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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 그 주체는 누구일까?
대륙문화, 중원내륙문화, 요동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주체가 누구인가는 전문가조차도 추정할 따름이지 쉽게 밝혀질 사항은 아닐 것이다.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상층 문화의 주체는 동호의 것이라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물론 중원북방의 세력을 호라고 보고 동쪽의 호를 동호라고 보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으나 동호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전국말기 흉노의 동방에 등장하는 세력을 동호라고 불렀으므로 하가점 상층 문화의 시기가 서주말 춘추초에 해당 되므로 동호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동호의 선조라고 하는 춘추시대의 산융이 하가점 상층 문화의 주체였을까? 비전문가가 생각하기엔 하가점 상층 문화의 주체는 산융일 것으로 사료되어 진다. 산융이라는 종족명칭을 살펴보면 방위상으로 구분된 서융도 아니고 북적도 아니고 북융이다. 산융이라는 족속명에서 방위상 종족 구분의 개념이 어긋나고 있으므로 그 출처를 따지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산융의 후예가 흉노,동호 등이었을 것이고 대륙 문화적 성격을 지닌 종족 정도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가점 상층 문화가 하가점 하층 문화와 지역적으로 동일한데 반해 하층문화 보다 유목적 성질이 다분히 나타난다고 하니 산융이 융인지, 적인지 알 수는 없으나 산융이라는 대륙 문화가 요서지역으로 유입된 것 만은 분명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산융의 근거지는 어디였을까? 산융이나 동호는 연의 동방이 아닌 연의 북방이다.
흉노가 동호를 격파하고 상곡에서 좌방왕을 배치한 것을 보면 난하 상류 일대가 근거지 일 것 같다. 산융이나 동호의 근거지는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난하 이동 지역으로 멀리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 문헌상의 기록이 잘 못 된 것이 아니라면 산융이나 동호는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영역의 변두리 세력이 된다.
주로 호와 맥(락)은 연칭하여 사용이 되는데 호는 중원 북방 거주족, 맥은 동방 거주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춘추시대 산융일파가 주나라 제후국과 대항하였던 역사를 호맥(락)이 연합하여 주나라 제후국을 침범하였다가 제환공에게 퇴각하는 기록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이는 진북에 있었던 임호 등과 같이 호가 북방 세력이고 전국시대의 동호는 춘추시대 산융일파 중 북방의 호가 동호가 되었던 것으로 사료되어 지는 바이다.
제환공이 산융일파를 격파하면서 무종, 고죽, 영지등을 격파 하는데. 고죽, 영지등은 난하 하류에서 대능하 일대의 거주 세력이다. 따라서 고죽, 영지등이 호(맥)락의 연칭과 대치해 보면 맥과 관련이 있고 무종은 호와 관련이 있는 나라 일 것이다.
일단 산융일파의 호가 대륙문화를 담당하였으므로 요서지역의 하가점 상층 문화중에 유목적 성질이 나타나는 것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중원내륙 문화와 요서지역의 하가점 상층 문화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고죽국은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고구려의 원씨 족속이었다는 배구전의 기록을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고죽국=맥족=고구려 건국 이라는 연결고리가 형성 되는 듯 하다. 그러나 왠지 동북공정의 내용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대능하 일대에서 대륙문화의 유물과 문헌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으므로 관련된 기록을 살펴 보자 먼저 의문이 가는 부분은 은나라가 멸망하자 은나라 혈족인 기자가 단신으로 가서 고조선 왕이 되었다.(고조선은 병신 인가) 고죽국이 고구려의 족속이기 전에 은나라의 제후국이 대능하 일대에 왜 존재하는가?
문헌 기록을 진위 여부를 가리기 전에 기록 자체부터 확인 해 보자?
1)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멸망 한 후 2차 대 반란이 있었다.
2) 1차 반란은 은나라 왕조가 주도하고 엄국, 회이등이 참여 하였다.
3) 2차 반란은 서언왕이 주도 하였다. 서언왕은 서이족의 왕이고 영성(嬴姓)이다. 회수일대 오백여 리를 점령하고 주위의 30여 제후국의 옹립을 받아 왕이 되었다. 엄국(奄國)은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 동쪽에 있었던 영성(嬴城)의 제후국인데 1차, 2차 반란의 실질 세력은 비슷한 족속이었던 것 같다. 결국 1,2차 반란이 모두 진압 되었는데 이 후 이들 세력이 북상하였다고 한다.
동쪽지방의 이족을 동이족이라고 하고 서쪽 지방의 이족을 서이족이라고 하는데 서이족은 서융이다. 서언왕은 동이족의 왕이라야 할 것인데 서이족(서융)의 왕이라고 했다. 환상적인 고조선설을 믿지는 않지만 기록된 바를 파악하면 환상적인 고조선설과 비슷해진다. 문제는 그 기록이 환단고기가 아니라 사기의 본기 내용이다.
진시왕의 진나라는 서융지역에서 출발 하였고 진나라 왕의 조상은 서융왕의 아들이다. 그리고 진나라와 조나라 왕의 성은 영성이다. 서융왕의 아들이면 서융인이고 서이족인데 성씨도 서언왕과 똑 같은 영성이다. 이족 세력은 하나이고 방위에 따라서 서이,동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환상적인 기록과 유사한데 그 유사성의 이유는 추론을 잘 해서 유사한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록 그 자체 인데 왜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는 모르겠다.
이 기록에 따라서 파악하면 산융이라는 족속명도 납득이 약간은 간다. 북쪽에 거주하지만 북융(산융)이 되었던 것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융(견융)의 동진에 따른 융적 세력이 동반하여 동진하였는데 이러한 융적세력의 동반 동진에 따라서 북방에 서융-북융(산융) 세력이 유입되었고, 또한 서언왕 일파가 북상하였는데 서언왕의 서이족이 동류이면서 중원의 공동 저항 세력이라서 세력 마찰 없이 결합하여 북융(산융) 세력을 형성하였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파악할 경우 고죽,영지등은 북상한 서언왕 일파로 파악할 수 있고 무종은 대륙의 북융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산융이라는 족속명의 형성이 당혹스러워 적어본 것인데, 믿지는 않는다.
은나라 일파인 산동의 동이 일파중 주나라에 대항하였던 세력의 일부가 북상하여 고죽국 정도의 규모로 주나라 일파에게 대항하였을 가능성 정도는 충분히 있을 것 같고 이러한 이유로 난하일대에 중원내륙문화가 유입되지 않았나 싶다.
인제, 여기서 고조선과 관련성을 따져 보자
하가점 상층문화를 담당하였던 주체 세력이 산융(고죽,영지,무종) 일파라면 하가점 하층 문화를 담당하였던 고조선은 산융일파에 의해 요서지역에서 축출 되었던 것이 된다. 이렇게 될 경우 고조선의 주적은 산융일파인데, 고조선은 산융과 사이가 아주 좋았다고 보아야 한다. 제환공에게 격파 된 후 산융일파는 잠시동안 와해 되었는데, 고조선은 요서지역의 세력을 전혀 넘보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동호가 형성 될 때까지 잘 참아 주었다가 동호와 함께 연나라 대응의 공동전선을 형성한다. 이러한 역사 전개 과정을 살펴 보았을때 하가점 하층 문화의 담당자 였던 고조선은 하가점 상층 문화의 담당자 였던 산융일파에게 격파되어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으로 축출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대능하 하단의 중원 내륙문화와 난하 상류의 대륙문화는 하가점상층문화의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 지역이다.
대능하 상단부에서 노합하일대의 하가점 상층문화를 고조선으로 파악하고 대능하 하단으로(발해북안인접)으로 고죽국등은 중국내륙문명이(동이북상) 유입된 것으로 파악하고 난하 상류일대 이서지역은 대륙문명(산융)이 유입된 것으로 파악하여 요서지역의 하가점상층 문화를 형성하였던것이 아닐까 추론해본다.
환상적이 고조선설을 찬동할 경우 홍산문화가 고조선의 선 문명이며, 홍산문화의 후인이 남하하여 산동의 동이를 형성하였고 이족의 또 한 무리는 서융을 형성하였기에 산융,고죽,고조선의 결합은 별 무리가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주나라 일파의 중원 세력이 계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변족속들이 연합하여 대응 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연합전선에서 문화의 유입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산융일파가 제환공에게 격파되고 동호가 등장하기 전까지 요서지역으로 고조선의 요서선점 움직임은 전혀 없었으므로 산융과 동호가 고조선의 일파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고대국가가 수많은 족속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 졌던점을 감안하면 맥족중심의 요서지역 고조선의 여타 부족 세력과 중원문명의 관계기록이 전해 지면서 전체 요서지역의 문명을 산융이나 동호로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난하 상류일대에 거주하였을 산융의 족속을 융이나 적이니 하는 것보다 북방의 호로 파악하고, 난하 하류이동지역에서 대능하 일대에 거주하였을 고죽이나 영지등을 중원내륙문화로 파악하였을 경우 이 두세력은 모두 이주세력이며 이주시기도 하가점 상층문화의 개시시기와 유사해진다. 두 이주집단이 어떤 매개도 없이 연맹세력을 형성하여 주나라 일파에게 대항하였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분명 진행되었던 역사이다. 북방의 호와 대능하 하단의 고죽을 매개로 하였던 요서 중심부의 문명을 맥의 문명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
주나라 제후국중 최고 동북방의 나라는 연나라이며 연나라와 인접하여 산융,동호,고조선등이 있었다. 제나라는 산동의 동이를 제압하면서 이룩한 나라이라면 연나라는 동이중 어떤 족속을 멸하면서 성립된 나라였을까?
추와 맥은 엄수 북국인데, 연나라는 추족과 맥족이 사는 북쪽을 다스리는 제후가 되었다고 하였다. 연나라가 맥족을 제압하면서 이룩된 나라이라면 맥족은 원래부터 연나라와 그 동북방에 분포하였다가 일부는 연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일부는 동북방에서 호와 연합하여 연나라와 주나라 일파에게 대항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론해본다. 연나라 위만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할때 조선인의 복장을 하고 상투를 틀고 들어 왔다고 했다. 위만이 바로 연나라에게 복속하였던 맥인은 아니었을까? 역사에 기록된 망명인중에 족속을 숨기면서 망명한자가 있었던가? 후대에 까지 족속을 숨기면서 망명한자는 없었던것으로 알고 있다 연왕 노관이 흉노인인것처럼 해서 흉노지역으로 망명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위만 또한 조선인인 것처럼 위장하여 망명할 필요가 없었던 시대였다. 위만이 맥인이라서 그의 복장이 맥인의 복장이었다고 주장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엄수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산동성 일대 일 것이고 엄수 일대에 엄국이 있었다면, 엄국이 영성의 제후국으로 서언왕이 영성이므로 동이 1차 반란에 참여 하였고 동이 2차 반란의 주동국이 되었을 것 같은데 엄국(엄수)의 북쪽에 맥족이 있었다고 하며 맥족을 제압하여 연나라가 형성 된것이니 연나라 봉지를 받았던 소공이 동이 진압에 주공과 선두에 섰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대륙동이의 반란 집압 후 맥족 고지는 대륙동이가 이동해 들어올 충분한 사유가 있는 땅이었다.
고구려 건국초기 맥족중에 고구려에 위협적인 맥족이 있었는데 양맥족이라고 한다.
양맥족은 고구려의 서쪽에서 거주하는 세력이었는데, 고구려를 요하 동쪽의 나라이라고 확정지으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 동쪽으로 확정 짓는 것 또한 하나의 추론이지 정답은 아니다. 일단 양맥을 대능하 일대의 거주세력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의견을 쫒아 양맥족을 살펴보자. 양맥족과 숙신은 고구려 건국후 모용선비가 등장하기 직적까지(280년) 고구려의 골칫거리였는데 모용선비가 등장하고 부터는 양맥족의 세력은 등장하지 않는다. 양맥이 고지가 대능하 일대가 확실하다면 모용선비가 양맥을 흡수하여 성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용선비는 난하일대에서 위나라와 연맹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그들의 누린 전리품은 군사력이 될 수 없었다. 우문선비,단선비등 그 어떤 세력도 모용선비의 군사력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모용선비 혼자서 부여도 침공하고 고구려와 선비 연명과도 대립한다. 모용선비가 대능하의 양맥과 결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양맥은 고구려가 1세기 초반에 정복하였고 2세기 중후반 까지 통치한 기록이 있는데 공손씨의 요동정권기에는 양맥의 기사가 보이지 않고 요동정권이 무너지자 양맥고지는 위나라와 고구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대능하 일대에 양맥골짜기로 비정될 만한 장소가 없다면, 문제가 있는 가설 같기는 하지만 양맥의 근거지를 대능하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들이 있어서 언급해 보았다. 물론 요하동쪽의 천산산맥을 양맥고지로 파악한다면 전부 헛소리에 불과하다.
동이족은 9개의 종족으로 구분되는데 그중 고조선의 주체가 되는 동이족은 양이(良夷)족으로 양이(良夷)는 또한 낙랑(樂浪)이라고도 불린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한 후 한사군을 설치하는데 군현의 명칭은 민족의 이름을 그대로 좇아서 따왔다. 낙랑군(樂浪郡)도 예외가 아닌데, 그 땅에 낙랑이(樂浪夷)가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낙랑군의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고대 종족을 처음에는 동이족이라고 불렀다가, 한민족의 고대국가가 형성될 시점에서는 예맥족이라고 불렀다. 예맥족중에 양맥(梁貊)족이라는 강력한 세력이 있었다. 양맥(梁貊)의 “梁”은 良夷의 “良”과 같은데 발음이 비슷하여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양맥(梁貊)은 양이(梁夷) 또는 양이(良夷)가 된다.(동북고민족 발전사 인용 및 혼용)
위만에 의해 몰려난 준왕의 세력이 낙랑이로 불렸다면 준왕의 일파가 한반도 일원으로 도망가서 낙랑국을 형성하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양맥위치=고조선=낙랑군등이 등치되고
양맥점령 1차 고구려
양맥점령 2차 공손정권 자립
양맥정령 3차 모용선비
이정도의 등치는 상상력이 풍부한 가상이라고 할지라도 문헌기록을 토대로 파악해보면 대능하 일대에는 동이족중 맥족이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엿보인다.
물론 맥족이 이족이었다는 것을 확인하였지 맥족이 고조선이었다는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맥족을 산동의 동이로 파악하고 고조선을 요하이동의 동이라고 파악한다면 맥족과 고조선은 전혀 관련이 없게 된다. 하지만 맥족이 고조선이 아니었다면 맥족의 고조선 영내로 동진할시 고조선 문명의 거부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과 하가점하층 문화의 담당자 였던 고조선이 하가점 상층문화의 담당자 였던 요서지역과 철천지 원수가 아닌 연맹세력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가 하가점 하층문화를 기저로 하지 않고 요하동쪽에서 자력갱생 하였고 요서지역과 문명의 일정 유사성은 교류를 통해 전파된 것이라고 한다면 요하동서는 단지 우애 좋은 연맹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문명이 교류되었다면 생산력 기반의 문명이 유사하여야 하지 비파형 동검 같은 무기류를 선행하여 문명이 교류되었다는 것은 쉽게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일것 같다. 하지만 고조선시대의 요하는 난하였다는 기록과 난하일대가 요동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난하이동의 대능하 일대에 고조선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여는 고조선과 관련이 없는가? 부여가 고조선의 제후국이 아니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부여의 선문명이 자생한 것이 아니라면 대륙 보다는 홍산문화의 후인이 이주하여 부여의 청동기 문화를 일으켰다고 보아야 한다. 자생설이 맞는지, 홍산문화의 후인이 이주하여 형성한 것인지는 역시 비전문가가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단지 부여의 선 문화를 예족의 문화라고 했다. 원래 예족의 땅이고 예족의 성이 있고, 예족왕의 옥쇄가 있는 곳이 부여지역이다. 이는 고조선의 예족이 부여의 청동기문화를 주도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기록이다. 그리고 흉노의 동호 격파에 따라서 맥족이 동방으로 이주하였고 그 결과 예맥을 형성하여 부여와 고구려를 형성하였던 것이 일반화된 견해이다. 예족과 맥족을 고조선과 싹뚝 짤라 내버릴 수 없다면 고조선과 부여가 무관하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족속적인 관계에서는 무관할 수 없으나, 국가 형성 차원에서는 가능성이 있는 견해 이다. 고조선시대에 부여도 공존 하였으므로 부여가 고조선의 제후국이 아니었다면 고조선과 별도의 국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