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년간의 소련 체제가 흔들리던 1980년대 말, 길거리 10대 깡패들의 이야기를 다룬 TV 시리즈 '그 녀석의 말, 아스팔트 위의 피''(Слово пацана, Кровь на асфальте, 이하 '그 녀석의 말')가 연말 러시아 안방극장을 강타했다.
러시아의 드라마·영화 온라인 포탈 사이트인 '키노 테아트르'(kino-teatr.ru)와 키노 메일(Kino Mail.ru) 등에서 '2023년 최고의 TV 시리즈물'로 뽑힌 드라마는 '그 녀석의 말'이었다. 조라 크리조프니코프(Жорa Крыжовников)가 감독한 이 시리즈 물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러시아 OTT)인 '윙크'와 '스타트', TV 채널 'NTV'를 통해 지난 11월 9일부터 이달 말까지 방영됐다. 전 8편.
러시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스타트(위)와 '그 녀석의 말' 포스터
이 드라마는 1970년대 타타르스탄자치공화국의 수도 카잔에서 나타난 10대 미성년자 깡패조직을 뜻하는 '카잔 현상'을 모티브로 삼았다. 시대적 배경은 그보다 10년 정도 늦은,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개방)정책으로 혼란에 빠진 1980년대 후반으로, 카잔 10대 조직들의 의리와 삶을 다뤘다. 원전은 '카잔 현상'을 파헤친 로베르트 가라예프의 책 '그 녀석의 말, 1970년대~2010년대 타타르스탄 범죄조직(Слово пацана. Криминальный Татарстан 1970–2010-х)이다. 방영 첫 회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그 녀석의 말' 본방에 수백만, 수천만명을 끌어들였다. 가볍게 TV 드라마의 모든 기록을 깨뜨렸다.
이 드라마의 인기 수준을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마지막 2편의 내용이 인터넷에 유출되자, 작가와 감독은 시나리오를 급히 수정하고 일부 분량을 다시 촬영했다. 언론들이 원본과 수정본을 비교하며 그 차이를 설명해줄 정도였다.
'그 녀석의 말' 드라마의 한 장면/스타트 홍보영상 캡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소련 전역을 휩쓸고, 체제가 흔들리던 1980년대 말. 미혼모 밑에서 자란 똑똑한 10대 안드레이는 길거리에서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부유한 집안 출신인 친구 마라트와 어울리며 길거리 폭력배로 변한다. 10대 깡패 조직의 하나로 '뒷골목 세계'에 뛰어들어 세를 키운다. 기존의 성인 범죄 조직을 부수고, 또래들과 경쟁하며 그들만의 조직 문화와 세계를 만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뒷골목의 폭력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친구와의 의리다.
현지에서는 30~40년 전의 깡패 이야기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의아해하며 그 현상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많은 평론가들은 '그 녀석의 말' 방영 시점에 주목했다. 러시아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과 그에 따른 서방의 가혹한 제재 조치들로 또다시 '한 시대의 끝'에 다가선 듯한 '불안 심리'를 제대로 건드렸다는 해석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영화 '리틀 베라'(Маленькая Вера, 1988년작 바실리 피줄 감독) 속 여성 주인공과 같은 캐릭터가 '10대 깡패'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리틀 베라'가 페레스트로이카 여성 해방의 상징이었다면 '그 녀석의 말'은, 대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난 '이 시대의 영웅'이라는 식이다. '리틀 베라'는 당시 소련 사회에 범람하던 범죄과 매춘, 가정 폭력 등 감춰진 치부들을 과감하게 드러낸 첫 영화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의 상징적인 영화 '리틀 베라' 포스터/사진출처:위키피디아
평론가 알렉산드르 골루브치코프는 "'그 녀석의 말'의 흥행은 젊은 세대가 오랫동안 그런 폭력세계의 영화를 보지 못한 탓이 크다"며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우정과 의리, 무언가에 저항하는 심리,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애잔한 느낌 등을 던져줬다"고 평했다.
일간 이즈베스티야지의 영화 전문가 세르게이 시체프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빼앗기고, 피해를 보고, 가난하다고 느낀다"며 "드라마속 일화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대와 연결되어 있을 지언정, 젊은 관객들이 쉽게 드라마속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이 드라마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 시절의 '리틀 베라'와 같은 상징적인 캐릭터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그 녀석의 말' 장면들/캡처
뒤늦게 '옥의 티'도 나왔다.
모스크바의 한 법원은 25일 드라마에서 '카메오'로 조직폭력배 역할을 맡은 세르게이 바자노프를 살인 혐의로 2개월간(2024년 2월 20일까지) 구속했다. 그는 지난 2011년 모스크바에서 한 기업가를 살해하고 거액을 빼앗은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살인 사건에 연루된 4명중 한명이라고 한다.
한편, '2023년 올해의 영화'로는 첫 우주 촬영영화 '브조프'(도전, 클림 쉬펜코 감독)와 가족용 오락 영화 '체부라쉬카'(드리트리 디아첸코 감독)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