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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1-34
▣ 부활에 관한 강론-고린도전서 15장-
헬라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바울이 아덴에서 부활을 전했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를 비웃었다(행 17:32). 헬라의 철학자들은 몸은 영혼의 감옥이며, 영혼이 죽음을 통하여 몸에서 빨리 자유로워질수록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연약함과 사악함의 근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몸이 지속되기를 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울이 본 장을 썼을 때는 이러한 종류의 사상을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1. 신자의 부활에 대한 증명(15:1-34)
역사적인 증명(1-11절)-고린도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여기서 논술을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멧세지, 목격자들의 증거, 바울 자신의 회심 등의 사실로 입증된 역사적인 사건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구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구세주는 아무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전개해 간다.
“이제 나는 너희 고린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줄 안다. 그렇지 않다면 너희의 믿음은 공허한(헛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계셨고 이제는 부활의 몸을 가지고 계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된 몸을 영원히 지니신다면, 우리 신자들이 그러한 몸을 가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에 관한 또다른 면이다. 그가 영화롭게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어느 날 영화롭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증명(12-19절)-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그들 자신의 경험을 지적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들은 믿었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다(6:9-11).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아직도 죽어 있는 것이며 복음은 거짓말이 된다! 그들의 믿음은 헛되고, 그들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게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이 살아있어야만 유익한 것이며 죽은 후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뜻이 된다.
교리적인 증명(20-28절)-여기서 바울은 “두 아담“에 관한 성경 교리를 다룬다. 로마서 5장에서도 이 논점을 사용한다.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첫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을 통하여 죽음이 정복되었다. 그리스도는 그 첫열매이시며 아직 오지 않은 대추수의 첫 번째 단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지막 아담“이시며, 첫 아담이 세상에 불러들인 모든 잘못된 일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할 것이다(23절/ 살전 4:13-18).
그리스도는 최종적으로,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그의 발 아래 두실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장래의 그리스도의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신자들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라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실제적인 증명(29-34절)-바울은 이제 몸의 부활을 입증하는 데에 일상생활에서의 몇몇 실천 사항들을 언급한다. 그 한 가지로, 고린도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침례)를 받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세례(침례)를 받기 전에 죽은 성도들을 위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세례(침례)를 받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새로운 신자들이 세례(침례)를 받아 죽은 자들의 위치를 대신 채웠다는 뜻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고린도 교회는 세례(침례)를 행하고 있었는데, 세례(침례)는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이러한 의식은 의미가 없다.
30-32절에서 바울은 자기 사역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위험들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부활이 없다면 내 생명을 스스로 매일 위험에 내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33절에서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을 동안에 생을 즐기라!“고 말한다. 물론 부활이 없다면, 이러한 실제적인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34절에서 결론을 제시한다.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라. 너희는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고전 15:35-49
2. 신자의 부활 과정(15:35-49)
“죽은 자들이 어떻게 부활할까?“하는 문제가 여기서의 핵심 질문이다. 바울은 죽음을 떠나서 생명이란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자연을 예로 사용한다. 심겨진 씨는 죽어서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는 원래의 씨와 동일한 것이긴 하나 씨와는 다르다. 천국에 있는 몸과 같이 부활한 몸은 각기 그 영광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심은 것은 똑같은 몸이 아니지만(37절) 육체의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무덤에 묻힌 육체는 부패하기가 쉽다. 그 몸은 수치로 말미암은 비천하고 연약한 것이어서 자연 환경에 잘 어울린다. 부활한 몸은 썩지 않을 것이다. 그 몸은 능력과 영광을 가질 것이며 영적인 환경에 적합할 것이고, 천국의 형상을 나타낼 것이다.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이 여기서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의 실례이다. 신자들이 그를 알아보았으므로,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과 영화롭게 된 몸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주님은 또한 자기의 모습을 변형시킬 수도 있으셨다. 그는 잠긴 문을 통과하여 드나들 수 있으셨고 구운 생선을 드셨다(눅 24:41-43). 그리고 제자들이 그를 만지도록 권유하셨다. 그 몸은 같은 몸이었으며 또한 다른 몸이기도 했다. 부활의 몸은 인격적인 동일성과 개별성이 유지되지만 또한 새로운 삶에 적합하도록 될 것이다."
고전 15:50-58
3. 신자의 부활에 대한 계획(15:50-58)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다루면서, 그것이 신자와 죽은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다룬다. “우리는 모두 죽지는(잠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변화될 것이다.“
이 비밀(mystery)은 교회의 휴거와 관련이 있다(신약의 비밀은 “가족“에 의해서만 이해되는 진리이며, 지나간 시대들을 통하여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려진 것이다).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며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더불어 올리워지고 모든 사람들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것이다!
그는 승리에 대하여 쓰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의 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쏘는 것을 제해버리셨기 때문이다. 무덤도 이기지 못할 것인데,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무덤들을 비게 하실 것이며 부활의 능력에 자기의 사람들을 내어놓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헬라인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얼마나 절망하였는가! 그리스도와 로마의 무덤에 새겨진 비문들은 죽음이 가장 큰 적이며, 무덤 저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생명과 소망이 있다.
58절은 설교의 본문으로 흔히 사용되는 구절이다. 그리스도인은 확고부동하고 요동치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최악의 적인 죽음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다른 적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봉사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이 영원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본 장에서 바울은 “헛되다“라는 구절을 여러 번 사용한다. 이것은 “내용이 없이 빈 것“을 뜻한다. 무덤이 비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행위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덤이 비지 않았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헛된 것이다.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되며(14절),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14절), 우리의 행위도 헛되다(58절).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우리의 승리를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고전 16:1-4
▣ 편지를 마치며 주는 훈계-고린도전서 16장-
이 마지막 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사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에 관하여 교훈하고 있으며,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권고를 함께 싣고 있다.
1. 헌금을 모으는 방법(16:1-4)
지교회는 재정에 관하여 교육할 때에 세상에서 방법을 배워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내가 명한 것같이“) 배운다. 교회들이 재정에 관한 성경에서의 방법을 거절하고 할인, 추첨, 보증, 연회 등을 적용하는 것을 보기란 슬픈 일이다! 이러한 일들은 필요로 하는 방법을 제공하지는 못하며, 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할 뿐이다. 바울 시대의 모든 교회들은 동일한 성경적인 형식을 따랐으며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은 성경을 따르는 교회들이 오히려 예외적이다!
교회 중심의 헌금이었다-그렇지 않다면 “그 주일의 첫날“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교회는 주일에 모였으며, 이 날은 주님께로 헌금을 가져오는 날이었다. 바울은 회원들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헌금을 가져오도록 조장하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교회를 제쳐 두고 교회에 속한 회원들로부터 돈을 개별적으로 받고 있는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빌립보서 4장 15-16절을 살펴보고, 바울은 교회들이 그와 함께 참예하기를 기대했던 것을 알아보자. 교회의 회중은 주님께 바칠 십일조와 헌금을 교회에 가져올 것과, 이런 방식으로 헌금을 방향지울 의무가 있다.
정규적이었다-그는 가능하면 매주마다 돈을 가져오도록 격려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주급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은 월급을 받는다. 바울은 “십일조나 헌금을 집에 저축해 두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체계적이고 정규적인 헌금은 반드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
모든 사람들이 헌금하였다-부자만 한 것이 아니라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같이 하였다. 사실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이 가난한 중에서도 바치는 일에 자유로왔다고 말한다! 성실하게 바치지 않는 교인은 실상 도둑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고(말 3장), 다른 그리스도인에게서 훔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축복을 받으면서도 계산은 그들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축복을 훔치는 것이다.
비례적이었다-“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 대로“ 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에서 바치는 일의 최소 기준이었다. 이것을 신약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십일조는 율법이 주어지기 오래 전부터 실천되었으므로, 십일조가 율법주의적이라고 논란을 벌일 수는 없다.
조심스럽게 다루었다-바울은 언제나 돈을 다룰 때 조심스러웠다. 그는 자기를 보조할 대표자를 교회가 임명하기를 원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소욕을 위해 돈을 훔쳤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었다. 교회에서 기록을 보관하기 위하여 봉투나 장부를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봉투 사용을 원하지 않는 교인이 있다면 돈을 다룸에 있어 교회가 부주의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적게 내는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교회의 재정적인 통계는 가능한 한, 최선이 되게 해야 하며,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간증이 되어야 한다. 회원들이 바치는 일에 성실하다면, 그리고 재원을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분산시켜 사용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 16:5-12
2. 그리스도의 종들을 돕는 방법(16:5-12)
바울은 미래를 향한 자기의 계획을 요약하며, 그들이 사역을 지원해 주고 싶어한다고 믿고 있다. 그는 지금 대적함과 축복이 동시에 존재하는 에베소에 있으면서, 믿음으로 전투 상황이 아니라 축복을 본다 !
바울은 젊은 디모데를 진정으로 사랑하였으나 그의 소심함과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그를 영접하고 지원할 것을 권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지 않다고 해서 다른 일꾼을 실망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따랐으며(행 18:24-28), 그와 바울은 함께 좋은 교제를 가졌다. 성공적인 목회자들이 서로들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바울과 아볼로는 둘 다 교회의 분당에 관련이 되었으나(1:12), 사역에 있어서 이들이 하나인 것을 보여 주는 데 주의깊었다.
교회들이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여 바르게 대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종들을 다른 종들과 비교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이것은 육적인 일이다. 그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한, 우리는 가능한 대로 지원해야만 한다.
고전 16:13-24
3. 교회를 강화하는 방법(16:13-24)
13절에 나타난 바울의 명령들은 사실상 군사적인 명령이었으며 교회가 하나의 군대이며 군대와 같이 행동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남자답게 행하라!“고 그는 권면한다. 오늘날 이 권면이 얼마나 필요한가. 교회가 군대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때가 너무도 많다. 오히려 교외의 클럽이나 바느질 써클같은 모습이다. 고린도 사람들은 젖먹이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성장하여 남자답게 행해야 할 때였다.
우리는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수고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진가를 인정해야만 한다. 15-19절에서 그는 몇몇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그가 사랑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끼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조력이 없었다면 바울은 그의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쁘게 자기가 빚진 것을 인정하고 있다.
바울은 21-24절에서 자신의 서명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비서에게 이 편지를 불러 주어 쓰게 한 것이 분명하며, 이제 펜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였다. 이것은 이 편지가 믿을 수 있는 것이며 위조가 아님을 증명한다. 바울이 직접 서명할 때는 언제나 “은혜“가 핵심 단어였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께서 오신다!“로 번역된 “아나트마“(Ansthema)와 “마라나타“(Marantha)라는 단어는 참으로 특이한 연결이기도 하다. “누구든 우리 구세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하라! 주께서 오신다!“
바울은 심판에 관심을 돌린 채로 편지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이 너희 모두에게 있기를!“이란 말로 끝맺는다. 게바와 아볼로를 따른 사람들에게도, 징계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과 교회에서 말을 많이 했던 여인들에게도 그러하다. 바울이 여기서 보인 본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죄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