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늙지 않는다
가을이 살며시 문을 열었다. 더웠던 지난여름을 조금 더 곁에 두고 싶었지만, 여름은 미련 한 점 남기지 않고 등을 돌렸다. 봄은 밖으로 피어나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안으로 여무는 계절인지 모른다. 불현듯 장인의 안부가 마음에 걸렸다.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안 들려.”
겨우 이어진 전화기 너머에서 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장모님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그럭저럭 안부 전화가 오갔는데 그 이후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장인의 귀가 부쩍 어두워져서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단숨에 사백 리 길을 달려가 보았다. 그는 거실에 홀로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를 차에 모시고 시내 목욕탕으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이발까지 마친 후, 그와 다니던 맛집을 찾아갔다. 예전 같으면 식당에 들어서며 ‘임금님도 안 부럽다’라며 웃었는데, 그날따라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슬쩍 내비친‘외로워’ 짧은 한마디가 가슴을 오래 머물렀다. 경로당에 가도, 주간 보호센터에 가도 낯선 얼굴뿐이라며 한탄이다. 노년의 외로움은 사람들 속에서도 스며드는가 보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장인에게 인사를 건네자, 손목을 부여잡는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일정이 있어서 차에 시동을 걸고 막 떠나려던 참인데 그는 불쑥 매형의 안부를 묻는다.
“죽기 전에 한 번 봐야 할 텐데….”
그 말에 마음이 멈칫했다. 두 사람은 오래된 인연이 있다. 한 동네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별하게 지냈고, 그 인연이 어쩌면 나를 지금에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장인은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지만, 자형은 농사를 접고 춘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누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며 매부 또한 홀로 남았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느새 그들은 졸수卒壽의 문턱을 넘었다. 언제 어디서 생을 마쳐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닿지 않으면 멀게 느껴지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향해 있으면 가까운 사이다. 혹시 하는 마음에 매형에게 연락해 보니 만나고 싶다는 답이다. 이제 그를 이곳으로 모셔 오는 일이 남은 숙제다.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조카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떼 보았더니 흔쾌히 모시고 오겠다는 것이다. 다만 세월이 치아를 하나둘 가져가서 말이 어눌해졌다고 걱정이다.
만시지탄이다. 그들은 그렇게 반세기 만에 조용한 식당에 마주 앉았다. 귀가 어두워 서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도 괜찮다. 치아가 빠져 말끝이 흐려져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이산가족이 만난 것처럼 그저 얼굴만 마주 보며 한참 말없이 웃는다. 잠시 후 오래 잠들어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이 하나둘 걸어 나왔다.
나는 조용히 엿보았다. 봄에 두엄을 소달구지에 싣고 논으로 나가다가 진흙 길에 빠져 애 먹었던 일, 너른 논에 줄모를 심느라 동네 사람들과 손을 맞추다가 줄잡이한텐 늦게 심는다며 혼났던 기억, 겨울이면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이십여 리 길을 오가며 쉬던 ‘백 고개’ 추억, 군에 입대할 무렵 강가로 천렵갔던 에피소드까지 꼬리를 물었다. 당시 장인이 이포나루에서 투망으로 큼지막한 메기를 건져 올렸던 이야기에 이르자, 그들은 아이처럼 웃음이 번졌다. 그들의 추억 속에 생생한 젊음이 되살아났다.
그 이튿날 추억의 ‘백 고개’를 함께 찾아가 보았다. 원적산 기슭에 있는 조붓한 산길이다. 젊은 날 농사를 지으며 나무하러 오르내리던 곳에 이르자, 몸은 늙어 삭정이 같으나 산길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젊은 날로 돌아가 있었다. 오래된 길 위에 선 그들의 모습이 마치 젊은 농부처럼 보였다.
추억은 늙지 않는다. 젊은 날의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얼굴에 주름이 늘고 귀가 어둡고 말이 어눌해져도 상관없다. 아마 기억 속에 그 추억은 무덤까지 갈 것 같다. 그날 그들이 웃었던 건 음식이 맛있어서라기보다는, 오래 묻어두었던 추억을 함께 꺼내어 볼 수 있어서다. 세월의 끝자락에서 필요한 건 어쩌면 거창한 일이 아니다. 지나온 추억을 함께 나누거나, 한때의 자신을 기억해 주는 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돌아보면 수많은 이의 이름이 전화번호부에 빼곡했다. 함께 웃고 밥을 먹던 이도 많았다. 하지만 세월은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우고, 얼굴마저도 희미한 기억 속에 묻어 버렸다. 그러나 추억까지는 늙게 하진 못한다. 빛바랜 사진 한 장 속에서도 그날의 젊음과 즐거움이 샘솟듯 추억 또한, 아름다운 꽃봉오리처럼 마음속에서 곱게 다시 피어난다. 그래서 추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곁에서 머물고 있는지 모른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가슴 깊이 간직한 추억은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린다.
어느덧 소슬바람이 인다. 저녁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도 모르게 발길이 고즈넉한 카페에 머문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잔잔히 들려와서다. 홀연히 기억의 저편에서 잠자던 추억이 피어난다. 새삼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추억을 꺼내 볼 이가 곁에 있다면 젊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첫댓글 유병덕 수필 <추억은 늙지 않는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