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님의 휘(諱)를 바르게 알고 써야한다.
'경주 이씨 국당공파' 카페와 '전통의 명문 경주 이씨 종친회' 카페에 올려져 있는
왕조실록에서 발췌한 양희공 휘 흥적 조상님의 자료이다.
○ 수원부사-이흥상(李興商)
처음에 유지례(柳之禮)가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되었는데,
부인(府人- 남원부내에 사는 사람) 김숙보(金叔甫)가
무슨 일 때문에 미움을 사서 집을 헐리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박효함(朴孝함)이 지풍덕군사(知豊德郡事- 풍덕군 지사)로 있을 때에
군인(郡人- 군내에 살고 있는 군민) 황득부(黃得富)가 예(禮)를 하지 않으므로,
또한 *품관(品官)을 시켜 그 집을 불지르고 쫓아내고, 그 밭을 회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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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관(品官)- 품계를 가진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던 말.
향소의 좌수나 별감 같은 지방의 유력자를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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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部民- 府民이 맞다- 부내에 살고 잇는 백성) 고소(告訴)의 법이 성립된 뒤로부터,
백성이 수령(守令)의 과악(過惡- 지난날의 죄악)을 가지고
서로 고(告)하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수령이 곧 이 율(律- 법)로써 좌죄(坐罪- 죄를 지어 벌을 받음)시켰으므로,
당시의 수령들이 두려워하고 꺼릴 것이 없어서,
오로지 탐(貪)하고 잔학(殘虐)한 것을 힘쓰고
다투어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
를 일삼으니, 백성들이 한탄(恨歎)하였다.
이흥상(李興商)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는데,
매년 흉년이 들어서 민간에 곡식이 귀하기 때문에
환상미(還上米- 조정에 상환해야 할 쌀)를 바치는 자가
포물(布物- 베나 천)로 대납(代納)하였다.
흥상(興商)이 모두 다 억지로 그 값을 깎아서 서울 집으로 보내었으며,
또 일찍이 들깨[荏子] 20여 두(斗)를 포대(布袋)에 담아서 아전에 주었다.
아전이 보낼 곳을 청(請)하니, 대답하기를,
“서울 집으로 싸 가지고 가서 우리 아이에게 주면,
우리 아이가 처리할 것을 알 것이다.” 하였다.]
(출처 :경주이씨 국당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 이충호)
O. 위의 글에 대하여 양희공의 휘가 '이흥적'인데
'이흥상'으로 잘못 올려진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 이이우
이 조상님이 국당공후 제정공파 휘 달충의 손자이며
양희 시호를 받으신 계림군이 아니십니까?
대부분의 카페에 흥상(興商)이라고 휘가 올라 있는데
흥적(興嫡-계집 '녀'가 없음)이 맞을 것 같습니다.
商과 嫡(女변이 없음)이 비슷하여 모두 흥상으로 올린 것 같은데요.
심지어 후손이 조상 묘소에 가서
'적'자를 확인해 놓고도 비문의 글자가 틀려 운운하면서
'상'자를 쓰고 있습니다. (08.05.25 20:57)
▶ 모 종친
왕조실록에는 상(商)으로 기록되어있고 대동보에도 그렇게올라있으니.
그렇게 표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선조님의 함자 후손이 왈가왈부한다면 서로반목만있지않겠는지요. (08.05.26 18:55)
* 조상님의 휘가 바르지 못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실록과 대동보(1978년 발간)에 상으로 되어 있다고 그쪽으로 따르자고 한다.
* 이이우
왕조 실록의 '상'자는 '적'자와 비슷하여 역문에서 잘못 읽은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대동보에는 '상(商)'자가 틀림없습니까?
제가 가진 87년도 발간 대종보에는 '계집 녀(女)없는 적(嫡)'자로 올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종친님의 블로그에서 본 내용인데
양희공의 비석에서 '적'자를 보고서도 모두 '상'이라니까
'비석의 글자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블로그를 다시 찾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종친끼리의 반목이 아니고
조상님의 휘를 바르게 알고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 10:49 )
!! 그래서 비문에 '적'자가 있었다는 그 블로그를 검색하여 찾아서
다시 댓글로 올렸습니다.
* 이이우
양희공의 비석에 '적'자로 적혀 있다는 곳은 사이트 NAVER입니다.
'이흥상'이라고 쓰고 클릭하면 '조상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록불의 잡학다식(orumi.eqloos.com)' . 닉네임은 초록불님이네요. 11:28
O. 닉네임 초록불님이 쓴 글의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정난 3등 공신(정난 공신이라면 세조의 찬탈- 계유정난을 도운 공신)을 제수 받은
계림군(鷄林君) 이흥상(李興商)이었고
(비석에는 난데없이 적(嫡- 女변 없음)자로 적어놓아 헷갈리게 해놓았군요.
글자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 이 글을 쓴 초록불 종친은 제정공파 후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시향에 다녀온 글을 쓴 장본인이니까요.
이 종친님도 양희공의 휘를 역시 '흥상'으로 알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문에 양희공의 휘가 '적(嫡- 女변 없음)'자로 적혀 있는데도
비문의 글자가 잘못 씌어진 것 같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비문에 휘를 잘못 기록할 리 만무합니다.
양희공 후손들이 함부로 조부의 휘를 틀리게
비문에 쓰는 아둔함은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비문에 기록된 휘가 족보에 기록된 휘보다
더 정확한 글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이에 휘 '흥상'은 휘 '흥적' 이 틀림없을 것 같네요.
후손된 자들이 조상의 휘를 잘못 부르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첫댓글 단순히 역문에서 한자 '적'을 '상'으로 잘못 읽어 '흥상'으로 읽은 줄 알았더니 고문서들에서도 '상'으로 적혀 있군요. 87년 대종보와 양희공의 비문에서 '적'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만 알고 '적'이 맞다라고 했는데 옛 책의 여러 곳에 '상'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니 참 어리둥절 합니다. 왕조실록의 원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여산 송씨 보첩 등을 살펴보고 정확한 휘를 밝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좋은 자료로 올바른 정보를 찻았스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