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철환(哲煥)
철환 변호사는 장흥 장동출신이다. 아버지는 원량(元良, 일명 月良), 어머니는 밀양 손행순(孫杏順)의 장남으로 1958년에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서울교육대를 선택했다. 졸업한 후에 6년간 초등교사로 봉직했다. 그러다 법조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성균관대 법학과 2학년으로 편입해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1989년에 수료했다. 나이 때문에 법관이나 검사로 임관될 수 없어 부득이 변호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원에서 개업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늘 여기서 안주하지 말자고 자신을 채근했다. 그런데 2013년 대한변협이 회장을 직선제로 회칙을 바꿨다. 그는 이 기회에 회장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주변에서는 그의 도전을 돈키호테 같은 돌출행동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간선제 회장은 높은 지위의 판검사를 역임하지 않은 사람은 엄두도 못 냈다. 그걸 모르고 덤빈 것은 아니다. 그는 변협의 관료적인 시스템을 파파해야 할 고질적인 병폐라고 진단하고 덤볐다. 그래서 자신의 출마가 한낮 객기에서 출발한 무모함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국의 변호사를 대상으로 발로 뛰며 득표활동을 벌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최초로 실시된 직선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2013년 1월 21일이다. 변협 61년의 역사를 새로 쓰는 날로 기억된 날이다. 회장에 취임한 그는 협회의 숙원사업을 임기 중 대부분 해결했다. 그의 당선은 위씨가 전국적인 선출직에 당선된 최초의 케이스가 된다.
6) 승호(昇鎬)
승호(昇鎬) 일명 봉록(奉錄)은 건국 이후 장흥 위씨로는 최초로 삼성장군에 오른 판서공파 후손이다. 장흥 유치 단산(丹山)에서 아버지 기복(祈復, 1937)과 어머니 청주 김순금(金順今)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흥고교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제38기로 입학, 1973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위관과 영관장교시절에는 미국유학과 서울대 등 군사전략과정의 교육을 이수했다. 최고의 군사전략가 하면 위장군이란 평을 받고 있다.
이는 이력이 증명하고 있다. 2001년 12월부터 2002년 12월 합참 전략기획본부 전략기획 담당관, 2002년 4월부터 12월까지 대북 군사업무 담당관, 2005년 6월부터0206년 12월까지 군사전략과장, 2008년 1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전략기획차장을 거쳤다. 2011년 4월 소장으로 진급해 2013년 4월까지 36보병사단장으로 재임했으며 2013년 4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신연합방위추진단장으로 복무했다.
2014년 1월 중장으로 진급해 육군대학 제42대 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군사 분야는 물론 비군사 분야에서도 국방수요에 부합하는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국내·외 대학 및 유관기관과의 교류협력을 통해 역량을 강화하는 네트워크를 마련했다. 아울러 세계일류 국방대학을 만드는 역할도 총장이 실현하려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60년 역사의 국방대가 논산으로 이전하는 사업도 그의 업적이다.
그는 육군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의 인재이다. 그런데 발탁되려면 정치권과 밀접해야 가능하다. 불행하게도 그는 호남출신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영남정권에서 호남출신 총장과 합참의장은 발탁한 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계급정년 이전의 승진은 사실상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군사전략에 관한 한 탁월한 능력자이니 혹시 다른 자리라도 발탁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나라가 인재를 보는 눈이 넓었으면 한다.
7) 성곤(聖坤)
장흥 위씨로는 처음으로 선출직인 국회의원에 당선된 판서공파의 후손이다. 그는 1968년 1월 장흥군 유치면 단산리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다. 그러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아버지의 근무처인 외가가 있는 제주도 서귀포시로 이사해 초·중·고·대학을 졸업했다. 제주도가 사실상 고향인 셈이다.
제주대 농과대 원예학과에 진학한 후 학생회 활동을 했다. 3학년 때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선출직을 통해 입지를 펴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행정대학원 정치외교과 대학원에 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6년부터 제주자치도의회 의원으로 2015년까지 3대를 내리 당선되어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런데 이곳 김제윤의원이 뜻하지 않게 뇌물죄로 실형을 받으면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만일 김의원이 무사했으면 3선이 마감되면서 도의원도 출마할 수 없었던 처지였다. 이런 일을 감안해보면 출세란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4·13총선에서 더불어 민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것이다.
20대 국회의원에 입성한 위의원은 국회 농수산위원회에 배정됐다. 원예과를 전공했고 그 방면에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알맞은 상위에 배정된 것이다. 이제 위문은 고대하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그러나 인물은 나무를 기르는 것처럼 잘 크게 키워줘야 잘 클 수 있다. 그 일은 장흥 위씨 모두의 일이기도 하다.
좋은 내용 올려
주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신복님께 감사
드립니다. ^^
멋지시고 휼륭하신 종친분들을 응원합니다.
파이팅입니다.
세분 모두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케이스로 보입니다, 덕천 위철환 변호사님에 대한 내용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현실적인 감각과 미래지향성을 고루 갗춘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