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여유있게 오후 네시까지는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해야만 했기에 벅찬 가슴을 안고 한수는 서둘러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오월의 싱그러운 초록빛이 햇살 가득 유들거리며 강물속으로 뛰어드는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 하고 오후 한 시 버스는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한수는 출출한 배를 달래려 대합실 매점으로 갔다. 두텁게 포장한 100호의 그림 두 점은 한수를 바짝 긴장시켜 한수는 그림을 한쪽 벽에 잘 기대어 두고 길다랗게 드리워진 탁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탁상 너머로 여인의 입술 같이 이글거리는 떡볶이가 탐스럽게 한수의 눈길과 마주치자 불현 듯 옛기억이 떠 올랐다. "아주머니,여기 떡볶이 좀 주세요 그리고 저 오뎅도 좀 주고요." 한수는 미끈한 몸매의 떡볶이 하나를 찍어 질근 깨물어 보았다. 가느란 춤사위 너머로 새하얀 미소 하나가 다가서며 바알간 떡볶이 하나를 찍어 한수의 입에 넣어 주고 있었다.뜨게질로 만든 자주색 창이 없는 모자를 쓰고 엹은 파머머리를 살짝 가리고 벙긋이 웃으며... "왜, 맛이 없어요?" "아니에요, 저-, 갈 길을 잘 몰라서요." 한수는 얼떨결에 둘러댄 말이 길을 묻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시는데요?" "네,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요." "저쪽으로 가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사당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면 금방이에요.서울은 처음인가 보죠?" "서너 번 와 봤읍니다만, 올 때마다 헷갈려서..." "그럴거요,서울 사는 우리도 헷갈릴 때가 많은 데 오죽하겠오." "그 냄비우동 하나 더 말아 주세요." 한수는 거나하게 배를 불리고서야 그림 두 개를 들기 좋게 포개서 묶은 손잡이를 들고 타박타박 지하철역을 향하여 걸어 내려갔다. 북적거릴줄만 알았던 지하철은 예외로 한산했다. 서울대공원의 봄은 한창이었다.봄나들이 상춘객들의 각양각색의 옷차림은 봄꽃만큼이나 다채롭고 아름다웠고 시샘이라도 하는 듯 꽃들은 너울너울 춤을 추며 호수를 노닐고 있었다. 한수는 잔잔히 너울대는 호수가를 따라올라 국립현대미술관의 야외조각공원 앞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르며 이마에 솟아오른 땀방울을 훔쳤다. 눈 아래로 호수 위를 걸어가는 리프트에는 줄줄이 매어달린 연인들의 히죽이며 봄을 만끽하는 전경이 한수의 가슴을 부럽게 두드렸다. 접수처에는 길다랗게 늘어선 줄로 퍼질고 앉아 있는 사람이며, 그동안을 참지 못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며, 기다림의 지루함을 적나라하게 들어내고 있었다. 한수는 서양화 줄의 맨 뒤에 가서 섰다. 마감이 오후 5시까지인데 한수는 4시까지 못을 박고 다소 느긋하게 맞쳐왔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엄청난 응모가 될 것이라고 생각됐다. 한수의 차례가 칠팔 명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이었다. 접수를 마치고 돌아서 가는 사람은 한수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틀림없는 바로 그 오민숙 선생님이었다. 한수는 그림을 그 자리에 살며시 눕혀놓고 냅다 뛰었다.
"선생님! 오민숙 선생님!" 돌아서 가던 그 사람이 몸을 돌렸다. 한수의 눈은 정확했다. 틀림없는 오민숙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저 모르겠어요. 저, 한수에요. 배한수." "오! 그-래, 배한수! 맞구나!" 민숙은 한수를 향해 팔을 벌렸다. 한수는 덥썩 안겨들었다. "세상에... 한수가 이렇게 성장을 했구나." "선생님은 하나도 안 변했어요. 내가 그리던 그대로 인 걸요." "그-래!" 민숙은 싱긋이 웃었다. "선생님,잠깐만요. 제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접수를 하고 올테니 잠시만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그래. 어서 접수하고 와." 한수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기다리는 접수시간이 한나절은 지나가는 것 같았다. "됐어요. 자, 선생님, 가요." "그래, 우리 저어기 가서 좀 앉자." 한수는 민숙의 손을 잡고 편석을 밟는 구두소리도 경쾌하게 조각이 있는 벤치 앞으로 갔다. "선생님, 여기 앉아요." 한수는 손수건을 꺼내어 벤치에 깔아주었다. "한수의 그 자상한 배려는 하나도 안 변했네." 한수는 민숙의 그 말에 벙긋이 미소만 지었다. "선생님, 지금 어데 계시는데요?" "진주에 있어. 넌?" "넷?! 진주요?! 그렇게 가까운데 있으면서 어떻게 한 번도 못 만났을까요?" "그럼, 너도 진주에..." "네, 선생님.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삼천포에 있어요." "그랬구나. 아휴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 아마 한수가 졸업을 하고 처음이지." "아니에요,그 뒤에 진주에서 한 번 만났어요. 제가 선생님 댁으로 찾아갔었잖아요." "아, 그랬었지." "그 뒤에 한 번 더 찾아갔는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더라고요.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아직껏 선생님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그랬어, 한수에게 뭐라 할 말이 없네. 그래, 그림은 언제부터 시작했어? 너 그 때는 그림을 안 그렸잖아?" "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다 선생님 덕이죠." "뭐라고!" "선생님이 미술 선생님이었잖아요." "그렇다고 그림까지 따라서 그린단 말이야!" "그러고 싶었어요. 정말 그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을 볼 수가 없게 되자 너무나 사무치던 걸요 그래서 소묘를 배워 선생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것이 시작이 되어 오늘 국전에 까지 오고 보니 참으로 야릇한 기분이네요." "그럼, 출품작도..." "네, 그래요. 인물화에요. 선생님 모습에 내가 사의寫意를 넣어서 그렸어요." "음-, ..." 민숙은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는 한창 사랑에 무르익어있을 지금 쯤의 모습'푸른 밤'이고요 또 하나는 선생님이 오십 정도 되었을 무렵의 모습을'생의 반환점'으로 그려봤어요." "그렇게 까지나..." 민숙은 한수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저려왔다.
2
새파란 잔디 위로 노랑나비 한마리가 가날프게 날으다 지친 듯 꽃도 없는 풀잎에 앉았다. 어느새 관악산 허리를 감싸안은 햇살은 슬그머니 길 떠날 차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차 가져왔니?" "아니에요, 저 버스 타고 왔어요." "그럼,내차 타고 같이 내려가자." "이 멀리 차를 가져왔어요? 장거리 운전 하려면 피곤할텐데..." "그림을 들고 오려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 그래서 피곤해도 할 수 없이 가져왔지." "그럼, 갈 땐 제가 운전할 게요." "그럴래? 그러면 너무 감사하지." "선생님은 어떤 그림을 그렸어요?" "응, 풍물화 두 점이야." 한수는 민숙의 자동차를 운전하며 경부고속도로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아까 서울터미널에서 점심요기를 하려고 구내매점에 갔다가 떡볶이와 오뎅을 보고는 불현듯 선생님 생각이 났는데 참 묘하네요. 어쩌면 이렇게 거짖말 같이 만날 수 있는지..." "떡복기와 오뎅을 보고 내 생각을 했다고?" "네. 왜, 생각 안 나요? 제가 선생님 따라서 진주에 놀러간 날 촉석루 입구에서 선생님이 떡볶이랑 오뎅을 사 주셨잖아요.그때가 겨울이었죠. 난 그날 생 처음으로 떡볶이와 오뎅을 먹어봤어요.그때 선생님은 뜨게실로 짠 창이 없는 보라색 모자를 쓰고 계셨는데 얼마나 이뻤는지 몰라요. 아까도 그 모습이 그대로 떠 오르던 걸요." "어떻게 그걸 잊지도 않고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지 모르겠네." 자동차는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 혼자만의 짝사랑이였죠 뭐." "짝사랑?!" 민숙은 혼잣말로 중얼거려 보았다. "그렇죠 뭐. 어딘 가에 있을 지도 모르는 선생님을 혼자서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한수, 그것은 그저 선생님에 대한 사제지간의 정이 아닐까?" "그랬으면 저도 좋겠어요. 제가 선생님 방에 놀러갔을 때 줄에 걸린 브래지어를 보고 전, 제 마음을 빼앗겼어요. 전 그 브래지어를 제 가슴에 가져다 대고 선생님을 느꼈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 그건 사춘기에 나타나는 현상들 아니었을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죠. 어쨌던 그 날 이후 전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한수는 하던 말을 멈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러브 미 텐더, 러브 미 스윗, 네브 렛 미 고/....' 한수는 '러브 미 텐더'를 유창하게 불렀다.
민숙은 첫발령을 받아 시골 중학교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교문을 나서는 한가로운 오후였다. 민숙은 둘이서 도란도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나오는 학생을 불렀다. "학생!" 이야기에 열중하던 한수는 부르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털었다. 그곳에는 이제 막 버스에서 내렸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려는 듯 커다란 가방 한 개와 자그마한 가방 하나를 세워놓고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감히 시골에서는 구경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여인이 손짖을 하며 서 있는 것이었다. 한수는 슬금슬금 민숙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 "이 가방 교무실까지만 좀 들어줄래?" 한수는 동욱을 쳐다봤다. 동욱은 그렇게 하라는 눈빛을 주었다. "네. 동욱아, 그럼 너 먼저 가." "그래 알았어." 동욱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뒷걸음질을 치다시피하며 멀어져 갔다. "몇 학년이니?" "삼 학년인데요." "나, 너희 학교에 발령받아 오는 중이야. 미술선생인데 너 미술 좋아해?" 한수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앞장 서 가며 민숙의 물음에 고개을 잘래잘래 흔들었다. 한수는 김이 팍 새버렸다.'하필이면 왜 미술이람' 한수는 앞에 보이는 자갈 하나를 발길로 차버렸다. 한수가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길들이 한수를 향하여 몰려들었다. "한수, 집에 안 가고 어쩐 일이야? " 그때 뒤따라 오던 민숙이 들어서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미술선생 오민숙입니다." "어서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골 조그마한 학교라 교감선생님이 학교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교육청에 들렀다 오너라 늦었읍니다." 한수가 가방을 한쪽에 놓고 문을 열고 막 나오려할 때였다. "어이, 한수. 잠깐 기다려." 교감선생님이 한수를 불러 세웠다. "너, 지난 번 그 미술선생님이 계시던 집 알지? 오 선생님 그 집으로 네가 좀 모시다 드리렴." "네." 한수는 조그맣게 대답을 하고 가방을 들고 앞장을 섰다. "애! 이름이 한수라고?" "네, 배한수에요." "난, 오민주야." "오민주!" 한수는 속으로 따라 불러보았다.억양이 참 좋았다.'오민주' 부를수록 낯익은 이름이 되었다. "너네 집은 어디니?" "같은 동네에요." "잘 됐다. 한수, 선생님한테 자주 놀러와도 되겠네" "그래도 돼요?" "그럼, 나 혼자 얼마나 적적하겠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요." 한수는 싫어하는 미술과목이었지만 민숙의 아름다움에 안기고 싶었다. 한수와 민숙이 찾아간 집에는 들일을 나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이 방이에요." 한수는 주인도 없는 집의 방문을 열어보였다. "애, 한수야. 주인도 없는데 함부로 방문을 열면 되나?" "괜찮아요, 여기는 다 그래요. 보세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얼마까지만 해도 전임 미술선생이 쓰던 방이라 비교적 깨끗했다. 한수와 민숙은 마루에 걸터앉아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병아리를 거닐고 어미닭이 양지쪽 담부랑 밑을 헤집고 있었다. "한수야!" "네." "너 고등학교 어데로 갈 거니?" "선생님!" "응." "아마 그때 선생님이 우리 부모님께 말씀 드려 주지 않았더라면 전 고등학교에도 못 갔을 거 에요." "그건 네가 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어서지." "휴계소에 좀 들렸다 가요.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요?" "그래, 그러자." 한수는 원두커피 두 잔을 들고 휴계실 밖으로 나와 파라솔 아래로 다가가 앉았다. "커피는 선생님이 타 주시는 것이 정말 맛 있는데..." "아휴! 그랬어요." "선생님, 아까 그 '러브 미 텐드' 생각 안 나요?" "예전에 참 즐겨 부르던 노래였지. 아마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지." "선생님이 가르켜 주셨잖아요. 음악시간에 한글로 토를 달아가면서 이런 노래 하나쯤 부를 줄 알아야 한다면서 요." "맞아, 그랬었지. 음악선생이 따로 없어서 내가 겸직을 했었지. 처음에 전공도 아닌 음악을 가르칠려고 하니 참으로 암담하더라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 노래였어. 그런데 넌 그 노래를 이제 네 것으로 만들어 버렸나 보네."
3
자동차의 질주를 따라 산들이 흔들렸다.산벚꽃 화사하게 웃음 짖는 우에로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은 길을 비켜서 주며 유유히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선생님, 제가 밤으로 선생님한테 가서 공부하고 같이 지내며 느낀 그 감정들이 차차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그 선생님의 브래지어 였어요. 그때 선생님은 설탕이 떨어졌다며 가계에 갔더랬어요. 전, 그 핑크빛 브래지어를 보자 호기심이 발동했어요 그래서 가만히 만져보았죠. 보드라운 감촉은 저의 볼을 적시게 했어요. 전 가만히 저의 가슴에 가져다 대고 황홀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의 브래지어에서는 라일락 향기가 났어요." "난, 그저 널 단순히 제자로서만 생각했었는데..." "그랬죠, 그러나 선생님은 저에게 사랑을 가르켜 주셨어요. 그 사랑 '푸른 밤'과'생의 반환점'에 불어 넣었어요." 민숙은 한수의 이야기를 듣고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스물 셋 함초롬히 피어난 꽃송이 누구에게든 사랑스러울 탐스런 복숭아 같았으리라.... 한수의 사랑고백을 받은 민숙은 착잡하기만 했다. 민숙에게 사랑은 불난 집 불구경하는 정도로 멀리 있었다. "한수! 아까 그 노래 한 번 더 불러 줄래?" "러브 미 텐드 요?" "응." "선생님만 좋다면 얼마든지 불러 드리지요." 한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민숙은 지긋이 두눈을 감고 조그만 시골학교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실기시간 소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민숙은 책상과 책상 사이 통로를 따라 오며 가며 학생들의 그림 그리는 모습들을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치고 박고 난리가 났다. 민숙은 달려가 두 사람을 떼어냈다. "아니, 넌...?" 한수는 손등으로 입술을 쓱 문지르고 강태를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고, 강태 역시 힘의 우세를 과시하듯 주먹을 쥐어 보이며 욱박지르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연방 무슨 좋은 볼거리를 보았다는 듯이 킥킥거리며 즐거워들 하고 있었다. "너희들 왜 그래? 수업시간에 이게 무슨 짖이야?" 민숙은 학생들의 동요에 화가났다. "너희 둘! 이리 나와!" 민숙은 두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어 무릎을 꿇게 했다. "배한수! 왜 그랬어?" 한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강태! 너도 대답 안 해!" 민숙은 언성을 높혔다.그때였다.동욱이 일어섰다. "선생님! 강태가 선생님 치마 밑을 봤어요 그래서 한수가 그러지 말라고 하다가 싸운 거에요." "뭐?! 뭐라고?! " 어느새 한수는 노래를 다 부르고 스쳐가는 풍경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민숙이 '피식'우스며 몸을 추스려 앉았다. "아니, 안 주무셨어요?" "그래, 그때 강태가 한 짖이 그렇게도 한수를 괴롭혔나보지?" "넷?! 무슨 말씀을?" "강태가 거울을 발등에 얹어 내 치마 밑을 봤다고 했을 때 난,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났던 화가 가라앉았어.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거든. 난, 그저 단순하게 선생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거야 그런데 그 강태가 나를 어엿한 여인으로 일깨워 준 거지 그래서 좀 더 옷치장에도 신경을 쓰고 라일락 향수도 뿌렸었지." "그르셨어요. 전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어요. 어쩌다 보게 된 선생님의 브래지어에서 라일락향기를 맡게 된 것이었죠. 그때부터 전 라일락향기를 맡노라면 으례히 선생님을 맡는 듯 했어요." "한수!" "네,선생님."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하지 않니?" "그것보다는 선생님이 지금 제 곁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 요. 저는 선생님을 사랑한 것이지 주위환경을 사랑한 것이 아니니까요." "음-, ..." 민숙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가늘게 흘러보냈다. "12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긴 있네요." "벌써 그렇게 됐나." 민숙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산하로 눈길을 주었다. 검은 바람이 숲을 흔들었다. 나무가지가 부러지며 민숙의 얼굴을 향하여 날아왔다. '악' 비명과 함께 민숙은 몸을 털었다. 자동차가 갸우뚱 흔들렸다. 한수는 재빠르게 자동차를 갓길에 세웠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아휴, 저 땀 좀 봐." 한수는 손수건을 꺼내어 민숙의 이마에 송글송글 솟아난 땀방울을 딱아주었다. 민숙은 한수의 손수건을 받아쥐고 차에서 내렸다. 저녁바람이 싱그럽게 이마를 스쳤다. 한수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선생님?" "응, 괜찮아. 잠시 헛것을 본 모양이야." "몸이 약하신가 봐요. 언제 시간 한번 내요. 제가 잘 아는 한의원이 있는데, 거기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짓게요." "괜찮아, 조금만 바람을 씌면 좋아질 거야." 한수는 민숙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피로에는 어깨를 주물러 주는 것이 참 좋아요. 어깨는 우리 몸에서도 가장 복잡한 근육들이 뼈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자칫 울혈이 되어 순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하얗게 석회화 되어 근육이 굳어질 수 있대요 그래서 이렇게 주물러 주면 근육을 풀어 주어 피로가 가신대요." 민숙은 한수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한수의 손놀림은 점차 민숙의 마음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민숙은 한수의 손놀림이 더해 갈수록 한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결국 어깨를 주무르는 힘에서 민숙은 한수를 성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느새 제자로만 다가서던 한수가 어엿한 남자로 변신해 있었다. 한수는 민숙을 돌려세웠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낚시를 채듯 홱홱 낚아 채갔다. 한수는 민숙을 끌어안았다. "선생님, 12년을 기다렸어요. 오늘 저에게 12시간만 주세요." "한수, 우리 이러면 안 돼. 응, 이러지 마!" 이미 한수의 귀는 막혀 민숙의 호소는 허공만을 헤매고 있을 뿐었다.
4
주위는 헤드라이트의 불빛만이 요동을 칠뿐 적막강산이었고 밤을 질주하는 마찰음이 고막을 어지럽게 울리며 민숙의 가슴을 흔들기 시작했다. 한수는 오른 손으로 민숙의 손을 꼬옥 잡고 한 손으로만 능수능란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민숙은 한수의 손이 유난히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수!" "네,선생님." "내가 그곳에 발령을 받아 갔을 땐 이미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은 수학을 전공했고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열열히 사랑했어. 결국 우리는 2년 후에 결혼을 했지. 아마 한수가 찾아왔을 때 이사를 간 몇 개월 뒤였을 거야. 혼수품을 장만하기 위해서 살던 집을 낮쳐야만 했었 거든." 이야기를 하던 민숙은 잠시 말을 멈추고 얼굴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랬으면 행복하게 살아야 될 것 아냐." 어느새 민숙은 눈물을 글썽이며 코멍멍이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한수는 민숙의 울먹임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휴계소 안내판이 선뜻 눈에 들어왔다. 한수는 휴계소 한 구석에 차를 파킹시키고 민숙을 가만히 감싸안았다. "뭔가 아픔이 있군요. 아픔은 토해내야만 약효를 볼 수 있다고 하던데요." 가만히 안겨 있던 민숙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어." "그래요? 그럼, 내 가서 사 올게요." "아냐, 휴계소에는 술 안 팔아." "그래요, 그럼 어떡하나?" "가! 가다보면 간이 정류장이 있어 거기에 가면 밖으로 나갈 수가 있어. 캔맥주라도 몇 개 사면 되지 뭐." 한수는 빠르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평소에 차분하기만 하던 한수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이삼십 분은 족히 걸려 화물차가 빼곡히 정차하여 있는 정류장을 발견하고 한수는 겨우 한 켠에 차를 파킹시켰다. "여기 계실래요. 내 가서 사 올테니..." "아니, 같이 가." 한수와 민숙이 찾아간 곳은 기사식당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기 굽는 내음과 연기가 진동을 했다. 겨우 한쪽 구석진 곳에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수, 우리도 저 고기 좀 구워서 소주 한잔 하자. 넌 운전하니까 딱 한 잔만 하고 나머진 내가 마실께." 한수는 민숙이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받아 주었다. 민숙은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천천히 마셔요, 누가 안 뺏어가요." 민숙은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듯 허리를 고추세우고 트림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응, 예전에 우리는 참 많이도 돌아다녔지. 그때가 봄날이었지만..." 한수는 고기를 뒤집어 민숙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민숙은 고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술잔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한수! 날 사랑한다고 했지. 사랑, 그것 참 별 것 아니더라고." "넷?!"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사랑이더라고 그러나 또한 기다려야 하는 것이 사랑이고..." 민숙의 높은 언성에 조용히 고기를 구워 상추쌈과 함께 식사를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한수는 민숙을 부축하여 자동차로 돌아왔다. "한수, 나 괜찮아, 그까짖 소주 한 병 가지고야 이 멍든 가슴 씻어내리지 못해." 전화벨이 울렸다. 민숙은 주섬주섬 전화를 찾아 더듬거리며 핸드백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발신자 전화번호를 읽었다. "칫, 내가 뭐 로봇인가." 민숙은 바테리를 분리시켜 핸드백에 쳐넣어버렸다. "내가 이리 산다, 살어. 한수, 이래도 날 사랑하려나?" "사랑은 한 단면만의 감정이 아니에요. 적어도 난, 선생님의 그 단면만을 보고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런가?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민숙은 혀를 돌려 입술을 적시고 침을 삼켰다. 지금의 남편과는 아까 잠깐 이야기했듯이 열열히 사랑했더랬어. 심지어 집을 낮추워 가면서 혼수를 장만하고 전셋집을 얻어 살면서도 참으로 행복했었어. 애들도 딸, 아들 차례로 나았더니 사람들은 백십점짜리 부부라고 하더라고. 우리는 주말만 되면 여행을 다니며 남편은 나의 취미를 살려주려 무던히 애를 쓰곤 했어. 그럴 때 일수록 난,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웠어. 그렇게 한 오년을 행복 속에 빠져 살았던 것 같아. 그런데 말야, 그 다음부터가 문제야." 한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민숙의 이야기에 귀를 더욱 쫑긋 세웠다. "어느 날부턴가 남편이 변해가는 거였어. 한 번도 그런한 일이 없던 꼬투리를 잡아가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하는 거야.처음에는 한 두 번 그렇게 하다 말겠지 했는 데 그것이 아니었어. 갈수록 나에 대한 학대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어. 말하자면 억지의처증이였어." "억지의처증이라니요?" "의처증을 일부러 만드는 것이지. 교내체육대회를 한다든지, 회식을 한다든지, 무슨 모임같은 것을 하고 조금만 늦어도 그 날은, 말 그대로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것만이면 다행이게 그 뒷날은 학교에 얼굴을 들고 갈 수가 없었어. 온통 푸른 멍 투성이여서..." 민숙은 그만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럼 아까 차에서 몸을 갸우뚱 한 것도...?" "그래,남편이 던지는 헛것을 본 거야." "세상에,어쩌면 그럴 수가..." 한수는 민숙의 이야기를 들어며 가슴 한 켠이 저려왔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나중에, 나중에야 알았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여 선생하고의 치정을. 그것이 결국 나를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분노보다는 가증스러웠어. 그동안은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다시 한 번 점검도 해보고 했었어. 그런데 사실을 알고 나니 난, 남편이 불쌍해지는 것이었어." 민숙은 한수가 준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눌러서 닦았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수근댔어. 바보가 아니면 나사가 하나 둘 쯤 빠진 것이 아니냐는둥,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어. 하지만 난, 내가 선택한 사랑이기에 지금도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 곧 돌아오리라는 확신을 갖고... 한수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 또한 남편을 사랑하거든." 한수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토록 수모를 당하면서까지도 견디고만 있어요.?" "그럼, 어떡해? 이혼이라도 하란 말이야. 그렇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이고, 사랑이란 시간에 따라서 변한다고 생각해. 처음에 남편이 나에게 그랬듯이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난, 믿고 싶어. 한수! 나하고 촉석루에 가고 싶지 않아. 그래, 우리 가자. 내일이고 모레고 언제라도 가자. 그래서 서장대의 물빛에 매달려 보자, 응?" "그래요,언제든지 가요. 선생님만 좋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선생님, 좀 쉬었다 가요." 한수는 휴계소 주차장에 파킹을 시켰다.
5
5월의 밤하늘은 보라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한수는 용변을 보고 매점에 가서 홍차캔을 사들고 민숙을 찾았다. 민숙은 별들을 올려다 보며 울타리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한수가 다가서자 한수에게 물었다. "'푸른 밤' 이랬지. 이 민숙의 '푸른 밤'은 어떨까? 몹시도 궁금한데?" "그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적어도 밝고 맑다고는 말할 수 있어요." "밝고 맑다고...?" 민숙은 한수의 말을 되받아 씹어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깊은 생각에서 건져내는 환희 같은 것이죠." "환희? 환희라... 내가 건질 수 있는 환희가 어떤 것일까?" "지금은 어때요? 남편하고의 생활이?" "지금 별거 중이야 그러나 난 항상 문을 잠구지 않고 열어두고 있어. 그런데도 아직 그 억지의처증은 여전해서 아까의 그 전화도 아마 확인 전화였을 거야." "어쩌면 자기가 바람을 피면서 그럴 수가 있어요. 도저히 납득이 안 가요." "그렇겠지,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용서하지 못 할 일일 거야. 하지만 나의 사랑은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지켜줄 수 없어. 이것은 단지 여자라는 죄만은 아니야." 남쪽 하늘에서 운석 하나가 선을 그었다. "저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보아주는 내가 있기 때문이야. 그 누구도 저 아름다움을 대신 보아줄 수가 없듯이 내사랑 역시 내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자정이 되어서야 진주에 도착한 한수는 민숙에게 핸들을 넘겼다. "어떻게 하려고?" "택시를 타고 갈 게요. 택시비나 여관비나 같이 나올 건데요 뭐. 주말 쯤에 촉석루 구경이나 시켜줘요." "그래, 그럼 그때 가서 연락하자." 민숙은 한수를 남겨두고 애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엑스레이드를 밟았다. 현관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서던 민숙은 그만 그자리에 발이 굳어버렸다. 남편 상태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며 떡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간뎅이가 부었어. 지금이 몇 신 줄이나 알아." 상태는 다짜고짜 민숙의 머릴채를 낚아채고 벽을 향해 밀쳐버렸다. 민숙은 항변 한 번 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없이 힘 없이 나가 떨어졌다. "악." 민숙은 외마디 비명만을 흘린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가 뜅 하고 어질어질한 가운데 딸 지혜와 아들 영민의 얼굴이 흐미하게 다가섰다. 민숙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엄마?!" "응, 지혜야! 머리가 몹시 아프구나." 상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지혜와 영민이만 안절부절 못 하고 민숙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숙이 일어나려하자 머리가 뜅하면서 현기증이 났다. "지혜야, 엄마 화장대 서랍에 보면 진통제 있을 거야. 좀 가져다 줘." 지혜가 진통제를 가져오는 동안 영민은 주방으로 가서 물을 떠왔다. 민숙은 안정을 되찾았다. "아빠는?" "아빠는 엄마가 쓰러지자 엄마를 부축해 침대에 누이고는 가셨어. 우리보고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일이 있어면 전화하라고 하셨어." "봐라, 아빠는 그래도 엄마를 걱정하시잖니." 민숙은 혼자만의 위안이라도 받고 싶었다. 민숙이 커피잔을 들고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커피향은 하얀 너울에 실려 민숙의 심장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푸른 밤'이라고..." 민숙은 한수의 낭낭한 목소리를 되새김했다. 민숙은 주섬주섬 핸드백을 뒤져 한수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여보세요?" 한수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아니! 선생님!" "잠 깨워서 미안해. 잠이 안 와. 한수가 말한 나의 '푸른 밤'은 밝고 맑다고 했는 데 흐리기만 해. 도저히 흐린 안개 속을 헤어날 수가 없어." "무슨 일이 있는 거 에요. 그렇죠? 무슨 일이 있는 거죠?" 한수가 다구쳐 물어왔다. "아니야, 일은 무슨 일. 한수가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도 하고 해서 그냥 전화한 거야. 그래 한수말 대로 우리 토요일에 촉석루에 가자. 떡복기도 먹고, 오뎅도 먹고, 우리 그렇게 하자." "잠이 안 오면 제가 자장가 불러줄 게요.선생님이 가르켜 주신 바로 그 사랑의 노래를 요." 한수는 목청을 가다듬어 '러브 미 텐드'를 부리기 시작했다. 민숙은 한수의 노래를 들으며 한수가 그렸다는 '푸른 밤'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파리한 얼굴이 점차 밝아왔다. 화장기 하나 없는 데도 달덩이 같이 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민숙은 혹시 한수가 말하는 '환희'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듣고 있어요?" "응, 한수. 고마워. 나를 위해 자다가 일어나서 노래까지 불러주고." "그정도라면 매일 밤이라도 하겠어요. 지금 선생님이 사랑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선생님 혼자만의 아집이에요. 이제 그 아집에서 풀려나야만 해요 그리고 밝고 맑은 '푸른 밤'으로 돌아와야만 해요." "그럴까? 아집일까?" "그럼요, 적어도 사랑이란 최소한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럴 때에서야 정말 사랑은 밝고 맑게 푸른 밤을 수놓는 환희로서 다가설 수 있을 거 에요."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가 보고 싶어지네. 내 마음도 그렇게 부서져 나릴 수가 있을까?" 민숙은 한수의 말대로 아집이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아집에서 풀려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한수와의 긴 이야기로 허기를 채운 민숙은 더디 가는 밤을 재촉하며 지끈지끈거리는 머리의 통증을 관자놀이를 누르며 달랬다.
6
토요일 오후 촉석루는 찾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한수와 민숙은 싱그러운 오월의 내음을 헤치며 촉석루를 들어섰다. 보라빛 향기가 민숙의 모자를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이뻐요, 선생님." "피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저 꽃들이 흉 봐요." "아니에요, 정말로 보라빛 향기를 풍기는 저 라일락보다 더 짙은 향기가 나요." 한수는 민숙과 나란히 촉석루 누각에 올라서자 남강물은 흐르는 듯 마는 듯 따사로운 오월햇살에 젖은 몸매를 뒤척이고 있었다. "변영로 시인은 여기서 저 의암(義巖)을 바라보며 강남콩보다도 더 붉은 논개를 연상했겠지요?" "그랬겠지. 아마 세계 그 어느 나라를 가도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는 없을 거야. 너우니를 곧추세워 흐르는 물줄기는 망경산을 휘돌며 서장대에 이르러 절경을 자아내기 시작하여 의암을 애무하며 꽃사냥을 하고는 뒤벼리를 휘돌아 나가지. 조금 아쉬운 건 예전의 그 맑은 소리 서걱이는 백사장이 사라져 버린 거야." 민숙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누각의 난간에 기대어 앉아 진양교를 바라다 보다 다리 밑에서 부터 서서히 눈길을 끌어 왔다. 신이 그려준 수묵화 한 폭이 흔들림 없이 의연하게 들어내 보이고 있었다. "선생님, 저 그림 같은 세상이면 좋겠어요." 민숙은 한수가 가리키는 남강으로 눈길을 주었다. "저 푸른 여백에 그려넣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 같아." "그래요! 어떤 충동인데요?" "글쎄? 뭐라고 꼭 꼬집어서 말하기는 그런데, 한수가 말했듯이 환희 같은 것이랄까..." "선생님! 다음에 우리 여기다 이젤을 놓고 그 환희를 그려요.내면에서 꿈틀거리는 환희를 요."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이제 좀 당당해 보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앞에 당당해 지는 거 에요." "자기 앞에 당당해진다 고?" "그럼요, 자기 앞에 당당한 사람만이 누구도 사랑할 수 있대요. 이제 선생님을 그 아집에서 서서히 풀어낼 거에요." 한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다부진 각오를 보여주었다. "한수!" "네, 선생님." "나로 하여금 한수가 고통스럽다면 그것 또한 사랑을 퇴색시키는 것이 아닐까?" "아니에요, 그것은 더욱 아름다운 채색과정일 거 에요. 우리 저 서장대로 가 봐요." 민숙이 한수를 따라 촉석루 계단을 내려설 때였다. 라일락 향기가 바람에 실려 물씬 풍겨왔다. "아, 이 향기!" "바로 선생님의 향기에요. 전 오래도록 이 향기를 가슴에 품어 왔어요." 민숙은 한수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빛을 볼 수 있었다. 민숙이 촉석루 담장을 돌아나올 때였다. "아이, 머리 아퍼!" "왜 그르세요? 네, 선생님?" "응, 갑자기 햇볕을 쐬니 그런가 봐. 약을 좀 먹어야 겠어." 민숙은 핸드백에서 진통제를 꺼집어 냈다. 한수가 냅다 뛰어가 생수 한 병을 사가지고 왔다. "한수, 생의 반환점에 선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 무척 보고 싶은데." "심사가 끝나면 찾아와 드릴 게요. 그때까지는 보고 싶어도 참아야죠." "그러니까 더 보고 싶네. 어떻게 그렸는 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선생님!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가 보고 싶다고 하셨죠?" "응, 그래. 유난히 밝은 달빛 그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앙상블, 그것은 곧 내가 그려내고 싶은 소리 일 거야." "그럼, 우리 가요. 마침 어제가 보름이라 오늘밤도 달빛이 만발을 할 거 에요." 서장대에서 바라보는 남강은 우람하다기 보다는 아담하고 자태 고운 여인이라기 보다는 소박한 어머니였다. "그래, 가자! 그래도 한수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떡볶이랑 오뎅은 먹고 가야지." "선생님이 사 주시는 떡볶이랑 오뎅은 아마도 이 세상 그 무엇도 따라올 수 없을 거 에요." 민숙이 발그란 여인의 입술 같은 떡볶이 하나를 찍어 입에 넣어 주자 한수는 입안 가득 전해오는 민숙의 체내를 맡는 듯 했다. "오늘이 오기까지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렸어요. 시간이 흘러도 떡볶이 맛은 변하지 않았네요." "그것은 한수의 마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죠, 허허허." 한수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딱아냈다. 그때였다.민숙이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한수에게 내어밀었다. "자! 이거 한수 꺼야." 한수는 민숙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코밑에 가져다 대자 물씬 풍겨나는 라일락 향기가 한수의 폐부 깊숙히 파고 들었다. "오월은 참으로 살맛 나는 세상이야." "그래요, 꿈을 이루는 그러한 계절이 오월이 아닌가 싶어요." 자동차는 어느새 삼천포대교 위를 미끄러지고 해는 뉘엿뉘엿 바다의 품 속으로 안겨 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민숙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핸드백에서 진통제를 꺼내 먹었다. "아니, 무슨 약을 그렇게 자주 먹어요. 많이 아픈 거에요?" "아니, 괜찮아. 가다가 커피 한 잔 마셨으면 좋겠어." "그럴 게요,조금만 참으세요." 창선대교에 다다르자 나근거리는 저녁햇살을 받아 삐죽삐죽 솟대로 솟아 있는 죽방렴 너머로 은빛물살이 춤을 추며 다가섰다. 한수는 한적한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저무는 저녁이 한가슴 가득히 커피향과 함께 너울져 흘렀다.
7
잠잠히 빠져드는 어둠 건너 검푸른 질책 같은 물결이 요동을 하며 가지런 하던 가슴을 물컹물컹 쥐어박았다. 민숙은 한수가 차려주는 이젤 앞에 앉았다. 산달이 되어 이제 막 엄마의 자궁을 헤집는 생명의 큰 환희를 안겨줄 둥근 달이 뜰 채비를 완벽히 갖춘 남해바다의 서정은 가히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수!" "네, 선생님." "내, 이토록 가슴 두근거리는 밤은 처음이야. 솔직히 말해서 첫순정을 준 그 날밤보다도 더 설레이는데." "저, 또한 이토록 가슴벅찬 밤은 처음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선생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 거 에요." 달이 잉태하자 바다는 사시나무 떨 듯 겁에 질려 떨었다. 격한 감동은 결국 민숙을 흐느껴 울게 했다. 민숙은 여미는 달여울에 넋을 잃고 한 없이 울었다. "그러다간 언제 그림을 그리겠어요. 저 순간의 포착을 놓치겠어요." "아참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지금 이젤 앞이지. 그래 그 무엇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의 감동, 오로지 눈과 가슴이 하나가 되어야만 가능한 불멸의 혼불 같은 것일 거야." 민숙의 손놀림이 가늘게 떨었다. "한수!" "네,선생님." "날 좀 잡아줘." "왜 그르세요? 선생님, 넷? " "모르겠어, 자꾸만 어디론가 내가 흘러가고 있어. 어디론가..." 한수는 민숙을 감씨안았다. 민숙은 벌벌 떨고 있었다. "선생님! 왜 이르세요, 네? 날 봐요, 네!" "한수! 내 생의 반환점은 어떤 모습일까? 무척 보고 싶은데..." "보여 드리지요, 며칠만 기다려요 그러면 내 새벽 같이 달려 가서 찾아와 드릴 게요. 네!" "물 좀 줘." 민숙은 핸드백을 뒤적여 겨우 찾아낸 진통제를 먹었다. 한수는 생수병을 가져와 민숙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민숙이 한수의 품에 안겨 쏟아져 내리는 달빛에 주루루 눈물을 흘렸다. "한수! 사랑이란 참으로 묘한 거야.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야." 한수는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저토록 밝은 달빛 아래 엄습해 오는 검은 그림자는 민숙을 부둥켜 안고 요동치는 바다 속으로 데려 가려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그렇죠? 네?" "모르겠어 다만, 너 하고 서울 갔다 오는 날 남편에게 휘둘려 나가떨어진 후로는 이렇게 머리가 아픈 게 오늘은 더욱 심하네." "왜, 그걸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한수는 민숙을 부둥켜 안고 통곡을 했다. "어쩌면 이토록 아픈 가슴으로 만나야만 했을 가요?" "한수, 나도 나의 아집에서 이젠 풀려나고픈데..." "그래요, 선생님. 이제 제가 풀어 드릴 게요. 제가 그린 선생님의 '푸른 밤'과 '생의 반환점'을 보셔야 잖아요. 뭐 제 실력으로 입선이야 되겠어요 그러니 곧바로 찾아올 수 있을 거 에요 그것보다도 지금 그리는 이 불멸의 혼을 그리셔야죠. 자! 정신을 차려요!" "응, 한수. 나도 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오늘밤 같이 정말 가슴 시리게 하는 혼을 본 적이 없어. 그래, 그것은 나의 혼 일지도 몰라." "왜, 자꾸만 그런 말씀만 하세요. 저토록 밝고 맑은 빛들이 꿈틀대고 있잖아요." "한수! 우리 '러브 미 텐드' 같이 불러볼래?" "네, 그래요. 우리 같이 불러요." '러브 미 텐드 러브 미 스잇 네브 렛 미 고' 한수가 먼저 부르자 민숙은 가는 숨소리인 양 거친 숨을 몰아쉬며 따라서 불렀다. 민숙은 호흡이 가파지고 사물이 스멀스멀 흐려져 갔다. "한수!" "네,선생님." "날 좀 안아줘." 한수는 민숙을 꼬옥 안았다. 달빛은 민숙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가고 밝고 맑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한수는 민숙의 차가운 입술을 덥히기 시작했다.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는 철썩철썩 울음을 그치지 않고 긴 시간을 밀려서 와서는 밀려 갔다. "왜 이렇게 차와요. 꼭 얼음장 같아요. 이러다간 안 되겠어요." "한수! 나 집에 좀 데려다 줘." "네, 선생님. 하지만 집이 아니라 우선 병원에부터 가야겠어요. "아니야, 집으로 가야겠어. 지혜 아빠가 기다리고 있어,응!" "그래요, 선생님이 계실 곳은 바로 선생님 집이에요. 가요. 그 엄청난 아집이 기다리는 곳으로 요." 민숙을 안아 자동차에 태우고 그리다 만 민숙의 그림을 챙기던 한수는 달빛에 비치는 그림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달빛에 일렁이는 작은 소용돌이 그것은 바로 민숙이 토해내는 울분이었다. 민숙의 숨결이 가파지자 한수는 다급해졌다. 진주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 "한수! 지혜아빠는?" "연락을 할 게요, 전화번호를 몰라서" 민숙이 또박또박 전화번호를 불렀다. 한수는 상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태는 채 삼십 분이 안 되어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오민숙 어딨읍니까? 네?" "지혜 아빠 되십니까?" 한수가 묻자 상태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한수를 노려봤다. "그래요, 내가 지혜 아빠 요. 대체 어찌된 일이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C/T촬영을 하고 있어요. 저 하고 이야기 좀 하시겠어요?" 한수가 앞장 서 병원 밖으로 나가자 상태는 서너 발자욱 뒤처져서 똥밟은 표정을 하며 뒤따라왔다. 순간 한수의 주먹이 상태의 얼굴을 강타했다. 상태는 응급결에 얻어 맞은 주먹세례로 나가 꼬꾸라졌다. 한수는 나가떨어진 상태를 일어켜 세워 다시 또 한 방을 먹였다. 맞기만 하던 상태가 일격을 가해왔다.한수와 상태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있는 힘을 모두다 소진하자 여덟팔자로 들어 누워 하늘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당신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요. 사랑이라는 탈을 쓴 늑대요." "..." "왜, 선생님이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가 보고 싶다고 했는 지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아요. 그것은 차마 터뜨리지 못하는 울분이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지혜 아빠만을 찾았어요.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해명할 건 가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거래요." 상태의 흐느낌이 달빛에 젖어들고 있었다. 한수는 상태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자! 들어가요. 결과가 궁금하지 않나요?" 상태는 묵묵히 한수가 잡아끄는 대로 따랐다. "어떻게 환자가 이렇게 되도록 방치해 두었단 말입니까? 대체 어찌된 일이에요. 집으로 데려 가요!!" 한수는 눈 앞이 캄캄해져 왔다. "뇌출혈로 새어나온 피가 고여서 이미 굳어버렸어요. 늦었어요, 너무 늦었어요." 한수는 병원문을 박차고 뛰쳐 나오고 말았다. 한수는 미친 듯 엑스레이드를 밟았다. 파도가 여전히 달빛에 부서지고 있는 남해의 고즈넠한 해변, 한수는 이젤을 세우고 민숙이 채색하다만 혼불을 사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비상을 꿈꾸던 어여쁜 한 여인의 인생이 이렇게 철저하게 추락할 수 있을까요?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오민숙씨의 고단한 삶과 배한수씨의 변함없는 순수한 사랑에 위로와 사랑을 보냅니다. 김종웅님 늘 건필하시길 빌며, 처음 대하는 귀한작품 고맙게 잘 읽고 갑니다.^^*
첫댓글 우아....나중에 시간나서 다시 읽어께예...죄송합니다.
전번은 왜? ~ 작품 좋아요. 출간 준비중인가여?
우아...배경이 남해이네예...촉석루도나오공...결말이 짠 하네예...보름달 아니 달뜬 바닷가 가 보셨어예..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뿜어내는 그빛 가만히 손으로 그빛잡으려고 바닷물을 퍼올리면 손등에 반짝반짝 빛이났던 기억이...그게 무엇때문에 빛이났었는지는 더 큰 후에야 알게되었네예...
사랑 낭만 아픔............... 저 번호로 연락하면 라일락 향기가 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비상을 꿈꾸던 어여쁜 한 여인의 인생이 이렇게 철저하게 추락할 수 있을까요?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오민숙씨의 고단한 삶과 배한수씨의 변함없는 순수한 사랑에 위로와 사랑을 보냅니다. 김종웅님 늘 건필하시길 빌며, 처음 대하는 귀한작품 고맙게 잘 읽고 갑니다.^^*
탐독 하였습니다 시도 가끔 상재해 주시길 부탁 합니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