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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구스타브 도레 Gustave Doré,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경계인 야곱의 씨름과 새 이름(창 32:24-32)
김정우
족장 야곱은 긴 세월 동안 밧단 아람에서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이제 곧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서 있다. 그러나 그의 귀향 길은 가시밭이었다. 그가 모태에서부터 발목을 잡았던 형 에서는 장자권을 사기당하고, 아버지의 축복까지 빼앗긴 과거사에 대하여 수 십 년 동안 가슴에 품어온 원한을 이제 갚기 위하여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그를 치기 위하여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었다(창 32:3-6). 야곱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다음 날 아침에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하면서, 그 밤을 얍복 강 나루터에서 보내고 있다. 바로 그날 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와 밤새도록 씨름하게 되며,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첫 출발을 하게 되는 이야기가 본 장에 담겨 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가 야곱만큼 씨름해야 되는 어려운 문제들을 담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야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가 한 천사와 씨름할 때, 얍복 강을 건넜는가, 건너지 않았는가? 즉, 그는 북쪽에 있는가, 남쪽에 있는가? 로랑 바르트(R. Barthes)에 따르면, 22절과 23절은 서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으며, 독자들은 야곱이 어떻게 홀로 남게 되었으며, 어디에, 왜 남게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고 한다(1971:30).
(2) 야곱이 밤새도록 함께 씨름한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인간’인가(23절), 혹은 ‘감히 이름을 물을 수 없는 분’인가?(29절) 혹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천사’인가?(호12:4)
(3) 야곱과 씨름한 자는 왜 왔는가? 그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는 왜 야곱과 씨름하기를 원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야곱에게서 무엇을 원하였는가?
(4) 야곱과 씨름한 자는 왜 날이 샐 즈음에 떠나려고 하였는가?
(5) 이 씨름에서 누가 이겼는가? 야곱인가, 야곱의 공격자인가? 2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고 말한다. 그는 ‘신적 존재’인 것 같은데, 사람과 싸워 이기기 위하여 환도뼈를 위골시켜야 만 했는가? 그러나 그는 28절에서 야곱에게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한다. 야곱이 이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어 장애자가 되었는데, 어째서 ‘이겼다’고 하는가? 야곱이 이겼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6) 이 장은 야곱의 승리로 끝나지만,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다. 즉, 그의 승리는 장애를 포함한 승리이다. 이것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 경계인 야곱 (22-23절)
이 본문에서 야곱은 ‘경계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먼저 장소에 있어서 경계인이다. 야곱은 지금 얍복 강 나루터에 있다. 나루터는 강을 두고 두 지역이 나누어지는 경계지 이다. 또한 야곱은 이미 약속의 땅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곳은 요단 동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거룩한 땅’이라기 보다, 반쯤 ‘거룩한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거룩성’에 있어서 ‘반쪽’의 경계지에 자리잡고 있다.
야곱은 시간에 있어서도 ‘경계인’으로 나타난다. 그는 ‘밤’에 일어나 가족들을 옮기고 있으며,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하고, ‘해가 뜨기 전 여명의 시간까지’ 씨름하고 있다. 즉, 야곱은 시간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는 완전한 밤도(layla, 23), 완전한 낮(shemesh)도 아닌, ‘새벽 미명의 시간’(shachar, 25, 27)에 홀로 고투하고 있다.
야곱은 또한 생사의 ‘경계지’에 홀로 서 있다. 그는 이미 ‘마하나임’ 땅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다(32:1-2). 하나님의 군대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의 형 에서는 400여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20년 동안 벼린 복수의 칼을 들고 그와 ‘그의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하여 달려오고 있다. 이 때 야곱은 ‘몹시 두려워 하였다’(7절). 그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런지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생사의 경계지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2. 야곱의 씨름(24-26절)
이 장에서 야곱 만 ‘경계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경계적 존재’로서 나타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야곱과 씨름하는 자는 분명히 ‘어떤 사람’으로 처음 나타났다(24절). 야곱은 밤 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야곱이 함부로 이름을 물을 수 없는 분’으로 나타난다(29절). 이것은 ‘전형적인 장면’(type scene)으로서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었음을 말해준다(창18-19; 삿6, 13장). 야곱 역시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30절).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경계적 존재로 비친 신적존재는 왜 왔는가? 그는 밤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고 있다. 모든 씨름은 이기기 위하여 한다. 2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고 말한다.1) 이 장면도 이해하기 참 어렵다. 그는 ‘하나님’인 것 같은데, 사람과 싸워 이기기 위하여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켜야 했는가?’ 2) 어쨌든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면, 야곱은 더 이상 씨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야곱이 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28절에서 신적 존재는 야곱에게 “네가 이겼다”고 말한다. 야곱이 이겼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그렇지만, 야곱이 ‘이겼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 풀기 위하여, 야곱의 ‘사실 상의 패배’(25절)와 ‘승리 선포’(28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26절은 바로 이 막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3)
여기에서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된 상태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힘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서도, 그의 적수를 놓치지 않았다. 야곱은 원래 힘이 센 사람이었다 (창 29:10,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는 이제 힘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죽으라고 매달리고 있다. 야곱의 관점에서 본다면, 만약 지금 이 사람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에서에 의해 ‘몰살을 당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 하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12:3-4). 즉, 창세기 기자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호세아는 ‘울며 간구하였다’로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의 본문에서 우리는 야곱의 눈물을 볼 수 없다. 만약 ‘울었다면’, 바로 환도뼈가 위골되고, 천사가 떠나겠다’고 선언한 사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야곱의 새 이름(27-29절)
야곱의 눈물은 천사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 때 그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즉, 야곱은 천사와의 씨름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붕궤되는 것을 느꼈다.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 깨어졌다. 그는 울며 하나님에게 은총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 이름을 준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28절).4) 여기에 역설이 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하나님에게 승복함으로써,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되었다. 그의 항복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승리가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비로소, 야곱에게 ‘변화의 시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4. 변화된 야곱(33:1-2)
야곱의 변화는 그가 받은 새 이름인 ‘이스라엘’로 나타난다.5) ‘이스라엘’이란 단어의 원래 의미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의 어근(shara)은 ‘싸우다’ 혹은 ‘씨름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6) 이렇게 본다면,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가 된다(McKay 1987:4). 그 동안 야곱은 수 많은 싸움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그는 에서와 라반과의 싸움에서 늘 이겼다. 이제는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 (호12:3). 이 ‘씨름하다’(ye’abeq)는 동사는 얍복 (Jabbok) 강 뿐 아니라 야곱(Jacob)과 매우 유사한 발음을 갖고 있다(y`qb/ybq/y’bq). 이런 언어의 유희는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7) 또한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이 고치신다’(Albright), 혹은 ‘하나님이 판단하신다’(Coote) 등으로 번역하지만, ‘다스리다’ (Noth)는 뜻으로도 이해되고 있다’(아퀼라, 심마쿠스, sharar).8) 만약 이 동사를 기원형으로 본다면, ‘하나님이여 다스리십시오’ 혹은 ‘하나님이 다스릴 것이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Hamilton).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는 자’가 된다.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그 동안 야곱은 존재론적으로 여전히 ‘경계인’으로 살아 왔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과 축복을 계승한 자이지만, 그 동안 인격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늘 간교한 자였다. 그는 늘 ‘남의 발목을 잡는 야곱’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는 ‘이스라엘’로 변화되고 있다.
야곱의 변화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로 고백되고 있다(30절). 이리하여 그는 비로소 ‘선지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는 그 동안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만 들었지만, 이제 하나님을 보는 신앙의 자리’까지 오른다. 물론 하나님을 ‘보는 대가’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환도뼈가 위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한 평생 ‘절뚝거리며’ 살 수 밖에 없었다(31절). 환도뼈—그것은 한 남자로서 생명의 근원이다. 그는 하나님을 보았지만, 육체적으로는 더 이상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장애자가 되었다. 야곱은 육체적으로 한평생 ‘경계인’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보는 은총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일에 그 정도의 댓가가 없을 수 없다.
야곱의 변화는 단지 영적인 차원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곧 에서와 참된 화해를 하게 된다. 에서와의 화해 장면이 바로 33:1-4절에 나타나고 있다. 32:22-23에서 야곱은 밤 중에 모든 식구들이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였다. 오직 야곱 만 건너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것은 특이한 모습이다. 모든 식구들이 다 죽어도, 자기 만 도망치겠다는 계산인지 모른다. 33:1-2절을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식구들은 그의 애정의 순서에 따라 분산해 놓았다. 에서가 쳐들어오는 맨 앞에, 여종과 그 자식들을 두고, 그 다음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두었다. 그리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었다”고 한다. 앞에 있는 식구들이 공격을 받으면, 뒤에 있는 식구들이 도망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야곱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씨름 이후에, 야곱은 “그들 앞으로 홀로 나아간다”(33:3).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죽어도 그가 먼저 죽으리라고 작심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위골된 환도뼈를 붙들고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에서도 감동을 받았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33:4). 이리하여, 평생 원수지간이 되었던 형제 사이에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명상
야곱이 얍복 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모습은 이후에 모세에게 다시 재현되고 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본 후 새로운 사명감을 얻고, 미디안에서 얻은 식구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길가에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출4:24-26). 그 때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의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졌고,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라고 고백하였다. 그 때, ‘주님께서 모세를 놓아주셨다.’ 주님을 가까이 섬기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암3:2). 주님은 그를 가까이 하는 자들이 ‘신앙과 불신앙’, ‘성결과 부정’의 경계지에서 경계인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온전한 성결을 원하신다.
야곱과 모세 이후,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이게 된다. 그 역시 ‘새벽 미명’의 경계시간까지 고투하게 된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를 세 번이나 동일하게 말한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그의 선택에 따라, 자신과 인류의 운명이 바꾸어질 것이다. 그는 야곱 보다 더 격렬하게 씨름하였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우리는 어떻게 ‘땀’이 ‘핏방울’ 같이 될 수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애씀에 있어서 이것 이상의 표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결국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그는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자”가 되셨다(히12:2).9) 우리의 삶에도 이런 전환과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본원 원장, 총신대 신대원 구약학 교수
1) 여기에서 ‘치다’는 기본적으로는 ‘만지다’(touch)는 뜻이지만 (창3:3, naga` be), 많은 경우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욥1:19; 수9:19; 삼상6:9). 또한 이 단어는 모세와 연관하여 ‘죽이려고 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출4:24), 여기에서는 ‘적대적인 뜻’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2) 여기에서 ‘환도뼈’(kaq yerek )는 ‘허벅지’나 ‘엉덩이 뼈’라기 보다, ‘음낭’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우리 말 성경에서 ‘허리’(출1:5)로 번역되지만, 남성의 생식기와 연관되어 있으며, ‘허리’(yerek)와 연계형을 이룬 ‘(손)바닥’(kap)이란 단어는 빈 자리를 뜻하므로 ‘음낭’으로 보아도 좋다(Hamilton 331; 신25:11-12참조).
3) 이 사람이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지만,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만약 하나님으로서 정체가 드러난다면, 야곱은 ‘살지 못할 것’이다(30절하).
4) ‘하나님과 사람들’(‘elohim we’anashim)은 숙어로서, ‘모든 사람’을 뜻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하나님’과 겨룬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문헌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고대 이집트의 메르넵타 비문(주전1230년경)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Isir’r).
6) ‘하나님과 싸운자’(Struggler with God)는 ‘여룹바알’(Jerubbaal, fighter against Baal)과 유사하다(Gunkel, 1997:350).
7) 이 언어의 유희는 뒤에 에서가 야곱을 포옹하다’(chabaq)와 이어진다(33:4).
8) 70인역, 벌게이트, 페쉬타는 아람어 sharah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며, ‘강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9) 칼빈은 본 기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킬 때, 야곱을 찾아온 천사의 참된 정체를 통하여 시도한다. 여기의 천사는 하나님인지,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 신비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만 풀려질 수 있을 것”으로 칼빈은 보았다. 야곱은 그와 씨름한 자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자 그는 거절하였다. “비록 야곱의 소원은 경건하였지만, 주님은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온전한 계시가 완성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족장들은 처음에 새벽의 여명에 걷도록 요구를 받았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결국,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완전한 빛이 비칠 때까지, 그들에게 부분적으로만 나타나셨다”(Genesis 1554 [1992]:201). 그렇지만, 겟세마네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이 더 나은 정경적 해석으로 여겨진다
[출처] 창 32장 24-32 경계인 야곱의 씨름과 새이름/ 김정우|작성자 kaikk
야곱은 외삼촌의 집으로 가던 중 날이 어두워지자, 예루살렘 근처 들판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했다. 그는 꿈속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천국과 지상 사이에 놓인 사다리를 보았다. 꿈속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했다. 하란 근처에 다다른 야곱은 우물가에서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라반은 야곱에게 자신의 딸 라헬과 결혼하려면 7년 간 자기의 집에서 일해야 하는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세월이 흘러 야곱과 라헬이 결혼식을 올릴 날이 되자, 라반은 큰딸이 먼저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라헬 대신 큰 딸인 레아를 주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또 다시 7년을 더 일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하기 위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형제가 만나기 전날 밤, 야곱은 낯선 사람-그림 속에서는 주로 천사로 묘사되었다-과 씨름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 낯선 사람은 야곱을 축복해 주었고 그의 이름을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었다. 이 때 야곱은 자기가 방금 하나님과 대면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야곱은 훗날 이스라엘의 열 두 부족의 족장이 될 열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잇사갈, 유다, 레위, 르우벤, 시므온, 스불론이다. 또한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레아의 여종이었던 실바에게서 얻은 아들은 갓과 아셀이다. 그리고 라헬의 여종이었던 빌하에게서 낳은 아들은 납달리와 단이다.
위의 그림에서는 인간의 얼굴에 깃든 내면을 표현하는데 탁월했던 렘브란트의 재능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작품 속의 야곱은 천사를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렘브란트는 두 인물이 싸우고 있는 물리적 특징보다 심리적 표현에 초점을 맞추었다.
야곱과 에서는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다. 쌍둥이 형제의 맏이 에서는 몸에 털이 많았으며, 커서는 사냥꾼이 되었다. 그리고 동생 야곱은 매끈한 피부를 가진 사람으로, 들로 나가기보다는 집안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들의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한 편이었다. 이들의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한 반면, 어머니인 리브가는 야곱을 더 아꼈다.
어느 날 에서가 사냥에서 허기진 배로 집에 들아와 동생 야곱의 죽 한 그릇을 달라고 부탁했다. 야곱은 에서에게 죽을 나누어주는 대가로 에서의 장자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당시 맏이였던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재산 상속권을 갖고 있었다.
몇 년이 흐른 후, 이삭이 늙어 눈이 어두워지자, 아들 에서에게 사냥을 해오라면서 죽기 전에 축복을 해 줄 테니 음식을 준비해 놓으라고 일렀다. 이삭의 말을 엿들은 아내 리브가는 먼저 야곱을 시켜 두 마리의 염소를 잡은 후, 그 염소로 요리를 준비했다. 또 야곱을 털이 수북한 에서로 위장하기 위해, 야곱의 목과 손에 염소가죽을 들러 주었다. 이 모든 준비가 끝나자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갔다. 이삭은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야곱의 목소리가 아닐까 의심을 했지만, 손을 만져보니 털리 수북한 에서의 손이었다. 이삭은 의심스러웠지만 야곱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이윽고 에서가 돌아와 야곱이 또 다시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것을 알고 야곱을 죽이려 들었다. 이에 놀란 리브가는 야곱을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동생 라반의 집에 가 있게 했다.
마커스 로드윅의 <신화와 미술 성서와 미술> 中 Odilon Red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circa 1905
oil on board, Height: 46.99 cm (18.5 in.), Width: 41.28 cm (16.25 in.)
Private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