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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연재 -미국의 여성 불교 >
캘리포니아 숲속의 비구니계단을 이끄는
타타로카 비구니
글 / 전현자( 취재기자)
타타로카 스님은 한국에서 수계을 받은 스님이다. 켈리포니아의 제너시(Jenner)에
있는 ‘ 아란냐 보디 숲속 선원(Aranya Bodhi Awakening Forest hermitage)‘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 본지 전현자 기자가 6월에 이곳을 방문하였다. --- 편집자 주.
기자: 미주현대불교를 읽으시는 모든 분들을 대신하여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스님 운문사에서 승려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타타로카 스님: 정해진 시간이 있는바, 긴 이야기를 간단 명료하게 해야 하는 하는군요.... 저는 십대에 집과 대학을 떠나 재가구도자(Anagārika) 가 되었습니다. 유럽과 인도를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빠알리어 성전협회에서 나온 고전 및 여려 경전들을 읽었습니다. 또한 옛 방식의 불교 승려 생활을 보여주는 영화와 TV 프로그램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도에서 불교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가구도자로써 유럽에 갔고 그곳에서 가르침을 행하시는 스리랑카 스님들을 돕는 좋은 기회를 얻었고 그분들께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그러다 인도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막상 인도에 가서 보니 인도에는 불교 승가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인터넷 문화 이전이어서 정보가 거의 없었던 상태로 인도를 갔습니다. 심지어 제가 다녔던 워싱턴 주에 있는 고등학교 도서관에는 불교에 관한 책이 세 권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는 불교를 알기가 쉽지 않았기에, 인도에 가고 나서야 인도의 불교 승가 상황을 알게 되었던 겁니다. 저는 팔리성전협회의 책들을 통하여 아라한들, 비구니들, 스승들, 지도자들, 그리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여인들에 대해 읽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제가 아라한의 깃발을 운반하도록 용기를 주셨고, 부처님을 따랐던 위대한 여성들이 저에게 큰 용기를 주고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의 상황은 책에서 본 것과 너무 달랐습니다. 제가 구도자가 된 것은 인도 보드가야에서 열린 제1차 사키야디타 국제 여성불교회의 참석 했을 때였습니다. 제가 수행 생활에 들어갈 즈음에, 미국에서 가르침을 펴던 아야케냐의 수계가 있었고 또한, 다른 분들이 캘리포니아에서 비구니로 계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그 무렵에 있었습니다.
그 무렵 인도에서는 불교 여성을 위한 1987년 제1회 사키야디타 국제 회의가 달라이 라마 성하의 지원에 힘입어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비구니 승가에 대한 조사가 요청되었습니다, 사키야디타(Sakyadhita)는 테라와다(Theravada) 불교, 티베트(Tibetan) 불교, 히말라야, 나란다 불교 등 전통을 잃어버렸거나 확립된 적이 없는 비구니 전통의 부활을 요청받았습니다. 연구에 대한 요구와 재건에 대한 요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인도에서 방콕이나 홍콩으로 가는 저렴한 티켓이 제공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티켓은 인도에서 기증된 것 이었습니다. 보시된 곳의 정확한 장소는 기억나지 않지만 “두 장 표 중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방콕을 고려했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어서 혼자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 했지요. 그때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여자로서 태국에 간다면, 흰 옷만 입어야 하고. 여덟 가지 계율만 지키며 ( 제가 인도에 있을 때 이미 십계를 지켰는데..) 스스로 부양할 수 있어야 하고, 비구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하며, 공양할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되면 3개월, 6개월 정도 수행이 가능하지만 미국에 돌아가 돈을 벌어 돌아와야 한다는 상황인 것입니다. 남자라면 편히 살아갈 수 있으며 전기를 사용할 수 있고, 꽃길을 걷는 것과 같으며 모든 제한이 열릴 것이며, 출가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지원될 것이라는 이야기도요. 저는 이미 10계를 지키고 있었고, 이미 모든 것을 버렸고, 마음으로는 이미 세속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마음의 출가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세간과 출세간을 왔다 갔다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구도자가 되기 전에도, 미국에서 저는 대학에서 일하고 있었고 자원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주말이나 휴일에 집중수행 을 했었습니다.
이미 출가의 길로 나아갔으니 일상의 생활과 수행의 생활을 병행하는 것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또 다른 선택지는 홍콩이었습니다. 홍콩은 동아시아와 연결되어 있어서, 중국, 홍콩, 한국, 베트남에서 이어진 동아시아의 고대 비구니 승가 전통을 배울 수 있는 곳이었지요. 그래서 홍콩행 티켓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홍콩에서 비구니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란타우 섬에 갈 수 있었는데, 거기에 큰 불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집중수행을 할 수 있고, 거기에는 비구니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마카오, 대만에 갔다가 일본에 갔습니다. 일본에는 비구니라고 불리는 여성이 있지만 더 이상 서품된 비구니 혈통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중국에 숨겨져 있던 비밀스런 것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아직 지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몽골과 러시아까지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비록 서양 수행자일지라도, 서양인 예복을 입었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교사라고 즉시 생각했을 겁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몽골과 러시아에서 많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의 비구니 상황이 세계 최고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터넷이 없었기에 늘 서로에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행의 관점에 대해 들으며, 완전한 수행, 완전한 서품이 한국에 있고, 심지어 서울 조계사 법당, 높은 자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가르쳤던 위대한 비구니 선사가 있다는 풍문도 들었습니다. 그 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이 바로 저의 은사 스님 이셨습니다. 대만의 불교도 매력이 있었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불교찬가, 절, 참회, 채식주의, 아이돌봄 등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훌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산속의 암자에 올라갔을 때, 소박한 명상 생활을 보았고, 제 마음은 한국에 끌렸습니다. 여기 소노마해안의 아란야보디의 암자 (hermitage)가 한국 숲속의 암자를 회상시킵니다. 저는 대학(아마 경북대학일 거예요) 명상그룹의 교사로 초빙되어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로 갔습니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다 두 명의 비구니스님들을 보았어요. 마치 그들은 천신들 같았지요. 그들의 차분하고, 힘있고, 간결한 모습의 걸음걸이를 볼 수 있었어요. 그 스님들이 제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버스안의 저를 올려다보았을 때, 저는 그 비구니 스님들의 눈빛을 보았답니다. 저는 그 스님들이 깊은 명상가라고 단언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명확하고 강한 눈 빛! 그것은 마치 그동안 찾고 있던 것이 여기에 있구나 라고 깨달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친구가 데려다 준 곳이 대구에 있는 팔공산 성전암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영어로 법문을 할 수 있는 스님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영어에 능통한 선사가 계셨습니다. 재가자인 제 친구는 선사님을 후원하는 신도회 일원이었던 것이지요. 그 선사님이 철웅 큰스님이십니다. 더군다나 성철 큰스님께서 머무시며, 큰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 바로 그 암자입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할 쯤에 성철 큰 스님이 입적하셨고 모든 이들이 성철 스님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저를 이곳에 데려다 주기 원했던 것이지요. 철웅선사님은 외국 수행자들에게 법문해주시 것을 좋아하셨으며, 여러 외국 스님들도 일정기간 같이 머물 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게 된 것이지요, 저는 그 숲의 암자 환경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저는 명상실에서 명상하고 한국불교에 대해 배우며 약 1년 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 비구니 스님 서품을 위한 저의 열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어디서 머물 수 있는지, 비구니 계보에 대한 관심 등을 여쭈었습니다. 철웅스님께서는 저에게 세분의 비구니 스님을 추천 해주셨습니다. 그 당시 상좌불교에서는 비구니서품을 실제로 받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키야디타의 일원인 카르마 렉셰 초모 (Karma Lekshe Tsomo) 존자는 한국에서 서품을 받았습니다. 또 티베트 전통에 있는 서양인들 또한 대만이나 홍콩으로 서품을 받으러 갔었습니다. 추천받은 첫 번째 절은 명성스님이 주지로 계신 운문사입니다. 원래는 세 곳을 다 가보려 했습니다. 먼저, 운문사가 위치한 계곡들을 품은 운문면에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산들이 주는 느낌을 감상했는데 호거산이 주는 그 야생의 기운에 매료되었지요. 그 외에도 그곳에 모든 스님들이 진심을 다하여 공부하며,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청정하며, 헌신으로 충만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여, 운문사가 좋겠다 생각해서, 주지스님을 찾아뵈려갔습니다. 저에게는 철웅스님의 인장이 찍혀 있고 붓으로 직접 써주신 두루마리 소개장이 있었지요. 제가 명성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명성스님께서는 주지스님이셨습니다.(후에 은퇴하시고 학장스님과 학주스님의 역할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분께 저도 모르게 아홉 번이나 절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도 모릅니다. 제 안의 깊은 곳의 어떠함이 세 번 절하고 또 세 번 절하고 또 세 번 절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분은 제가 모르는 그 이유를 알고 계셨지요. 그분은 제자가 되고 싶냐 하시며 "너의 목표는 무엇이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어 그분은 카르마 렉셰 초모 (Karma Lekshe Tsomo) 존자처럼 여러 사람들이 서품을 받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그들은 한국에서 세워지고 발전된 훈련을 다 마치지 못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분은 서품을 받으러 한국에 오는 여성들 ,특별히 상좌불교 또는 티벳정통불교에서 비구니상가를 재건하려는 분들을 염려하셨습니다. 계를 받는 이들은 그 전통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하고 훈련을 마쳐야하며 이것을 안과 밖으로, 즉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명성스님께서는 제가 십 계지키는 것을 중단했더라도 다시 지킬 것이며 이 훈련을 기초부터 시작할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운문사에 행자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행자 전 단계라도 들어 갔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받아 들여 졌고, 시간이 지나 그분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분은 저의 스승님이 되셨습니다.
기자: 운문사 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이었나요 ?
타타로카스님: 저는 운문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
저의 명상에 대한 관심을 아셔서, 은사스님은 저를 승가계 친척격인 대구 기린산 서봉사 경희노스님께 보냈습니다. 운문사에서 행자가 되었을 무렵, 경희 노스님의 시자가 되어 가까이 모시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많은 것을 직접 보고 배우던 중, 비자갱신을 위해 미국에 다녀와야 했고, 이후 동안거기간에 청화큰스님께 배울 기회를 가졌습니다. 사미니계를 받은 후, 은사께서는 저를 서울의 연등국제불교회관에 보내셨습니다. 그때 연등국제불교회관은 강화도에 국제적 명상센터가 될 국제 선원을 설립하는 첫발을 내 딛고 있었지요, 그 일을 도울 때, 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조계종에서 연등국제불교회을 통해 국제담마교사 프로그램을 제공했습니다. 그때, 영어로 된 불교서적들을 많이 읽게 된 거지요, 또한 당시 한국을 방문하신 틱낫한 스님 같은 외국 스님들을 만나 뵐 수 있었답니다. 회관 공동이사 무진 수님을 통해 아잔 차, 아잔 수메도의 태국 숲속 수행 전통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철스님의 제자이며 회관 공동이사이신 원명스님께 성철스님에 대해 더 배울 수 있었습니다. 원명스님이 인도하는 외국 학생들을 위한 강화도 집중수행에도 참여했답니다. 숭산스님이 인도하는 화계사 서울 국제명상 센타 하안거도 참석 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은사님께서 서울에 오셨을 때, 새로 개편된 대한 비구니회 회장과 위원회를 포함한 지도자이신 혜춘 스님과 광우 스님 등 손위 비구니스님 분들과 비구니 지도자분들을 은사님을 뫼시며 뵐 수 있었습니다. 1996년, 바로 그 해에 한국 비구와 비구들은 매우 특별한 계획을 지원했습니다. 인도 사르나트에 있는 10명의 스리랑카 상좌부 비구니의 비구니 서품식입니다. 이에 대해 진지한 승가 토론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곳에 대해 공부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한국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런 중에, 비자가 취소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비자관련규정을 어긴 것이지요. 한국어로 수십 쪽에 달하는 규정을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탓입니다. 규정상 저는 운문사에만 있었어야 했습니다. 승가대학으로 운문사가 등록 되어 있어서, 제가 학생비자를 받아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대구출입국관리소는 계속 운문사에 전화하여 저에 대해 확인하며 왜 제가 거기 없는냐 고 따졌습니다. 당시대구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서울출입국관리소가 외국스님들에 익숙한 반면 대구는 아니었거든요. 그 공무원들은 저를 대하기 꺼려했습니다. 악마로 보였겠죠. 자신들이 기독교천국으로 생각하는 미국출신인 미국인이 불교수행자가 되다니! 결국 저는 미국으로 쫓겨났습니다. 한국에서의 비구니 서품을 위한 저의 계획이 완전히 망쳐진 것 같았습니다. 저의 은사스님, 은사스님과 관계된 승가와, 법우들, 그외의 모든 것들에서 저만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국에서 스리랑카 상좌부 전통을 통한 비구니 구족계, 비구니 서품식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1997년에 ,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지만 1995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에서의 경험으로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한국에서 배운 중요한 것들의 영향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선배 비구니스님들의 강함과 그 정신은, 청정함에서만이 아니라, 명상, 교학, 지도력, 승가 운영능력, 높은 자율성 에 대해서도 정말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지요. 그 당시 한국에서 사미니계를 구족하려, 종정스님이신 아사리 혜암스님!, 저의 율사 아사리이신 일타 큰 스님!, 유명 비나야로 스리랑카에서 다시 서품 받으셨으며, 저의 은사스님의 정계아사리이신( 저의 은사님을 지도하셨기에) 그분의 인가로 수계를 받게 되었으며, 저에게 언제나 영감을 주신 대율사스님들께 저는 그 강함과 정신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분들은 법문을 부흥시키는, 법문에 청명함과 실재성을 가져오게 하는 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산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생활은 정말 청명하고 강력하고, 신선했습니다. 이것이 제 삶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어른 비구스님들, 저의 은사님을 포함하여 위대한 비구니 스님들께서 강력하게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분들께서 명상하도록, 법문을 깊고 넓게 공부하도록, 법문을 전하도록 격려해주신 것입니다. 이런 전승의 청명함과 기운이 지금도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운문사 근처의 유적지에 있을 때 받은 또 다른 깨달음이 있습니다. 신라 때를 아시지요? 신라 시대부터 내려져온 원광국사스님의 법의 자취 그리고 법당, 석탑 이 모든 것들이 거기 있었어요.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이 살아 있고, 활기차게 각 시대마다 있었던 것이라고 깨달았어요. 조선의 불교탄압에서, 일제시대에서, 한국전쟁에서도 다 어려움을 견뎌내며 살아져 있더군요. 이런 부흥의 정신, 부처님과 위대한 선사들과 연결되어 있는 이 감각과 부흥의 정신을 소유한 나의 스승님들! 이들이 잿더미 속에서 그 전통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것이야말로 상좌부 전통에 비구니 승가 재건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강력한 선례였습니다.—저의 은사스님 그리고 저의 대사부 자운 대율사님 등 훌륭하신 스승님들께서 헌신하신 바로 그것이지요.
기자: 어떤 목적으로 비구니가 되었나요?
타타로카스님: 정식 계를 받은 이후, 운문사로 돌아왔어요. 은사님께 출가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죠. 2000년 초반에 천일 수련에 입소하여 마지막 날이 가까워졌을 때, 은사스님께서 방문하셨어요. 그분은 제게 운문사로 돌아와 영어 법문 소통 연구회에 연구원이 되어 가르치라고 제안하셨습니다. 연구원으로써의 저의 과제는 두 가지였는데, 세계비구니상가역사와 비구니 계율 비교였습니다. 연구원으로 있을 동안, 저는 태국과 한국을 오갔어야 했어요. 태국에서, 저는 마하쿨라롱콘(Mahaculalongkorn) 태국 왕실승가 대학 연구부서와 협력하여 국제적 시대적 상좌부불교 수행 계보의 전파를 연구했으며, 학승들을 가르쳤고, 국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또한 명상센터에서 북동부(Isaan)로 두타행 순례(태국어: tudong =빠알리어 Pādhutanga 두타행 or cārika 도보 순례 산책)를 하며 아잔문의 숲속 전통을 따르는 곳(미국에 있는 동안, 이에 대해 공부하여 친근감이 있었습니다)을 방문했습니다. 겨울방학 동안 Wat Pah Ban Taad에서 고(故) 아잔 마(Ajahn Mah)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집중수행에 참여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여러 비구니스님들과 사미니스님들이 위빠사나와 근본불교로 인한 초기불교명상과 그 실행 및 생활에 관심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분들은 "근본불교가 어떤 것인가요?" "어떻게 실행할 수 있나요?" 계속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분들 대다수가 비구니로서 초기불교 가르침에 애정이 생겨, 남아시아 상좌부 불교에 가서 비구니로서 훈련에 참석하기를 희망하여 미얀마(버마)로 갔었습니다.
한국에서, 그분들은 그들의 수행, 그들의 공부, 서품, 그들 소유의 사찰, 수행처, 암자, 그들의 훈련, 가르치는 것, 무리를 이끄는 것, 사회봉사하는 것에 많은 지원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하죠. 그분들은 거기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초기불교수행과 상좌부불교에 관심 있는 분들 중 상당수가 그랬답니다. 미얀마(버마)를 가셨던 스님들 중에 그곳 수행 생활이 마음 같지 않더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거기서 비구니로 생활하기가 어려웠으며(미얀마에는 비구니로서의 계 받는 것이 없어 비구니가 없었기 때문에), 심지어는 대승불교도인 것처럼 행동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분들이 마음으로는 상좌부불교를 공부하고 훈련하고 살아내고 싶어도 말입니다. 그 분들은 대승불교복식을 입고 사는 것에, 늘 "대승불교도, 대승불교도" 로 불려졌으니까요. 내적 열망, 헌신과 외적인 상태가 일치 할 수 없으니,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한국어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지요! 반야심경에 "공(空)은 형(形)과 다르지 않고, 형(形)은 공(空)과 다름이 없다," 라 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상가를 발전시킬 당시 공사상에 깊이 통찰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외적인 부분과 마음이 일치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불편할 뿐 아니라 강해질 수 없음을 이해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세간에서 흔히 경험 되죠. "마하반야바라다심경…”이렇게 매일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분들도 이 일치의 결여를 느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파악하였습니다. 제가 1997년에 상좌부에서 수계를 한 것이 바로 딱 맞는 옷을 입었던 것임을요. 매우 드문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그분들과 다른 곳에서 같은 고통을 받는 분들에 대해 자애를 느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고 그로인해 특별한 과정을 통과한 것이었음을 생각하며, 다른 분들도 통과할 수 있도록 우리가 길을 넓혀 열어 줄 수 있기를 다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계를 여행할 때 간혹 아무 곳에도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불일치를 해결하지 않고 끌려 왔기에, 간간히 목적과 외적인 형태가 일치할 때, 공(emptiness)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기자: 전 세계에 많은 제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몇 나라에 몇 명이나 있습니까?
타타로카스님: 예전에 홍콩에 있었던 때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가르치고 있었던 곳이: 홍콩, 마카오, 대만, 일본, 러시아, 몽골… 한국 운문사에 들어가 행자가 되었을 때는 한 10년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은사스님께서 가르쳐보라고 하셔셔, 다시 시작했지요. 그리고 어른이신 상좌부 비구스님들께서 저에게 상좌부 여성 기원에 대해 책임지고 해보라 하셨고, 이때가 비구니 수행 약 10년, 수행생활한지 20년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은사스님과 운문사 도량에서 나눈 대화로 기억합니다. 운문사 본당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었어요. 하얀 옷을 입은 태국식 재가 출가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편지를 보낸 것이었는데, 저에게 미국으로 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를 지도하는 분이 그녀가 단지 미국의 재가 출가자가 아닌 정식 비구니가 되게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태국에서는 사실 불가능했던) 이 내용을 은사스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녀의 스승 되는 분이, 저보고 도와달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은사스님이신 명성스님께 여쭈었을 때, 은사스님께서는 말씀하셨어요. "내가 가장 높은 지위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을 , 네가 아래서부터 할 수 있을듯하구나" 당시 은사스님께서는 전국비구니회장이셨지요. 그것은 전 세계 비구니 상가의 여황제인 셈이지요. 그분이 백방으로 노력하셨지만 상좌부에서 비구니 수계를 받게 하는 것을 얻어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실재로 한국의 비구니스님들은 많은 것들을 해내셨습니다. 특히, 스리랑카 비구니상가를 상원비구니 스님과 한국의 대선사들이 1996년에 사르나트에 설립했어요. 스리랑카 비구니 조직을 형성하는 것을 지원하여 1998년에는 보디가야에 비구니 훈련원을 세워서(당시 한국비구니 회장 광우 스님께서 돌봐주셨어요) 스리랑카의 비구니 훈련 및 교육센터로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은사스님께서는 제가 가서 아래에서 부터 돕기를 바라신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저에게 바라를 주셨는데, 이것은 저에게 주신 위임과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저와 같이 상좌불교에 계를 받고 싶은 한국인이 아닌 서양과 외국여인들의 바램을 제가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던 것이라 믿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그것을 하거라"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은사스님의 축복을 받으며 운문사를 떠났습니다.
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된 2005년에 법지니사(美國 法持尼寺) 와 법지니 지원 재단을 켈리포니아에 설립했습니다. 그 후에 비구니상가 주지로서 저는 처음으로 출가 수계식을 행했으며 또한 새로 생긴 비구니 연합의 고문이 되었습니다. 북미비구니연합회를 세웠고, 이 단체는 인도의 비구니 훈련 및 수계식을 돕게 됩니다.
13년 전에 이곳 숲속이 아란냐보디로 기증되기 전에도 비구니 집중수행 및 상좌부 사미니계수여식을 가졌습니다.( First Sramnerika Pabbajja) 호주에서도, 태국에서도 사미니계 수여식을 가졌지요. 제가 수계사가 된 2009년부터는 비구니구족계 수계식을 2년 마다 실행했습니다. 지금까지 55회의 수계식을 동서양에서 한 거 같군요. 물론, 제가 비구니상가 구성을 위한 것이 원칙이며 그렇게 해왔습니다만, 몇몇의 남자신도도 비구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신도와 여신도들이 있지요. 한국을 떠난 지 15년 동안, 수계사로서는 12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 수도자들, 비구니들이 탄생되었네요. 그들 중 다음세대에 상좌부 수계사비구니들이 될 사람도 있겠지요. 이들이 풀뿌리가 되어 자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동서양 상좌부불교에서 여성을 위한 좁은 틈이 이렇게 조금씩 넓혀져 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시와 장소: 6월 30일 아란냐 보디 숲속 선원
(Aranya Bodhi Awakening Forest hermitage).
이 곳은 Jenner, CA 95450에 있다.
Jenner시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의 북쪽, 켈리포니아 주도인 새크라멘트의 서쪽 해안가인 소노마 카운티의 인구가 약 136 명인 작은 해안 도시이며 러시아 강 입구 근처의 태평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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