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몽주(鄭夢周)는 자(字)가 달가(達可)이고,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모친 이씨(李氏)가 임신했을 때 꿈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 놀라서 깨어 난 뒤에 낳았으므로, 이름을 몽란(夢蘭)이라고 하였다. 태어나면서 매우 남달라서 어깨 위에 검은 점 7개가 북두(北斗)처럼 펼쳐져 있었다. 9살이 되어서 모친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흑룡(黑龍)이 마당 가운데에 있는 배나무로 오르기에 놀라서 깨어 나가 보니 몽란이었으므로, 이에 몽룡(夢龍)으로 개명하였다. 관례(冠禮)를 하고나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응시하여 삼장(三場)에서 연이어 수석을 하고 마침내 제1인으로 뽑혔다. 11년(1362)에 예문검열(藝文檢閱)에 선발되어 임명되었고, 13년(1364)에는 우리 태조〈李成桂〉를 따라 화주(和州)에서 삼선(三善)·삼개(三介)를 무찔렀으며, 거듭 승진하여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하고 해이하여 사대부가 모두 100일이면 길복(吉服)을 입었지만, 정몽주는 부모의 상(喪)에 혼자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슬퍼하고 예를 다하는 것이 모두 극진하였으므로,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16년(1367)에는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서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하였다. 당시 경서가 우리나라로 온 것은 오로지 『주자집주(朱子集註)』 뿐이었다. 정몽주의 강설(講說)이 매끄럽고 두드러졌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이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심스러워하였다. 뒤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은 후에야 꼭 맞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여러 유학자들이 더욱 탄복하였다. 이색(李穡)이 그를 자주 칭찬하여 말하기를, “정몽주가 이학(理學)을 논하는 것은 횡설수설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종[東方理學之祖]’이라고 추앙하였다. 17년(1368)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가 20년(1371)에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전임하였으며 얼마 후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진하였다. 21년(1372)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써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경사(京師)에 가서 촉(蜀)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돌아오다가 바다에 있는 허산(許山)에 이르러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고 표류하다가 바위섬에 도착하였다. 홍사범은 익사하였고 살아남은 자가 겨우 12명이었는데, 정몽주도 거의 죽다가 살아나서 말다래를 베어 먹으며 13일을 버텼다. 이 일이 〈황제에게〉 알려지자, 황제가 배를 보내어 돌아오게 하여 후하게 은휼(恩恤)을 더하여주고 돌려보내었다.
우왕 원년(1374)에 〈정몽주(鄭夢周)는〉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제배되었다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다. 처음 명(明)이 건국되자 정몽주가 조정에 극력 요청하여 맨 먼저 귀부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시해를 당하고 김의(金義)가 〈명〉 사신을 살해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흉흉해하며 감히 〈명〉 조정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또 대의를 떨치면서 아뢰기를, “최근의 변고는 마땅히 재빨리 자세하게 아뢰어서 상국(上國)이 석연하게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어찌 우리가 먼저 의심을 품어서 백성들에게 화를 끼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부고를 알리고 또 김의의 일을 분명하게 해명하도록 하였다. 이때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이 다시 원(元)을 섬기고자 하여 그 사신을 맞이할 것을 논의하였다. 정몽주와 문신 십수인이 상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대계(大計)를 정해야 합니다. 대계를 정하지 않으면 인심(人心)이 의심할 것이고, 인심이 의심을 하면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은 바다 밖 한 구석에 있으면서 우리 태조(太祖)께서 당(唐) 말기에 일어나신 때부터 중국을 예로써 섬겨왔는데, 그 섬김에 있어서 천하의 의로운 군주인지를 보았을 뿐입니다. 근래에 원씨(元氏)가 스스로 파천(播遷)하면서 대명(大明)이 용처럼 일어나 사해(四海)를 덮었습니다. 우리 승하하신 선왕께서 천명(天命)임을 환히 아시고 표문을 바쳐 신하를 칭하니, 황제께서 그를 가상히 여기시어 왕의 작위로 봉하였으며, 하사품과 공물이 서로 오간 것이 이제 6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적신(賊臣) 김의가 예를 따라 천자의 사신을 전송하다가 도중에 제멋대로 살해한 후 모반하여 북원으로 들어가서 원씨의 남은 얼손들과 함께 심왕(瀋王)을 〈왕으로〉 들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천자의 사신을 살해하고 또 군주를 배반한 것은 악역(惡逆)이 극심한 것이니 참으로 그 죄를 바르게 해야 마땅하므로, 위로는 천자에게 보고하고 아래로는 〈중국의〉 방백(方伯)에게 알려 토벌을 요청하여 그를 죽인 연후에야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김의의 죄를 묻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金湑)를 시켜 북방에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오계남(吳季南)은 국경 지역을 지키는 신하인데도 제멋대로 정요위(定遼衛)의 3인을 죽였습니다. 장자온(張子溫) 등은 김의 일행 중의 사람들로서 정요위까지 가지도 않고 떳떳이 귀국했으나 또한 그냥 내버려두고 문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북원 사신이 오니 대신을 보내어 국경에서 예로써 맞이하자고 논의하며 말하기를, ‘북방을 격노시키지 않음으로써 군사를 늦추려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무릇 원씨가 나라를 잃고 멀리 와서 음식을 구하는 것은 한 번 포식하여 잠시 동안의 목숨을 연장해 보려는 것입니다. 명분은 군주[심왕]를 들여보내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이익 때문이니, 그들을 거절하면 우리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고, 그들을 섬긴다면 도리어 그 마음을 교만하게 할 것이니, 군사를 늦춰보려고 하는 것이 실상은 그것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듣건대 그 조서에는 우리에게 대역(大逆)의 죄를 덧씌우고 이어서 그것을 용서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본래 죄가 없으니 또 무엇을 용서한다는 것입니까? 국가에서 만약 그 사신을 예우하여 대접해 보낸다면, 온 나라의 신민(臣民)은 그 실체도 없이 스스로 대역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니 사방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하된 자가 그러한 일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물며 〈명〉 조정에서는 처음에 김의의 일을 듣자마자 이미 확실하게 우리를 의심했을 것인데, 또 우리가 원씨와 상통하고 김의의 죄를 불문에 붙였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우리가 적과 더불어 죽이게 한 것이라고 말할 것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죄를 묻는 군사가 일어나서 수륙으로 한꺼번에 쳐들어온다면 국가에서는 장차 무슨 말로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작은 적국의 군사를 막으려고 했다가 실제로는 천하의 군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이치는 매우 명백하여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묘당(廟堂)의 윗선에서 마치 말을 꺼내기 어려운 것처럼 하는 것은 그 까닭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대개 이전에 군소(群小)들이 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당시 재상들이 〈명〉 조정의 힐책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여 김의와 통모하여 상국(上國)과 관계를 끊으려 했던 것입니다. 안사기(安師琦)가 정황이 드러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이 때문입니다. 안사기가 이미 죽었으니 빨리 계책을 정하여 여러 사람들의 분함을 명쾌하게 해야 할 것인데도 지금까지 들리는 것이 없으니 인정(人情)이 흉흉해져서 다른 변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충(宸衷)을 결단하셔서 원 사신을 잡아서 원의 조서를 압수하고 오계남·장자온 및 김의가 데리고 갔던 사람들을 모두 결박하여 경사(京師)로 압송한다면 애매한 죄는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이에 정요위와 함께 군사를 양성해 변란에 대비할 것을 약속하고 북쪽을 향하겠다는 성명을 낸다면 원씨의 남은 종족들은 자취를 거두고 멀리 달아나 국가의 복이 무궁해지는 것을 기약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지윤(池奫)·이인임(李仁任)이 그[정몽주]를 크게 꺼리어 언양(彦陽)으로 유배 보내었다가 2년 쯤 되자 임의로 거주지를 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왜구가 매우 성하여 바닷가 주군(州郡)이 황폐해져서 완전히 비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이를 근심하여 일찍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 하카타[覇家臺]에 보내어 화친하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 곳의 주장(主將)이 잡아 가두어 나흥유가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우왕〉 3년(1377)에는 권신(權臣)이 지난 번 일에 원한을 품어서 정몽주(鄭夢周)를 보빙사(報聘使)로 천거하여 하카타로 가서 왜구를 금지시켜줄 것을 청하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전혀 어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카타에〉 이르러서 고금의 교린(交隣) 이해관계를 자세히 이야기하자 주장이 놀라고 탄복하여 객사[館]에서 대접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왜승(倭僧)들 가운데 시(詩)를 구하려는 자에게는 붓을 들어 바로 지어주니 승려들이 많이 모여들고, 날마다 가마를 메고 와서 기이한 승경(勝景)을 보기를 청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가 보낸 주맹인(週孟仁)과 함께 왔으며, 또 포로가 되었던 윤명(尹明)·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인을 쇄환(刷還)하였다. 또한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지시켰으므로 왜인(倭人)들이 오랫동안 칭송하고 사모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뒤에 정몽주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다들 탄식하고 한탄하기를 금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재승(齋僧)하여 명복을 비는 자도 있었다. 정몽주는 왜구가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이에 속전(贖錢)을 주고서라도 돌아오게 하고자 여러 재상들을 극력 설득하여 각자 사재 약간씩 내게 하였다. 또한 글을 써서 윤명 편에 주어 보내니 적의 우두머리가 글의 간절하고 슬픈 말을 보고 포로 100여 인을 돌려보내었다. 이로부터 매번 윤명이 가면 반드시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우왕〉 4년(1378)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배되었고, 전공(典工)·예의(禮儀)·전법(典法)·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쳤다. 〈우왕〉 6년(1380)에 우리 태조〈李成桂〉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격퇴하였고, 돌아와서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제배되었다. 이듬해에는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우왕〉 10년(1384)에 〈정몽주(鄭夢周)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배되었다. 본국과 〈명〉 조정 사이에 분쟁이 잦아지자 황제가 노하여 장차 우리에게 병사들을 보내려 하면서 세공(歲貢)을 늘려 정하였다. 이에 5년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고 하면서 사신 홍상재(洪尙載)·김보생(金寶生)·이자용(李子庸) 등을 장(杖)을 치고 먼 땅으로 유배 보내었다. 이렇게 되자 하성절사(賀聖節使)를 파견해야 할 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고 피하려고만 하였다. 최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陳平仲)이 거론되었는데, 진평중이 노비 수십 구를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주고 병을 핑계로 사임하였다. 임견미가 즉시 정몽주를 천거하자 우왕이 불러 대면하고서 설득하면서 말하기를, “근래 우리나라가 〈명〉 조정으로부터 책망을 당하는 것은 모두 대신들의 잘못이다. 경은 고금의 일을 널리 꿰뚫고 또한 내 뜻을 잘 안다. 지금 진평중이 아파서 갈 수 없으므로 경으로 대신하고자 하니 경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군부(君父)의 명이라면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는데, 어찌 천자께 조회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남경(南京)까지 거리가 대략 8,000리인데, 발해(渤海)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날을 빼고도 실로 90일의 일정입니다. 지금 성절(聖節)까지 겨우 60일 남았는데 바람을 기다리는 10일을 빼면 남은 날은 겨우 50일이니, 이것이 신이 한탄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언제 길을 떠나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유숙(留宿)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즉시 떠나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절일(節日)에 맞춰서 표문(表文)을 올렸다. 황제가 표문에 적힌 날짜를 보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 배신(陪臣)들이 분명 이유를 대면서 오지 않으려고 하다가 날이 임박하자 그대를 보내었도다. 그대는 지난번에 촉(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러 왔던 자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그 때 배가 패몰했던 상황을 모두 아뢰자, 황제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응당 중국어[華語]를 이해하겠구나.”라고 하면서 특별히 위로하고 달래주었다. 예부(禮部)에 명하여 예를 후하게 하여 전송하도록 하였으며 홍상재 등을 석방하여 돌려보내 주었다. 〈우왕〉 11년(1385)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선비들을 뽑았다. 고사(故事)에서는 매번 1장(場)을 시험할 때마다 번번이 심사하여 방(榜)을 내걸어 초장(初場)에 합격하지 못한 자는 중장(中場)에 들어갈 수 없고 종장(終場) 역시 그러하였다. 〈그런데〉 의비(懿妃)의 아우 노구산(盧龜山)이 어리고 어리석으며 배운 것도 없었으므로 중장에 입격(入格)하지 못하자 우왕이 크게 노하여 시험을 중지시키려 했다. 이성림(李成林)·염흥방(廉興邦) 등이 노구산의 부친 노영수(盧英壽)의 집으로 찾아가 노구산을 종장에 응시하게 하라고 청하였지만 노영수는 혼자서 들어가는 것은 불가하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불합격한 사람 십수 인을 함께 시험 보도록 하여 마침내 노구산을 합격시켰다. 덕창부행수(悳昌府行首) 문윤경(文允慶)은 본래 환관 이광(李匡)의 종자(從者)로서 그 친구의 책문(策文)을 도둑질하여 썼으므로 정몽주가 내쫓았는데 지공거 염국보(廉國寶)는 그를 발탁하니, 최영이 비웃는 말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전 달의 감시(監試)에서는 학사(學士) 윤취(尹就)가 빈한한 선비를 버리고 어리석은 아이를 뽑아서 하늘이 큰 우박을 내려 내 삼[麻]을 모두 죽이더니, 지금 동당(東堂)에서는 학사가 다시 어떤 천재지변을 부를 것인가?”라고 하였다. 〈우왕〉 12년(1386)에 경사(京師)에 가서 관복(冠服)을 청하고 또한 세공의 감면을 요청하였다. 정몽주가 아뢴 것과 대답한 것이 상세하고 명확하였으므로 5년 동안의 공물 중에 미납한 것과 증액한 세공의 상당수를 면제받았다. 〈정몽주가〉 귀국하자 우왕이 크게 기뻐하여 의대(衣帶)·안마(鞍馬)를 내려주고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제배하였다.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영원군(永原君)으로 봉하였다. 하륜(河崙)·염정수(廉廷秀)·강회백(姜淮伯)·이숭인(李崇仁)과 함께 호복(胡服)을 혁파하고 중화의 제도[華制]를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우왕〉 14년(1388)에는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제배되었다.
창왕(昌王) 원년(1388)에 〈정몽주(鄭夢周)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전임하였다. 우리 태조〈李成桂〉를 따라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기로 대책을 세워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사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 同判都評議使司事 戶曹尙瑞司事 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兼 成均大司成 領書雲觀事)에 제배되었다.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으로 봉해졌으며,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교서에서 이르기를,
“난을 평정하여 반정(反正)한 것은 진실로 사직(社稷)의 충신이요, 덕을 존숭하고 공에 보답하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영전(令典)이도다. 경이 천인(天人)의 학문과 왕을 보좌할 재능을 가지고 과거[射策]에서 연이어 으뜸으로 급제하였고,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효의 뜻을 다하였다. 안에서 근본이 잘 길러진 것이 확고하여 뽑히지 않으므로 밖에서 꽃부리가 아름답게 피어난 것이 화려하게 무늬를 이룰 수 있다. 선왕께서는 그대를 임용하여 조칙을 쓰는 일[絲綸]을 관장하게 하셨고, 후생(後生)들은 그대를 경모하여 태산과 북두처럼 보았다. 염락(濂洛)의 도(道)를 앞장서서 부르짖으면서 불교와 도교의 말을 배척하였다. 강론(講論)은 매우 정밀하여 성현(聖賢)의 오묘한 가르침을 깊이 체득하였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수많은 인재가 일어났다. 덕망(德望)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명성(名聲)은 이 때문에 크게 떨치었다. 명이 발흥한 초기에 〈우리〉 국가가 가장 먼저 귀부하였는데, 신료를 신중하게 가려서 〈그대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였었다. 넓은 바다를 항해하여 가다가 폭풍으로 인해 표류하여 겨우 만 번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다시 〈명으로〉 돌아가서 아주 후한 대접을 받고 왔다. 공민왕께서〈玄陵〉 세상을 떠나신 후 김의(金義)가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을 때 권신(權臣)들은 여우처럼 의심을 품고서 여러 관리들이 사행으로 빨리 달려가야 하는 수고를 꺼린다고 말하면서 상국에 사신을 파견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장차 백성들에게 재앙을 뒤집어씌우려 하였다. 경은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힘써 말하기를, ‘근래에 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어찌 사정(事情)을 갖추어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천자에게서 죄를 얻으면 우리나라의 복은 잇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어 신자(臣子)의 분위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방이 안녕하고 조용한 것은 경들의 계책 때문이도다. 그 뒤에 오랑캐 사신이 왔는데 서신의 글이 불순하여 당시 교외에서 맞이하자는 논의에 대소 신료들이 모두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경이〉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 등을 거느리고 불가함을 극력 진달하다가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용납되지 못하여, 영남(嶺南)으로 쫓겨나 있었던 것이 여러 해이고, 일본에 갔다 온 것이 해를 넘겼다. 작은 나라로서 사신을 보내 조빙하는 것이 늦춰지자 명 조정의 견책이 엄하여져서 국가의 행보가 위기에 빠지고 인심은 흉흉하고 두려움에 떨게 되니,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친히 천자를 뵙고 나서 비로소 입조할 길을 통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세공 액수를 감면받게 하였다. 예로부터 사대(事大)의 예에 실수가 없었기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아! 갑인년(우왕 즉위, 1374)으로부터 기사년(창왕 1, 1389)까지는 불행하게도 우(禑)·창(昌)이 왕위를 도적질한 화(禍)가 있었도다. 경은 항상 적인걸(狄仁傑)과 장간지(張柬之)가 〈당을〉 부흥시키던 것과 같은 충성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하늘이 실로 그대의 마음에 강림하여 일이 마침내 그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었구나. 홍무(洪武) 22년(창왕 1, 1389) 10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 등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오면서 성지(聖旨)를 가지고 왔는데, ‘고려는 왕위는 후사가 끊어졌으니 비록 가짜 왕씨라 하여도 이성(異姓)이 왕이 된 것이니, 이는 삼한(三韓)이 대대로 지켜 갈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해 11월 15일에 경 등이 계책을 정하여 천자의 명을 선포하고 태비(太妃)의 말을 받들어 과궁(寡躬)을 추대하여 정통을 잇도록 하였으니, 이미 16년이나 끊어졌던 제사를 계속하게 되었고 천만 세의 끝없는 아름다움을 연장하게 되었다. 이에 기강을 바로잡고 예악(禮樂)을 닦을 수 있었으며 전법(田法)을 바르게 하고 쟁송(爭訟)을 그치게 하였고, 용관(冗官)을 도태시키고 현량(賢良)을 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조정[廊廟]에서 한 일은 실로 요(堯) 임금과 순(舜) 백성의 뜻이고, 경연(經筵)에서 아뢰는 말[啓沃]은 모두 〈『서경(書經)』의〉 「이훈(伊訓)」과 「열명(說命)」의 말과 같았다. 빼어난 재주는 고굉(股肱)에 잘 어울리고 성대한 공덕은 굳은 맹세를 잊기 어려우니, 진실로 특별히 포상하고 존숭하지 않는다면 어찌 장래에 권면하고 장려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공신각을 세우고 초상을 두게 하고, 비(碑)에는 공적을 새기도록 하며, 3대의 조상들을 추증하고, 사면하여 용서하는 것[赦宥]을 영원히 자손에게 미치도록 하라. 토전(土田)을 내려주고 노비[臧獲]을 딸려 주며 백금(白金) 50냥·구마(廐馬) 1필을 하사하노라. 아아! 내가 어렵고도 큰 왕업을 이어받아 죄를 짓지 않으려 늘 생각하니, 경은 더욱 나를 보필하는 데 성심을 다하여 끝까지 명예를 이어가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경연에 임하자 정몽주(鄭夢周)가 진언하여 아뢰기를, “유자(儒者)의 도는 모든 것이 일상의 평범한 일에 있으니, 음식(飮食)과 남녀(男女)는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같으므로, 지극한 이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순(堯舜)의 도(道)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행동이 조용하고 말이 묵묵하여 그 바름을 얻게 되면 곧 이것이 요순의 도이니, 처음부터 너무 높아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 불씨지교(佛氏之敎)는 그렇지 않아서 친척과 이별하고 남녀관계를 끊어버린 채 홀로 바위굴에 앉아서 풀로 짠 옷을 입고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관공적멸(觀空寂滅)을 종지로 삼으니 어찌 이것이 평상(平常)의 도(道)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당시에 왕이 승려 찬영(粲英)을 스승으로 맞아들이려 했기 때문에 정몽주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바야흐로 불교에 현혹되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대간(臺諫)이 그 일당을 논죄하기를 매우 강하게 하니, 정몽주는 그들이 공신으로서 4대를 봉숭(封崇)했다고 하여 대사(大赦)를 청하였으나, 대간이 오히려 논집(論執)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은 도당(都堂)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정몽주가 이르기를 “죄상이 명백하지 않고, 지금 또한 사면을 거친 터이니 다시 논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형조(刑曹)에서는 정몽주가 윤이·이초의 당을 편든다고 탄핵하였다. 정몽주가 2번이나 전(牋)을 올려 사의를 표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고, 정몽주를 불러 잔치를 열어 위로하였다. 얼마 후에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判都評議使司 兵曹尙瑞寺事 領景靈殿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經筵事)로 제배되었고,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으로 〈봉해졌다〉. 〈공양왕〉 3년(1391)에 왕이 경연관(經筵官)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중국의 고사(故事)는 알면서 본조(本朝)의 일은 알지 못하니, 옳은 것인가?”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근대(近代)의 역사가 모두 편수되지 못했고, 선대(先代) 실록(實錄)도 상세하지 못합니다. 청하건대 편수관(編修官)을 두고 『통감강목(通鑑綱目)』에 의거하여 수찬(修撰)하게 하고 살펴보시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받아들여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 등에게 실록을 수찬하도록 명하였지만, 실행되지 못하였다.
성균박사(成均博士) 김초(金貂)가 상서(上書)하여 불교를 비방하자 왕이 노하여 그에게 사죄(死罪)를 주어 막으려 하니, 병조좌랑(兵曹佐郞) 정탁(鄭擢)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김초가 이단(異端)을 배척하느라 극언(極言)을 기피하지 않은 것인데, 주상께서는 선왕의 성전(成典)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하려 하신다니,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서경(書經)』에서 이르기를 ‘선왕의 성헌(成憲)을 본보기로 하여 영원히 허물이 없도록 한다.’라고 하였는데, 소위 선왕의 성헌이라는 것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씨(佛氏)는 모두 그것을 위배하므로, 김초가 선왕의 성전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스스로 훼손하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김초가 광망하게도 직언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대언(代言) 등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다.
정몽주(鄭夢周)가 동렬(同列)과 함께 상소하여 이르기를, “믿음[信]이라는 것은 인군(人君)의 대보(大寶)이니, 국가는 백성에 의해 보존되고 백성은 믿음에 의해 보존됩니다. 근래에 전하께서 구언(求言) 교서를 내리시며 말씀하시길, ‘말하는 자에게 죄를 주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상소하여 정사(政事)의 득실(得失)과 민생(民生)의 휴척(休戚)을 극론하였으니, 진실로 이른바 〈신하들의 말을〉 꺼리지 않는 조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자박사(國子博士)와 생원(生員) 등이 이단(異端) 배척을 이유로 상서하여 말을 아뢰었는데, 언어가 정중하지 못하여 천위(天威)를 침해했으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마지않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기에 불씨를 배척하는 것은 유자(儒者)의 상사(常事)이므로 예로부터 군왕(君王)은 그대로 두고 논죄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전하의 관대하신 도량은 작은 이 광망한 유생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너그러운 은혜를 베푸시어, 모두 용서하시어 나라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여주시기를 간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따라 김초 등을 사면시켜 주었다. 또 소를 올려 이르기를, “상벌(賞罰)은 국가의 대전(大典)으로서 1인에게 상을 주면 천만 인이 좋아하고 1인에게 벌을 주면 천만 인이 두려워합니다. 지극히 공정하고 명확하지 않으면 그 중도를 얻어 한 나라의 인심을 복종시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성헌(省憲)·법사(法司)에서 교장(交章)하여 잘못을 탄핵하기를, ‘어떤 사람은 왕씨를 세우려는 논의를 막고 〈우(禑)의〉 아들 창(昌)을 옹립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역적 김종연(金宗衍)의 음모에 참여하여 행재소(行在所)에서 내응(內應)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장수들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우(辛禑) 부자(父子)가 왕씨가 아니므로 왕씨를 다시 세우자고 의논할 때에 신우를 맞으려고 도모하여 왕씨를 영원히 끊으려 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윤이·이초를 상국에 보내어 친왕(親王)이 천하의 병사를 동원하도록 청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왕의 얼손(孽孫)을 몰래 길러서 불궤(不軌)를 몰래 도모한 자입니다.’라고 하면서, 장소(章疏)는 여러 차례 올렸지만, 전하께서 근심하는 마음만 번거롭게 했을 뿐 지금까지 명백하게 나타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사이에 죄가 있는 자가 부당하게 용서를 받거나 허물이 없는 자가 아직까지 누명을 씻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니, 둘 다 공도(公道)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로 인하여 말이 분분하여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마땅히 성헌(省憲)·법사(法司)에 분부하시어 함께 논의해서 헤아려 정하기를 장차 용의자들의 옥사(獄詞) 문안(文案)을 상세히 재검토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법으로 처리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정황이 의심만 갈 뿐이니 마땅히 가벼운 법을 따라야 하며, 어떤 사람은 죄 없이 무고를 당한 것이니 마땅히 명백히 판별해야 합니다. 옥장(獄章)이 이미 올라왔으니 전하께서는 조문(朝門)에 앉으셔서 재보(宰輔)와 신료들을 불러 친히 심록(審錄)을 보셔서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벌을 내려 축출하거나 용서를 베푸신다면 인심(人心)이 승복하고 공도(公道)가 행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이에 성헌·형조(刑曹)에서 5죄(罪)를 논리적으로 나열하며 아뢰기를, “왕씨를 올리자는 의논을 저지하고 〈우(禑)의〉 아들 창(昌)을 옹립한 자는 조민수(曹敏脩)·이색(李穡)입니다. 김종연(金宗衍)의 음모에 참여하여 내응(內應)한 자는 박가흥(朴可興)·지용기(池湧奇)·이무(李茂)·정희계(鄭熙啓)·이빈(李彬)·윤사덕(尹師德)·진을서(陳乙瑞)·박위(朴葳)·이옥(李沃)·이중화(李仲華)·진원서(陳元瑞)·김식(金軾)·이구철(李龜喆)입니다. 다만 지용기·박위·이무·정희계·이빈·윤사덕·진을서·진원서·이옥·이중화 등은 모두 국문하지도 않고 유배를 보냈으며 또한 공술한 말도 없어 정황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지용기·박위는 이름이 공신의 반열에 있고 지위가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니 성심을 다해 보좌하여야 하는데도 군관(軍官)을 많이 모아 김종연에게 의지할 곳을 만들어줌으로써 그 음모를 이루려고 하였으니 그 정황이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김식·이구철 등은 공술한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 불분명하여 그 정황 또한 의심할 만합니다. 신우를 맞아서 왕씨를 영원히 끊고자 도모한 자는 변안열(邊安烈)·이을진(李乙珍)·이경도(李庚道)·원상(元庠)·이귀생(李貴生)·정지(鄭地)·우현보(禹玄寶)·우홍수(禹洪壽)·왕안덕(王安德)·우인열(禹仁烈) 및 이색·정희계입니다. 대역(大逆) 변안열은 공술한 말이 남아 있지 않고 이미 복주(伏誅)되었으나 가산을 적몰하지 않아서 온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을진이 변안열과 함께 모의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죄상은 공술한 말에 명백히 나와 있으며 또 지금 이을진의 진술에 의하면 이경도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것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또 그는 변안열의 심복으로서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니, 어찌 변안열이 도모한 일을 이경도가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마땅히 이을진과 같은 곳에서 대질 심문해야 할 것입니다. 원상과 이귀생은 정황을 알았으면서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림(李琳) 부자가 공술한 말에 의하면 우홍수는 신우를 맞으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는 하나 공사가 없으므로 그 정황에 의심이 갑니다. 정지가 공술한 말을 보면 그가 죄도 없이 무고를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박의룡(朴義龍)이 공술한 말을 보면 이색이 신우를 맞으려고 도모했으니,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합니다. 우현보·왕안덕·우인열·정희계 등은 이미 모두 면직시키고 외지에 나누어 유배보내었으나 모두 공술한 말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 국문했던 순군관(巡軍官)에게 물었더니, 다들 말하기를 ‘우현보 등이 모의에 참여한 것은 김저(金佇)가 이미 분명히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김저와 대질 심문시키지 않았고 공술한 말도 없으니 정황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우인열은 위관(委官)으로서 순군에 있으면서도 김저의 공사를 명확하게 받아놓지 않았습니다. 왕안덕은 도둔곶(都屯串)에서 패전한 후 여흥(驪興)에 가서 신우를 만났는데 여러 날의 일정이었으므로 그 간의 일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또 이림 부자가 공술한 말을 보면 변안열이 우인열·왕안덕을 시켜 신우를 맞으려 했던 것이 명확합니다. 윤이·이초의 글에 보이는 자들 가운데 변안열·김종연은 이미 복주되었고, 이림·조민수는 병사(病死)했으며, 우인열·정지·이숭인·권근(權近)·이귀생·우현보·권중화(權仲和)·장하(張夏)·이종학(李種學)·경보(慶補)는 이미 승복하였으며, 이색·진을서·이인민(李仁敏)·한준(韓儁)·정룡(鄭龍)·구천부(仇天富)·이대경(李大卿)은 모두 공술한 말이 없습니다. 윤이·이초의 글에는 있지 않으나 홍인계(洪仁桂)가 공술한 말에서 드러난 자 가운데 최공철(崔公喆)은 이미 장(杖)을 맞아 죽었고 최칠석(崔七夕)·안주(安柱)·공의(公義)·곽선(郭宣)·정단봉(鄭丹鳳)·조언(曹彦)·왕승귀(王承貴)·장충립(張忠立)은 이미 승복하였으며, 조경(趙卿)은 병사하였습니다. 선왕의 얼손을 몰래 기른 자 또한 지용기인데, 지용기가 왕익부(王益富)를 몰래 기른 것은 일의 정황이 명백하므로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정전(正殿)에 나가 정몽주(鄭夢周) 및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剋廉), 겸 대사헌(大司憲) 김주(金湊), 문하평리(門下評理) 유만수(柳曼殊), 좌상시(左常侍) 허응(許應), 우상시(右常侍) 전오륜(全五倫), 간의(諫議) 박자문(朴子文)·전백영(全伯英), 헌납(獻納) 권진(權軫), 정언(正言) 유기(柳沂)·김여지(金汝知), 장령(掌令) 최함(崔咸)·김무(金畝), 지평(持平) 이원집(李元緝)·이작(李作), 형조판서(刑曹判書) 구성우(具成祐), 총랑(摠郞) 성보(成溥), 정랑(正郞) 하계종(河係宗), 좌랑(佐郞) 박의(朴猗) 등을 불러 5죄(罪)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과인이 즉위한 이래로 대간이 매번 5죄를 가지고 교장(交章) 상소했으나, 죄상이 명백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주기가 어려웠다. 내가 마음을 쓰며 걱정할 뿐 아니라 대간도 이로 인해 혹은 관직에서 밀려나기도 하고 혹은 좌천되기도 하면서 어지러운 일들이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명확하게 분변하는 것이 마땅한데, 죄가 있는 자는 사사로이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무고를 당한 자 역시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 경 등은 면전에서는 복종하는 듯하며 물러나서는 뒷말을 하지 말도록 하라.”하고, 창왕(昌王)을 옹립하고 우왕(禑王)을 맞으려 한 일을 묻고, 이색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하여 말하기를, “무진년(우왕 14, 1388)에 여러 장수들이 회군(回軍)한 후에 왕씨를 옹립하기로 의논하고 이색에게 계책을 물었다. 조민수(曹敏脩)가 신창(辛昌)의 외척으로서 당시 대장(大將)이었는데, 이색이 실로 겁을 먹고 나약하였으므로, ‘아버지를 폐하고 그 아들을 옹립하는 것이 국가의 상례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창을 옹립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죄가 용서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다만 이색은 절조(節操)가 없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주(金湊)가 논박하며 말하기를, “전하께서 잠룡(潛龍)이실 적에 가짜 신씨[僞辛]가 현릉(玄陵, 공민왕)의 후손을 칭하였습니다. 이색은 그가 왕씨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아들 신창을 옹립할 것을 주창하면서 아버지가 폐위되면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신씨가 왕이 되는 것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신씨가 왕이 되는 것을 이루게 한 것이라면 곧 전하께서는 신씨의 신하로서 신씨의 왕위를 찬탈한 것이 됩니다. 이색은 당대의 대유(大儒)가 되어 국론(國論)을 결단하면서 생(生)을 탐하여 의(義)를 잊었으니 죄가 어찌 용서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대장이었던 제군사(諸軍事) 같은 사람은 어찌 믿지 못하고 굳이 조민수만 두려워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러 낭사(郎舍)는 단지 예! 예! 만 할 뿐인데, 김여지(金汝知)가 홀로 왕의 비위를 맞추며 말하기를, “신 역시 이색 등이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또 우현보(禹玄寶)·박가흥(朴可興)을 용서하려고 하니, 김주가 다시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뜻이 있으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면서 말하기를, “경은 나를 사사롭다고 여기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색·우현보 등을 석방시켰는데, 이는 공술한 말이 없었고, 다만 김저(金佇)·정득후(鄭得厚)의 진술만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명하기를, “조민수·변안열은 그 집을 몰수하라. 지용기·박가흥은 그전대로 부처(付處)시키고, 우인열·왕안덕·박위는 외방(外方) 종편(從便)하도록 하며, 나머지는 모두 경외(京外) 종편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애초에 왕안덕도 경외 종편하고 있었는데, 김주가 말하기를, “왕안덕은 남포(藍浦) 전투에서 군대가 완전히 패하였는데 돌아오면서 필시 여흥(驪興)으로 가서 신우(辛禑)를 알현하고 다시 맞아서 옹립하기를 건의하였을 것인데, 죄상이 명백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가합니까? 외방종편이라는 죄를 내리는 것만 해도 〈은혜가〉 큽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정몽주가 왕에게 법령으로 삼아주기를 아뢰며 이르기를, “지금 이후로 만약에 위의 항목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誣告)로 논죄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얼마 후에 정몽주에게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내려주었다.
〈공양왕〉 4년(1392), 정몽주는 「대명률(大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과 본조(本朝)의 법령을 참작(參酌)하고 산정(刪定)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하여 바쳤다. 정몽주는 우리 태조〈李成桂〉의 위덕(威德)이 나날이 높아져서 중외 백성의 마음이 〈그에게〉 가고 있는 것을 꺼렸다. 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추대(推戴)하려는 모의가 있음을 알고는 일찍이 기회를 틈타 그들의 제거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세자 왕석(王奭)이 〈명 황제를〉 조현(朝見)하고 돌아올 때에 태조가 황주(黃州)까지 출영(出迎)하였고, 마침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몸을 심하게 다쳤다. 정몽주가 그 일을 듣고 기뻐하는 낯빛을 보이며 사람을 보내어 대간을 부추기며 말하기를,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므로, 마땅히 먼저 그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잘라낸 연후에야 가히 도모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마침내 조준·정도전·남은 및 평소 태조에게 마음이 가 있던 자들 5,6인을 탄핵하고, 장차 그들을 죽이고 태조까지 살해하려 하였다. 태조가 〈개경에〉 돌아오면서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묵고자 했는데, 태종(太宗) 〈이방원〉이 말을 달려 이르러 고하기를, “정몽주가 필시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것입니다.”라고 하였지만, 태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 이곳에서 유숙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었지만 태조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방원이〉 진심으로 청한 연후에 병을 무릅쓰고 마침내 견여(肩輿)를 타고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여 먹지도 못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 태종은 또 아뢰며 이르기를, “형세가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장차 어찌하여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생사(生死)는 명(命)에 있으니, 다만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태조의 아우 이화(李和) 및 사위 이제(李濟) 등과 함께 휘하의 군사[士]들과 논의하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에 충성을 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입니다.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아 오명(惡名)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능히 판가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도모하였다.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누설하였으므로,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변화가 있는지를 살펴보려 하였지만 태조는 그를 대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때를 놓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정몽주가 돌아갈 때에 조영규(趙英珪) 등 4,5인을 보내어 길에서 격살(擊殺)하게 하니, 나이가 56살이었다. 태종이 들어가 고하자, 태조가 진노하며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더니 태종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대신을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우리 가문은 평소 충효(忠孝)로 소문났는데, 너희들이 감히 불효(不孝)를 저질러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태종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정몽주 등이 장차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효(孝)이니, 마땅히 휘하 군사를 불러 모아 뜻밖의 일을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는 부득이 황희석(黃希碩)을 시켜 왕에게 말하기를, “정몽주 등의 당(黨)이 죄인을 비호하면서 몰래 대간을 꾀어내어 충량(忠良)한 신하들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조준·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변명하게 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간을 국문하여 유배 보냈고, 더불어 그 당도 유배 보냈으며, 정몽주의 머리를 저자[市]에 매달고, 방(榜)을 내걸어 알리기를, “거짓된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 대신을 해치려 하였고, 국가를 어지럽혔다.”라고 하였다. 태조 휘하의 군사들이 또 상소하여 그 집을 적몰하였다. 정몽주는 타고난 재질[天分]이 지극히 빼어났고, 호탕한 성격[豪邁]이 매우 뛰어났다. 충효(忠孝)와 대절(大節)이 있었고, 어려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성리(性理)를 연구하는 데 힘써 얻은 바가 깊었다. 태조가 평소에 그 그릇을 중히 여겨 전쟁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함께 갔고, 여러 번 천거 발탁하여 같이 재상까지 올랐다. 그때 국가에 변고가 많아 기무(機務)가 많으면서도 복잡하였지만, 정몽주는 큰일이나 의혹된 일을 처결하면서도 성색(聲色)이 동요하지 않았고 좌우(左右)로 대답[酬答]하며 모든 것을 적절하게 처리하였다. 당시의 풍속에서상제(喪祭)는 오로지 승려[桑門]들의 법을 숭상하였는데 정몽주는 처음으로 사서(士庶)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가묘(家廟)를 세워 선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또 수령(守令)은 참외(叅外)와 이서(吏胥)를 뒤섞어서 임용했기 때문에 직질이 낮고 사람됨이 용렬했었는데, 처음으로 참관(叅官) 중에서 청렴하고 명망 있는 사람을 뽑아서 임용하고 그 출척(黜陟)도 엄하게 하였다. 또 금전과 곡식을 출납(出納)하는 도평의사(都評議司) 녹사(錄事)가 백첩(白牒)을 시행하며 업무가 외람된 것이 많았는데, 처음으로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두어 그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또한 도성 내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외방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유학[儒術]을 일으켰다. 그밖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한 것도 모두 그의 계획이었다. 저술한 시문(詩文)은 호방하고 고결했고, 『포은집(圃隱集)』이 세상에 전한다. 본조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大提學 兼 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라고 하였으며, 아들은 정종성(鄭宗誠)·정종본(鄭宗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