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大師)의 순우리말…‘세속적 차별’
지적도”
지위와 덕망이 높은 노스님을 흔히 ‘큰스님’이라고 부른다. ‘큰스님 계십니까?’, ‘저의 큰스님(은사)께서는’, ‘○○큰스님 초청
수계법회’ 등등 불자들에겐 낯익은 단어다. ‘큰스승’을 뜻하는 대사(大師)를 순우리말로 옮긴 존댓말로 추정된다. 스님의 유력한 어원이
‘스승님’이니, 그럴 법도 하다. 다만 큰스님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어느 정도 연로해 보이고 명망이 있다면 큰스님이라고 존칭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야 괜한 핀잔과 뒷말을 면한다.
‘큰스님’의 어감은 입에 착착 감기는 편이다. 울림소리(ㄴ, ㅁ)와 안울림소리(ㅅ)가 적절하게 배합된 결과다. 고유어에서 비롯된 푸근한
정서도 폭넓은 통용에 한 몫 하고 있다.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 애틋하고 무엇보다 듣는 스님도 흐뭇하다. 반면 과유불급이어서, ‘큰스님’의 지나친
남발은 큰스님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불교계 종사자들은 간혹 서로에게 ‘큰사무장’ ‘큰팀장’ ‘큰기자’ 운운하며 우애를 키우는데,
‘큰스님’에 대한 희화화가 깔린 농담이다. 또한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큰스님이라고 지칭할 경우 외려 결례가 될 수도 있다. ‘참
대단하십니다그려’라는 반어법의 느낌이 난다.
‘큰스님’이란 호칭은 오래된 전통으로 짐작된다. 옛날 신문을 뒤지면서 얻어낸 추론이다. 1971년 3월27일자 동아일보에는
‘수도승(修道僧) - 견성성불과 중생제도로 가는 번뇌와 고행’이란 제하의 특집이 실렸다. 여기에 ‘청담 큰스님’이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전산화된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큰스님’이다. 불교정화운동의 주역이자 조계종 제2대 종정을 지낸 청담스님을 가리킨다. 그해 청담스님의 입적을
보도한 기사에서도 스님은 큰스님으로 기려졌다(1971년 11월19일자, 경향신문 매일경제).
큰스님이란 단어 사용에 대해 특별한 각주나 신조어란 설명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이때에도 자연스럽게 유통되던 낱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53년에 출가한 경주 불국사 회주 성타스님은 “내가 입산할 즈음에도 큰스님이란 표현은 지금처럼 보편적으로 쓰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아마도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많은 어휘의 한글화가 진행되면서 백성들 사이에 정착됐을 것”이라고 견해를 전했다. 고승대덕(高僧大德)과
같은 한자어가 아름다운 우리말로 거듭났으리란 이야기다.
한편 큰스님에 값하는 존칭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화상(和尙)이다. 가르침을 주는 본보기를 일컬으며, 종단의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은
스님들의 수계(授戒)를 관장하는 최고의 어른이다. 더불어 선 수행에 조예가 깊으면 선사(禪師), 계율에 투철하면 율사(律師), 경전에 해박하면
강백(講伯)으로 기린다. 선지식(善知識) 역시 경지에 이른 수행자이자 귀감이 되는 지도자를 받드는 말이다. 한국불교가 선을 중시하는 대세이다
보니 가끔 착각하는 이도 있는데, ‘고요할 선(禪)’이 아니라 ‘착할 선(善)’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은 기본적으로 품성이 따뜻해야 한다.
여하튼 큰스님이란 공경과 예우에는 신도들의 순정한 존경심이 묻어난다. 하지만 일각에선 “큰스님이 있으면 작은스님도 있겠네”라며 차별을
조장해선 안 된다고 비판한다. 부처님 아래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일불제자(一佛弟子)의 논리에 따른 주장이다. 사실 큰스님 호칭 여부는 당사자의
내실이 아니라 위세에 근거해 판단하는 게 일반적인 풍토다. 속물적인 근성의 반영이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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