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현재화하고 있어요.

이는 예수님은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거에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해서 없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해서 미래에 오시는 분도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란 말이에요.

 

항상 계신다 함은 지금 만물을 주관하고 계시고 역사를 다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알라는 거에요.

예수님이 우리 눈에 안 보여도 항상 우리와 함께 현재로 계신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 믿어지고 의식이 될 때 담대해지고 세상을 이길 수가 있어요.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당하여 죽어가면서 쓴 책이에요.

그러니까 극심한 박해 속에 있는 사도 요한을 예수님이 현재 속에서 너와 함께 거하고 있으니 그 어떤 환란이나 곤고가 닥쳐도 낙심치 말고 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사도 요한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현재성을 보여 주셨어요.

그리고는 교회들에게 알려주라고 합니다.

성도들아 예수가 너희와 늘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환란이나 곤고나 위험이 닥치더라도 소망을 잃지 말고 이겨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앞세워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그럼 이제도 계시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삼직과 절기와 성막으로 살펴봅시다.

 

예수님을 일컬어 주(主)와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았다고 증거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의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다른 말로 메시야 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메시야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서 세운 세 가지 직임(職任)자가 있어요.

선지자(先知者)와 제사장(祭司長)과 왕(王)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 속에 이 세 가지 직임이 다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했으니 예수님의 사역 속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삼직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직도 수행하셨고,

제사장 직도 수행하시고,

왕직도 수행하세요.

 

선지자는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 당하는 직임이고!

제사장은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직임이고!

왕은 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직임이에요.

 

이걸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한 사역으로 말하면 선지자 직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고,

제사장 직은 성령으로 오셔서 성도를 새 언약 가운데 거하도록 돌보는 것이고,

왕 직은 재림하여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사역을 시제(時制)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과거(過去) 사역도 있고,

현재(現在) 사역도 있고,

미래(未來) 사역도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해되지요.

 

예수님은 세 가지 사역을 하셨어요.

그리고 세 가지 시제(時制)로 일을 하고 계세요.

이건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관점에서 말하고자 함입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걸 이스라엘의 절기 속에도 담아 놓았어요.

1년이라는 싸이클은 전 역사의 축소판이에요.

이게 계속하여서 순환을 해요.

역사가 1년 주기로 순환(順換)을 한다는 것은 1년 속에 전체가 다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1년 안에 다양한 절기를 정해 주셨어요.

하나님은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시간표를 알려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정해 주신 절기는 하나님의 시간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창세전 언약을 구현하십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기 속에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을 알고 증거 했어요.

 

골로세서 2장을 봅시다.

 

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보세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월삭이나 안식일이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가 장래 일을 그림자라고 합니다.

누구의 그림자인가 하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합니다.

 

분명히 절기가 있지요.

그러니 절기는 곧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을 보여 주는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절기를 보면 예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실 지가 씨눈처럼 들어 있어요.

 

성령은 이 씨눈 같은 것을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깨닫게 해 주세요.

즉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입은 성도는 모든 성경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은 전부가 율법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했어요.

그럼 우리는 그림자인 율법 속에서 실체인 예수님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림자처럼 있는 율법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상으로 그려내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절기를 통해서 어떻게 그려내셨는지 봅시다.

 

절기를 보면 봄 절기와, 여름 절기와, 가을절기가 있어요.

봄 절기 속에는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어요.

여름 절기엔 칠칠절이라는 오순절과 넉 달 농사 기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 절기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어요.

 

봄 절기에 속한 유월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예표하고 있으며,

무교절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힌 것을 예표하고,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합니다.

 

여름 절기인 오순절은 초실절을 지낸 후 50일째 되는 날인데 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50일째가 되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날을 예표 합니다.

여름 절기 속에는 넉 달 농사도 들어가 있어요.

넉 달 농사는 절기가 아니지만 편의상 절기라고 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세요.

 

넉 달 동안 농사를 짓고 난 후 가을 절기를 지킵니다.

가을 절기 속에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를 역사적인 시제(時制)로 말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됩니다.

 

역사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된 시작과 끝이 있는 한시적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역사 속에서의 일하심도 과거 사역, 현재 사역, 미래 사역이라는 3 시제(時制)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지요.

그래요.

저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들으면 다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럼 절기를 다시 성막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정리하여 말합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은 세 구분으로 나누어졌지요.

뜰과 성소와 지성소지요.

 

이걸 예수님의 3 가지 직임으로 말하면 뜰은 예수님의 선지자(先知者) 직을 말하고,

성소는 예수님의 제사장(祭司長) 직을 말하고,

지성소는 예수님의 왕(王)직을 말합니다.

 

그럼 성막의 세 구분을 다시 절기로 표현해 봅시다.

성막의 뜰은 봄 절기와 같고,

성소는 여름 절기와 같고,

지성소는 가을 절기와 같은 것이 됩니다.

 

이를 다시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과거 사역인 육체로 이루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봄 절기에 해당이 되고 성막으로 말하면 뜰에서 행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역활을 성막의 뜰에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사역은 부활하신 후 성령 강림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일하시는 것은 여름 절기에 해당이 되고 성막으로 말하면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 됩니다.

성소는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일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일을 하세요.

 

그리고 미래 사역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어서 만국을 심판하고 다스릴 것을 말하는데 이는 가을 절기로서 성막으로 말하면 지성소가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는 것은 3직 중에서 왕 직이 되는 것입니다.

헷갈리지만 잘 이해하세요.

 

모든 성경은 다 예수님 이야기에요.

절기나 성막이나 기름 부음을 받은 3 가지 직임자들이나 모두가 다 예수님을 말해주고 있단 말입니다.

이 모두 속에 예수님이 하실 일들이 담겨져 있어요.

 

절기 속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이 담겨져 있고!

성막 속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이 담겨져 있고!

기름 부음을 받는 3 가지 직임자들 속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로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과거 사역이 뭔가요?

십자가에 죽으심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성막의 세 구분으로 말하면 뜰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성막의 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하신 일들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의 뜰에는 흠 없는 제물의 피 뿌림이 있는 곳이에요.

흠 없는 제물이 죽음으로서 죄인이 살아나는 곳이에요.

 

이는 예수님이 육체로 십자가에서 찢겨져 죽으신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자기 백성들이 죄를 사해 주셨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흠 없는 분의 죽음으로 죄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홍수 이후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부정한 것들을 용서 해 주신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홍수로 옛 세상을 멸하시고 새 세상을 만드셨어요.

이 새 세상은 창세전 언약 정신을 담고 있어요.

흠 없는 자가 죽어서 죄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걸 노아 홍수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 이후 노아에게 정결한 제물의 제사를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정결한 제물의 희생을 보시고 이제는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을 흠향(歆饗)하세요.

 

흠향(歆饗)이란? 기쁘게 받으시고 잔치를 베푸신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을 기쁘게 받으시고 잔치를 베푸시는가요?

이는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부정한 자들이 살아나는 창세전 언약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만들어졌어요.

그러니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캔버스와 같아요.

하나님께서 세상이라는 도화지에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을 그리시는 것입니다.

어떤 그림인가 하면 흠 없는 제물이 죽어서 흠 있는 죄인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바로 흠 없는 분이 죽어서 흠 있는 죄인인 자기 백성들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죄가 사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는 것은 창세전 언약의 정점(頂點)이에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화가가 용에 그림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에 눈동자를 그리자 그림이 아니라 용으로 살아난다는 말이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이 만개가 되어서 이젠 생명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입니다.

 

죽었던 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창세전 언약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핵심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성막의 뜰에서 이루어지는 번제를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흠향(歆饗)이 뭐라고 했나요?

기쁘게 받으시고 잔치를 베푼다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하자 영광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받았다는 말은 기쁘단 말입니다.

너무 기뻐서 춤을 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그러지요.

이제 자신이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야 하니 아버지와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화를 다시 갖게 되어 기쁘다고 하잖아요.

내가 죽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기도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성막에서는 향(香)으로 나타납니다.

 

이 향(香)이 피워지는 장소가 성막에선 성소에요.

성막이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다고 했지요.

그럼 성소에서 피워지는 향(香)이 곧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의 모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막 이야기를 하고 향(香)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반복 되더라도 이해하고 들으세요.

성막의 뜰은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 즉 과거 사역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현재 사역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성막의 뜰은 예수님의 과거 사역인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현재 사역은 성막의 성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로서 항상 계시는 분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현재 사역은 무엇일까요?

이걸 성막의 세 장소로 말하면 성소의 사역이 되겠지요.

뜰이 과거 십자가에 죽으신 사역이라고 한다면!

성소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제사장으로 사역하는 것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3 직을 가지셨지요.

선지자 직은 죄를 고발하고 죽임 당하는 사역이에요.

이 사역은 성막의 뜰에서 이루었지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담당 하셨잖아요.

 

그리고 부활하시고는 성소 안으로 들어가셨어요.

이제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기 백성들을 돌보는 사역이에요.

 

선지자는 싸우고 찢고 죽이는 일을 하지만 제사장은 싸매고 평화하고 살리는 일을 하세요.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이 제사장 일을 하세요.

여기에 예수님의 기도가 있단 말입니다.

 

그 기도가 무슨 기도인가 하면 죄인을 용서하는 기도에요.

자기 피로 자기 백성을 지켜 달라는 기도에요.

오늘 본문의 기도가 바로 그 기도에요.

 

이건 지나가는 길에 참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방인과 다른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성도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제사장적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적 삶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고 용서하고 낮아지는 삶이에요.

싸움꾼이 아니라 돌보고 베풀고 섬기는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피로서 용서 받은 자로서 화목케 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의 향기나 나와요.

살아있는 꽃은 반드시 향기를 토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그 속에서 제사장으로 일을 하시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용서받은 자로서의 은혜와 긍휼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는 예수님이 성도의 몸을 성전으로 삼아서 제사장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도 안에서 제사장으로서 은혜와 긍휼을 토해내는 일을 하고 계세요.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사랑을 한다고 하였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그 안에서 일하는 성도에게는 마치 성소에서 피어나는 향(香)처럼 예수의 냄새가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이걸 믿음으로 한 행함이라고 했어요.

이 행함이 없는 자는 죽은 자라고 했어요.

 

성소 안에는 일곱 등불과 떡 상과 향단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등불도 간검하고,

떡 상도 진설하고,

향(香)을 피우는 일을 합니다.

 

제사장들이 이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성소 안에는 피 냄새가 나면 안 되어요.

성소 안에는 24시간 피 냄새를 가리는 향(香)이 피워져 있어요.

지금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 안에서 이 세 가지 일을 하세요.

 

등불을 간검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늘 살펴본다는 말이고!

떡을 진설하고 먹는 것은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뜻이고!

향(香)을 피운다는 것은 기도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제사장으로서 현재 사역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이 되셔서 기도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왜? 우리를 대신하여서 기도하고 계실까요?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바라는 기도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기도 속에는 우리 뜻이 담기면 안 되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만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기도를 하나님께 바쳐지는 향(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 5:7-8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香)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香)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 8:3-4=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香)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기도를 향(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흠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뜻을 몰라요.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뜻만 구해요.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만약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면 끊쳐진다고 했어요.

이걸 성막에서 사용하는 향(香) 만드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그럼 향(香) 만드는 법을 봅시다.

 

출애굽기 30장입니다.

 

출 30:34-3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6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37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38 무릇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에서 쓰여질 향(香)을 만들라고 합니다.

성소 안에서 피워지는 향(香)을 만들게 하신 겁니다.

뜰에는 향(香)이 없어요.

 

뜰엔 피 냄새가 진동해요.

성소에서 향(香)을 피움으로서 성소 안에서는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향긋한 냄새만 나요.

 

하나님께서 그 향긋한 향(香)을 풍기는 그 향(香)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셨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향내를 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향(香)을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진장 중요해요.

향(香)이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럼 기도는 누가 기뻐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듣고 기뻐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들으면 기뻐하실까요?

 

그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면 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서 일을 하시지요.

그럼 하나님이 기뻐하는 말은 창세전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아무 기도를 하면 안 되고 창세전 언약을 위한 기도를 하여야겠지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향(香)을 기도라고 했잖아요.

그럼 기도를 누가 듣기 좋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듣기 좋아야 하지요.

 

아니~ 향(香)을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그러니 기도도 하나님이 듣기 좋아야 하는 것이라야 하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하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기도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좋아하는 향(香) 만드는 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향(香) 만드는 법을 알려 주셨다는 말은 기도하는 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법이란? 약속이 되어진 것으로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요.

주기도문은 나중에 별도로 강해를 하고자 하니 오늘은 패스합니다.

이걸 구약식으로 말하면 향(香)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과 같아요.

 

그럼 향(香) 만드는 법을 봅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준 향(香) 만드는 법을 보면 세 가지 향(香) 재료가 나옵니다.

소합향과 풍자향과 나감향이 있습니다.

 

소합향은 나무 송진처럼 나오는 진액을 말하는데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몰약이라고도 합니다.

풍자향 역시 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인데 이것은 해독제로 사용하였어요.

나감향은 조개 껍질를 갈아서 만든 향품인데 왕이나 귀족들이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도록 지니고 다녔어요.

 

향(香)을 기도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어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하라는 것은 기도 속에 예수님의 것이 담겨져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기도 속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의 하신 일을 근거로 응답을 하세요.

 

그럼 세 가지 향(香) 속에도 예수님의 것이 씨눈처럼 담겨져 있어야 하겠지요.

세 가지 향(香) 속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각각 담겨져 있겠지요.

세 가지 향(香) 재료를 예수님의 사역적인 의미로 살펴봅시다.

 

소합향은 나무 송진처럼 나오는 진액을 말하는데 몰약이라고도 했지요.

몰약은 죽은 시체에 바르는 거에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몰약으로 예수님 시신을 처리하였지요.

이건 예수님의 삼직 중에서 선지자로서 죽임당하는 것을 상징해요.

 

풍자향은 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인데 이것은 치료하는 해독제로 사용하였다고 했지요.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모든 죄로부터 용서 받는 것을 상징해요.

이를 예수님의 삼직으로 말하면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 뿌림으로 사단의 참소를 막아주고 성도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령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나감향은 조개 껍질로 만든 향품인데 왕이나 귀족들이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조개 껍질로 목걸이를 만들어서 존귀하신 분들이 걸고 다녔어요.

이는 예수님의 왕 되심을 상징해요.

 

이렇게 되면 세 가지 향(香)은 예수님의 3 가지 직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지요.

이 3 가지를 동일한 중수로 골고루 섞어서 향(香)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성령으로 다시 오심과 우리 안에서 왕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잊지 말고 항상 현재화 시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기도는 예수님 공로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향(香) 만드는 법대로 만들라고 하지요.

어떻게 만듭니까?

각각 동일한 중수로 만들라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지 말고 항상 현재화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 안에서 죄를 책망케 하는 선지자 역할도 하고 있고!

우리 죄를 사해 주는 제사장 역할도 하고 있고!

또한 우리를 다스리는 왕으로서도 일을 하세요.

 

그러니 성도는 천국에 서기관들처럼 옛 것과 새 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듯이 삼직으로 일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십자가 피만 외쳐도 안 되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만 강조하여서도 안 되고!

또한 예수님의 재림만 외쳐도 안 되어요.

 

이 모두를 조화롭게 하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중수로 향(香)을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도 귀하고,

성령으로 일하심도 귀하고,

재림도 귀해요.

 

십자가도 복음이고,

성령의 오심도 복음이고,

예수님의 재림도 복음이에요.

 

그러니 복음을 말하면 이 세 가지를 다 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면 안 되어요.

믿음 속에는 이 세 가지가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도 등한시 하면 안 되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이 다 들어가 있어요.

십자가 피도 믿어야 하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일하심도 믿어야 하고!

장차 다시 오시는 재림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과거 사역인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우리 죄가 속해 졌다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현재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일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장차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이 모두를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이러한 것이 동일한 중수로 향(香)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향(香)이라야 여호와를 위한 거룩한 향(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香)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몽땅 담겨져 있는 향(香)이에요.

예수님에 것만 담으란 말입니다.

 

예수님에 것 말고 그 이외 다른 것이 담기면 여호와를 위한 향(香)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향(香)이 되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담겨져 있지 않는 향(香)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향(香)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향(香)이 되어요.

그런 향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어요.

이런 자는 끊쳐진다고 했어요.

 

그래서 너희를 위하여 향(香)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너희를 위하여 만들면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진다고 하지요.

이는 언약을 모르는 자기 백성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놈은 이방인으로 간주하겠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뜻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기도도 하나님 뜻을 위해서 하여야지요.

언약을 위하여 기도하여야지요.

그래서 만약에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 놈은 자기 백성 아닌 자로 간주하여 죽여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무섭지요.

이렇게 되면 기도는 아무나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겠지요.

그래요.

기도는 아무나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제사장들만 기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만이 알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는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자기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세요.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10-13=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분이라고 하지요.

통달하신다는 말은 하나님 마음을 아신단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요.

성령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하세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들을 알게 하세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어요.

 

이것이 사람의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알게 된단 말입니다.

성령이 분별케 해 주세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 대신 일을 해 주세요.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성도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도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령이 우리 대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요.

이러면 출애굽기 30장에서 향 만드는 법대로 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에서 끊쳐져요.

 

아니 예수님께서 피 흘려서 구원해 놓은 자가 기도 잘못해서 끊쳐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수님이 직접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대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곧 예수님이 오신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러 오셨어요.

그러니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과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성도 안에 오신 것을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고 동의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를 책임지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3 가지 직임 중에서 제사장 직분을 우리 안에서 현재 사역으로 행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절대로 끊쳐지지 않아요.

성도는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 누구도 예수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맨날 엉터리로 기도해요.

우리 소원 이루어달라고 해요.

하나님 뜻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기도를 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향로에 담아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린 맨 날 틀린 놈으로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사나 죽으나 우리 몸에서 예수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죄를 깨닫게 되어요.

아까 향(香)을 만들 때 유향을 섞고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하지요.

그러니 소금을 쳐서 성결케 하라고 하였잖아요.

 

유향은 말씀을 상징하고!

소금은 언약을 상징해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언약을 상징해요.

그러니 향(香)에 소금을 치라는 것은 기도 할 때 하나님 언약에 의지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뭔가요?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예수님 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해지는 것이잖아요.

 

쉬운 말로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시잖아요.

무어라 기도합니까?

자기의 죽음으로 살려낸 자기 백성을 지켜달라고 하잖아요.

 

뭔가 든든하지 않나요.

야! 우리가 대단한 존재들이구나!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든든한 생각이 들어야 해요.

야! 이거 구원이 장난이 아니구나!

구원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장난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창세전부터 계획된 일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면서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무엇을 구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요.

만약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기도라고 한다면 얼마나 많이 정성스럽게 하였는냐 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나 소용이 없겠지요.

 

기도는 양과 정성의 문제가 아니에요.

오로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기도를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는 기도를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럼 기도 많이 했다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코미디처럼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자랑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기도란? 나는 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기도 많이 한 것을 자랑할 수 있는가요?

없어요.

 

그런데도 기도 많이 한 것을 훈장처럼 자랑하고 있어요.

기도 많이 하는 것으로 신령한 척 한단 말입니다.

교인들도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 간에 기도 많이 하는 경쟁이 생기게 되었다구요.

 

아~ 웃지 못할 코미디여!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무지하다는 말입니다.

기도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함은 하나님께서는 아무 기도나 받지 않는다는 단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는 우리 뜻대로 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 됩니다.

이건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다릅니다.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신에게 빌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빕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다시 살펴봅시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지요.

구한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 하신 대로 라고 한다면 기도는 누가 하느냐?

예수 안에 거하는 자라야만 할 수 있어요.

또한 예수님의 말이 그 안에 거하여야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약입니다.

그럼 기도는 언약을 근거로 하여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즉 기도는 언약을 위하여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의 대표적인 기도이지만!

겟세마네 기도도 있습니다.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하신 기도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시고 십자가를 지는 길로 나섰습니다.

 

이로 보건데 예수님의 기도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서입니다.

언약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 언약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언약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는데 자기 백성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은 죄 아래 있습니다.

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케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그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그 기도의 의미대로 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아요.

죄인이 기도하면 죄인의 수준에서 기도 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만 들으세요.

 

그런데 성경은 세상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의인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기도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걸 중보자라고 해요.

중보자란? 중간에 서서 연결시켜 주는 분이란 뜻이에요.

마치 부동산 중개업자와 같아요.

 

그러므로 아버지에게는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만이 기도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지금 중보자가 되셔서 성도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중보자는 하나님이 세운 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보자로 세우신 분이라야만 해요.

그 분이 누군가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이 기도 할 수가 있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만 받으세요.

 

이 사실을 아는 자가 바로 영생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이 창세전 언약을 성취할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고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중보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영생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건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십시다.

 

오늘은 참으로 난해한 공부를 했습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여서 헷갈릴 수가 있어요.

그러니 한번 읽고 끝내지 말고 읽고 또 읽어서 잘 소화하여서 여러분의 양식으로 삼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신 것을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대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고 계시니 고맙습니다. 이 사실이 찬미가 되고 감사로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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