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7일
조선 중기 문신 심사손(沈思遜)묘 도굴 사건 발생
조선 중기 문신 심사손 묘의 훼손 당시 모습.
2009년 7월 17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 중턱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문신 심사손(沈思遜·1493~1528)의 묘가 파헤쳐진 것이 발견됐다. 명백한 도굴 현장이었다. 봉분이 절반 이상이 무너지고, 묘역에 가로 60㎝×세로 120㎝×깊이 60㎝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심사손이 묻힌 개화산 기슭은 풍산 심씨 집안의 묘 50여기와 석인상 등이 모여있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2584㎡·781평)이다. 심사손은 비변사 낭관 등을 지내며 북방 오랑캐 정벌에 공을 세운 인물로, 오랑캐를 섬멸하다 목숨을 잃었다. 심사손의 아버지 심정(1471~1531)은 중종반정의 주역 중 한 명이며, 아들 심수경(1516~1599)은 대사헌을 지냈다. 훼손된 심사손의 묘 인근에 있는 이들의 묘는 무사했다.
심사손의 묘는 400년 넘게 보존돼오다가 처음으로 파헤쳐진 까닭에, 무엇이 도굴됐는지 확인하기 힘들다. 풍산심씨 대종회 심현종(沈鉉鐘·64) 총무이사는 “묘 앞에 석인상까지 세운 것을 보면 분명히 ‘보검’ 같은 임금의 하사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덤 앞에 석인상을 세우는 풍습은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묻힌 사람의 사회적인 위세를 나타낸다. 이번에 사건이 난 묘역도 묘에 따라 문신과 무신을 형상화한 석인상이 서 있다.
전문가들도 ‘부장품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조선 중기 사대부들의 관습에 따라, 심사손도 회곽묘(灰槨墓)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목관 주위 6면을 석회를 발라 밀봉하는 구조다. 이 경우 유해뿐 아니라 부장품이 거의 손상 없이 보존된다.
비슷한 시대에 살다 간 사대부의 무덤과 비교하면 그런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지난 1997년 경북 영주에서 발견된 김흠조(金欽祖·1461~1528) 부부 묘에서는 의복 66점과 분청사기 등 유물 30점이 나왔다. 당대 유명 사대부들이 쓴 만사(輓詞·고인의 이력과 선행을 칭송하며 친분관계를 표시하는 글) 19점도 출토됐다. 김흠조는 충주목사와 장례원 판결사 등을 지낸 문신으로, 심사손과 동시대 인물이다.
심사손의 묘를 비롯해 이 묘역에 있는 조선시대 묘 4기와 석물·신도비 등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이다. 즉시 서울 강서경찰서가 수사를 맡았지만, 지문이나 신발 발자국 같은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않았다.
한편, 풍산심씨 종친회에서는 9월 중순, 추석을 앞두고 심사손의 직계 후손 8명이 나서서 심사손의 무덤을 복원한 뒤 조상들께 예를 갖춰 축문을 읽는 ‘산신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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