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분께서는 자비하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셨다.
당신 분노를 거듭 돌이키시고
당신 진노를 결코 터트리지 않으셨다
(시편78,38).
이 절은 39절과 함께 하느님의 놀라운 반응을 묘사한다.하느님은 분노와 벌이 아니라 자비와 이해로 반응하신다. 이 절은 탈출 34,6-7에 나오는 하느님의 본질을 설명한다.하느님은 자비 또는 연민의 하느님이시다(탈출34,6;신명4,31).자비하신 하느님은 죄를 용서하고(탈출34,7ㄱ;시편65,4;79,9).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고(신명4,31;9,26;10,10),자주 분노를 참으신다.“진노”는“분노”보다 더 강한 말로서 분노의 타오르는 열을 말한다.진노는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조상들은 하느님을 속이고(시편78,36),계약에 신실하지 않았지만(37절)하느님은 용서하고 분노와 진노를 참으며 자비를 베푸신다.
시편 78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78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역사를 간추려 노래한다.구체적으로는 야곱부터 유배까지의 사건(5-61절),특히 이집트 탈출,광야생활,가나안 정착,시온과 다윗의 선택을 다룬다.106편에서와 같이 시인은 백성의 지독한 불복종과 배은망덕,백성의 반항(17.40.56절)과 하느님의 진노(21.31.38.49절)를 여러 차례 언급한다.하느님 진노의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반역이 있었다.그들은 계약을 지키지 않았고 가르침을 따라 걷지 않았다(10절).그들은 하느님께 죄를 짓고 사막에서 반항했다(17절).하느님을 시험하고(18절)하느님을 거슬러 말했다(19절).또한 기적을 믿지 않고 죄를 지었다(32절).더욱이 하느님께 거짓말하고 계약에 신실하지 않았다(36.37절).이렇게 그들은 반항하고 시험하면서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그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억하지 않고 하느님을 슬프게 했다.그렇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종 다윗을 선택하여 새로운 시작을 하도록 자비를 베푸신다.이 시편의 저작 의도는 장차 태어날 미래의 세대를 알아듣고서 그들도 제 자손들에게 자기 조상들처럼 되지 말라고 일러주게 하려는 것이다(6-8절).많은 경우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개인적으로 반역과 거역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그런데도 하느님의 자비가 훨씬 더 큼을 시인은 알려준다.그리고 하느님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분이심을 보여준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3-2 시편 42-89편/바오로딸)
(한 여름 밤에/08/29)
Ⅳ.공동선의 원리
156. 통합 생태론은 사회 윤리에서 핵심적이고 통일적인 원리인 공동선의 개념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공동선은“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의 조건의 총화”입니다.
157.공동선은,자신의 통합 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은 인간의 존중을 전제로 합니다.이는 보조성의 원리를 적용하면서,사회 보장과 복지 제도,그리고 여러 중간 집단의 발전도 필요로 합니다.그 가운데 두드러진 집단은 사회의 기초 세포인 보장을 요구합니다.이는 특히 분배 정의를 존중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분배 정의가 침해당하면 언제나 폭력이 발생합니다.사회 전체,특히 국가는 공동선을 수호하고 증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158. 불의가 판치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배척당하며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세계화된 사회라는 현재 상황에서는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공동선의 원리가 곧바로 연대로의 부름이자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됩니다.이러한 선택은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암시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제가 <복음의 기쁨>에서 다룬 것처럼,이는 먼저 믿는 이로서 우리가 가장 심오한 신앙의 확신에 비추어 가난한 이들의 커다란 존엄에 대하여 성찰할 것을 요구합니다.오늘날 이러한 선택이 공동선의 효과적인 실현에 근본이 되는 윤리적 요청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Ⅴ.세대 간 정의
159. 공동선의 개념은 또한 미래 세대도 관련됩니다.세계 경제위기는 우리 후손들도 예외일 수 없는 공동 운명을 무시하는 악영향을 신랄하게 보여 주었습니다.오늘날 우리는 세대 간 연대 없이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더 이상 논할 수 없습니다.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지구를 생각하면,우리가 거저 받은 선물을 전달하는 것에 관한 새로운 논리에 접어들게 됩니다.세상이 우리에게 선사된 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개인적 유익을 위한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공리주의적 원칙으로만 생각 할 수 없습니다.세대 간 연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우리가 받은 지구는 우리 후손들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포르투갈 주교들은 우리가 이러한 정의의 의무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였습니다.“환경은 받음의 논리에 속하는 것입니다.환경은 각 세대가 빌려 쓰는 것으로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통합 생태론은 이러한 폭넓은 전망을 담은 것입니다.
160. 우리 후손들,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이 질문은 환경만을 따로 데어 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부분적으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물려주고 싶은 세상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제기할 때에는,무엇보다도 그 전체적 방향,의미,가치를 생각합니다.만일 우리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치열하게 다루지 않는다면,우리의 환경을 위한 노력이 중요한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그러나 우리가 용기를 내어 이러한 질문을 하면,반드시 또 다른 매우 직접적 질문을 제기하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가?우리가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우리는 무엇을 취하여 일하고 노력하고 있는가?지구는 왜 우리를 필요로 하는가?그러므로 그저 우리가 미래 세대만을 걱정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우리 자신의 존엄이 위기에 빠져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미래 세대에게 살 만한 지구를 물려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이는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161. 종말에 대한 예언은 더 이상 비웃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엄청난 잔해와 황무지와 쓰레기를 남겨줄 수 있습니다.소비,낭비,환경 변화의 속도는 지구의 한계를 넘어섰습니다.그래서 현재의 생활 방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에,이미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재앙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현재 불균형의 영향을 줄이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하는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특히 최악의 결과를 감수하게 될 이들이 우리에게 추궁할 책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162. 이러한 도전에 진지하게 맞서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환경 훼손을 수반하는 윤리적 문화적 타락과 관련됩니다.탈근대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지나친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습니다.많은 사회 문제들을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인 문화,가정적 사회적 결속의 위기,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됩니다.부모들은 과도하고 근시안적인 소비로 자녀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자신의 집을 마련하고 가정을 꾸리는 데에 점점 더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더 나아가,우리가 미래 세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관심의 지평을 넓히지 못하는 것과 발전에서 소외된 많은 이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미래의 가난한 사라들만을 생각하느라 길을 잃지 맙시다.이 지구에서 살날이 많지 않고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오늘날의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합시다.그러므로“더욱 공평한 세대 간 연대 의식에 덧붙여,세대 내 연대의식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도덕적 요구도 절실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그들은 현존하는 정치 질서의 틀을 벗어나는 행동이나 주장은 곧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도록 하는 사상을 의도적으로 보급시켰다.그러한 도전을 자연 질서에 역행하는 금도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이 점을 이해하면 왜 신유학 사상(주자학)이 일본에서 그토록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일본의 통치자들이 왜 기독교에 대해 조금만 동조하는 기미가 보여도 그토록 집요하게 짓밟으려 했는지 설명이 된다.일본의 기독교들에게 가해진 지독한 박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이전 로마 제국에서 행해졌던 기독교 박해에 비교할 만하다.그것은 단순히 신앙에 대한 금지가 아니었다. 모든 외국인 선교사는 강제 출국되거나 사형당했다.박해는 수만 명의 신도가 저항 끝에 나가사키 근처 시마바라 島原반도로 피란 가서 자리 잡앗던 1637년에 절정을 맞았다.새로 도입된 과중한 세금제도도 한몫했지만 종교적 신념이 막부에 대한 항거의 핵심이었다.기독교도들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라郞는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통솔하에 수개월 동안 저항했다.이들의 근질긴 저항은 역설적으로 이들이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하는 위험한 종교단체라는 막부의 신념을 강화시켰다.피란 기지였던 성이 함락되면사 수만 명이 학살되었고,전국에서 도 다른 수만 명이 추적 끝에 처형되거나 신앙을 부인하도록 강요받았다.
그 뒤로 수십 년간,막부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에 관한 조그만 동조의 움직임도 절대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누구라도 그런 낌새를 보이면 기독교의 상징을 비난하는 의식을 행해 보일 것을 강요받았다.이를 거부하면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그럼에도‘숨은 기독교인’들은 두 세기반을 살아남아 은밀하게 신앙을 대물림했다.이들 일대기 최후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그 후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지역은 1945년 나가사키長崎에 덜어진 원자폭탄에 의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굴레93~94쪽 발췌/태키트 머피 著/글항아리)
(종로 08/24)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어떤 결심/이해인)
행복한 날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