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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파하겠다>
1절
성도 여러분 ,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였을 때 ,
웅변술이나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전한 것이 아니였읍니다.
AND I brethren , when I came to you, did not come with excellence of speech or of wisdom declaring to you the testimony of God
참고) "성도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 을 말하는 사도바울의 의미를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읍니다. 영어로 영문으로 보게되면 "AND I brethren, when I came to you " (앤 아이 브레:든 웬 아 케임 투 유) 가 되는데
성도를 향하여 하는 말에서 성도를 brethren (동료, 종교적인 형제) 으로 표현하였는데 특이한것은
내가 형제(성도) 들을 보러 고린도 교회에 가서... 라는 뜻인데 사도바울 자신이 상대성 2 인칭인 성도여러분을
보러 간 것이라면 , My bethren (나의 형제<성도> 라는 소유격 my 를 써서 상대성 2인칭 으로 해야함을 1 인칭으로 " I brethren"으로 I (자신) 와 동격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도형제들을 자신인 사도바울과 같은 자신이라는 성도의 정의적 뜻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한 관계로서 성도형제들을 자기화 하고 있음을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형제의 브라더 라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더 밀접하고 불가분한 동질성으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판단하지 않는것입니다. "이웃을 형제처럼 사랑하라" 이러한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오로지 방편이였읍니다.
이웃이라는 것을 내 몸인것처럼 사랑을 행 한다 라는 오롯한 진리의 비밀을 전하기에는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아직은 지혜가 없고 ,성도들도 아직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이 들이 많기 때문에 통속적인 관계성에서 단지 같은 피를 나눈 관계인 형제로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이라함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라는 그 의미로서 담아보아도 각자 모습은 달라도
성령의 은총을 입을때에는 오로지 동시에 한몸인 것입니다.
한몸이라는 것은 사도바울이나 성도형제분들이나 한몸과 같으니 사도바울의 존재도 성도형제분들의 각자 존재로서는 정해지지 않는 성령의 은총을 동시에 입는 하나이므로
이미 자기 존재라는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의 지경" 이라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읍니다. 서로가 같음은 누구를 딱히 자신의 존재라 칭하겠읍니까? 그러므로 무아 라는 의미도 잘 궁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비밀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testimony of God" (하나님의 증언) 이라고 표현하고 있읍니다.
"비밀은 하나님의 증언"을 의미함을 여실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맥락을 이해하고 해당 1 절을 참독해야 합니다. 증언을 전하는 사도바울은 이미 예류과에(오는 미래에 이미 들어서서 하나님의 성령의 증인이 된 자 입니다) 들어서서 이 비밀을 전하는 것임을 당당하게 나타내고 있으므로
이제는 사도바울이나 성도여러분의 각기 존재는 없고 오로지 성령의 말씀에 따라 나는 무슨말이나 지혜를
같음으로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깨어난 자 입니다.
그러믈 탁월한 웅변이나 전하는 말은 모든 성령이 동시에 주어진 상태에서 내가 아닌 하나의 이치로
입을 열어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지 스스로 사고방식등 머리를 궁리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언에 따라 독실한 믿음과 세례를 받고 서로간에 대하는 동료들은 (성도) 불가분이라는 의미는 확실한 것입니다. 이를 여호아! 의 입김이 각자 마음에 동시에 내재된 사실을 성도들이라 이름할 수 있읍니다.
"웅변술이나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전한 것이 아니였읍니다" 오로지 성령의 은총으로 전하는 말씀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절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For I determined not to know anything among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참고)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혔읍니까?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의 메시아로서 몸소 십자가에 못 박힌
까닭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다 헤아리는 지혜를 지닌자라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에서 이러한 내용이 있읍니다, 도인이 제자를 두었는데 제자가 너무 우수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하산하라, 더 이상 가르킬것이 없다 , 완전 하다. 그러므로 하산해라,
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데 앞장서라: 이와 같읍니다.
통속적인 예로서 예수님을 비유하는 것은 안되지만 이해를 쉽게 하는것을 위하여 소개해봅니다.
예수께서는 우상을 숭배하거나 이로서 세력을 가진자들이거나 통치자들에게 즉 기득권 자 들에게
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판과 , 끊임없는 질타를 가하셨고,
핍박받는 백성들과 , 가난함과, 질병과 아픔을 지닌 모든 백성을 위해 당신과 같은 몸임을 몸소
전도하였읍니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을 믿는자들은 스스로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했읍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은 하나와 같은 백성들을 사랑하셨읍니다.
사랑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분리 될 수 없는 자신의 몸처럼 은애하는 것을 사랑이라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진정성이 있는 인연을 맺는다면 서로가 분리 될 수 있을까요?
전쟁이 일어나서, 느닷없는 사건이 일어나서 연인이 죽음직전에 놓여있다면
대신 죽어도 아깝지 않는 진정성이 있다면 , 이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이며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감히 어떻게 이혼을 상상하겠읍니까?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인내하며 ... 뭐 이러한 인용귀절이 있지 않읍니까?
사랑이라함은 영원한 보수성입니다, 불가피함의 사정을 예외로 든다면 오직 사랑은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일심동제"<一心同體> 를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백성들을 내몸처럼 여기라(사랑하라) "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상숭배는 무엇인가?
상대세계로서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래로 이성적인 상대세계에 빠져 성령의 절대성을
벗어난 일탈의 행위를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라 하는 것입니다.
통치자를 숭배하는 행위, 세력에 비굴해지고 눈치보며 무엇인가를 구하고자 바라고자 받아먹을 것을
빌어서 지고자하는 관계는 우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되는데 이를 우상숭배라 합니다.
상사한테 잘못보이면 잘릴까바 눈치보는 것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방자치단체의 단체장에 대하여 잘 보이려하는 직원이나 공무원이 있다 합시다.
이를 뉴리는 자인 지방자치단체장은 우상노릇 하는 것이고 그 공무원은 이러한 우상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우상은 그러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세계에서 사회의 세력권과 기득권 그리고 하층민을 제도하고 구해준다는 이유로서
권력을 휘두루는자. 자신의 유리한 입장을 무기삼아 자기보다 불리한 입장에 선 자 들을
업신여기고 유리한 조건을 지닌것으로 행사하는자, 이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의기소침하고
무엇인가를 빼앗겨야 하는 관계 ! 이 모두가 전부 우상과 숭배의 이원론 속에 빠진
상대세게의 모든 일련의 행위 및 상징성은 전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의 정의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비판하신 것이 예루살렘에서 통치자들에게 지적을 하고 비란하시며
엄중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필요충분조건은 두려움입니다, 눈치를 보게되고 눈치를 주는 관계로 상하 서열로
매기고 이를 가지고 스스로 같은 백성들로서 한몸인 사실을 의도적으로 차별하고 상대적인 세계를
열어버린 것인 인류의 현 주소이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은 우상의 기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읍니다.
가족은 내 몸처럼 여겨야 하는 것이 가정의 제 1 기본인데 이를 사랑이라 이름하고
서로 서열정리로서 모든 일상을 해결하거나 해결하려는 질서의 어떤 모순체계
이것이 바로 우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레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 사회계약설의 어떤 상대세계에
주어져 있는 관계로 서로 서로 경계하며 일상을 유지하고 있읍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게되면 우상숭배를 자처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진 문화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눈이 어두어 성령의 온전함을 믿지 못한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주변을 돌아다 보면 거의 다 그러합니다. 전부 우상의 나락으로 빠지고 우상이 되려고 노력하는
명예욕, 재물욕, 성욕, 수명욕 등으로 얼룩진 상대세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메시아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행함으로서 O 의 여호아 의 말씀대로 인과율을 스스로 비추어서 같은 백성으로서
일체 같음을 보지 않고 ,
우상에게 핍박을 받는자는 반연하여 핍박을 주는자로 부활하는 빛의 심판을 받고
가난한자로서 일방적으로 부자인자들에게 당하는 고통이 주어지면 반연하여 그와 같은 상대적으로 제공하는
당사자로 부활하고
통치권자들로서 수많은 공익에 해를 가하는자는 그와 같음으로 수많은 목습을 훼손하는 만큼 멸망케 하여
부활자체도 할 수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여 세상의 온전한 O 의 세계를 유지하게 하는 심판을 빛으로
행하신다 라는 것이 메시아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상대세계를 그렇가도 벗어나고 혼자 초연하다가 살아낼 수 있는 사회구조인가를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읍니다.
도리어 더 잘 살 수 있으며 복락을 누릴 수 있읍니다
참회나 회개를 하게되면 더욱더 떳떳하게 순백의 영혼됨으로 서로 서로 사라앟는 인과율을 조성하게되어
더욱더 충만하고 복되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말 합니다.
단지 이러한 지혜를 내지 못하는 연유가 삶의 고리를 묶어진것을 벗어나지 못할 뿐 입니다.
그 까닭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동양적인 정서로 의역하면 여수 (如受) 입니다.
같음을 받게 하는 분! 이라는 의미로 짐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문의 번역을 동양적인 정서로 하지 못한 까닭은 크게 영향을 주고 있읍니다,
어느누구나 내재된 성령을 지니고 있으므로 백성들 제 각기 자신의 의지를 작용하는 능력이 상존해 있음인 고로
단지 의지작용만큼 행함의 반연하여 돌이키는 빛 의 힘으로 비추어 온 우주세상의 공간을 늘 청정하고
O 으로 유지하게 하신다 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심판이라 하는 것입니다.
단지 백성들중에 우상을 의도하는 세력이 생겨남인데 이는 성령의 온전한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세계의 욕망에만 길들여진 잘못된 의지작용의 6,6,6 짐승표만 물고 전부인양 착각하는 백성들을
비판하신 것이 예수님의 통렬한 지적이였다는 사실이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에게는 기적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위적으로 나중에
핍박받는만큼 반연하여 핍받을 받지 않는자로 인과가 주어져 성령으로 구원맏음을
증하기 위해 행하시는 것인바 희망과 진실로 믿음을 지닌자는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시켜 보여주신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의 기적적으로 인위적 조성하여 실행하신 당신이라 하지만 자체적으로그 인과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라고 예외는 둘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는 겨우 6 개월 정도로 전도를 하시다가 몸소 인과율대로 정해진 수순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당신의 한몸처려 여기고 희생하셨으니 그와 같음으로 삼위일체의 삼일만에
부활 하시어
도다시 증거하신 것입니다.
사랑과 희생 그리고 봉사로서 온전함을 지닌체 성령을 믿는자는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영생의 자리 티켓을 이미 따 놓은 것과 같다, 이것을 메시아 라고 할 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하심이 구원이며 주) 그리스도의 메세지 입니다.
서로서로 같은 몸처럼 사랑하고 그렇게 여기며 살아간다면 더이상 늘 복락으로 펼쳐지는
세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세게의 우상숭배에 의한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세력에 의존하는자는
성령을 배반하는 것과 같으므로 심판을 받고 온전한 성령을 믿음으로서 복음이 된다 이 말과 같읍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됨을 목도하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분파를 조성하지
말라는 지혜의 말씀을 성령의 은총을 빌어 행한다는 사실을 결단있게 전하는 것입니다.
3절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약하였고 두려웠으며 몹시 떨었읍니다.
참고) 사도바울로 인간인고로 상대세계의 통속적인 관계를 연결하고 살아온 속자(俗者) 이기는 매 한가지 이며
같은 성도들에게 다가섰을때는 이러한 상대성의 두려움으로 그와 같은 행위의 인과율에 의하여
불안함은 늘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같음으로 성도에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회개나 참회가 올때는 자신의 속죄양을 보는 상태이므로 항상 두렵고 떨리고 쥐 구멍이 잇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온 주변에서 몰려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기운을 경험해야 마치 비오고 천둥치는
이후 아주 맑고 순백한 창공을 보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부터는 절대 타자나 다른이들을 비난하거나 비판 할 수 없는 순백상태에서 사랑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 거듭나는 것입니다, -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4절
내가 전한 말이나 선포한 것들은 지혜롭고 설득력이 있는 말들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었읍니다.
참고) 성령의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차 올 미래를 미리 받아지니는것을 성령의 능력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예류과라 하고 성인의 흐름에 들어서는 성령을 보아 은총을 받은 은혜로운 자 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러하다 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5절
이렇게 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두게 하려는 것이었읍니다.
참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진리입니다.
창세기 1장 2절
그런데 그 땅은 지금처럼
자임새 있는 모습이 아니었고, 생물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읍니다.
어둠이 깊은 바다을 덮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서 움직이고 계셨읍니다<하나님의 입김 성령>
여기에서 어둠이 깊은 바다처럼 덮었다는 것은 " 칠흙같은 어두움으로 표현합니다"
칠은 무엇인가? 옷칠을 하면 옷 색깔이 검습니다,그러므로 칠의 7 빛은 어둠에서 근원을 둡니다.
우리가 옷칠로 색을 구현하는데, 일곱번 중복합니다,
그리고 이 일곱번 칠을 (빛의 운동기원) 할때 여러가지 배색을 하고 난 후 거듭 일곱번 칠한 판화를
다시 깎아 보면 아주 선명한 모든 색이 자연하게 들어납니다.
어둠에서 빛 7 이 일어난다 이러한 의미를 통찰하여 궁리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영적이 아니면 항상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상대세계로서 오로지 선악의 각자대로 규정하여
눈치보고 살면서 두려움과 공토를 숙지하게 살아내개 됩니다, 이것은 위대한 착각이고, 이 위대한 착각에 대한 혁명은 오로지 예수님의 복음된 말씀의 빛은 생명이요 진리라는 말씀을
믿는 것에 있읍니다. 믿으려면 진정성 있게 믿어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분파를 우려하여 전하는 말입니다.
다음에 계속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지헤 편인 6 절부터 소개 하도록 하겠읍니다.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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