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김좌진장군!
백야는 청산리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김좌진장군의 호이다.
김좌진장군은 고향을 얘기하면 분명 우리 고장의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장군은 지금의 갈산중학교 자리에 본가가 있었고
홍성과 우리 나박소를 무대로 유소년기를 지냈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김좌진장군이 김옥균의 일가라고 하면 잘 믿지를 않는다.
김옥균선생은 장군의 백부이시다.
한말의 개혁의 선봉자이시고 천재 정치가라고 일컫는 김옥균선생의
핏줄이라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김좌진장군은 유년기 서부터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비범한 소년이었다 한다.
일반인과는 다른 골격과 비상한 머리를 소유한
선각자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듯 하다.
소년시절에 이미 힘이 장사로 그를 당하는 사람이 없었고 학문 또한
깨우침이 빨랐다고 한다.
일예로 장군이 어렸을 때 이웃동네에 비석을 세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비석을 네사람이 밧줄(동아줄)과 나무를 이용하여 어느분의
(일명 목도라고 함)묘소까지 운반하였는데
그 비석을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소년 김좌진은 그 비석을 두손으로 일으켜서
반듯하게 비석이 세워질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다른일화는 홍성의 금마에 유명한 장사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사람을
팔씨름으로 꺾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사람이 아마 주위에 힘자랑을 했던 모양이다.
그 소문을 들은 열네살의 김좌진장군이 하루는 그 사람을 찾아
팔씨름을 하기를 청하였던 모양이다.
새파란 김좌진을 보고 그 사람은 가소롭게 여기고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웬걸 소년 김좌진은 일거에 그 장사란 사람을 팔씨름으로 꺾어서
아얏 소리를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옛날 쌍천교 가기전 구성굴 쪽에 소나무 숲이 1km쯤 연이어진 곳이 있었다.
하루는 김좌진장군이 그곳을 지나는 데 양반이란 작자가 가마를 타고 갔던 모양이었다.
옛날에 양반의 가마가 지나가면 옆으로 비켜서 머리를 조아리는 게 상식인데
김좌진은 뻣뻣하게 길 가운데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양반이란 사람은 김좌진에게 "웬놈이냐! 이리오너라!"하고 외쳤던 모양이었다.
소년 김좌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 길 양옆으로 있는 소나무를 양손으로 붙잡아
양반이 못가도록 꼬아 놓아 버렸다고 한다.
그걸 두눈으로 똑바로 본 양반이란 작자는 기가 죽을 수 밖에.........
그렇게 홍성과 나박소를 무대로 활동을 하시던 장군은 고향에서 학교를 세우시고
개화 운동을 하시다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는 바가 있어
자신의 집안에서 일하던 하인들에게 노비문서와 재산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해방시키고
한양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기셨다고 한다.
한양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장군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급기야는
만주벌판에서 본격적인 장군으로서의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만주벌판에 북로군 정서라는 독립군을 창설하여 청산리 전투에서 이범석 장군 그리고
홍범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셨다.
장군은 42살에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자신의
부하에게 권총으로 저격을 당하여 돌아가셨다.
장군은 젊은 시절 나라만을 생각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만주벌판에서
자신을 불태우셨다.
지역이기주의가 만연되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냉혹한 요즈음의 세태에
우리는 우리의 고장에서 자라난 김좌진장군과 같이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바쳤던 선각자적인 사상을 흠모하고
그분의 그 호탕한 기개를 본받야 할 듯 하다.
첫댓글 이미 돌아가신 김두한 전 국회의원이 아들이고 탤런트이며 정치가로 활동하는 김을동이 김좌진 장군의 손녀랍니다.
역시 그후순 들만 보아도 힘이 장사라는 것을 알수 있을것 같네요....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한주가 시작됬네요... 힘찬 한주을 열어가시길 바람니다....
달형님 방문 고마워요..., 이번주에는 직산에 훈풍만이 불기를 .......
아주 좋은 글이네요...감사^^
저도 새해벽두에 김좌진 장군을 가까이서 뵙고와쥬! 덕분에 다시 한번 공부혔네유. 꾸벅!!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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