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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➆] 조천읍 항일 정신과 4·3 상처 스며있는 역사의 마을 고경호 기자 <제민일보> 2014년 06월 12일
▲옛 제주의 관문이었던 조천포구와 연북정의 모습
'옛 제주 관문' '독립운동 진원지' 등 향토사의 보고 수려한 경관 및 열녀·조천석 등 다양한 스토리 넘실
한라산 북동쪽자락에 위치한 제주시 조천읍은 30여개의 오름과 곶자왈, 고즈넉한 포구와 아름다운 해변 등 수려한 자연경관 뿐만 아니라 옛 제주의 관문이자 3·1 독립운동의 진원지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지역이다. 전통문화의 계승지이자 감귤·채소·원예 등 도시근교 농업이 발달한 조천읍의 마을별 지명 유래를 들여다보자.
유서 깊은 마을 신촌리 조천읍 서쪽에 위치한 신촌리(新村里)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신촌현(新村縣)'으로 불리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신촌리는 예부터 '새을'로 불렸으며 본동과 동수동 등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마을에서는 △돌코짓동네인 동동 △상둣거리·중골인 중동 △큰물동네인 대수동 △중동 위쪽인 중상동 △강시불동네인 서상동 △펄랑동네인 서하동 △당머리·앞궤알인 서원동 △종시르인 동수동 △아파트단지인 신영동 △신설동네인 벽수동과 연목동 등 11개 동네로 나눠 부르고 있다.
신촌초등학교 서쪽 비석동산에는 열녀 '국지(國只)'의 비석이 있다. 「탐라지(耽羅誌)」에 따르면 고려 말에 태어난 국지는 신촌리 사람으로 홍질의 첩이었다. 하지만 혼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사별, 홀로 살게 됐다. 이후 그녀의 미모와 재산을 탐내 겁탈하려는 자들이 많아지자 국지는 모든 유혹과 재산을 뿌리치고 남편 일가로 들어가 시부모를 모시며 평생을 살았다.
국지는 여느 때와 같이 물을 길러 가는데 갑자기 나타난 한 청년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결혼해 달라고 애원하자 분하고 원통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와 왼쪽 손목을 작두로 잘라 버렸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정절을 지킨 국지를 높이 칭송하고 정절의 표본으로 삼았으며 1634년 나라에서 '열녀 국지문'이란 비석을 세웠다.
바위 위 정자 '쌍벽정' 조천리(朝天里)는 조천읍의 행정소재지가 있는 해안 마을로서 일찍부터 '조천(朝天)'이라 불렸다. '조천(朝天)'은 고유어로 보이는데 그 뜻은 정확하지 않으며 「탐라지(耽羅誌)」에는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순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본동과 신안동, 양천동, 봉소동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으며 마을에서는 △침낭거리 일대의 상동 △처남골 일대의 중상동 △중골·비석거리 일대의 중동 △깅이동네·돌킹이동네인 하동 △빌레못 일대의 신안동 △양대못 일대의 양천동 △오롬밧·오름밧 일대의 봉소동 등 7개 동네로 나눠 부르고 있다.
조천리에는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연북정(戀北亭)'이 조천포구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마을사람들로부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연북정 자리는 원래 '조천석(朝天石)'이라는 바위가 있던 곳으로 이 바위에다 닻줄을 걸어 배들을 매곤 했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중국에서 유명한 지관이 바위를 보고 "저 바위를 감추지 않으면 이 마을에는 불량한 사람이 많이 날 것이고 감추면 훌륭한 인물이 끊이지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조언에 따라 조천석을 흙으로 덮어 둥글게 쌓아 올린 후 정자를 지어 '쌍벽정(雙碧亭)'이라 명명했고 그 후 삼대문학(三代文學)이 나고 현감·군수가 다수 배출됐다. 현재의 이름은 연군의 의미를 붙여 '연북정(戀北亭)'으로 바꿨다고 한다.
상처 깊은 마을 북촌리 북촌리(北村里)는 조천읍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해안 마을로서 옛 이름은 '뒷개'다. '뒷개'는 마을 뒤 또는 북쪽에 있는 개(포구)라는 뜻으로 뒷개을로 불리다 현재의 북촌리로 개칭됐다.
북촌리는 본동과 해동, 억수동 등 3개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마을에서는 △섯가름 일대의 1동 △사릿거리 일대의 2동 △동까름 일대의 3동 △헤뎅이 일대의 해동 △한숭이와 사장밧 일대의 한사동 △엉물 일대의 억수동 등 6개로 나누고 있다.
북촌리는 '너븐숭이 애기무덤' '북촌초등학교 학살' '옴팡밧' 등 4·3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상처 깊은 마을이다. 1948년 12월16일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며 토벌대에 협조하던 24명의 주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 동복리 '난시빌레'에서 집단 총살됐다. 이틀 뒤에는 무장대가 마을로 내려와 보초를 서던 경찰후원회장과 이장 부부를 살해했다.
이후 한 달 만인 1949년 1월17일 무장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 1000여명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내몬 후 온 마을을 불 질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민 수십 명씩 학교 인근 밭으로 끌고나가 사살, 이날에만 무려 300여명이 희생되는 등 북촌리에서만 모두 440여명의 주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이후 북촌리와 북촌리4·3희생자유족회는 매년 마을내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합동위령제를 열고 희생된 마을주민 440여위의 넋을 달래고 있다.
항일운동 이끈 '자존의 고장' 조천리
▲조천리에 위치한 제주항일기념관 내 애국선열추모탑과 창열사 전경
마을출신 김장환 학생 등 고향서 만세 운동 이끌어
1919년 3월, 제주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도민들의 함성이 밀물처럼 터져 나왔다. 3월 1일 서울 등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조천리 출신의 휘문고보 김장환 학생(당시 18세)이 시위 참여 후 귀향했다. 삼촌 김시범·김시은 등에게 서울의 소식을 전한 김군은 고향에서도 시위를 계획, 지역청년 14명과 태극기·유인물 등을 제작했다. 3월 21일 김군 등 마을 사람 100여명은 조천 미밋동산에 모여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었고 신촌까지 행진했다.
이날을 계기로 22·23·24일 연이어 조천·함덕리 등에서 시위가 열리는 등 제주에도 민족 항일 의식을 널리 퍼트리는 시발점이 됐으며 이후 조천리는 이성태·김운배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황태희 조천읍장은 "매년 조천청년회의소 주최로 '만세대행진'을 실시, 선조들의 항일정신이 후세에도 계승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마을 주민들 모두 조천읍이 도내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에 대해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고경호 기자
▲기념관으로 가는 길 왼쪽의 독립유공자 비석 - 김연배, 김시성, 부생종, 김순탁, 김문준 등 다섯분의 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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