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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지태 오야붕으로 모셨다”는 1962년 부산일보 기자 김종신 인터뷰
여든셋의 노신사는 60여년 전의 상황을, 그날의 날씨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58~1970년 부산일보 기자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종신씨 얘기다. 그는 12·19 대선 정국의 쟁점이 되어버린 정수장학회 태생기의 진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증언자다.
지난 10월 23일 부산 해운대의 한 고층아파트로 들어섰을 때 턱수염을 기른 신사가 웃으며 기자 일행을 맞아주었다. 창문 너머로 쓰시마(대마도)가 가로누워 있는 부산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김씨는 자리를 권하면서 “내가 박정희 대통령과 김지태 부산일보 사장을 오야붕으로 모셨던 사람이오”라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김종신은 누구인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전후의 김지태 이야기를 듣기에 앞서 먼저 김종신의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30년 경남 사천 출생이다. 부산상고 졸업반이던 1950년 6·25남침전쟁이 터지자 그는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학병(헌병 7기)으로 군에 입대했다. 그는 8년간 복무를 끝내고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했다.
그는 부산일보 황용주 편집국장 겸 주필의 특채로 부산일보 기자가 되었다. 1958년 10월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당시 부산일보와 쌍벽을 이루던 국제신문은 훗날 소설가가 되는 이병주가 편집국장 겸 주필을 맡고 있었다. 신참기자로 동분서주하던 어느날 부산일보에 인사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김지태 사장이 주필을 겸하던 황용주에게서 편집국장직을 면(免)하는 인사발령을 냈다. 이와 함께 김 사장은 황용주 편집국장 계열 기자들에게 사표를 받았다. 훗날 국회의원과 내무부 장관을 하는 서정화 기자(김승연 한화 회장 장인)도 이때 회사를 그만두었다. 김종신과 최세경만이 구제되었다. 조건은 다시 견습기자 시험을 보고 입사하라는 것이었다. 김종신과 최세경은 다시 공채과정을 거쳐 기자가 되었다. 훗날 최세경은 부산일보 사장·KBS사장·국회의원을 지낸다. 얼마 뒤 박정희 소장이 초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황용주 주필과 박정희 장군은 대구사범 동기생으로 요즘 말로 절친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부산일보 기자 김종신은 김지태-황용주-박정희로 이어지는 특별한 관계에 끼어들어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오래된 메모장을 보며 인터뷰에 응했다.
- 당시 왜 김지태 사장은 김종신 기자를 구제했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부산상고 후배잖아요. 당시 김지태 사장이 부산상고 동창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내가 공채시험을 통해 다시 입사하자 김지태 사장이 나를 불러 ‘기자하면서 내 비서 역할도 같이 해달라’고 당부했어요. 그렇게 되어 밤에 사장이 술을 마실 때는 비서로 따라가서 술상무도 했습니다. 종종 사장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면 업어서 집에다 모셔다 드렸지요.”
- 박정희 장군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1959년 박정희 소장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습니다. 처음 만난 것은 출입기자로 기자간담회 때 인사를 했지요. 박 장군은 한눈에도 다른 군인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저는 예의를 갖춰서 인사를 했지요. 그런데 황용주 주필과 대구사범 동기다 보니 제가 황용주 주필의 심부름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와 박 장군은 열세 살 차가 났지만 저를 예뻐했습니다. 제가 대위로 예편해 군을 아니까 말도 통하고 또 제 형이 육사 3기로 박 장군과 동기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금방 친해졌죠.”
- 당시 군 상황은 어땠습니까. “수없이 나온 얘기지만 자유당 시절의 군부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얌생이 몬다’는 말이 유행했죠. 군인들이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군수물자와 미군 원조물자를 빼먹는 것을 비유한 말이었죠. 군인들이 군트럭을 이용해 ‘후생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 당시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은 김지태 사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박 장군은 대구사범 동기생인 황용주 주필, 조증출씨(내과의사) 등을 통해 김지태 사장에 대한 얘기를 지속적으로 들었습니다. 박 장군에게 주입된 것은 한마디로 하면 ‘김지태는 악질 기업인’이라는 얘기였죠.”
-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없었나요. “나는 두 분한테서 모두 사랑을 받았어요. 그래서 두 분을 친하게 해드리려고 노력했죠. 한번은 부산일보 주최 고교야구대회 개막식날 군수기지사령관에게 시구를 부탁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어요. 김 사장도 그게 좋겠다고 했지요. 박 장군도 좋다고 했고, 그래서 제가 박 장군을 모시고 야구장에 갔지요. 두 분이 처음으로 함께 귀빈석에 앉았죠. 그런데 김 사장이 자기만 시구를 하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박 장군이 몹시 기분이 상했죠.”
- 왜 김 사장은 그런 결례를 했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때 김지태 사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던 시절이었어요. 자유당 국회의원도 했으니까요.”
- 그 뒤로 두 사람이 만난 일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 한 번도 없었습니다.”
-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 당시 부산은 어땠나요. “3·15부정선거 얼마전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부산에 내려와 부산의 군 장성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몇몇 기자들이 그 자리에 동석했지요. 사실상 다가올 정·부통령 선거를 독려하는 자리였지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는데 박 장군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잔을 비우고 있었죠. 송요찬 참모총장이 박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거 잘 봐주시오. 그러니 오늘 이렇게 모인 게 아니겠소. 앞으로 중대사도 있는데….’ 그러자 박 장군이 고개를 돌리며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푸념처럼 말을 던졌죠.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얘기였죠. 그만큼 박 장군은 비협조적이었습니다.”
- 3·15부정선거로 인한 학생시위가 4·19혁명으로 폭발한 것은 부산일보가 김주열군의 사체 사진을 1면에 실었기 때문인데요. “4·19혁명은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이 사실상 불을 지른 것이죠. 신문과 라디오에서 시위 중계를 했죠. ‘울 밑에 선 봉선화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등의 사설을 통해 시위를 독려했고, ‘이승만 물러가라’는 사설을 언론사 최초로 썼습니다. 마산 바닷가에서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올랐을 때 저는 1면 톱으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해서 4·19혁명이 되었지요.”
- 4·19가 터졌을 때 박정희 사령관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그때 박 장군은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갈등이 있었고, 박 장군의 남로당 전력이 귀에 들어가 ‘박정희를 감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그때 시위대들이 김지태 사장 집을 습격했다고 하던데요. “그랬죠. 시위대들은 평소 감정이 있는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돌멩이를 던지며 습격을 했습니다.”
- 왜 당시 김지태 사장은 시위대의 표적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내가 잘 모르겠어요. 나는 내가 보았거나 근거가 확실한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그는 말을 조심하려는 빛이 역력했다. 자신을 아낀 보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김지태는 왜 표적이 되었을까. 1959년 8월 23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국세청 당국은 생사수출 시 2억500여만환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부산일보 사장인 김지태씨 등 5개 회사를 조세처벌법 위반혐의로 기소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기사로 미뤄 1년 뒤인 1960년 4·19 당시 김지태 사장 집이 시위대로부터 왜 공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기업인 김지태에 대해 긍정적 평가도 일부 있다. 부일장학회로부터 장학금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 주로 여기에 해당한다.
- 사장 집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을 때 선생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박정희 사령관을 찾아가 ‘지금 김지태 사장 집이 습격을 받고 있는데 헌병 두 명만 보내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러자 박 사령관이 단호하게 ‘안돼, 그런 자는 혼이 나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박 장군의 육성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나는 박 사령관을 만나고 나와 헌병대장을 찾아갔어요. 다른 소리 안 하고 헌병대장에게 ‘방금 박 사령관을 만나고 왔으니 헌병 두 명만 지원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헌병 두 명과 함께 김 사장 집으로 가서 사흘 동안 집을 지켜줬지요.”
- 4·19 때 부산 지역 계엄사령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데요. “박 사령관은 학생들이 시위할 때는 분명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일부 양아치들이 시위대에 합류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박 사령관이 움직여 이들을 진압했습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민주당 정부가 탄생했다. 1960년 7월 30일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은 좌천인사를 당한다. ‘육군소장 박정희 免(면) 군수기지사령관 補(보) 제1관구 사령관’. 이것은 전라남도 관구 사령관으로의 좌천 명령이었다.
- 왜 박정희 소장이 좌천되었다고 생각했나요.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던 4월 26일 박 소장은 도청 앞 광장에서 데모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지 않고 오히려 만세를 선창했습니다. 박 소장은 처음부터 총을 쏠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던 거죠. 오히려 데모대 속에 들어가 만세를 선창해 그들의 탈선을 막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이 말썽의 실마리가 되었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혁명정부는 사회정화 차원에서 부패정치인, 부정축재자, 용공분자, 깡패 등을 잡아들였다. 이런 와중에 부산일보 황용주 주필이 논설위원 3명과 함께 용공분자로 구금되는 일이 발생했다. 황 주필이 교원노조 고문으로 활동했고 혁신세력을 옹호했다는 죄목이었다. 박 의장이 부산을 방문했을 때 그는 황 주필 석방을 위해 박 의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그때 박 의장이 뭐라고 말했나요. “잠자코 듣고 있던 박 의장은 ‘알았어. 황용주에 대해선 내가 잘 알고 있어. 그 사람은 빨갱이가 아니야. 그 사람이 나하고 친하다고 별의별 모략을 다하는 모양이군’이라고 말했습니다.”
황용주 주필은 우여곡절 끝에 4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5·16 직후 김지태 사장은 두 번 구속된다. 첫 번째 구속되었을 때는 기업인을 전부 구속하면 경제 발전은 누가 하냐는 여론으로 다른 기업인들과 함께 풀려났다. 김 사장이 서울헌병대에 구금되어 있었을 때 최세경 기자와 김종신 기자는 부산과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여러 가지 심부름을 했다. 김 사장은 또 1962년 3월 27일 ‘다이아몬드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같은해 5월 24일 7년형을 구형받고 6월 22일 공소가 취하되어 풀려난다. 이때 김지태 사장은 부일장학회를 혁명 정부에 헌납한다. 부일장학회는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문재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측과 김지태 사장 유족들은 김 사장이 수감 중에 부산일보 등 3개사를 협박에 의해 강제로 빼앗겼다고 주장한다.
- 일부 인사들은 군사정부가 부일장학회를 강탈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수장학회는 ‘장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이 내용은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에요. 당시 여론은 악덕기업인이 어떻게 장학사업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학사업에 손을 떼고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협박했다고 하는데, 누가 권총으로 협박하는 것을 봤다는 증언이 있나요.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을 내놓은 것은 자의반 타의반이에요. 또 그때 부산일보는 적자투성이였어요.”
이 대목에서 김씨는 유족의 얘기를 반박했다. 일부 유족은 4·19 때 시위대들이 김지태 사장 집을 지켜줬다고 주장한다.
“김지태 사장이 인심을 얻어 동네 양아치들이 시위대로부터 지켜줬다고요? 아들이 그때 얘기를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헌병 두 명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지켜줬는데.”
- 일부 유족은 김지태 사장이 박정희 소장이 요구한 5·16 거사자금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구속됐다고 주장하는데요.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제가 그 얘긴 황용주 주필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박 소장이 황 주필에게 ‘김 사장한테 돈 좀 받을 수 있나?’라고 물으니 황 주필이 ‘그런 얘기 꺼내지도 마라. 김 사장은 자금을 낼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 정보만 새어나간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일부 유족은 김 사장이 수갑을 찬 채 헌납 증서에 강제 날인했다고 주장한다. 유족의 주장과 관련,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으로 직접 수사를 담당했던 박용기씨는 주간동아 1994년 9월 23일자 인터뷰에서 다른 증언을 했다. 박용기씨는 “김 사장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하여 한국은행 부산지폐소에서 조사를 진행했다”고 반박한다.
김종신씨의 증언과 관계자를 인터뷰한 언론보도를 종합해 보면 ‘강탈했다’는 유족과 문재인 후보 측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반대로 자유의지에 의해 헌납했다는 근거와 증언이 많다. 흥미로운 점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가 똑같은 논리로 박정희 대통령을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김지태 사장이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을 헌납했다는 사실은 1968년에 발행된 ‘(한국생사·조선견직·삼화고무 등) 창업 35년사’에도 적시되어 있다. 이 35년 사사(社史)를 인용해 본다.
‘군재(軍裁)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김 사장은 측근 모씨를 통하여 재산 중 신문사와 방송국을 5·16장학회에 넘기자는 말을 받았다.…심혈을 기울여 가꾸기는 했으나 신문사와 방송국은 공익사업이므로 누가 경영하든 이 나라의 매스컴 발전에 기여할 수만 있다면 된다는 심정으로 김 사장은 결국 협상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김 사장이 경영하던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은 몽땅 5·16재단에 넘기기로 했다.…’
김지태는 1971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도 “언론사 헌납은 사회환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1972년에는 정수장학회(당시는 ‘5·16장학회’) 주식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김지태가 증여행위를 무효로 할 정도로 의사결정의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였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60여년간 일기 써온 ‘기자 김종신’
김종신 기자는 박정희 대통령을 소장 시절부터 관찰한 메모를 바탕으로 1966년 최초의 박정희 전기를 펴냈다. ‘영시의 횃불-박정희 대통령 수행기자 7년의 기록’이었다. 그는 1968년 언론계를 떠나 청와대 언론사회비서관으로 들어가 1970년 10월까지 2년여 대통령을 보필했다. 1997년에는 두 번째 책인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사람들’(한국논단)을 펴냈다. ‘영시의 횃불’은 지난해 9월 기파랑에서 개정판을 펴냈다. 1970년 청와대비서관을 그만두고 1971년 5·16장학회에 소속돼 있던 부산문화방송 사장으로 취임했다.
기자는 3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그의 기억력에 놀랐다. 그는 상황에 관계된 사람의 이름과 당시 직함을 정확히 기억했다.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군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서재로 들어가는 벽면에는 청와대비서관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찍은 사진과 군 장교 시절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서재에는 그가 군 시절부터 써온 일기책 수십 권이 빼곡하게 서가에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내가 사장하고 그럴 때는 바빠서 일기를 빼먹는 경우가 많았지요” 하고 웃었다.
출처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29100001&ctcd=C01&c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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