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산빛은 가속을 내고
폭풍처럼 불길이 들이닥칠 때
티끌도 흠집도 죄다 태우며
미친 하늘이 덤벼들 때
맞습니다
길은 보이지 않고
바람이 우리 몸뚱이 통째로 말아버리면
어디선가 어둠도 저린 발가락 피가 나도록
긁고 있겠지요.
접었던 시간의 소매를 내리며
먼 기억들이 박쥐처럼 날개를 펴고
휘몰아치는 단풍 속으로, 속으로
마구 날아드는 것이겠지요.
끝도 없이 서로 얼굴을 부딪치며
세상의 굽이마다 떨어져 쌓일 때
서둘러 낭떠러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1999 경향신문 - 풀과 함께 <이승희>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지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어린 풀들
쑥쑥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 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1999 중앙 일보 - 어라! 햐! <이희철>
어디 보자. 이게 피라민가 빙언가 속이 보여야 빙어이제. 어디 보자 자리를 벌리고 비집고
들어와 냅다 겨울 햇빛 한 조각을 집어 들던 사람. 빵모자를 눌러쓰고 초집장에 한 번 찍어
소주잔을 걸치고 입술을 쓰윽 쓰다듬던 사람 어라! 햐!
그 겨울이 그립네. 겨울의 깊이를 웅크리고 웅크려서 얼음의 두께로 한겨울을 보여주던
저수지. 손도끼 곡괭이로 내리쳐야 닿던 완강한 겨울의 복판.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얼음을 깨어내 내부로 닿던 적막. 속이 투명한 빙어가 어라! 햐! 얼음빛을 닮아 빛나고 있
네.
얼음 밖이 딴 세상이라. 얼음 밑이 딴 세상이라 조심조심 겁많은 사람에게 아무 말도 않
다가 안심이다 정말 안심이다 마음 놓을 때 쩡쩡 갈라지며 울음 울던 물의 소리 저 검푸른
빛 구들장만하게 떼 오고 싶었네. 몸으로 뗄 수 없어 엎드려 어쩔 줄 모르던, 어라 햐! 그래
서 더욱 첩첩 산중이던 상주 어디쯤에 아직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그리운 사람.
1999 세계일보 - 만 월 <정지완>
그날 밤 송암동 버스 종점 마을은 가로등 불빛 대신 달빛이 수상했네 달빛은 마을을 감싸
던 안개를 가르며 조심조심 지붕 위를 걸어다녔네 달빛이 삭은 슬레이트를 밟느라 하수도
물위에는 몇 줌 떨어뜨린 금종이 부스러기들로 번들거렸네 감나무집 담장 밑을 걸어가는 사
람이 있었다면 그 담장 밑 하수물에는 꽃이 자란다고 생각했을 것이네 호박꽃은 감나무집
지붕 위에 내려온 별 몇 개와 쑥덕거리고 있었는데
보름달이다 보름달이다, 버스기사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밖을 내다보던 가게 주인
도 보름달이다, 주뼛하여 불을 끄고, 누렁이는 버스 밑에 숨어서 킁킁거릴 뿐 도둑고양이들
도 폐차 속으로 달려가 시퍼렇게 뜬 눈을 감아버렸네
감나무집 지붕 밑, 깻잎들 소소소 잠을 깨고 바람에 밀리는 꼬소한 냄새 호박꽃잎을 흔들
었네 배짱 좋은 호박꽃 몇이 별과 헤어져 지붕을 내려갔네 호박꽃은 발개한 입술 사이로 단
물을 흘리며 흠뻑 창문을 더듬었네 핼쑥한 형광등 불빛! 꿀꺽, 침을 삼켰네
거구의 사내가 종이새를 접고 있다아
방충망을 헤집는 더듬이들,
호박꽃잎은 그만 터질 것 같네
툭!
부실한 푸른 감 하나
지붕 위에 떨어지고
보름밤 감나무집 지붕 위, 새까만 호박 몇이 사생아 같았네 무슨 날짐승 소리 들리는 듯
도 했는데, 달빛이 안개에 젖은 빨래를 말리고 있었네
1999 동아일보 - 흑백사진 <최치언>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새들은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지
붉게 꽃핀 담장 너머
멀리 공장의 굴뚝 다섯, 하늘을 이고 있었네
그는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보네
짧게 잘린 마디는 마치 촛농으로 덮어씌운 듯했지
상처만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남아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세어보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도 들여다보네
붉은 철근 더미 위에 앉아
한순간 웃던 얼굴들이 사진 속에서 영원히 웃고 있네
또한 영원히 울고도 있네
눈을 들었을 때
키 큰 순서부터 공장의 굴뚝들은
어둠에 허리를 짤리우고 있었지
이제 그는 창문을 닫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고
빈 새장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네
누군가 와서
그를 잊지 않았다고
모이를 주고 물을 주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의 집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부리를 다친 새처럼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네
문은 밖으로 잠겨 있네.
1999 대한 매일 - 어달리의 새벽 <정영주>
묵호는 검은 고래다.
새벽마다 허옇게
바다를 벗겨내는 어부들이
선창가에 비릿한 욕지거리를 잔뜩 풀어놓으면
고래 입 같은 아가리 배에서는
온통 욕지기질로 헐떡이는 생선들...
경매가 시작되면
선창가는 거대한 고래의 뱃속이다.
부시시 무너지는 어둠 속에서
퍼덕거리다 뒤로 나자빠지는 그네들의 흥정
지난 밤
오징어 배에 수없이 켜놓은 알전구로
눈이 먼 어부들, 이제
눈꺼풀 안쪽에 비친 햇덩이가
200촉짜리 집어등만큼 뜨겁다
1999 매일 신문 -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배영옥>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네모난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고스란히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 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지금 나를 읽고 있는 소리,
온몸이 뻐근하다
1999 전남일보 - 감나무 옆에 방이 있다 <최인철>
1.
누이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고
석고기둥 같은 전신주 불빛 아래 눈이 쌓인다
생을 널어서 겨울 햇볕에 말리던 친구는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지나도 내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나 겨울은 춥고
그 빛나는 결빙의 세례 끝에서
은백양 벗은 몸들이
우수수 떨린다
검정 고무신 신고
눈처럼 하얗던 어린 아이 때
나도 봄날이면 언제나
연푸른 새잎이 저절로 돋아나는 것일 줄 알았단다
너처럼 고통을 모르는 어린 나무였으니까
이제는 내 등걸도 제법 상처를 입고
아픔을 무서워할 만큼 두터워졌지 참,
어제는 한없이 초저녁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어
소원 한 가지 못 빌고 울면서
내 속에 움트는 새싹 한 가닥을 본 것도 같아
은백양 벗은 몸 위로 눈은 점점히 굵어지고
불빛은 흘러 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꺼져간다
2
밤은 쉬이 지나지 않는다
문을 열면
하얗게 눈이 내리고
긴 어둠을 통과하는 목포행 열차가
철길을 건너며 겨울을 지나간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렇게 잊힐 것과 추억할 것들의 무덤을
천천히 채워간다는 것일 거야
살아서 걸어가는 발자국
우리들의 무대는 어설프게 읽혀지고
뜻없이 하늘을 이는 바람처럼
서른의 옷깃을 천천히 적셔가는 것
눈은 어둡게 쌓이고
친구는 여태 돌아오지 않는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을 껴안고
죽음처럼 깊은 잠을 이끌어 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