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른 바 '국정 농단'이라는 것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요...)
나는 '농단'이라는 말을 별 생각없이 그냥 흘려 들었는데 이 말은 아주 재미있는 고사를 지닌 성어 즉 '고사성어'임을 최근에 알았다. 정확한 한자 표기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물론이다.
'농단'은 '壟斷(언덕 농, 끊을 단)'이라고 쓰고 '깎아 세운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며 '재물이나 이익을 독차지함'을 비유한다고 한다. '농단'이 자료의 원문에는 용단(龍斷)으로 되어 있다. '원래 龍(용)자인데, 壟(농)과 같이 언덕이라는 뜻으로 쓸 때에는 ‘농’이라고 읽는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하>)
맹자는 기원전 4세기 말 약 수년간 제(齊)나라의 정치 고문으로 있었다. 제나라의 선왕(宣王)은 도무지 그의 진언(進言)을 채택하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맹자는 그 지위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것을 안 선왕이 시자(時子)라는 사람을 통하여, "나는 맹자께 집을 마련해 드리고, 만종(萬鐘, 1종은 여섯 섬 너 말)의 녹봉을 드려 제자들을 양성하게 하며, 여러 대부(大夫)와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본받게 하고 싶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맹자가 말하였다. "나는 돈이나 재산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부(富)를 원하는 것이라면 제나라 정치 고문의 신분으로 새삼 1만 종을 받겠습니까? 일찍이 계손(季孫)이 말하기를, '자숙의(子叔疑)는 이상하다. 자기가 정치를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곧 그만 두고 말 것이지, 어찌하여 또 자제에게 그 자리를 대신 물려주었는가. 어떤 사람인들 부귀를 원하지 않으랴마는, 그는 남을 밀어젖히고 부귀를 독차지한 것이다(私壟斷焉:사농단언)'라고 하였습니다. 또 옛날에는 시장에서 자기에게 남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과 바꾸었으며, 시장을 다스리는 관리가 있어 부정한 거래행위를 단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징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욕심 많은 장사치가 있어 높이 솟은 언덕[농단(壟斷)]을 차지하고는 시장 전체를 둘러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시장의 모든 이익을 독차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자를 비난하였으며 관리도 이 장사치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상인에게서 세금을 징수하게 된 시초였습니다." 맹자는 이익을 독차지하는 자숙의 처사나 욕심 많은 장사치의 소행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선왕이 제의한 1만 종의 봉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나라를 떠났다.(이상 '두산백과'에서)
기왕 내친 김에 더러 혹은 자주 쓰이는 고사상어 몇 가지를 찾아 그 유래를 알아보았다.
아래 글의 출처는 '두산백과' 등이며 한자 표기 중 일부는 편집자가 삽입하였다.
글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 주석은 편집자가 웹 등에서 수집한 자료를 편집한 것이다. 늘그막에 읽기 쉬우라고 굵은 글씨로....
옛날 이야기 읽는 셈 치고 조용하실 때 일독을 권한다. <편집자>
= 고사성어(故事成語)란? =
'고사성어'는 '옛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로, 여기서 말하는 '옛 이야기'에는 신화, 전설, 역사, 고전문학 작품 등이 포함된다. '고사성어'는 교훈(敎訓), 경구(警句), 비유(譬喩), 상징어(象徵語), 관용구(慣用句) 등이나 속담으로 사용되어 일상 언어생활에서의 표현을 풍부하게 해준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발생한 고사성어는 '어부지리(漁父之利)'(1) 처럼 4자 성어가 대부분이지만, 단순한 단어로서 예사롭게 쓰는 '완벽(完璧)'(2)이나 벼슬에서 물러난다는 '괘관(掛冠)'(3), 도둑을 뜻하는 '녹림(綠林)'(4) 등도 고사성어에 속한다. 또 흔히 쓰는 '등용문(登龍門)'(5), '미망인(未亡人)'(6)과 같은 3자 성어도 있으며, 아예 8자, 9자로 된 긴 성구(成句)도 있다.
한국에서 발생한 고사성어 역시 4자 성어가 많다.
그 출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역사서, <춘향전(春香傳)>, <구운몽(九雲夢)>과 같은 구소설, <순오지(旬五志)>(7)와 같은 속담집 등이다.
이 중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은 '오비이락(烏飛梨落)'(8), '적반하장(賊反荷杖)'(9), '초록동색(草綠同色)(10), '함흥차사(咸興差使)'(11), '홍익인간(弘益人間)' (12)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속담처럼 쓰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13), '언 발에 오줌누기'(14),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15) 등과 같은 말도 모두 한자(漢字)로 된 성어에서 나온 말이다. 또 '스승보다 낫다'는 뜻의 중국 고사성어 '청출어람(靑出於藍)'(16)을 한국에서는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는 뜻의 '후생각고(後生角高)'로 표현하여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중국 고사성어는 270 가지 정도이다. 이 성어들은 중국의 역사와 고전, 또는 시가(詩歌)에서 나온 말이 대부분이며, 그 전거(典據)만 해도 70 남짓한 문헌과 200명 정도에 이르는 인물이 관련되어 있다. '일망타진(一網打盡)'(17), '일거양득(一擧兩得)(18)', '천고마비(天高馬肥)'(19), '방약무인(傍若無人)(20), '배수진(背水陣)'(21), '조강지처(糟糠之妻)'(22), '오리무중(五里霧中)'(23), '철면피(鐵面皮)'(24), '천리안(千里眼)'(25) 등 쉽게 쓰는 말도 중국의 역사서에서 나온 성어이다.
또 '전전긍긍(戰戰兢兢)'(26), '대기만성(大器晩成)'(27), '자포자기(自暴自棄)'(28) 등은<논어(論語)>등의 고전에서, '고희(古稀)'(29), 청천벽력(靑天霹靂)'(30) 등은 시가(詩歌)에서 나온 성어이다.
서양의 고사성어 역시 신화, 역사, 문예, 종교 등에서 나온 말이 많으며, 이 중 더러는 금언(金言), 격언(格言), 명언(名言), 잠언(箴言) 등으로 높임을 받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이 인용된다.
'제왕절개(帝王切開)'(31),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32), '백일천하(百日天下)'(33) 등 한자어로 번역된 성어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34), '기하학에는 왕도(王道)가 없다'(35), '주사위는 던져졌다' 와 '루비콘강을 건너다'(36),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37) 등은 서양의 역사, 또는 역사적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어이다.
또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위험한 관계(Dangerous Liaison', '악의 꽃(Les Fleurs du mal)', '지킬 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 '25시(25th Hour)' 등의 작품명은 상징적인 성어로 변하여 많이 쓰인다.
이 밖에 '금단의 열매(Le Fruit Defandu)', '카인의 후예(Descendants of Cain)', '소돔과 고모라(Sodom and Gommorrah)', '쿠오바디스(Quo Vadis)'(38) 등은 성서에서, '판도라의 상자(Die Buchse der Pandora)'(39),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40), '시지푸스의 바위(41)' 등은 신화(神話)에서 나온 성어이다.
<주>
(1) 어부지리 : 출전<전국책(戰國策)>의 <연책(燕策)>장 조(趙)나라가 연(燕)나라를 치려 하였는데, 때마침 연나라에 와 있던 소진(蘇秦)의 아우 소대(蘇代)는 연나라 왕의 부탁을 받고 조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을 찾아가 이렇게 설득하였다. "이번에 제가 이 곳으로 오는 도중에 역수(易水, 이수이강, 중국 하북성의 강)를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민물조개가 강변에 나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쪼이고 있는데, 황새란 놈이 지나가다 조갯살을 쪼아 먹으려 하자 조개는 깜짝 놀라 입을 오므렸습니다. 그래서 황새는는 주둥이를 물리고 말았습니다. 황새는 생각하기를 오늘 내일 비만 오지 않으면 바짝 말라 죽은 조개가 될 것이다 하였고, 조개는 조개대로 오늘 내일 입만 벌려 주지 않으면 죽은 황새가 될 것이다 생각하여 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어부가 이 광경을 보고 황새와 조개를 한꺼번에 망태 속에 넣고 말았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려 하시는데 두 나라가 오래 버티어 백성들이 지치게 되면 강한 진나라가 어부가 될 것을 저는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소대의 이 비유를 들은 혜문왕은 과연 옳은 말이라 하여 연나라 공격계획을 중지하였다. 같은 뜻으로 방합(蚌蛤, 펄조개)과 도요새가 다투는데 어부가 와서 방합과 도요새를 다 거두어 가 제3자만 이롭게 했다는, '방휼지쟁(蚌鷸之爭)'도 있다.
(2) 완벽 : 출전 <사기(史記)><상여전(相如傳)>
조(趙)의 혜문왕(惠文王)은 세상(世上)에도 드문「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고귀(高貴)한 구슬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신하(臣下) 목현(木賢)의 애장품이었는데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강대국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조에 사신을 보내어 15성(城)과 「화씨지벽」을 바꾸자고 청했다. 이에 혜문왕(惠文王)은 걱정이 생겼다. 내주자니 소양왕이 받고도 15성의 약속을 모르는 척 할지도 모르고, 거절하자니 이를 구실 삼아 진이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왕은 중신 회의를 열었다. 이 때, 목현이 나와서 식객(食客, 세력 있는 대갓집에 얹혀 있으면서 문객 노릇을 하던 사람) 중 인상여(藺相如)라는 자가 지모와 용기(勇氣)가 있으니 그를 사자로 보내면 능히 난국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 하고 천거했다. 인상여는 즉시 진으로 가 지니고 갔던 화씨지벽을 일단 소왕에게 바쳤다. 구슬을 받아 쥔 왕은 "과연 훌륭하구나!" 라고 감탄하면서 좋아할 뿐 15성 이야기는 조금도 비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예기했던 인상여는,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고 속여 말하니 무심코 내주었다. 인상여는 즉시,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하고는 구슬을 빼내어 조국(趙國)에 돌려보냈다. 소양왕은 할 수 없이 인상여를 정중하게 놓아 보냈다. (3) 괘관 : 출전 <後漢書>전한(前漢) 때에 왕망(王莽)이라는 정치가는 '어진 사람'(賢人)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그는 그와 같은 인기를 이용하여, 썼던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어 漢(한)의 조정을 손아귀에 넣었다. 왕망이 아직 가면을 쓰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조정 관리 중에 봉맹(逢萌)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 무렵 황제의 외척인 왕망이 봉맹의 아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다. 당시는 죄와 원한이 가족에게까지 미쳤다. 봉맹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삼강(三綱) 곧 군신, 부자, 부부 등 세 가지 인륜 관계를 보존할 수 있는 기둥인 도의(道義)가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지금 도망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화가 미친다."
봉맹은 즉시 관리의 표상인 갓의 끈을 풀어, 동도(東都) 성문에 갓[冠]을 걸[掛]고,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요동(遼東)으로 도망하였다.(解冠掛東都城門 將家屬 浮海客於遼東)
(4) 녹림 : 출전 <漢書>
전한(前漢) 말기에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하여 천자(天子)가 되고, 국호를 신(新)이라 고친 다음 모든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개혁정책이 너무 급격하여 혼란만 빚었고, 백성은 극도의 생활고에 빠져 새 왕조를 원망하게 되었다. AD 14년(천봉 4) 왕광(王匡) ·왕봉(王鳳) 일당이 이들 난민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그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러자 관군에 쫓긴 마무(馬武) ·왕상(王常) ·성단(成丹) 등이 몰려와 함께 녹림산에 근거지를 차리고 마을을 공략하였는데, 이들의 세력이 몇 달 사이에 8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후 이들은 형주(荊州) 자사(刺使, 감찰관)가 이끈 관군 2만명과 싸워 크게 이기고, 세력이 커져 5만명이 되었을 때 유수(劉秀:光武帝)와 유현(劉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들과 합류하여 왕망을 위협하는 큰 세력을 이루었다. 녹림은 원래 산 이름이지만, 왕광의 무리가 굶주린 백성을 모아 이 곳을 근거지로 도둑질을 하였기 때문에 이 후부터 도둑의 소굴을 녹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5) 등용문 : 출전<후한서(後漢書)>의 <이응전(李膺傳)> 후한의 관리인 이응(李膺)은 퇴폐한 환관(宦官)들과 맞서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정의파 관료의 영수(領袖)로, 몸가짐이 고결하고 청백하여 당시 청년관리들은 그와 알게 되는 것을 등용문이라 하여 몹시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士有被其容接者 名爲登龍門) 여기에 나오는 등용문은, <이응전>의 주해(註解)에 따르면 황하(黃河) 상류에 용문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 근처에 흐름이 매우 빠른 폭포가 있어 그 밑으로 큰 고기들이 수없이 모여들었으나 오르지 못하였으며, 만일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된다고 하였다. 그 후 이 말은 과거에 급제(及第)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출세의 문턱에 서는 일을 말하게 되었다.
(6) 미망인 :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초(楚)나라의 영윤(令尹) 자원(子元)이 죽은 초 문왕의 부인을 유혹하기 위해 궁실 옆에다 건물을 짓고 은나라 탕왕이 시작했다는 '만의춤'(?)을 추게 하였다. 그 음악 소리를 듣고 부인은 울면서, “돌아가신 왕께서는 이 춤을 군대를 훈련하는 데 사용하셨다. 지금 영윤은 원수들을 치는 데는 생각이 없고 미망인의 곁에서 하고 있으니 이상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시종 하나가 이 사실을 자원에게 알리니 자원이 “부인은 원수를 잊지 않고 있는데 오히려 내가 잊고 있구나” 하며 군사를 동원하여 정(鄭) 나라를 쳤다고 한다. <노(魯)나라 장공(莊公) 28년조> * 그 해 노나라의 백희(伯姬)가 송공(宋公)에게 시집가게 되어 계문자(季文子)라는 사람이 후행으로 송나라에 갔다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성공은 위로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계문자가 성공과 송공을 칭송한 후 출가한 희의 앞날을 축복하자, 선대 선공(宣公)의 부인이자 백희 어머니인 목강(穆姜)이 “이번에 큰 신세를 졌습니다. 당신은 선대부터 지금까지 충성을 다하고, 미망인인 나에게까지 진력하여 주셔서 고맙기 그지없습니다.”고 하였다 한다. <노나라 성공(成公) 9년조> * 위(衛)나라의 정공(定公)이 병이 들자 공성자(孔成子)·복혜자(宓惠子)로 하여금 첩실인 경사(敬似)의 아들 간(衎)을 태자로 삼게 하였다. 10월에 정공이 죽고, 부인 강씨가 곡을 마치고 쉬면서 보니 태자는 아무런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부인은 이를 보고 식음을 전폐한 채 “저 못난 자식은 틀림없이 나라를 망칠 것이며, 먼저 미망인인 나를 학대하리라. 아, 하늘은 위를 저버렸는가?” 하였다고 한다. <노나라 성공(成公) 14년조> 이처럼 미망인이란 순장(殉葬, 왕이나 귀족 등이 죽으면 첩, 신하, 종 등을 함께 장사지내던 일)의 풍습에 따라 '남편이 먼저 죽은 부인'을 가리키던 말로 오늘날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논의가 있다.
(7) 순오지 홍만종(洪萬宗)이 숙종 4년(1678)에 지은 잡록으로 2권 1책. 보름(10旬+5五=15)만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으며, <십오지(十五志)>라는 이칭도 있다. 책머리에 김득신(金得臣)의 서(序)와 함께 실려 있는 자서(自序, 자기의 저작에 스스로 쓴 서문)에서 저자는 '병으로 누워지내던 중 그 적적함을 극복하기 위해 평소에 들은 여러 가지 말과 민가에 떠도는 속담 등을 기록하였다'는 제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 내용은 상권에 고사일문(古史逸聞) · 시화 · 양생술, 하권에 유현 · 도가 · 불가 · 삼교합론(三敎合論) · 문담 · 문집 · 별호 · 속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실려 있는 시화는 20여 항목인데, 전반부는 주로 대우(對偶, 쌍 혹은 대칭), 후반부는 해학을 곁들인 시일화(詩逸話)로 구성되었다. 또한 진복창(陳復昌, 조선 중기의 문신)의 <역대가>, 조식(曺植, 조선 중기의 학자)의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우리말로 된 가사 14편이 작품 위주의 간결한 평과 함께 소개되었다. 이 책의 끝부분에는 상당수의 속담이 한문으로 번역되어 실려 있어 조선시대 속담의 실태를 잘 보여준다.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 민족문화의 긍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관인문학(官人文學)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사실들을 찾아 기록하였다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8) 오비이락 : 출전 <순오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로 풀이되며, 아무런 관계도 없이 한 일이 우연히 다른 일과 동시에 일어나 오해를 받게되는 경우를 나타낸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이 엮은 <순오지>에 나오며, 한국에서 많이 쓰이는 한국 고사성어의 하나이다. 한국 속담에는 일이 잘 안 될 때는 안좋은 일이 겹친다는 말이 많은데, '소금 팔러 가니 이슬비 온다',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등이 이와 같은 예이며, 이 말은 모두 한국에서 만들어진 속담이다.
(9) 적반하장 : 출전 <순오지> 출전에서는 "적반하장은 도리를 어긴 사람이 오히려 스스로 성내면서 업신여기는 것을 비유한 말(賊反荷杖以比理屈者反自陵轢)"로 풀이되어 있다. 이처럼 적반하장은 잘못한 사람이 잘못을 빌거나 미안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성을 내면서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어처구니없는 경우에 기가 차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말이다. '손님이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한다'는 뜻의 주객전도(主客顚倒)·객반위주(客反爲主)와도 뜻이 통한다. 또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뜻으로, 나에게 책망을 들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나를 책망할 때 쓰는 아가사창(我歌査唱)도 같은 뜻이다. 적반하장과 비슷한 뜻의 우리말 속담도 여럿 있다. 제가 잘못하고서 도리어 성을 낸다는 속담 '방귀 뀐 놈이 성낸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오히려 남을 나무란다는 뜻의 '문비(門裨, 정월 초하룻날 악귀를 쫓는 뜻으로 대문에 붙이는 神將 그림)를 거꾸로 붙이고 환쟁이만 나무란다', '소경이 개천 나무란다',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니까 내 봇짐 내라 한다' 등이 그 예이다.
(10) 초록동색 : 출전 <순오지>
초색(草色)과 녹색(綠色)을 합하여 초록이라 하듯이 서로 같은 무리끼리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즉 명칭은 다르나 따져보면 한 가지 것이라는 말로서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가재는 게 편'이요, '솔개는 매 편'이요, '초록은 한[一] 빛'이라는 속담과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11) 함흥차사 : 출전 <축수편(逐睡篇, 저자 미상)>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
조선 태조 이성계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울분하여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 뒤, 태종이 그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보내지 않았으므로, 한번 가면 깜깜소식이라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12) 홍익인간 : 출전 <삼국유사>의 <고조선조>, <제왕운기>의 <전조선기> 단군신화에 나오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이자 대한민국의 교육법이 정한 교육의 기본이념.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의 아들 중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탐냈다.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홍익인간할만 하거늘,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삼천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니 이를 신시(神市)라 하였다”고 전한다.(이상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록) 이에 의하면 홍익인간은 환인이 환웅을 인간세상에 내려 보내면서 제시한 지침이었다. 『제왕운기』에서는 환인이 환웅에게 삼위태백으로 내려가서 홍익인간 할 수 있는지 그 의지를 물었고, 그런 지시에 응하여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13)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 출전 <순오지>
경전하사(鯨戰蝦死)라는 한자성어를 우리말로 고친 것으로 '강자(强者)들의 다투는 틈바구니에서 약자(弱者)가 화를 당함'을 비유한 말이다.
(14) 언 발에 오줌누기 : 출전 <순오지>
동족방뇨(凍足放尿)라는 한자성어를 우리말로 고친 것으로 '임시변통(臨時變通)으로 한 일이 나쁜 결과를 가져옴'을 비유하는 말이다. 미봉책(彌縫策)이라는 말과 뜻이 통한다.
(15)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 출전 <순오지>
담호호지(談虎虎至)라는 한자 성어를 우리말로 고친 것으로 '화제(話題)의 대상이 된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남'을 의미하는 말이다.
(16) 청출어람 : 출전 <순자(筍子>의 <권학편(勸學篇)> '푸른색은 쪽[藍]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라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출람(出藍)'이란 말도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원래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고 해야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의미가 갖추어지지만 일반적으로 줄여서 '청출어람'이라고 쓴다. 또 이러한 재주 있는 사람을 '출람지재(出藍之才)'라고 한다. 비록 제자일지라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스승을 능가할 수 있음을 강조한 순자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북조(北朝) 북위(北魏)의 이밀(李謐)은 어려서 공번(孔璠)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하였다. 그는 학문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 열심히 노력한 결과 몇 년이 지나자 스승의 학문을 능가하게 되었다. 공번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그를 스승으로 삼기를 청했다. 그러자, 공번의 친구들은 그의 용기를 높이 사고 또 훌륭한 제자를 두었다는 뜻에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칭찬했다. 우리 속담에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출람지재' '출람지예(出藍之譽)' 등과 함께 '청출어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17) 일망타진 : <송사(宋史)> <인종기(仁宗記)
송나라의 인종은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때에 명신인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주돈이(周敦頤) 등이 황제를 보필했다. 한편, 현사(賢士)들이 제각기 정론을 제기하게 되니 당파가 생기게 되어 자주 대신들이 바뀌게 되었다. 두연(杜衍)이 승상이 되었을 때에는 황제가 대신들과 상의하지 않고도 조칙(詔勅)을 내리는 것이 관례[이를 내강(內降)이라 함]였다. 그러나 두연은 정도(政道)에 어긋난다 하여 내강이 내려도 보류했다가 10여 장이 모이면 황제에게 도로 반송했다. 이 같은 두연의 행동은 성지(聖旨)를 마음대로 굽히는 것이라 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때에 두연의 사위 소순흠이 공금을 횡령하여 제사를 지내고 손님 접대에 탕진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두연을 못마땅하게 여겨 온 어사 왕공진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이를 엄중히 처단했다. 그리고는 손뼉을 탁 치면서 '일망타진했도다'라고 말했다 한다.
(18) 일거양득 : 출전 <진서(晉書)> <속석전(束晳傳)>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는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진(晉)나라의 혜제(惠帝) 때 저작랑(著作郞)을 지냈으며, 진사(晉史)를 편찬한 속석이 농업 정책에 관하여 진언하였다. 그는 이때 “위(魏)나라 때의 개척지인 양평(陽平) 지방으로 들어가 살게 했던 백성들을 다시 서쪽으로 이주시키자.”고 제의하였는데, 그 성과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백성들을 서주(西州)로 이주시킴으로써 변방 지역을 보충하고, 10년 동안 부세를 면제해 줌으로써 이주시킨 일을 위로합니다. 이렇게 하면 밖으로는 실제적인 이익이 있게 되고, 안으로는 관용을 베푸는 일이 되어 일거양득이 됩니다.”
이 밖에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조>와 <춘추후어(春秋後語)> 등에도 이에 관한 고사가 있다.
(19) 천고마비 : 두심언(杜審言)의 시,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
이 말의 원말은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로, 당나라 초기의 시인 두심언의 시에서 나왔다. 두심언은 진(晉)나라의 명장이고 학자였던 두예(杜預)의 자손이며, 대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이다.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을 떨쳐, 소미도(蘇味道), 이교(李嶠), 최융(崔融) 등과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고 불렸다. 다음 시는 당나라 중종(中宗) 때, 두심언이 참군(參軍)으로 북녘에 가 있는 친구 소미도가 하루빨리 장안(長安)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지은 것이다. 雲淨妖星落 구름은 깨끗한데 요사스런 별이 떨어지고 秋高塞馬肥 가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 馬鞍雄劍動 말 안장에 의지하여 영웅의 칼을 움직이고 搖筆羽書飛 붓을 휘두르니 격문이 날아온다 이 시는 변방의 정경과 당나라 군대의 빛나는 승전보를 전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라는 구절은 당군의 승리를 가을날에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추고마비'는 아주 좋은 가을 날씨를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한편,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보면, 이 말은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민족 흉노가 활동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해마다 가을철에 중국 북방 변경의 농경지대를 약탈하여 기나긴 겨울 동안의 양식을 마련했으므로,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天高馬肥]'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의 침입이 있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추고마비'란 말은 뜻이 변하여, 오늘날은 누구나 활동하기 좋은 계절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추고마비'보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을 더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20) 방약무인 : 출전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
위(衛)나라 사람인 형가(荊軻)는 성격이 침착하고 생각이 깊으며, 문학과 무예에 능하였고, 애주가였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청운을 품고 위나라의 원군(元君)에게 국정에 대한 자신의 포부와 건의를 피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연(燕)나라 및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니며 현인과 호걸과 사귀기를 즐겼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연나라에서 사귄, 비파(琵琶)의 명수인 고점리(高漸離)인데 이 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아 금방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 술판을 일단 벌여 취기가 돌면, 고점리는 비파를 켜고, 형가는 이에 맞추어 춤을 추며 고성 방가하였다. 그러다가 신세가 처량함을 서로 느껴 감정이 복받치면 둘이 얼싸안고 울기도 웃기도 하였다. 이때 이 모습은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傍若無人]' 보였다. 원래 방약무인은 아무 거리낌없이 당당한 태도를 말하였는데 변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무례하거나 교만한 태도를 표현할 때 인용된다. 이후 진(秦)나라의 정(政:훗날 시황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형가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진시황 암살을 부탁하였다. 형가는 단의 부탁으로 진시황 암살을 기도하였지만 관복만 뚫었을 뿐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진시황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암살하기 위해 진나라로 떠나기 전 그가 읊은 노래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찬데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不還]”라는 구절은 유명하다. 이 노래를 들은 이는 모두 눈을 부라리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말로 안하무인(眼下無人),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의 방벽사치(放辟邪侈)가 있다.
(21) 배수진 : 출전 <사기(史記)><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십팔사략(十八史略)> 〈한태조고황제(漢太祖高皇帝)>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제위에 오르기 2년 전인 204년, 명장 한신(韓信)은 유방의 명령에 따라 장이(張耳)와 함께 위(魏)나라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조(趙)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군사 20만 명을 동원하여 한나라가 쳐들어올 길목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조나라의 군사전략가 이좌거(李左車)가 재상 진여(陳餘)에게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한나라 군사를 공격하자고 건의하였으나 기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진여에 의해 묵살되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한신은 기병 2,000명을 조나라가 쌓은 성채 바로 뒤편에 매복시켰다.그러면서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조나라 군사는 우리를 좇아올 것이다.이때 조나라 누벽에 들어가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아라."하였다. 또한 병사 1만 명으로 하여금 먼저 가게 하고 정경의 입구에서 나와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하였다. 조나라 군사는 이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조나라 군사가 성에서 나와 공격하자 한신은 거짓으로 배수진까지 후퇴하였다.여러 차례 접전을 치르면서 한나라 군사는 배수진에서 우군과 합류하였다. 기세를 제압하였다고 판단한 조나라 군사는 한신을 맹렬히 추격하였다. 이때를 노려 한신은 매복시켜 둔 군사에게 조나라의 성채를 점령하도록 하였고,나머지 군사는 배수진을 친 곳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결사적인 항전에 지친 조나라 군사는 견디지 못하고 성채로 돌아와 보니 이미 한나라 깃발이 꽂혀 있었다.한신의 승리로 돌아간 것이다. 이처럼 '배수진'은 오랜 원정을 거듭해 조나라보다도 전력이 떨어진 한신의 전술에서 유래한 말이다.이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처럼 사생결단하는 정신 상태로 싸움에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등 뒤에 강물이 흐르니 싸움에 져서 죽든지 강물에 빠져 죽든지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움에 임한 것이다. 비슷한 말로 파부침선(破釜沈船:솥을 깨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 기량침선(棄糧沈船:군량미를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사량침선(捨糧沈船), 제하분주(濟河焚舟)가 있다.
(22) 조강지처 : 출전 <후한(後漢書)> <송홍전(宋弘傳)>
조(糟)는 지게미, 강(糠)은 쌀겨라는 뜻으로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고생한 본처(本妻)를 이르는 말이다.
처녀로 시집와서 여러 해를 같이 살아온 아내라면 모두 조강지처라 할 수 있다.
후한 광무제(光武帝)의 누님이 일찍이 과부가 되어 쓸쓸히 지내는 것을 보고 광무제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다시 시집을 보낼 생각으로 그녀의 의향을 떠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송홍 같은 사람이라면 시집을 가겠다고 하였다. 마침 송홍이 공무로 편전에 들어오자 광무제는 누님을 병풍 뒤에 숨기고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속담에 말하기를 지위가 높아지면 친구를 바꾸고 집이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 하였는데 그럴 수 있을까?" 하고 말하자 송홍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신은 가난할 때 친하였던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되고,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臣聞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광무제는 누님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조용한 말로 "일이 틀린 것 같습니다"라 했다한다.
(23) 오리무중 : 출전 <후한서(後漢書)>
환관과 황실의 외척이 세도를 부리던 후한 중엽에 이름 난 학자이자 시중의 고문관을 지낸 장패(張覇)는 그의 명성을 듣고 사귀기를 원하는 권문세가의 요청을 마다하고 고고하게 살아갔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완고함을 비웃었고, 얼마 후 그는 70세에 세상을 떴다. 그의 아들 장해 역시 <춘추(春秋)>> <고문상서(古文尙書)> 등에 정통한 학자여서 제자가 100여 명에 이르고 이름있는 학자들이 모두 그의 문을 두드렸으며, 세도가들도 그와 가까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때묻은 자들과 섞이기를 싫어하여 시골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조정에서는 그를 아껴 여러 차례 예를 다하여 맞이하려 하였으나 그는 병을 핑계로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장해는 학문만 잘한 것이 아니라, 도술에도 능하여 곧잘 5리에 걸쳐 안개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관서에 살던 배우(裴優)라는 사람도 도술로 3리에 걸쳐 안개를 만들 수 있었지만, 오리 안개를 배우고자 장해를 찾았으나, 장해는 오리 안개에 자취를 감추고 만나주지 않았다. 이리하여 '오리무중'이란 말이 생겼다. 그 후 관서 사람 배우가 안개를 일으켜 나쁜 짓을 저질렀다가 잡히자 장해에게서 그 도술을 배웠다고 했으므로 장해는 억울하게 2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옥중에서 그는 경적(經籍)을 읽고 상서의 주를 썼다. 뒷날 사실 무근함이 판명되어 풀려났고, 환제(桓帝) 때에 다시 초빙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고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24) 철면피 : 출전 <북몽쇄언(北蒙鎖言)>, <송사(宋史)> <조변전> 옛날 중국에 왕광원(王光遠)이라는 진사가 있었다. 그는 출세욕이 대단하여, 권력가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는 심지어 채찍질로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이를 개의치 않고 웃어 넘길 정도였다. 이런 그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광원의 낯가죽은 열 겹의 철갑처럼 두껍다(光遠顔厚如十重鐵甲)’라고 말했다. (북몽쇄언) 한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변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관리의 부정을 감찰하는 벼슬)가 되자 권력자건 천자(天子)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건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그 부정을 적발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철면어사(鐵面御史)라 불렀다.’(송사) 이처럼 철면피라는 말에는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뻔뻔스런 사람이라는 뜻 외에 강직한 것, 준엄한 것의 뜻도 있다.
오늘날에는 보통 염치를 모르는 뻔뻔스러운 사람이라는 한 가지 뜻으로만 쓰인다.
또 컴퓨터시스템에서 이용하기도 하였다.
(25) 천리안 : 출전 <위서(魏書)> <양일전(楊逸傳)>
천리 밖의 먼 곳을 보는 안력(眼力)이라는 뜻이다.
<위서(魏書)> <양일전(楊逸傳)>의 고사(故事)에 의하면, 위나라의 양일이 부하를 시켜서 끊임없이 정보를 모아, 먼 곳의 일까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보고 사람들이 '양일은 천리안을 가졌다'고 하였다 한다.
(26) 전전긍긍 : <시경(詩經)> <소아편(小雅篇)>,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
전전(戰戰)이란 겁을 집어먹고 떠는 모양을, 긍긍(兢兢)은 몸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소아편(小雅篇)>의 소민(小旻)에서 찾을 수 있다. 不敢暴虎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憑河 감히 걸어서 황허강을 건너지 못한다. 人知其一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지만, 莫知其他 그 밖의 것들은 알지 못한다. 戰戰兢兢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如臨深淵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한 것같이 하고, 如履薄氷 살얼음 밟듯이 해야 하네. 이것은 악정(惡政)을 한탄한 시이다. 이 시가 지어진 시기는 서주(西周) 말기였다. 당시는 씨족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왕정이 쇠락하여 주공(周公)의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때로 천하가 위험한 시기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의 이득과 손해에만 매달려 그것이 뒤에 큰 재앙이 될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조심성 있는 사람들만이 그 악정 속을, 깊은 연못가에 있는 것처럼 또는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불안에 떨며 조심한다는 뜻이다.(이상 <시경>)
증자(曾子)가 병이 있어 제자들을 불러 말하였다. 내 발을 펴고 내 손을 펴라. <시경>에서는 ‘매우 두려운듯이 조심하고, 깊은 연못에 임한 것같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은 것같이 하라’고 했다. 지금 이후로 나는 그것을 면함을 알겠다(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이상 <논어>)
<시경>과 <논어>의 '전전긍긍'은 스스로가 자신을 반성하며 두려워하는 좋은 의미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요즈음에는 그 뜻이 전이되어 부정적 의미로 이해된다. 즉 죄나 잘못을 저질러놓고 그것이 발각될까봐 두려워한다거나 어떤 사건의 여파가 자신에게 미칠까 불안에 떠는 경우 등에 흔히 쓰인다.
(27) 대기만성 : 출전 <노자(老子)> <41장>
노자(老子) 이 장에서 옛글을 인용하여 도(道)를 설명하였는데 "매우 밝은 도는 어둡게 보이고,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다. 가장 평탄한 도는 굽은 것 같고, 가장 높은 덕은 낮은 것 같다. 몹시 흰 빛은 검은 것 같고, 매우 넓은 덕은 한쪽이 이지러진 것 같다. 아주 건실한 도는 빈약한 것 같고, 매우 질박한 도는 어리석은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또 "그러므로 아주 큰 사각형은 귀가 없고(大方無隅),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大器晩成). 아주 큰 소리는 들을 수 없고(大音希聲), 아주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大象無形). 왜냐하면 도는 항상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이므로 무엇이라고 긍정할 수도, 또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보듯 만성(晩成)이란 본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로,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 강하다. 그런데 후일 이 말이 '늦게 이룬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비롯된 듯하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이름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는 최림(崔林)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는데, 외모도 빈약하고 출세가 늦어 친척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였다. 하지만 최염만은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큰 종이나 큰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형이다.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틀림없이 네가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최림은 후일 천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나이 들어 성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28) 자포자기 : 출전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 상(上)
위 출전에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로를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진리를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진리를 행할 수 없다. 말하자면 예의(禮義)를 비방하는 것을 '스스로를 해치는 것[自暴]'이라 하고, 내 몸이 인(仁)에 살고 의(義)를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를 버리는 것[自棄]'이라 한다.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리고 행하지 않으니, 슬프다(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자포'는 예의를 헐뜯기만 하는 무리이고, '자기'는 인의(仁義)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인간의 도리를 망각한 자와는 상종을 말라는 경고이다. 본래 맹자가 인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철학적 성격을 띤 말이니 지금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오늘날에는 절망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의 뜻으로 사용된다.
(29) 고희 : 출전 <곡강시(曲江詩)>
희수(稀壽)라고도 한다.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유래한 말이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짧아 60세의 환갑에는 큰 잔치를 열어 장수를 축하했는데, 70세의 고희연(古稀宴)도 77세의 희수연(喜壽宴), 88세의 미수연(米壽宴)과 더불어 크게 열고, 시문·서화 등의 작품을 남겨 기념하기도 하였다.
(30) 청천벽력 : 출전 <검남시고(劍南詩稿)><9월4일 계미명기작(九月四日鷄未鳴起作)>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는 금(金)나라가 남침했을 때 이민족(異民族)에 대해 끝까지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한 철저한 항전주의자였다. 65세 때에 향리에 은퇴하여 농촌에 묻혀 지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약 1만 수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 사상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히며, 당시풍(唐詩風)의 강렬한 서정을 부흥시킨 점이 최대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청천벽력'이란 말은 육유의 시(오언절구)의 끝구절에 나온다. 放翁病過秋 방옹이 병으로 가을을 지내고 忽起作醉墨 홀연히 일어나 취하여 글을 쓰니 正如久蟄龍 정히 오래 움츠렸던 용과 같이 靑天飛霹靂 푸른 하늘에 벼락을 치네. 방옹은 육유의 호(號)이다.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 끝나갈 무렵인 음력 9월이다. 여름에서 늦가을까지 병마에 허덕인 육유는 어느 날 병을 이겨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치 술에 취하듯 흥겹게 붓을 놀리려 하지만 여전히 몸은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이 시의 분위기이다. 이 시에서 '용(龍)'은 시인 자신을 비유하며, 그 기세는 하늘로 올라갈 때 치는 우레와 같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필치(筆致)를 가리켜 '푸른 하늘에 벽력을 날린 듯하다'고 표현했다. 이 시에서의 '청천벽력'은 붓놀림의 웅혼함을 비유하고 있다.
오늘날 이 말은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처럼 '뜻밖의 큰 변'을 비유하여 쓰인다.
(31) 제왕절개 (Cesarean section) :
'제왕절개'라는 명칭은 독일어인 카이저슈니트(Kaiserschnitt)의 직역이며, 어원은 라틴어인 섹티오 카이사레아(sectio caesarea)에서 유래하는데, 이 독일어의 번역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황제가 복벽절개에 의해 태어났다는 데에서 유래한다'는 설과, '벤다는 것(caesarea), 즉 임신자궁을 절개한다는 뜻에서 온 중복어(重複語)'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왕절개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수술을 받은 산모의 대부분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에 들어와 방부술(防腐術)이 발달되면서 산모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
(32) 태산명동서일필 :
'세상을 떠들썩하게 움직이는데 나타난 것은 고작 쥐 한 마리'라는 뜻으로 '요란하게 일을 벌였으나 별로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이 성어는 로마의 계관시인(桂冠詩人, 고대 그리스에서 명예로운 시인이 월계나무 가지를 머리에 쓴 데서 기원)이었던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가 그의 시에서 "산들이 산고(産苦) 끝에 우스꽝스러운 생쥐 한 마리를 낳았다.(Parturiunt montes, nascetur ridiculus mus.)"라고 한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의역(意譯)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3) 백일천하(Les cent jours) : 1815년 3월 20일 엘바섬(Elba Island)에서 빠져나온 나폴레옹이 파리에 들어가 제정(帝政)을 부활한 뒤부터 6월 29일 워털루(Waterloo)전투에서 패배하여 퇴위한 때까지 약 100일간의 지배를 지칭하는 말이다.
1814년 4월 나폴레옹이 동맹군에 패배한 뒤 프랑스에서는 왕정(王政)이 다시 실현되어,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에 유배되었으나, 1815년 3월 1일 니스 남쪽의 주앙만(Juan灣)에 몰래 상륙하였으며 옛 부하였던 농민의 구원으로 파리에 돌아와, 다시 제위(帝位)에 올랐다. 나폴레옹은 뱅자맹콩스탕(Benjamin Constant, 프랑스 수필가 정치가)에게 새 헌법을 기초하게 하고 양원제 의회를 설치, 책임내각제를 제정하였다. 이에 대해서 프로이센((Preussen, 유럽 동북부와 중부에 있었던 지방 및 그 지방에 있었던 나라로 '프러시아'라고도 함)·오스트리아·러시아·영국 등 동맹국들은 웰링턴(A. W. Wellington) 휘하에 20만 명이 넘는 대군를 집결시키고,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백일 동안의 재위 끝에 나폴레옹은 또다시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아프리카 대륙 서쪽 기슭에서 약 1,900km 떨어진 남대서양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 섬)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34)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
라틴어로 "아르스 롱가 비타 브레비스(Ars longa, Vita brevis)"라고 표기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Hyppocrates)의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의사인 히포크라테스가 왜 예술(藝術)과 인생(人生)에 대한 언급을 했을까?그리고 이 격언의 뜻이 우리가 통상 아는 것처럼, "예술작품의 생명은 오래가고, 거기에 비해 인생은 보잘 것 없다."라는 것일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 따르면 의술(醫術)은 문학, 미술, 음악과 같은 범주에 있으며 모두 제작 혹은 기술(技術)과 관련된 장르이다. 현대에는 예술과 의술을 분리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의술이 인간의 육체를 조절하듯 비극이나 희극과 같은 예술작품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의 기능을 가진다고 보았다.
위의 격언을 영어로 표현하면 "Art is long, Life is short"가 되는데, 여기서 '아트(Art)'는 '예술(藝術)'이라기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단어 '아르스(Ars)'가 지닌 원래 뜻 '기예(技藝)'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 아트(art)에는 예술이라는 뜻도 있지만 '인공적(arttificial)'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인공(人工)', '기법(技法)'이라는 뜻도 있다. 요컨대 히포크라테스 당대의 의술은 예술과 기술이 합쳐진 '기예'의 범주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은 정확히 '의술(醫術)은 길고 인생은 짧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가 술회(述懷)한 것은 '의술이나 예술은 영원하고 거기에 비해 인생이 부질없다'는 것이 아니라 '의술(더 정확히 말해 내과 처방이나 외과수술 같은 것)을 배우는 길은 끝이 없고, 학문적 성과를 이루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다'는 것을 한탄(恨嘆)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5)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 : 기하학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이 계절적으로 범람한 뒤 전답의 경계를 다시 측량해야 했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라 하는데, 이것을 학문적으로 조리를 세운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유클리드(Euclid)라고 한다. 평면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의 업적은 열세 권으로 되어있는 기하학 원본으로 묶어져 있으며, 이것은 당시의 권위있는 교과서였다. 유클리드는 당시의 이집트 왕 프트레마이오스 1세의 초빙을 받고 강의를 했는데, 왕은 그 내용의 방대함을 보고 놀라, "기하학을 속성으로 배우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유클리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하학에 왕도는 없습니다." 학문의 권위를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학문, 특히 자연과학과 같은 엄밀한 이론을 토대로 하는 세계에서는 어떠한 속세적인 권력도 통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면에서는 정확한 얘기라고는 할 수 없다. 좋은 교육시설을 갖춘 곳에서 유능한 교사에 의해 주어지는 교육이, 불충분한 시설과 무능한 교사에게서 배우는 것보다는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학문에 있어서도 왕도, 즉 세속적인 권력 혹은 돈의 작용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상적인 교육이란 오로지 학도들에게 왕도를 걷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36) '주사위는 던져졌다'와 '루비콘강을 건너다' :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alea jacta est)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1월 12일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면서 했던 말이라고 알려진 문장이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Rubicon River, 이탈리아 북부의 강)을 건너면 당시 로마의 국법을 어기는 것이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내전으로 치닫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말을 사용했다고 하며 그 이후로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의미할 때 이 어구를 인용한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리스 희극작가 메난드로스(Menandros)의 작품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37)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 Omnes viae Romam ducunt.)'는 말은 17세기의 프랑스 작가 라 퐁텐(J. de La Fontaine)의 〈우화〉에 맨 처음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1391년 영국 역사가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가 처음으로 썼다고도 한다.
이 말은 '로마와 길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로마인은 '길은 직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길이 직선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산에 굴을 뚫기도 했고, 골짜기에 높은 다리를 놓는 어려운 공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닦은 길의 전체 길이는 3세기 말의 자료에 따르면 8만 5천km에 이른다. 길이를 보면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도로 건설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행해졌다. 또한 병사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38) 쿠오 바디스 :
'쿠오 바디스'는 성서를 바탕으로 쓴, 폴란드의 헨리크 시엔키비치(Henryk Sienkiewicz)의 노벨평화상 수상한 소설 제목이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Quo Vadis, Domine?'로 '어디 가시나이까, 주여?'라는 뜻이다. 이 말은 사람들이 기로(岐路)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할 때 한탄조로 내뱉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줄거리) 로마 황제 네로(Nero Claudius Augustus Germanicus)는 정치는 돌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멋대로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사도 베드로나 바울을 중심으로 하여 조용히 신앙을 넓혀 가고 있다. 귀족들은 황제를 두려워하며 그저 아첨만 할 따름이었다. 그 신하들 가운데 페트로니우스는 황제 자신도 만만히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조카인 비니키우스가 리기아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리기아는 열렬한 크리스천이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조카를 위해 네로에게 부탁하지만 오히려 일은 더 복잡하게만 되었다.
네로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남몰래 로마에 불을 지르고는 불타오르는 로마를 보면서 시를 읊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탄로나게 되니까 황제는 페트로니우스를 시샘하고 있는 티게리누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방화죄를 크리스천에게 돌리려고 했다. 감옥은 수천 명의 기독교인으로 만원이었다. 리기아도 그녀의 충실한 종인 거인 우르수스도 붙들렸다. 피에 굶주린 국민 앞에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신도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죽었다. 리기아는 사나운 들소에게 찢겨 죽게 되었지만, 우르수스가 나서서 들소와 싸워 이겼다. 감동한 사람들의 청원으로 리기아는 구원을 받게 된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고 베드로도 바울도 순교한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었다. 네로는 이치에 맞지도 않는 이유를 만들어 신하인 귀족들을 하나씩 죽였다. 끝내는 페트로니우스조차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네로 황제 또한 망할 때가 오고 말았다. 군대의 반란이 계속되고,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네로는 목을 찌르고 죽었다. 사도 베드로의 최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베드로는 박해를 피하여 캄파니아 평원까지 왔을 때 찬란한 빛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였다. 베드로는 땅에 엎드려서 '쿠오 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다. 주는 대답했다. '네가 다시 한번 십자가에 매달리리라.'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곧 로마로 되돌아가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
(39) 판도라의 상자 :
'판도라의 항아리'라고도 한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여성으로 제우스(Zeus)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로부터 불을 얻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헤파이스토스(Hephaitos)를 시켜 진흙을 빚어서 만들게 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판도라가 '온갖 불행을 가두어 둔 상자'를 호기심에 못 이겨 여는 바람에 인류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판도라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여기로...)
(40)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Freud, Sigmund)가 만든 정신분석학 용어로, 아들이 동성(同性)인 아버지에게는 적대적이지만 이성(異性)인 어머니에게는 호의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성(性)적 애착을 가지는 복합감정이다. 어머니에 대한 성적 애착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갖는 욕망을 모방하는 것인데, 정신 발달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프로이트가 이 용어에 인용한 '오이디푸스'라는 용어는 그리스 신화 에서 비롯한다.
(41) 시지푸스의 바위 :
시지푸스(Sisyph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서 코린토스(Korinthos, Corinth) 시(市)를 건설한 왕이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化身)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시지푸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Sres)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지푸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지푸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Hades)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막상 코린토스에 가서는 저승에 돌아오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Hermes)가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는 저승에서 벌(罰)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힘들게 정상에 굴려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가 이 벌을 받은 정확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그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여행하는 이들을 살해한 벌이라고도 한다.
<끝>
(읽으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재미없을 수도, 재미있을 수도....
약 30여분의 시간을 할애했지만 난 후자임.
좀 공부가 되었습니다.
보다가 중단 ㅋ
이걸 다 읽으셨다고요 아이쿠 머리가 ////
좋은 정보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머물다 갑니다
당췌 넘 길어서 못읽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