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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9(주일) 다니엘 4:28~37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영적 교훈’
사람들은 흔히 ‘심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그것은 마치 법정에서 내려지는 판결처럼 무겁고, 두렵고, 불가피한 사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죄를 드러내며, 동시에 회복과 구원의 길을 여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심판’(Judgment)과 ‘징벌’(Punishment)은 비슷한 의미처럼 보이지만, 약간의 다른 의를 갖고 있습니다. 심판의 히브리어 원어는 미쉬파트로 기본적으로 "정의", "법률", "판결"을 뜻하며, 공의와 올바름을 실행에 옮기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헬라어는 크리시스로 "판단", "재판", "결정"을 뜻하며, 어떤 행위나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나타냅니다. 이 단어에 대한 성경의 사용례로는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정의로운 심판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그의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요”(시 96:10) 여기서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판결을 뜻합니다. 둘째로는 구원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사 의로우신 것을 나타내셨다." (로마서 3:26)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징벌은 히브리어로 ‘오넷’인데 "죄에 대한 대가", "형벌"을 뜻합니다. 헬라어로는 ‘콜라시스’로 교정적 또는 징벌적 처벌을 뜻하며, 영원한 심판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또다른 헬라어 ‘디케’는 정의로운 처벌, 또는 공의의 실행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례는 크게 두가지로 나눠지는 데, 하나는 "나의 아들아 주의 훈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그 징계를 싫어하지 말라." (잠언 3:11) 여기서 징벌은 교정과 훈계를 통한 사랑의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다음은 최후의 징벌로 "이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능력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라." (데살로니가후서 1:9) 이 구절은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심판을 경고합니다.
심판과 징벌의 관계는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의미하며, 이는 반드시 징벌이나 상급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징벌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자 정의의 실행으로, 사람을 회개로 이끌거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노아의 홍수 (창세기 6-9)는 심판과 징벌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요약하면, 심판과 징벌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개념이며, 성경은 이를 통해 인간의 삶에서의 회개와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은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그 이후의 회복 이야기를 다룹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의 절대 권력자였던 느부갓네살왕은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를 낮추시고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인정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은 교만한 자에게 임합니다(28~33절).
교만해진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 옥상을 거닐며 바벨론의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돌립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함에 도취되어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30절에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것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교만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놓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만이 멸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이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경고합니다(잠16:18).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려는 태도로,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죄악의 근원입니다. 30절에만 ‘나’라는 단어가 무려 4번이나 나옵니다.
성경(기독교)가 말하는 섭리사관은 주어를 유일신(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주어가 바뀌었다는 것, 즉 ‘주어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가령 “내가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게 하셨다”, 그리고 “요셉이 형들의 시기에 의해 애굽에 팔려갔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에 앞서 보내셨다”로 그리스도인을 고백을 합니다. “조선이 일본에 멸망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조선을 일본에 내어 주셨다”로 고백하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본을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게 하셨다.”로 말합니다. 여기서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도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인간적인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섭리)이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결정론적 역사’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론이 인간의 책임을 면제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행한 모든 행위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며, 그에 상응하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다만 그 심판이 징계 차원에서의 끝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이라는 은혜의 차원이 있음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을 지적하셨고,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31절에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합니다. “편안하다 할 그 때 해산의 고통이 이르듯” 왕위가 떠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게 된다고 합니다(32절). 이것이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의 결론입니다. 그는 인간 이상이 되고자 했지만, 인간 이하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대등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음을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세상의 힘과 부와 권력이 내 삶을 지켜주는 것 같지만, 그것이 떠나는 날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나라를 다스리는 줄을 알기까지 7년 동안 짐승같이 지내야 했습니다(32절). 이 장면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절대권력자였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인간의 권세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그 분의 주권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다가 경고의 말씀이 응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겸손한 환경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느부갓네살 외에도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사울 왕과 히스기야 왕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첫째, 사울 왕의 교만은 하나님을 거역한 불순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1-23에 보면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지시를 어겼습니다. 그는 왕 아각과 좋은 가축들을 살려 두었고, 이를 변명하며 자신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사울의 교만은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행위로, 그의 교만함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사울을 왕위에서 패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15:22)고 경고하며 그의 교만과 불순종을 책망했습니다. 사울의 교만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판단과 명분을 앞세운 결과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결국 그의 왕권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둘째, 히스기야 왕의 교만인데, 그의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관련한 본문은 열왕기하 20:12-19, 이사야 3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병에서 회복된 후 바벨론에서 온 사자들에게 자신의 궁전과 모든 보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교만의 특징은 자신의 업적과 축복을 자랑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그 결과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에게 심판을 예언하며, 바벨론이 그의 모든 재산과 자손들을 포로로 잡아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그의 교만한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교만에 대한 영적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과 자만으로 바꾼 사례입니다. 이는 그 자신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느부갓네살과 이 두 사람의 교만함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권위를 망각하고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을 보였습니다.그러나 느부갓네살과 히스기야는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반면, 사울은 끝내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본적 시작점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겸손과 하나님 중심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단순히 지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참된 깨달음과 올바른 분별력을 포함합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얻게 되는 지혜를 뜻합니다.
적용) 내 능력과 권세로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말씀을 들어도 자기도취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하는 자를 돌이키게 하여 총명을 회복시킵니다(34-37절).
느부갓네살은 짐승처럼 풀을 먹으며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의 일곱때를 보냅니다. 땅끝까지 내려가는 기한이 모두 찬 후에야 총명이 돌아옵니다(34절).
이 구절에서 "총명"은 느부갓네살이 교만으로 인해 징계를 받은 후 회복되어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올바른 판단력을 되찾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총명’은 히브리어 ‘마다’(mad’a)로 알다", "깨닫다"라는 뜻입니다. 이 어근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적 지식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잠언 9:10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총명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총명"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말하며, 단순히 세속적 지식이 아닌 영적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욥기 32:8에 보니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라고 합니다. 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깨달음과 통찰력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느부갓네살은 교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하늘을 우러러봄"으로써 하나님을 깨닫과 하나님의 총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여기서 "총명"은 단순히 지적 능력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참된 이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총명은 인간의 총명을 잃어야 돌아옵니다. 총명이 돌아온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34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진정한 총명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 영원한 권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세만이 영원한 권세요, 하나님의 나라만이 대대에 이를 것임을 아는 지각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총명은 창조주, 구원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 존중으로 나타납니다. 느부갓네살은 쫓겨나는 고난을 겪으며 자기 위에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총명입니다. 36절에서 “그 때에 내 총명이 돌아왔고”라고 고백합니다.
저도 ‘네가 지옥갈 자가 아니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그 때에 나의 총명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간의 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고난이 계속될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는 반드시 옵니다.
흔들리지 않는 꽃이 없듯 인생에서 고난이 없을 수 있습니까?
태어나서부터 인생은 기쁨도 많지만 오히려 사람마다 더 고난이 많은 것처럼 느낄 정도로 걱정거리 속에 늘 파묻혀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난을 겪다보면 정말 끝없이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동굴이 아니라 반드시 끝이 있는 터널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끝이 보이는 고난이라면 이겨낼수 있는 소망과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바로 그 끝속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 왕과 같이 고난은 축복입니다.
왜 고난이 축복이냐 하면, 성경은 고난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고난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그 결과로 인내심과 성숙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시련은 결국 우리를 더 온전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고난은 종종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은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선한 계획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비록 우리가 당장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더 큰 목적과 축복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의 구원의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고난의 예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인류는 구원을 얻게 되었고, 이는 고난이 어떻게 축복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고난 속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서는 고난 중에 경험하는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 구절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체험하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누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축복이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고난 자체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성장,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신뢰,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체험하는 과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더 깊은 신앙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믿음을 갖고 계신가요?
오늘 본문의 느부갓네살왕을 보면서 그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며 100% 죄인인 나 자신을 알고 100% 옳으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 인생은 가장 복된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참 신이기에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100% 옳으심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100% 옳으신 분이기에 내게 온 어떤 사건도 우연히 아니며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모든 것은 은혜롭고 자비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면 내 속의 슬픈 생각, 천한 생각이 물러갑니다. 절대주권으로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느부갓네살왕처럼 고난을 당하여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고 짐승처럼 될 지라도 이 땅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 느부갓네살처럼 마음이 낮아져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니이다” 시편 119편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적용) 나는 짐승처럼 낮아져 회개하며 총명이 돌아오기를 잘 기다리고 있나요?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찰 때까지 인내하며 통과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주님을 만나자 새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도 구원의 도구로 쓰이길 소원하게 되었다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간증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새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어요. 새어머니는 수시로 폭언과 폭행을 일삼으셨기에 제 마음엔 새어머니를 향한 증오가 가득했지요. 청년 때는 힘이 세지자 복수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저는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서 얼마 뒤 이혼했어요. 그 후 지금의 아내를 만나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말씀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어요. 그리고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지체들의 권면을 들으며 어린 시절의 고난과 상처, 대물림되는 이혼의 아픔 속에서 저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지요. 자기의 위엄을 나타내다 망하게 된 느부갓네살 왕처럼 저 또한 욕심으로 내 유익을 좇다가 망할 인생이었어요. 하지만 여러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답니다. 이후 지병을 앓으시던 새어머니가 소천하시고 저는 교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르며 새어머니가 천국가시는 길을 배웅해드렸어요. 이 일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사랑도, 구원도, 사명도 없음을 깨달았어요. 36절에 나온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처럼 저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의 제자로 세워진 거에요. 앞으로도 영혼 구원을 위해 저의 아픈 상처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며 복음을 전하길 소원해요. 저의 적용은 삶의 문제와 상처 속에 신음하는 믿지 않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전하겠습니다. 젊은 부부가 양육을 받는 시간에 그들의 쌍둥이 자녀를 대신 돌보겠습니다. 입니다.
결 론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이 단지 죄에 대한 형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회복의 도구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도 때로는 교만과 자기 의에 빠질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 교만을 깨뜨리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은혜의 기회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화)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 였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턱썩 주저 앉아 엉엉 울며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적입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셨습니다. 고난은 축복의 기회라는 애기도 있습니다.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했던 자매의 모습, 하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바라기는 예산수정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있게 하신 고난의 낮은 자리에서도 내게 작정하신 훈련의 때를 잘 통과하여 하나님의 총명을 얻고 결국 하나님으로 결론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