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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위기 20장 13절) ©연합 |
기독교 내부에서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여러 가지 시각차가 존재할 수 있다. 아마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이 제기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담 혼자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 하와를 만들었으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 땅에 그의 자손들을 번성하고 생육시키기를 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성애라는 행위는 이러한 번성과 생육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것이고 따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일반 성도들을 위한 가장 원론적인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금은 원론적인 주장만으로 동성애 문제를 판단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가령, 그렇다면, 독신의 문제나 피임 문제의 경우 모두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경우가 될 터인데, 독신이나 피임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정죄가 없으면서, 왜 동성애에 대해서만 유독 정죄를 하느냐고 하면 이 원론을 가지고만 답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론을 뛰어 넘어, 성경은 과연 동성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동성애를 말하고 있는 구절은 창세기 19장 4-5절, 레위기 18장 22절, 레위기 20장 13절, 로마서 1장 26-27절, 고린도전서 6장 9절이다. 이 구절들의 해석에 대한 양측 입장, 즉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과 그것을 옹호하는 입장의 해석을 살펴봄으로 현재 성경적인 동성애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 원문은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겠다.)
창세기 19장 4-5절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이 구절은 바로 천사가 소돔성에 살고 있는 롯을 방문하자, 그 소돔성의 주민들이 천사를 내 놓으라고 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이 일 후에 롯은 가족과 함께 소돔성을 탈출하며,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게 된다는 잘 알려진 성경의 부분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상관’이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야다’라는 히브리 원어의 번역으로, 이 단어는 구약에서 ‘직접 보아서 확인하다, 알다,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주로 ‘알다’란 의미로 사용되었지 성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로 사용되는 경우는 적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다’를 ‘낯선 사람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자’는 형태로 해석한다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동성애와 같은 성적 타락이 아니라 롯 가정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당시 근동 지방의 관습이던 손님 환대를 무시했다는 것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후에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언급하는 구절들이다. 이사야는 ‘위선과 사회적 불의(사 1:10)’를 지칭할 때, 예레미야는 ‘간통, 사기, 사악함(렘23:140)’, 에스겔은 ‘교만, 탐욕,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겔16:49)’을 염두에 두고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동성애였음을 지적하는 이들은 ‘소돔(sodom)’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소도미(sodomy)'는 동성애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두 딸’을 언급하는 창세기의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분명 동성애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 18장 22절, 20장 13절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 구절에 대해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구약의 제사법과 같은 의식에 관련된 율법은 신약에 모두 철폐되었기 때문에 그 근거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그런 식으로 한다면, 강간, 근친상간, 수간과 같은 것도 모두 허용가능한 것이냐고 되묻는다. 또한, 동성애의 문제는 구약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언급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로마서 1장 26-27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바로 ‘역리’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역리’라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동성애라는 성적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이성애를 하는 것이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다른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이 죄라는 해석한다.
이에 반하는 동성애 비판론자들은 당시의 바울이 현대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성과 같은 복잡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고 보는 것은 조금은 과장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단순하게 생물학적인 성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 9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당시의 고린도는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당시에 남성 매춘과 아이와 어른간의 동성애인 패더래스티(pederasty)가 성행하는 도시였다. 즉, 여기서 말하는 ‘남색’은 남성 매춘이나 패더래스티와 같은 특정한 형태의 동성애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지, 일반적인 의미의 모든 동성애를 포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주장한다.
이와 반대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탐색’을 수동적인 동성애로 ‘남색’을 좀 더 능동적인 동성애라 해석하며, 따라서 이 구절은 동성애 전체에 대한 거부라고 해석한다.
동성애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러한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아직은 어떤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분명한 것 중 하나는 성경은 동성애에 대하여 그리 긍정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이다.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해석은 아직 지엽적이며, 맥락적인 지지를 얻기가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곧 동성애자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로 이끈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가령, 일각에서는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인가, 아님 길러지는 것인가의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인 문제에 더 가깝고, 현대에 이르러서 그것은 더 이상 정신병으로 분류가 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선천적일 가능성도 높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선천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동성애의 성향을 가진 이들을 무조건 비판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여기서 바로 동성애자와 동성연애자를 구별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동성애자는 말 그대로 동성에게 끌리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라면, 동성연애자는 그것을 성적 행위로 옮기는 자들이다.
다음으로, 동성연애에 대하여 성경이 부정적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그것의 강도를 어느 정도에 둘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가령, 성경은 정직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분명 가끔식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성경은 죄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살아가며 죄를 짓고 있다. 문제는 동성애라는 죄가 과연 돌이킬 수 없는 죄인지,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죄인지의 판단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성연애라는 것과 동성연애자는 구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죄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분명 그들을 모른 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을 이 사회나 교회에서 소외시키는 행위는 분명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결합시킬 때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는 가지각색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동성애 자체를 죄가 아니라고 취하는 입장도 가능할 것이며, 그것이 죄이지만 여타 일상의 죄와 다름이 없고, 그 죄인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도 가능하다. 또한, 그것이 죄이고 또한 돌이키지 않는다면 습관적 죄이기 때문에, 분명 성도로서는 가능하되 교역자로서는 하자가 있다는 입장도 가능할 것이다. 현재 동성애에 관한 논의는 따라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 중 하나는 분명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이해가 적으며, 수많은 오해가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기독교도들은 동성애에 대하여 궁금해하지만, 정작 물을만한 곳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껏해야 동성애자들을 무조건 에이즈와 연관시키거나, 하리수와 같은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트랜스젠더는 동성애자와 또 구별된다). 본 지에서는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연재기사를 기획했다. 그 기사들은 현재 우리나라에 퍼져 있는 동성애자들의 문화를 다루기도 할 것이며, 그들의 신앙을 다루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 일차적 목표이고, 다음으로는 동성애자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들도 분명,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할 사람이며, 그들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한 정죄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정죄가 수많은 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내 모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범인기자,visionor@hanmail.net(구굿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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