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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안녕하세요.
어느덧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지난주 전교주일을 마치고 이제 오늘 연중30 주간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전교주일에서는 우리가 혀끝으로 전하고, 손끝으로 행한다. 이런 말씀을 합니다. 혀끝이라는 이 말은 말씀에 초점을 두고, 그 다음에 손끝이라는 이 말씀은 창조에 초점을 뒀습니다. 말씀은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고, 창조는 너를 향해서 우리가 움직인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는 다음 주에 대해서 한 달 동안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시간입니다. 다음 주일입니다. 언행일치라고 이름을 붙여봅니다. 언행일치는 말은 나를 잘 살피고 행동은 너를 잘 살핀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말씀의 전례와 성찬전례로 구분하면서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잘 살핀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았음을 알게 되고, 너를 잘 살필 때는 이웃 사랑의 제물이 돼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은 것은 바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상대를 섬기는 자세를 갖게 되고 바로 내가 이웃 사랑의 재물이 된다는 것은 봉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봉사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별로 우리는 감흥이 없습니다. 오히려 봉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를 기술자가 되지 말고 봉사자가 되어라.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많은 지도자들이 백성을 위한다고 백성을 위한 사람도 있지만 백성을 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 같은 사람은 백성을 위한다고 말했지만 결국 백성을 위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자가 되었습니다.우리도 나도 모르는 사이 미사 드리는 기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신자들도 성당 왔다 갔다 하는 기술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자가 되지 말고 봉사자가 되어라는 이 말씀은 기술자는 나를 위하는 삶을 살고, 봉사자는 너를 위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굉장히 내 마음에 많이 와 닿아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중 31주간, 다음 주간은 그럼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 오늘 일치는 내가 말을 하지만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야 될 텐데, 바로 너에게 초점을 맞춰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중 32주간으로 넘어갑니다. 연중 32주간은 깨달음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깨달음은 언행일치에서 언행에 해당된다고 보고, 실천함은 언행의 일치에서 행위에 해당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연중 32주간은 깨달음이라고 이름을 붙여놨고, 연중 33주간은 실천이라고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러면 깨달음 연중 32주간에는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가 나옵니다.
슬기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나 모두 등장을 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은 모두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은총을 받았다는 겁니다. 받았다는 데 초점을 뒀습니다. 나에게 이 말입니다.그러나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너에게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서 기름을 준비를 할 수도 있고 기름이 준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등잔은 나 창조에 초점을 맞춰줬지만, 기름은 너 창조에 초점을 맞춰졌습니다. 결국 나는 결국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섬김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고, 봉사 받으러 오지 않고 봉사하러 간다. 누구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표현했냐면 나는 몸값을 지불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정확하게 읽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제들도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또 여러분 신자들도 몸값을 지불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의식하지 말아야 될 것이며, 너를 향해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써 상대의 불행을 바로 행복으로 바꿔줄 것인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언젠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린 대로 교황이 되었다고 해서 천국 갑니까? 주교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 갑니까?성직자 수도자가 천국 갑니까? 못 갑니다. 그거 기준 아닙니다. 방법론에 해당되는 겁니다. 천국 가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이 깨달음을 갖고 바로 상대한테 다시 실천함으로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천국 가는 유일한 삶은, 택배 기사가 돼야 됩니다. 배달 사고 나지 않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놓은 것, 이것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잘 나눠줘라 했는데 우리는 그 말을 못 알아듣고, 하더라도 최소화시키면서도 만족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정말 주님께서 매우 노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모든 것을 버리면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오고, 십자가를 지면서 너에게 생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연중 32주간의 등잔이라는 이 말씀은 죄가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린다 했을 때 받아들인다.누구에게? 나에게 그러나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바로 슬기로운 처녀인데 슬기로움은 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벌이 사라진다는 것은 내가 너에게 행위를 움직였을 때 ,벌이 사라지고 내어놓을 때를 말하는데 바로 공덕을 쌓는 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나의 도움을 분명히 바로 청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눈을 감아버리고 귀를 막아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이것은 내가 해낼 일이 아니야, 누구 마음대로 내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닥치는 대로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내 목숨까지도 내어 바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닥치는 대로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됐던 것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선별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의 뜻을 말하고는 있지만 바로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중 32주간도 결국은 기름을 준비하는 측면에서 너를 향해서 움직이라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연중 33주간으로 넘어갑니다. 연중 33주간은 실천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실천함은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로 10달란트로, 두 달란트 4달란트로 만들었습니다. 근데 한 달란트한테는 땅바닥에 다 묻어두고 내가 정말 이제는 깨끗하게만 살아야 되겠다. 아주 땅바닥에 묻어뒀습니다. 주님이 오셔 가지고 결산을 했는데 어떻게 합니까? 주님 짜잔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주신 것을이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 못된 종아!, 내가 그렇게 하라고 너에게 한 달란트를 준 것이 아니다. 너는 이것을 갖다가 너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서 두 달란트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었는데도 너는 그것을 하지 않았구나. 얘들아 저자를 끄집어내고 바깥으로 내쫓아라. 그는 거기서 이를 갈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연중 33주간도 누구를 향해서 움직이라는 겁니까?너를 향해서 움직이라는 것으로 봅니다. 연중 34주간 전례의 마지막 날입니다. 전례 마지막 날 어떤 모습이 있는지 보십시오. 심판에 대해서 나옵니다. 심판에 대해서 양이 나오고 염소가 나옵니다. 우리는 장례 미사 때 이것을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때 그 장례미사 때 그 양과 염소에서 어떻습니까? 내가 아파할 때, 내가 슬퍼할 때, 내가 굶주릴 때, 너는 나에게 그것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합니까? 제가 언제 안 했습니까? 가장 미소한 형제에게 이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존재가 있고 나에게는 가치도 있습니다.그 존재는 받아들일 때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것은 가치는 내가 형성되어서 내어 줄 때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받아들이는 존재를 영성이라고 표현했고, 내어놓는 가치를 성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보에는 항상 나를 통한 너를 향한 우리 공동체 우리 공동체라는 이 단어가 천국이라는 단어입니다.그래서 완전한 나를 통해서 내가 움직여 너를 성장시키는 데 그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우리 공동체, 천국 공동체가 된다. 이렇게 말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뜻일까? 이 모든 것을 보면 오늘 연중 34주간 전례 끝입니다. 이제 35주간은 없습니다. 바로 대림주간으로 넘어갑니다. 이 연중 34주간에 가장 미소한 형제에게 그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미소한 형제는 또 뭡니까? 무언가 여러분들이 하고 있을 때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는 그에게 접근해서 그의 일에 동참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주님이었습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건 뭡니까? 성사를 볼 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 때 ‘오늘, 성사가 되는 사람’ 했습니다. 오늘 성사가 되는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성사가 된 사람 안 하고 성사가 되는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도 잘 기억하시고 우리들도 충분히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이해가 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제가 우리 본당에 파견된 것은 신자들을 위해서 죽으려 왔습니다. 그러면 훌륭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신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내가 조금 움직여서 내가 좀 불편하고 내가 좀 고달프고 내가 좀 힘들어도 상대에게 이것이 이득이 된다면절대 피하지 말고 그것을 함께하려고 노력해야 된다. 저는 이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도 나이가 70이 다 돼갑니다.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가 더 편하고자 하면 무엇이 편해지겠습니까? 이제 제가 할 일은 이제 마지막 문턱에서 있는 힘을 다해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그렇게 힘을 다 쏟고 싶은 것이 제 마음입니다. 옆에서 훼방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훼방 놓는 사람들이 더러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관심 없습니다. 어차피 견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집어넣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예수님도 견적에 죽음이라는 것을 집어놓았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모습들이 우리가 신앙에서 답을 찾도록 각별히 노력해 주어야 될 것입니다.
이제 지난 주간에 대한 것을 다 말씀드렸는데 이번 이제 오늘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오늘은 바로 일리사의 말씀은 주제 파악을 하라. 너도 옛날에 이방인 아니었던가. 이집트에 끌려가 가지고 그렇게 고달픈 생활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럽니다. 한국 사람들이 좀 비슷합니다. 옛날에 다 농사짓고 가난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부자가 됐다고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말씀에서도 너도 이방인 아니었던가. 근데 이방인을 왜 서럽게 하는가. 그러니 너도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그렇게 서럽게 하지 말아라. 나와 반대되는 사람도 잘 받아들여라. 주제 파악을 좀 하라고 이런 말씀으로 저는 알아들었습니다. 이 주제 파악이 하느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말씀은 꼴값입니다.주제 파악을 하는 사람은 꼴값을 하게 돼 있습니다. 왜? 나는 하느님의 꼴을 담고 태어나고, 하느님의 꼴에 대한 값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값을 지불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꼴값을 지불하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누구에게? 너에게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치이고 재물입니다.주제 파악은 존재이고 선물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우리 신앙생활은 주제 파악을 하면서 반듯한 모습이 되어주시고 꼴값을 함으로써, 깔끔깔끔한 삶을 살아달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 파악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독서의 말씀은 성령이라고 하는데 성령은 둘을 합쳐놓은 것인데, 여기서 처신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본보기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본보기라는 단어는 모범 답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런 처신을 한 것도 얼마나 놀랍고, 모범 답안도 잘 보였습니다.
나는 신자들에게 조금도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벌어먹고 살기 때문에 나는 바로 그물을 손질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율법학자 중에 율법학자요 바리사이 중에 바리사이였습니다. 똑똑하다면 아무도 쫓아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신자들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물을 손질해서 내가 벌어먹을 것은 내가 찾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 그렇게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냥 그렇게 하면 아니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보이셨습니다. 거룩한 변모가 되었을 때 누가 있었습니까? 주변에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누굽니까?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입니다. 엘리야는 누굽니까? 엘리야는 예언의 대명사이다. 오늘 복음의 끝에 뭐라고 나옵니까?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잘 새기라고 분명히 나왔습니다. 율법은 뭡니까? 받아들이는 하느님 사랑이고, 예언은 뭡니까? 내어놓는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잘 간직하시고 항상 무엇을 행할 때 여러분들이 행하면서도 아무런 공덕이 안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내어 놓을 때 이것은 공덕이 됩니다. 받았다는 것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내어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느님께 찬미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득이 되어 나에게 이득이 되고 남들이 나를 좋게 봐주는 데 초점을 맞추면 이미 우리는 꽝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그, 길을 찾아서 온 힘을 다 기울일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 이제 예수님께서 몸값을 지불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우리도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면서 전례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전례를 시작할 때는 대림절 때입니다. 대림은 생명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맞습니까?그러나 전례가 끝나는 주간은 뭡니까? 위령성월입니다. 위령성월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로 시작하지만 죽음 잔치로 끝납니다. 잘 보십시오. 생명 잔치는 누가 받습니까? 내가 받습니다. 죽음 잔치는 누구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하느님 사랑과 너를 위한 이웃 사랑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나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서 너를 위한 이웃 사랑으로, 분명 방향 전환을 해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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