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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아메리카 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공군으로부터 갑작스러운, 그리고 의도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의회에 미국이 일본제국에 대해 전쟁상태가 되었음을 선포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다음날인 12월 8일, 긴급 소집된 미 의회는 루즈벨트의 연설직후 상원은 만장일치로, 하원은 388:1로 대일선전포고를 결의합니다.
의회에서 대일선전포고 결의안 통과를 요청하는 루즈벨트.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aktaca&logNo=60101391057
이 뉴스를 들은 윈스턴 처칠은 매우 기뻐하면서 "이것으로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도 산산조각나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같은 시각 "할렐루야"를 외친 것은 장개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날 자신의 일기에 "행운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 오랫동안 마냥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기록합니다.
사실 미국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일본과 타협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전쟁 준비가 매우 빈약했던 미국의 군사력으로는 독일과 일본 양국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명백히 역량밖이었고 일본이 미, 영의 세력권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적당한 조건(중국과 인도차이나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합니다. 그러나 외교적 협박과 무력적 위협을 병행하는 일본 군부의 소위 "벼랑끝 전술"이 되려 역효과로 작용하였고 루즈벨트는 설사 양보한다고 해도 어차피 그들이 침략을 그만둘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전에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만주사변 이래 근 10년, 노구교사변이 발발한지 4년반동안 홀로 압도적인 일본과의 전쟁을 치루어야했던 중국은 미국과 영국이라는 막강한 동맹국을 얻게 되었습니다. 12월 9일 중국은 국민정부 주석 임삼의 이름으로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들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선언합니다. 중일전쟁은 이제서야 "지나사변"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이 되었으며, 2차대전은 독, 이, 일 3대 추축진영과 미, 영, 중, 소 4대 연합진영간의 본격적인 싸움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임삼(1867~1943) : 혁명 1세대로서 손문과 함께 중국 동맹회를 이끌었으며 국공합작에 반발해 손문과 대립하기도 했으나 손문 사후 반공노선을 표명한 장개석과 손을 잡았고 31년 입법원 원장이 됩니다. 양광사변으로 장개석이 일시하야하자 그를 대신해 국민정부 3대 주석이 되어 1931년 12월부터 사망하는 1943년 8월까지 주석자리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군사위원장이었던 장개석이 쥐고 있었고 그는 단지 상징적인 국가원수로서 얼굴마담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죽은후 장개석이 그 자리에 앉음으로서 명실상부한 중국의 수장으로서 모든 권력을 쥐게 되죠.
41년 12월 31일 장개석은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중국전구의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으며 다음날 워싱턴에서 개최된 26개국 공동선언에서도 중국은 4대 강국중 하나로 인정되었습니다. 중국 대표로 참석한 송자문은 공동선언문에 루즈벨트와 처칠, 리트비노프 다음으로 서명하였습니다. 또한 루즈벨트는 장개석이 요청한 5억달러의 차관을 아무런 조건없이 제공하는데 동의하였고 이 돈은 분명 중국에게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습니다.(물론 중국의 관변학자 쑹훙빈이 자신의 저서인 "화폐전쟁3"에서 당시 국민정부의 10년치 예산과 맞먹는다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이 부풀여진 것이지만)
장개석은 이제야 중국이 치루어 왔던 희생과 그 위대함에 걸맞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의 융숭한 대접이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 것이며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장개석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미, 영이 연합국간의 전쟁수행과 상호협력을 위해 워싱턴에 설치한 연합참모회의(CCS, Combined Chiefs of Staff Committee)에 대표를 참석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실질적으로 어떤 발언권도 없다는 의미였죠. 정보공유도, 전략적 협의도 불가능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선, 과연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이것은 추축진영의 운명만이 아니라 영국과 중국의 운명 또한 좌우하는 것이었습니다. 양국 모두 강력한 적을 상대로 홀로 버텨왔으며 미국의 지원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처칠과 장개석은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미국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으나 결국 이 싸움의 승자는 처칠이었습니다. 반대로 싸움에 패한 장개석은 전쟁의 주역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됩니다.
처음에 불리한 쪽은 명백히 처칠이었습니다. 진주만을 기습한 것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고 루즈벨트가 선전포고를 선언한 상대 역시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共守동맹"일뿐 선제공격을 했을때도 참전을 의무화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독일과 일본은 전혀 다른 두 대륙에 존재하는 별개의 국가였습니다. 영국 외상인 이든은 매우 들뜨고 흥분한 처칠을 향해 이 점을 지적하면서 "미국과 영국이 동맹국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일본과의 전쟁에 한해서일뿐입니다."라고 냉정하게 말합니다.
루즈벨트는 12월 9일 연설에서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싸워서 이긴다한들 그 나머지 세계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며 일본과 독일은 결코 별개가 아니며 일본보다 독일과의 전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의 기습에 격앙된 국내여론을 고려해 처칠의 미국 방문에 대해서 난색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루즈벨트 자신은 아시아보다 유럽을 우선시했지만 독일이 미국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일본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을 주장하는 국민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처칠은 장개석에게 "우리는 언제나 친구였다. 이제 우리는 공동의 적과 마주보고 있다"라는 전보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루즈벨트에게는 유럽이 전쟁의 중심이며 유럽을 최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나는 대통령에게 미국의 여론은 전쟁에서 중국의 공헌도를 과대평가하는 것같다고 말했다. 물론 나는 중국인들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거듭되는 그들의 실정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비현실적인 가치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수용하리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처칠과 루즈벨트의 고민을 손쉽게 해결해 준 것은 다름아닌 히틀러였습니다. 12월 11일 히틀러 스스로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루즈벨트는 유럽전선에 개입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얻었습니다. 여전히 미국의 여론은 일본에 대한 전쟁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루즈벨트, 마셜, 아이젠하워는 연합군의 첫번째 공격목표가 독일임을 분명히 하였고 4월 1일 루즈벨트는 정식으로 "레인보우플랜-5"를 승인합니다.
※ 1939년 기존의 오렌지계획을 보다 구체화된 형태로 발전시킨 레인보우플랜은 유사시 미국의 전쟁수행계획을 상정한 것으로, 그 중 레인보우플랜-5는 미국이 영, 프와 동맹을 맺어 서유럽의 방위에 우선순위를 두고 독일, 이탈리아를 패배시킬때까지 태평양에 대해서는 현상유지에 주력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구교사변이래 미, 영 등 열강들과 동맹을 맺어 일본과 대적하는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장개석으로서는 이런 미국의 결정은 뒷통수를 가격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연합국들이 힘을 모아 추축국중 가장 허약한 일본부터 타도하여 추축진영의 한축을 재빨리 무너뜨리는 것이 우선이며 독일은 그 다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미, 소, 영이 일본본토를 공습하여 본토와 대륙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후 중국군이 총반격을 개시한다면 1년안에 대일전은 끝날 것이며 그 다음 대독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죠.
이를 위해 12월 8일 파뉴시킨 소련대사를 통해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와 참전을 요구했으나 12월 12일 스탈린은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하며 일부 병력을 극동으로 파견할 수 없는 입장이다. 향후 대일전에 대한 준비를 하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라며 거부하였고 또한 다시는 이런 요청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당장 독일에게 본토를 위협받고 있는 영, 소로서는 일본과의 전쟁은 한낱 부차적인 것일 수 밖에 없었고 루즈벨트 역시 중국 대신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장개석은 동맹국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앞으로도 혼자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루즈벨트가 향후 세계 질서를 주도할 4대 강국으로 미, 영, 소와 함께 중국도 포함시킨 것에 대해서도 중국을 약소국이라며 멸시하고 있었던 처칠과 스탈린은 이런 생각을 비웃었습니다. 43년 11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3국 회담에서 장개석은 아예 초청되지도 않았으며 버마에서 분투중인 중국군을 지원하자는 루즈벨트의 제안에 대해서도 처칠은 버마는 촉박한 문제가 아니며 "중국이 강대국이라면 자력으로 그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비꼬았습니다. 스탈린 역시 독일부터 무찌르고 그 다음에 소련이 서쪽에서 일본을 공격하면 해결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청조이래 부패하고 허약하기만 했던 모습을 평생 보아왔던 그들에게 중국은 멸시와 경멸의 대상일뿐 결코 자신들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죠.
한편, 장개석의 기대를 배신한 것은 중국 내부에도 있었는데 바로 중공이었습니다. 12월 18일 해방일보는 세계전황의 중심은 유럽과 대서양에 있기 때문에 독일부터 타도하면 일본은 자연히 해결될 것, 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논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독일이 항복할때까지는 중국인들이 앞으로도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장개석정권이 항일에 소극적이라며 온갖 비난을 퍼부어 왔던 중공으로서는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인 주장이었죠. 이는 소련의 지시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일본과의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날 경우 아직 장개석에게 충분히 대적할만한 실력을 키우지 못한 자신들에게 더 불리할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즉, 국가와 민족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모택동과 중공이었습니다.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이 세명에 의해 중국은 철저하게 배제되었으며 그동안의 희생 또한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미국이 중국에 5억 달러에 달하는 무상차관을 제공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41년 3월 무기대여법과 함께 영국에 제공한 차관은 중국의 10배가 넘는 무려 70억 달러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으로, 전쟁기간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제공한 총 500억달러중 영국이 310억 달러, 소련이 110억달러를 차지했습니다.
무기대여법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제공된 물자를 하역중인 모습.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yoonjy2k/80038972134
종전 직전까지 중국이 제공받은 것은 단지 8억4500만달러로 전체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정작 중국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무기나 식량, 군수품에 대한 지원은 극히 미미했습니다. 중국은 영국이나 소련과 달리 무기대여법의 실질적인 수혜국이 되지 못한 것이죠. 미국이 제공한 차관은 주로 중국내 법폐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으나 일본의 봉쇄로 외부로부터 물자를 수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플레 억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심지어 전쟁끝날때까지도 그 돈을 모두 쓰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제공하는 미국의 원조는 중국의 전쟁수행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기보다는 도리어 고위 관리들의 비자금으로 활용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그 부분에서 장개석 역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발발전인 41년 7월, 존 매그루더 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사절단이 중경에 파견되어 장개석을 만납니다. 그들은 중국군의 상황을 돌아본후 전쟁성에 "만약 중국군에게 충분한 무기가 공급되고 그들이 그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면 일본군에 대해 국지적인 공세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직후 재차 방문한 미국사절단은 "중국군은 전투의지가 전혀 없으며 중국이 무기를 요구하는 이유는 일본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산군과의 내전을 위한 것이 틀림없다"라고 이전과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을 보고합니다. 그러나 이런 보고는 당시 중국이 대륙 곳곳에서 진행된 일본의 국지적인 공세에 대항해 여전히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으며 의창에서는 제한적인 반격까지 시도했다는 점에서 명백히 왜곡이었습니다.
전쟁기간 내내 미국은 중국군을 위해 충분한 무기도, 물자도 제공하지 않았고 소수의 군사고문단을 제외하고는 단 1명의 병사도 파견하지 않으면서 패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중국의 의지 부족 탓이라며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루즈벨트는 중국전선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사실 애초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처칠과 스탈린은 중국이 약하다며 비웃었으나 그들 역시 미국의 원조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누가 누구를 비웃을 처지도 아니었죠.
이미 완전히 고갈된 영국의 전쟁수행능력은 미국과 캐나다 등 영연방국가의 막대한 물적, 금전적, 인적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고 44년에는 영국군이 보유한 장비의 28.7%가 미국산이었습니다. 또한 캐나다는 74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군용차량의 32%를 공급하였습니다. 소련 역시 미국으로부터 1만5천대의 항공기, 전차 5천대와 식량 500만톤, 42만대의 차량, 1500만컬레의 군화, 300만톤의 가솔린을 받았고 영국에게도 5천대의 전차와 7천대의 항공기, 11만톤의 고무를 제공받았습니다.
영국과 소련은 중국보다 월등히 우세한 공업력을 갖추고 있는데다 미국의 막대한 물적 지원까지 받고 있었음에도 고전의 연속이었고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한줌도 안되는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에게 몇번이나 난타당한채 42년말까지도 카이로 문턱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극동에서도 절반도 안되는 일본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버마와 말레이, 홍콩을 단숨에 상실했다는 점에서 과연 이들이 중국군이 무능하고 전의가 없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부당하고 편파적인 비난의 선두에는 바로 "까다로운 죠"라 불리우는 죠셉 스틸웰이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중국전구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루즈벨트에게 자신의 참모장의 역할을 맡을 미육군의 고위장성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한가지 단서가 붙어 있었는데, 해당 장교가 반드시 극동문제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으며 이는 군벌시대의 중국군에 대해 알고 있는 장교는 현재의 중국군을 옛 군벌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서 작전 수행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이 굳이 이런 단서를 단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스틸웰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 육군 전체를 통틀어 스틸웰만큼 "중국통"은 없었습니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2번이나 육군 무관을 지내는등 중국에서 13년간이나 체류한 경험이 있었습니다.(1926~29, 1935~39) 만약 그가 중국에 우호적인 인물이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 불행의 시초였죠.
당시 58세로 육군소장이었던 그는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 주둔한 미 육군 제3병단 사령관으로 명예로운 퇴역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으로 전시상태가 되자 퇴역은 당연히 연기되었고 그는 롬멜과 싸우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셜은 루즈벨트에게 스틸웰만이 미 육군에서 유일한 극동전문가라며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자신이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때 그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나를 중국에 보낸다고? 천만의 말씀. 그들은 아직도 나를 함부로 부려먹어도 되는 하찮은 대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진흙길을 도보로 걷고 쿨리와 어울리고 군용열차를 타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중국인들을 "쿨리"라며 멸시했고 중국과 중국군에 대한 시각은 20년대 군벌시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성격적으로 매우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는 적대감을 감추지 않음으로서 이로 인해 영국군과도 심한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런데 당초에 마셜이 후보로 점찍은 사람은 스틸웰이 아니라 1차대전당시 퍼싱원수의 참모를 지냈던 휴 드럼(Hugh A. Drum)소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셜이 중국과 버마전선을 부차적으로 취급한다고 판단하고는 자신을 중국에 보내는 조건으로 미군부대와 대규모 군수품의 지원을 요구하였습니다. 모든 전력을 유럽에 집중할 생각이었던 마셜은 드럼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중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스틸웰에게 의향을 물어봅니다.
휴 드럼(1879~1951) : 스틸웰 대신 그가 갔다면 어땠을까. 일단 중국에 대한 편견이 없고 대부대의 조직과 지휘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스틸웰보다는 동맹국들간의 불협화음을 덜 일으켰을 것입니다. 마셜이 스틸웰을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최악의 선택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일기에는 온갖 불평을 적었던 그는 막상 마셜 앞에서는 "지휘권이 주어진다면 하겠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전쟁성 장관인 스팀슨이 "장개석은 중국군의 모든 지휘권을 주기로 약속했다."라며 이 점은 자신이 확실히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하자 스틸웰은 "OK!"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스틸웰은 매우 유능하고 책임감이 강한 군인이기는 했으나 그전까지 주로 행정과 해외 무관, 신병에 대한 훈련을 맡았을뿐 야전 지휘관으로서 대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전무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OK"라고 대답했을때 중국에서 자신이 맡게될 책무에 대해 얼마나 신중하게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센놀트의 말대로 그가 맡아야 할 역할은 미군의 모든 장성들을 통틀어 가장 복잡하고 민감한 것이었으며 정치 경험도 없는 일개 군인이 맡기에는 터무니없이 과중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맡은 공식직함은 중국전구 연합참모장외에도, 재중경연합군사위원회 미국대표, 중국-인도-버마 전구의 미군 총사령관, 중국에 대여되는 대여물자 관리통제관, 버마루트의 통제와 개선을 맡은 감독관, 재중 미공군 지휘관 등 무려 8가지에 달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의 권한과 책임의 범위가 실제로는 대단히 모호했다는 것과, 루즈벨트조차 장황한 말만 했을뿐 정작 그에게 중국에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셜은 그에게 "중국내 여러 당파를 화합시키고 미국의 원조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 중국군의 전투능력을 향상시키고 그들의 지휘권을 장악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임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영의 전략적 목표가 유럽에 있으며 중국은 단지 부차적인 문제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예 관심밖이라는)
이후 시작되는 스틸웰의 불행은 그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스틸웰 삼자가 생각하는 바가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는 것에 있습니다. 스틸웰은 자신의 주도로 영, 중 연합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겠다는 원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반면 중국과 동남아가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루즈벨트와 마셜은 군대를 직접 파견하는 대신 상징적인 수준에서 스틸웰 한 사람으로 대신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장개석은 단지 군사고문으로서 역할과, 중국의 요구사항을 미국에게 강력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원했습니다. 물론 스팀슨의 호언과 달리 중국군의 지휘권을 생면부지의 외국인에게 맡길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의욕 넘치는 스틸웰이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나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셜이 충분히 전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미국의 전략 방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나, 열강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20년대 군벌시대의 편협한 사고로 장개석을 대한 것은 그의 중대한 실책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양국간의 심각한 마찰은 물론이고 그 자신까지 몰락시키고 만 것이죠.
1942년 3월 스틸웰은 중장으로 승진한후 급조된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중경에 도착합니다. 장개석이 버마의 방어를 요청하자 곧바로 자신의 임무를 시작했지만, 정작 그에게는 아무런 밑천도 없었습니다. 마셜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은채 현지에서 스스로 해결할 것을 요구한 것이죠.
버마 랭군항에서 만다레이와 라시오까지 철도로, 그리고 운남 곤명까지 험준한 산길을 통과하는 비포장도로로 연결되는 약 2천300km의 "버마루트"는 하노이루트와 홍콩루트를 빼앗긴 상황에서 중국과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중국의 동부지역은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산맥이 가로막고 있었죠.
따라서 장개석은 버마루트의 중요성을 고려해 3개군(제5군과 제6군, 제66군)을 스틸웰에게 내주었는데 이는 중국군 최정예부대이자 장개석 비장의 전략예비대였습니다. 또한 버마의 방위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해 8만의 병력을 파병하여 영국군과의 공동 방어를 제안했으나 인도군 사령관 A.P.웨이블대장은 중국군이 버마로 들어올 경우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을 우려해 이를 거부하고 1개 사단만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게다가 버마루트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150대분의 대중원조물자를 영국군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등 일본군의 침공을 눈앞에 두고도 각자의 이익만 앞세운 불협화음은 심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틸웰은 3월 8일 중국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실제로는 중, 영 연합군을 제대로 지휘할 수도 없었고 전력에서도 열세했으며 협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특유의 "백인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그는 휘하의 중국군을 매우 고압적으로 대했으며 또한 일본군의 전력을 매우 과소평가하여 결국 참담한 패배를 당합니다. 영국군은 물론이고 중국군 역시 완전히 괴멸되어 75%이상의 손실을 입었고 1명의 사단장이 전사했습니다. 스틸웰 자신도 소수의 참모들만 이끌고 정글을 통과해 1,500km를 도주해야 했고 간신히 인도 델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중국은 외부로 통하는 마지막 남은 통로마저 상실함으로서 완전히 고립되었을 뿐더러 후방 기지인 사천과 운남까지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패배의 책임은 스틸웰과 영국, 중국 모두에게 있었으나 가장 큰 책임은 스틸웰의 독선적이고 고압적인 태도가 중국과 영국의 협조는 커녕 불신과 반발만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틸웰은 영국군의 패배주의와 비협조, 중국군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모든 책임을 돌렸고 중경으로 돌아온 그는 장개석을 향해 온갖 비난을 퍼부었으며 버마에 대해 반격하여 탈환할 것, 또한 중국이 원조를 받고 있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원조도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쓸데없이 머릿수만 많은 중국군을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틸웰의 주장은 명백한 월권에다 지극히 무례한 내정간섭이었습니다. 중국은 실질적인 원조를 받지도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스틸웰이 그것을 무기로 마치 상전처럼 행세하는 것은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미국의 한낱 괴뢰국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틸웰은 자신이 해임되는 44년 10월 19일까지 무려 13번이나 집요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장개석이 스틸웰의 건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중국군은 훨씬 효과적으로 강화되었을 것이며 중일전쟁의 향방은 물론 국공내전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총 300개 사단 약 380만에 달하는 중국군을 3개군(X군, Y군, Z군) 90개 사단으로 축소하자는 스틸웰의 주장은 30년대 중반 장개석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장개석은 왜 그의 권고를 무시했을까. 실상 스틸웰의 계획은 미국이 충분한 원조를 제공한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문제는 미국이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죠. 미국의 최우선순위는 유럽이었고 일본에 대해서도 중국으로 우회하는 쪽보다는 태평양에서 밀고 올라가는 것이 병참면에서 훨씬 유리했습니다. 루즈벨트에게 중국은 우선순위에서 가장 낮았습니다. 42년 6월 장개석이 요청한 "최소의 요구", 버마탈환을 위해 미군 3개사단의 파견, 중국 전구에 500대의 전투기를 유지할 것, 매월 5천톤의 물자 공수는 확실한 언질이 회피되었고 재무장관인 모건소는 중국에 대한 차관의 추가 지원을 거부하였습니다. 카이로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약속했던 버마작전 역시 적어도 1년이상 연기되었습니다. 즉, 장개석과 스틸웰의 문제는 서로간의 극도의 불신에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미국이 중국군의 개혁에 필요한 물자는 제공하지 않으면서 개혁만 강요하는 것은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중국군을 장악하려는 음모가 아니냐며 스틸웰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군대 축소 문제로 몇차례나 대규모 반란을 경험한 그로서는 이 문제는 스틸웰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민감한 부분이었습니다. 반면, 스틸웰은 장개석이 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으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만 급급하다며 생각했습니다. 제1차 버마원정이 실패했을때 스틸웰은 중국군에 대해 "죄다 총살시켜야 한다"라며 폭발했지만 버마 주둔 영국군을 지휘했던 제14군 사령관 슬림은 "중국군은 비록 장비는 매우 빈약했지만 매우 강인하고 용감했으며 전투경험이 풍부했다. 그들은 베테랑이었으며 일본군을 가장 잘 저지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라고 극찬하였습니다. 또한 장개석의 모든 조언이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본군의 규모와 강약, 그들이 병참에 매우 취약하다는 조언은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결과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었음에도 스틸웰은 이를 무시했으며 "사사건건 간섭한다"라고 불평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생각만이 옳으며 남의 생각은 틀렸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빚어지지 않을 리 없는 것이죠. 카메라앞에서는 친한 척했으나...
그는 44년 5월 일본의 최후 공세였던 "이치고 작전"에서 중국군이 속수무책으로 패주한 것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장개석이 미국이 제공한 무기를 자기 휘하의 군대를 무장시키는데에만 사용하고 자신의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투를 회피했기 때문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이 자신의 지휘에 복종하지 않는 이상 당장 중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장개석을 격분시켰고 영국에 대해서도 비협조적이라며 공공연히 비난하였습니다. 중국전구에서 미, 영, 중간의 심각한 불화의 상당부분은 스틸웰이 벌인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루즈벨트조차 스틸웰과 장개석간의 불화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자 스틸웰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중할 것을 충고하였습니다. "당신이 장총통을 다루는 방식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소. 장개석은 중국인이며 우리와 생각이 같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소. 그는 최고사령관이자 총통이오. 그런 인물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며 모로코의 술탄에게 다짐받듯 그에게 언질을 강요할 수 없소." 장개석을 "땅콩(peanut)"이라며 공공연히 경멸하고 있었던 스틸웰은 루즈벨트에 대해서도 "물러빠진 사람(softie)"라고 자신의 일기로 기록하였습니다.
자체적인 군수산업역량이 극히 제한된 중국으로서는 영국이나 소련이상으로 미국의 원조를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었음에도 원조의 우선순위는 가장 낮은데다 "버마루트"마저 상실한후 인도 아샘의 차부아 비행장에서 수송기를 동원해 공수작전을 전개했으나(이른바 "험프루트") 험준한 산맥과 기후로 인해 큰 희생만 치루었을뿐 막상 도달한 물자는 아주 미미한 양이었습니다. 42년 여름에는 월 100톤에도 미치지 못했고 43년 1월에도 여전히 1,700톤에 불과했습니다.37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험프루트를 비행하는 C-46 코만도 수송기. 험프 루트는 조종사들에게는 최악의 환경이었으며 전쟁기간 약 600대에 달하는 항공기를 상실하고 1천명의 조종사가 사망하였습니다.
43년 3월 트라이던트 회담에서 루즈벨트가 공수물자를 7월부터 월 7천톤으로 확대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44년 중순까지도 3천톤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험프루트를 통해 제공되는 군수품은 스틸웰과 센놀트가 각각 절반씩 차지했기 때문에 동부전선의 중국군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으며 센놀트의 공군 역시 스틸웰의 버마탈환작전에 대부분 투입되어 정작 중국군을 지원할 수 없었죠. 중국군은 44년 6월에야 처음으로 산포 60문, 대전차화기 320문, 바주카포 506문을 제공받앗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완전히 지치고 궁핍해진 중국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스틸웰이 영국군과 함께 무다구치의 제15군을 괴멸시킨후 2년 반만에 버마 탈환에 성공하는 동안 미국의 원조물품은 모두 스틸웰과 센놀트가 독점하였고 중국 동부전선의 대다수 부대들은 총알 한발도 제공받지 못한채 구식무기만 들고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스틸웰은 이런 사실을 철저하게 외면한채 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중국군이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도 버마에서 승리했고 이어서 45년 4월 지강과 노하구 전역에서도 일본군을 격퇴한후 점차 반격을 개시한 것을 보더라도 중국군이 부족한 것은 전의가 아니라 무기와 식량이며 중국군도 잘 무장되고 충분히 훈련된다면 얼마든지 잘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의가 없다"라는 비난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이 말하는 5년간의 영웅적인 항쟁따위는 말도 안되는 거짓 선전"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압박이 도저히 먹혀들어가지 않는다고 판단하자 루즈벨트에게 장개석 정권의 교체를 건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비행기 테러를 통한 암살까지도 진지하게 고려합니다. 이런 점에서 스틸웰이 과연 순수한 야전 군인인가, 라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번의 충돌과 극적인 화해가 있었지만 결국 44월 10월 19일, 그는 루즈벨트에 의해 해임되어 미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3년 9월동안 중국과 버마에서 스틸웰이 이룩한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중국군 30개사단을 미국식으로 재편하고 훈련시켰으며 이들은 버마를 탈환한후 45년 5월부터 화중과 화남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영토를 탈환해 나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선을 벗어났다는 것이죠. 그는 서로 완전히 상이한 연합군을 지휘하면서 동맹국들을 존중하기보다 비난했으며 대등한 관계가 아닌 자신의 괴뢰군대쯤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정치, 외교적 수완이 무엇보다 필요한 연합군 사령관으로서는 최악의 방식이었습니다. 심지어 부하인 센놀트와도 경쟁하고 충돌했습니다. 스틸웰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맹렬하게 비난했으나 결국 불신과 갈등의 가장 큰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스틸웰의 생각과 달리, 미국과 영국의 전략상 중국전구는 한낱 "계륵"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죠. 루즈벨트와 마셜이 태평양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필리핀과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로 진격할 것을 정하자 더욱 중국의 중요성은 낮아졌습니다. 영국 역시 버마 탈환에 열의가 없었으며 많은 물자와 인원을 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처칠은 중국이 전후세계에서 강대국으로 등장하여 인도와 버마에서 영국을 위협하지 않을까 우려했습니다. 스틸웰이 아무리 의욕을 가지고 독주 한들 루즈벨트와 처칠의 시각에서는 불필요한 노력일뿐더러 오히려 자신들의 입장만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장개석대로 그의 무례함과 미국의 성의없는 지원에 심한 불만을 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기간 4명의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였던 것이죠.
스틸웰은 중국으로 떠나기전 자신의 일기에 "제사상에 올리는 희생양이 딱 나의 경우"라고 썼는데 그것은 결코 틀린 예측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첫댓글 내 생각은 이러한데... 상대의 생각은 콩밭에.....
여담입니다만... 저 388: 1 의 스코어에서 1표는 뭘까요. 잘못 누른건가?
하원 여성의원이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잘못 누른 것은 아니고 반전주의자인지라.....
ㅎㅎㅎ 재밌네요. 국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소신대로 반대표라... 재선됐을지 궁금하네요.,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