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범학교 항일비밀결사 ‘다혁당’ 당수 권쾌복
대구사범학교에서 일본인의 차별을 마주하다
권쾌복(權快福, 1921~2009년)은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현재의 구미시) 시미동 출신으로 권상근(權相瑾)의 셋째 아들이다. 권쾌복은 어려서 밀양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고, 1937년 밀양공립보통학교(密陽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권쾌복은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모습을 보고 대구관립사범학교(大邱官立師範學校) 심상과(尋常科)에 입학하였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사범학교 교육을 정식 중등교육기관으로 강화하려는 의도로 학교관제를 개정하고 사립대구사범학교를 대구관립사범학교(大邱官立師範學校)로 전환하였다. 권쾌복는 대구사범학교에 배학보, 유흥수와 같이 입학하였는데, 권쾌복이 입학한 1930년대 후반 이 학교에는 전국의 뛰어난 능력의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학교의 입학경쟁률은 평균 8~10대 1 정도였고 학생과 학부모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1937년은 일제 침략전쟁의 서막이 오른 시기로 이때 권쾌복은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민족차별의 분노가 폭발한 ‘왜관사건’
1938년 수업연한 2년의 연습과(演習科)가 대구사범학교에 새로이 설치되었다. 연습과는 중학교 5학년 졸업생이 입학하는 제1종 훈도양성제도로 대부분 대학 진학이나 취업하지 못한 일본인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학교 당국은 연습과가 설치된 후 조선인 학생 중심 심상과를 하급(下級) 취급하여 차별하며 무시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일본인 학생 사이에 마찰이 더욱 빈번해졌다. 학생들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불만은 1939년 ‘왜관사건’으로 폭발했다.
여름방학 동안 사범학교 학생들은 강제로 군수 물자 생산·수송을 위한 노동에 동원되었다. 대구사범학교는 1939년 경부선의 철로 복선화 구간 중 왜관철교부터 약목까지 작업을 할당받았다. 여름방학 동안 학교 당국은 전·후기 두 차례 학생을 동원하여 철도 둑을 쌓기로 하고, 7월 하순에 심상과 4, 5학년과 연습과 1, 2학년을 먼저 동원하였다. 작업 도중 학생 사이 충돌이 있었는데 학교 당국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에게 유리하게 처리하였다.
이러한 사안처리에 학생들은 평소 민족 차별을 서슴지 않는 일본인 교사의 응징을 결의하고, 숙소에 있던 일본인 교사를 집단으로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학생 7명 퇴학, 11명이 정학 처분이 내려졌다. 1939년 8월 후기 노동에 동원된 권쾌복, 유흥수, 배학보는 왜관 심상소학교 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동기생 20여 명과 왜관사건 진상을 공유하며 대책을 논의하였다. 권쾌복과 학생들과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 행동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백의단(白衣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백의단은 권쾌복이 단장, 배학보가 부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백의단은 즉흥적으로 조직되어 지속되지 못하였다. 비밀결사에 대한 치밀한 준비와 명확한 인식 없이 왜관사건의 실상을 알고 난 후 울분에 찬 나머지 즉흥적으로 조직을 결성했기 때문이었다.
칠곡 권쾌복 대구사범학교(사진출처:현충시설정보서비스)
칠곡 권쾌복 대구사범학교(사진출처:현충시설정보서비스)
독립운동을 다방면으로 펼치다
대구사범학교에 1936년에 입학한 8기생이자 4학년인 박효준(朴孝濬)과 강두안(姜斗安), 이태길(李泰吉) 등은 독서 모임 성과를 모아 1940년 『반딧불』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반딧불』은 200부 정도 발간되어 8기생 대다수와 9기생 일부에게 배부되었다. 이처럼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강화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항일운동을 준비하여 나갔다. 1940년 유흥수 등은 문예 활동을 표방하며 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하였다. 문예부는 성과물을 잡지 성격의 『학생(學生)』을 발간하였다.
문예부는 활동 주도 5학년의 졸업이 다가오면서 조직 존속 여부를 논의하고 졸업생은 현직에서 활동하고, 재학생들은 부원을 확대하여 활동을 이어가기로 하였다. 문예부가 활동하던 무렵 1941년 1월 임병찬(林炳讚) 주도의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가 조직·활동하고 있었다. 연구회는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5학년으로 조직되어 존속 문제에 직면하였다. 모두 5학년 학생으로 구성되었기에 재학생을 확보하지 않으면 존속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유흥수는 문예부에서 함께 활동하던 문홍의, 이동우 등과 협의한 결과 새로운 동지 규합을 통하여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다혁당의 당수가 되다
1941년 2월 중순 유흥수는 권쾌복, 배학보 등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새로운 비밀결사 결성을 제안하였고 권쾌복, 배학보가 이를 받아들였다. 1941년 2월 15일 유흥수와 이주호의 하숙집에 유흥수, 권쾌복, 배학보, 조강제, 이홍빈, 이주호, 박호준, 문홍의, 이도혁, 이동우, 문덕길, 최영백(崔榮百), 서진구, 김성권(金聖權), 이종악(李鍾岳), 최태석(崔泰碩), 김효식(金孝植), 이홍빈(李洪彬) 등 17명이 모였다. 문홍의가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을 제안하였고 모두 동의하여 ‘다혁당(茶革黨)’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권쾌복은 백의단에서 보여준 능력으로 당수를 맡았다. 다혁당은 문예부와 연구회 활동을 계승하고 활동하였다.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전국 곳곳에서 대대적인 다혁당 관련자 검거가 시작되었다. 권쾌복은 8월 말 포항에서 군사 훈련을 받던 중 체포되었다. 다혁당 관련자는 1941년 12월 예심에 35명이 회부되었는데, 비밀결사 사건으로서는 이 시기 가장 큰 규모이다. 권쾌복은 다혁당 당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권쾌복은 광복 후 언론계에 몸담았고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권쾌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광복회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