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서 뜨끈한 열탕에 아픈 다리를 담그고 주물러가며 찜찔을 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같이 운동하는 권사님이 탕 안으로 들어오시더니 내 옆에 앉으셨다. 권사님은 어머니랑 말을 잘 나누고 친한 걸로 알았지, 나랑은 별로 말도 나눈 적이 없었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지만 다른 데로 갈 수도 없고 어차피 당면한 상황에 거저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지민아! 니는 하느님이 특별히 남들보다 더 사랑하신데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꺼? 저는예, 성당에 다니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몸이 불편하니 봉사 활동도, 레지오 활동도 한 번 못한 속된 표현으로 열등생인데요? 사실 하느님은 저한테는 손해가 막강합니더. 저는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반에 반도 해드린 게 없어서리. 운 좋게 하느님 나라 가더래도 얼굴도 못 들깁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까닭으로 하느님께 예뻐 보이겠으며 거기에 사랑까지 더 받겠냔 말입니까.”
“물론 제가 아프니까 안 돼 보여 위로해 주고 힘을 주려는 뜻인 건 알지만 예.”
권사님 말씀인즉슨, 하느님은 사람들과 반대라는 거란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한다. 그에 반하여 하느님은 마음을 보신단다. 그렇다면 나는 더 큰일이다.
“나 이 사람은 외모도, 마음도 다 엉망인데, 이를 어쩌란 말입니까”
하고 권사님의 손을 붙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천사’라고 불러주며 힘을 ‘듬뿍’ 주는 지민이 니가 진짜로 천 사 아이가?”
하소연까지 했는데도 나에게 이렇게 더 충격적인 말을 일삼으셨다.
나는 두 손을 가로저으며 울먹이며 호소했다.
“에헤이, 울 권사님 아침에 신문 못 봤구나. 제가 천사가 되었으니, ‘어젯 밤에 천사 모두 죽었다’구요.”
하느님은 아프고 약한 이들을 더 맞아 주신단다. 지민이 너처럼 아픔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속된 표현으로 점수를 더 따고 들어간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의 아픔도 그냥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이 아픔마저도 함께 하고 있음에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도 못 느낀다면 살아 있음이 아니지 않는가. 숨쉬고 살아있으니까, 아픔을 느끼고 기쁨도 느끼는 거 아닌가.
남들에게는 없는 이 아픔 조차도 그 많은 70억 사람 가운데 다른 누구도 아닌 멋진 나에게 당첨되었다면, ‘아픔’ 이 녀석도 제대로 운이 좋은겨! 암만!!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는 속담도 있잖은가. 사람도 평소에는 모르다가 어려운 때를 겪어보아야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하는데 뭐.
바닷물에는 보통 3% 정도의 염분이 있다. 그러니까 3이라는 소금을 만드려면 97의 물을 증발시켜야 한다. 이런 소금은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만약에 소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생선을 절이거나 김치를 담글 때, 혹은 나물을 무치거나 국을 끓일 때도 음식의 조화로운 맛을 내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소금은 자신을 가만히 녹여낸다. 소금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하면 적당한 말일까?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더라도 주연 배우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나 주연 배우 한 명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연 배우와 스태프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어디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1등에만 관심이 있지만 그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드러내지 않고 열정을 녹여내는 조연들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소금 같은 조연들에게 오늘도 ‘파이팅!’ 외치며 여러분을 응원한다. ‘조연 없는 주연 NO NO’ 라지 않더냐.
이때까지 내가 해왔던 것처럼 낮은 데에서 주연이 아닌 소금 같은 조연으로 모자람을 채워가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아무리 그케도 하느님께 기본 점수는 나와야 될 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