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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묵상글 들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 그렇습니다. 그러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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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18주 수요일-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
오늘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공동체적인 열등감에 빠져
메뚜기 같다고 자신을 비하하고 자기들은 이방인보다 약하니
싸움도 전에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며 패배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열등함과 열등감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객관적인 사실로서 열등한 것이 사람에게는 다 있고,
민족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키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크다거나
이방인의 군대가 이스라엘보다 숫자적으로 많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기에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이 열등한 것은 분명하지만
열등감은 아주 나쁜 것이고 그래서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며
패배주의에 빠져서는 더더욱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감정이란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는 천하를 다 가진 것처럼 좋다가도
뭐 하나 잘못되면 기분 전체가 잡쳐버리고 그래서 기분 잡쳤다고 하지요.
열등감도 감정이기에 전체를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키가 작다면 키만 작은 것일 뿐 존재가 열등한 것이 아닌데 미성숙 할 때는
키 때문에 존재적인 열등감을 가지게 되고 작은 키 콤플렉스도 가지게 되어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자신감 있게 뭣을 하지도 못하게 하지요.
아무튼, 열등감이란 열등한 것 한두 가지 때문에 존재 전체가 열등하다거나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열등감의 미숙함을 갖게 되는 걸까요?
미성숙은 대체로 교만에서 비롯되고
열등감의 미숙함도 우월감의 미숙함과 마찬가지로 교만 때문입니다.
그러니 겸손하면 할수록 성숙하고 그래서 자신의 단점이나 장점을
그대로 인정하며 그로 인해 존재가 위축되지도 우쭐하지도 않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자는 이방인임에도
매우 겸손하고. 매우 겸손하기에 매우 성숙합니다.
자기와 딸이 강아지 취급을 받을 때 '그렇습니다'라고 하고
그러나 곧 이어서 '그러나'라고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과 성숙함은 '그렇습니다'와 '그러나'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럼에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 사랑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자비를 포기치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스라엘의 열등감의 문제는
단지 인간적인 미성숙의 문제만이 아니고,
영적인 결함이나 미성숙이 더 문제입니다.
설사 모든 면에서 자기들이 이방인들보다 열등하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지요.
모든 면에서 우리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함께 계십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겸손과 믿음을,
그러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의 겸손과 믿음을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여자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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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15,21)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 이방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끝까지 간청하였고, 마침내 응답을 얻어냈습니다. “믿음과 겸손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겸손함이 배어있는 믿음만이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함께야).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을 잘 찾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원의에 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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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는 주님 앞에서 참으로 찹찹해지기도 합니다.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 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낳았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한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시고,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이 놀라운 침묵 안에 완성되어 사랑의 외침을 들어야할 일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의 침묵 앞에서 견고해지게 하소서!
거부당함 속에서도 새로워지게 하소서!
더 큰 소망을 품고, 믿음과 겸손으로 끝없이 간구하게 하소서.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놀라운 사랑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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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가나안 땅에서 일어난 엇갈린 운명
시나이 광야를 거쳐 요르단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 파란 광야에서 드디어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별로 한 사람씩 열두 명이 뽑혀 사십 일 동안 정찰을 하고 돌아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보고 내용이 엇갈렸습니다. 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이었다는 것과, 그 땅에는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정찰 보고 내용이 같았지만, 열한 명은 그 가나안 땅에 사는 원주민들이 힘이 세게 보였고 거창한 성채에서 살고 있었다고 보고한 반면에 오로지 유다 지파에서 나온 칼렙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가 차지할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원주민들과의 충돌이 두려웠던 열한 명은 겁을 먹은 나머지 정찰한 땅에 대하여 거짓으로 나쁜 소문까지 퍼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진노하셨고 정찰했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광야에서 사십 년을 더 고생하도록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 뒤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서 새로운 신앙을 갖추게 되면 그제서야 새로운 땅으로 들여보내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습니다. 제자들 열두 명 가운데 한 명만이 일찌감치부터 딴 마음을 먹고 재빠르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나머지 열한 명은 스승께 대해 우직스럽게 충실하고자 하였으나 문제는 그 믿음이 여물지 않고 어리버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작정을 하시고 티로와 시돈이라는 해안가 이방인 지역으로 넘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귀든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이례적일 만큼 극성스럽게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졸랐습니다.
이미 제자들의 미적지근한 믿음을 따끔하게 깨우쳐줄 본보기를 찾고 계셨다는 듯이, 예수님께서는 부러 그 여인과 밀고 당기기를 하시면서 믿음을 떠보고자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그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으며 주인은 그 부스러기를 막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떨어뜨려 주기도 한다는 듯이 끈질기게 버티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가나안 여인의 당당한 믿음을 확인하시고 그 여인의 딸을 낫게 해주셨으며, 제자들은 그 가나안 여인으로부터 믿음의 본보기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노예근성이 배어있는 무리들을 데리고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며, 믿음이 여물지 않은 제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 굳건해지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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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고대 로마 제정기의 스토아 철학자이며,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세네카를 아십니까? 그는 비록 자신의 제자이고 황제이지만, 옳지 않은 길로 가면서 백성을 힘들게 한다고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올바른 길로만 가려 했고, 그래서 늘 다른 이에게 떳떳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네카에게 와서 지금 누가 당신을 비난하고 있다고 고자질했습니다. 그러자 세네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 제정신으로 저를 헐뜯었다면 혹 화를 내겠지만, 단지 마음이 병들어서 저를 헐뜯는 것이라면 성을 내서 무엇하겠습니까?”
사고를 당한 어떤 사람이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날 따라 응급환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아무도 다가와서 조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환자는 화를 낼까요? 내지 않을까요? 너무 아파서 힘든데, “다른 사람 먼저 모두 봐주신 다음에 천천히 저를 봐주세요. 바쁜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사실 이렇게 화를 냈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니까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프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세네카는 아프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세네카가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남의 말과 행동에 아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마귀에 들려서 힘들어하는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서운한 말이 아니었을까요? 요즘 시대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내일 뉴스 1면에 큼직하게 이런 기사가 떴을 것입니다.
‘늘 사랑을 외치던 예수, 마귀 들린 딸로 인해 힘들어하는 불쌍한 가나안 여인에게 막말을 하다!!!’
어쩌면 이 여인을 시험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떤 말과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함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서 고쳐 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에, 상처가 되는 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딸만 고쳐 준다면, 어떤 막말을 하셔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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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동은 눈에 보이지만 그 행동의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카를 구스타프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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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 분노하는 나의 쪼잔함.
방에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파리의 ‘앵앵’ 거리는 소리가 너무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파리의 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파리를 쫓을 생각으로 창문을 열고 그쪽으로 유도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파리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또 들어왔습니다. 화가 나서 더 신경질적으로 파리 잡기에 집중했습니다.
잠시 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파리의 앵앵거리는 소리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어떤 고통과 시련을 참을 수 있을까?”
파리의 앵앵거림이 제 삶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신경이 쓰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폭력적으로 변하는 제 모습에 고통과 시련을 참지 못하는 저의 성급함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분노하는 저의 쪼잔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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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일미사를 봉헌하면 ‘신자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대부분 봉사자가 기도문을 읽고, 교우들은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를 인도하고, 신자들의 기도가 끝나면 그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청하면서 마무리합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자들의 기도 내용을 무심히 듣고 지나가곤 합니다. 신자들의 기도가 끝나면 예물봉헌과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기도에 저의 감정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몇 주 전입니다. 한 자매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하면서 다 읽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가족들의 건강이었습니다. 기도의 내용 중에 ‘치매로 고생하는’이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그 부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셨고, 신자들의 기도는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그날 신자들의 기도는 봉사자로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가족 중에 치매로 고생하는 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문을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날 신자들의 기도는 단순히 미사의 한 부분이 아니었고,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께 청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미사를 봉헌하면서 마음이 울컥했던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지난 어머니날이었습니다. 미사를 잘 마치고, 어머니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기도문 중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작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잠시 멈추었습니다. 곧 마음을 추스르고 기도문을 읽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미사에 함께하신 많은 교우들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글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 글은 감동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글과 마음이 따로 가면 글은 단순한 글로 남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에도 마음이 울컥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면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축성된 성혈과 성체를 모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였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많은 이의 죄를 사하기 위한 나의 피다.’ 그날은 큰 감동으로 다가 왔습니다. 부족한 제가 성체와 성혈을 모시고 기도한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부족한 제게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에 마음이 함께하면 신앙의 신비가 됩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에 습관적으로 참례하면 전례가 됩니다.
오늘은 ‘본당사제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축일입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습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던 신부님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기차역이 없던 아르스에 새롭게 기차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르스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찾아온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고, 그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했고,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을 만난 많은 교우들은 진심으로 회개하였고, 영적인 기쁨을 얻었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부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인의 진심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여인의 겸손은 예수님께도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파 누워있는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과 근심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두려움과 근심 덩어리입니다. 사랑과 희망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집트에서 위대한 일을 하신 분,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잊었네. 함족 땅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갈대 바다에서 이루신 두려운 일들을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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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戰士
- 영적탄력靈的彈力과 믿음 -
참 역설적인 존재가 인간입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런저런 전쟁입니다. 아마 인류가 시작되면서 함께 한 전쟁같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엔 필히 싸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마 우리 한국 사회보다, 한국정치보다 역동적인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예측불허의 나라입니다. 총칼만 안들었지 참 치열한 영적전쟁터인 현실입니다.
지금 일본 도쿄에서는 올림픽 경기가 한창입니다. 공격성과 폭력성의 표출이 전쟁이요, 이에 대한 대리만족의 역할을 하는 것이 올림픽 경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흥미진진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갖가지 경기를 관전하면서 공격성, 폭력성, 잔인성을 잠시나마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참 많이 반복하여 나눴던 주제입니다.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의 현실이요 우리는 주님의 전사가 됩니다.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 끝이 없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우리는 올림픽 선수들로부터 참 영적전쟁에 도움이 되는 체험적 진리를 배웁니다. 어제 “어찌 해피엔딩만 있겠냐!”는 신문 칼럼(장대익)을 소개합니다.
-“화살 다 쐈다. 이제 더 이상 쏠 화살이 없다. 돌아가서 부족한 것 채우고 3년 뒤 파리 대회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 김우진 선수는 아예 인생의 화두를 쏴버린 것 같다. 이토록 멋진 말을 남긴 올림픽 선수가 또 있을까 싶다. 최선을 다한 결과의 말이리라. 2021년 도코 올림픽 남자 양궁 개인전에서 1점 차이로 석패한 김선수의 인터뷰 내용이 연일 화제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요, 뛰어난 과학저술가이기도 했던 리쳐드 파인먼은 노벨상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영예를 좋아하지 않는다. 과학적 발견에 대한 즐거움 자체가 이미 내가 받은 상이다.”
겨울이 없는 자메이카에서 봅슬레이팀을 만들어 동계올릭픽에 출전하는 이야기를 영화화한 <쿨러닝>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금메달은 멋지죠. 하지만 그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있다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올림픽에 관한 수많은 격언중 “올림픽은 4년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는 것”이란 말도 있다. 매일매일이 영적전투의 현실이란 말이다. 테니스 메이저 3개 대회를 이미 우승했으나 이번 도쿄에서 빈손으로 마감한 노바크 조코비치의 말이다. “우수한 선수 100명은 체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 중압감을 견디고 결정적인 순간에 놀라운 결과를 만드는 힘은 정신력에서 나온다. 이게 삶이다. 어떻게 해피엔딩만 있겠는가!”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영적전쟁의 적나라한 요약이 올림픽 경기같습니다. 언젠가 한 자매님의 “내 남편은 전우입니다.”라는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부부애는 전우애로 직결됨을 봅니다. 우리 수도자들의 형제애가 전우애로 직결되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이런 영적전쟁중 주님의 전사로서의 모범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인 성 요한 마리 비안네이고 복음의 가나안 여자요 민수기의 칼렙입니다.
성 요한 마리 비안네의 인생이 참 경이롭습니다. 성인은 죽을 때까지 한해 평균 2만명, 10년 동안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하루에 최소 16시간에서 최대 18시간까지 봉사해야 했습니다. 비안네는 하루 평균 두세시간의 수면밖에 취할 수 없었습니다. 1859년 8월4일 새벽 2시, 향년 73세에 요한 마리 비안네는 41년 5개월 동안 사목활동을 마치고 아르스 본당에서 선종합니다. 그 치열한 한결같은 극기와 절제의 영적전투의 삶중에도 73세 장수했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자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영적탄력의 믿음입니다. 영적탄력은 제가 수도생활 초기부터 자주 사용한 용어입니다. 탄력좋은 용수철을 상기하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누르면 즉시 튀어나오는 용수철처럼 주님의 전사들에게는 영적탄력의 믿음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탄력은 떨어지더라도 영적탄력이 떨어져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끈질긴 기도와 믿음을 통해 드러나는 영적탄력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영적탄력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냉정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다시 탄력좋게 다시 도전하여 마침내 주님께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처럼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절정 상태에 있던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믿음, 인내의 믿음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은 나았습니다. 주님을 감동시켰고 독자들인 우리를 감동케하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입니다. 탄력좋은 영혼의 승리, 정신력의 승리, 믿음의 승리, 겸손의 승리, 인내의 승리입니다. 정말 영적 올림픽의 금메달감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겐 부족한 믿음, 부족한 인내, 부족한 겸손을 각성케 하는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주님의 위대한 전사, 가나안 여자는 주님과의 영적전쟁에 이겼고 자기와의 영적전쟁에 이겼습니다. 말그대로 탄력좋은 믿음의 승리입니다.
최대의 유일한 평생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나’입니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진정 주님의 전사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 매일 나와의 영적전투입니다. 가나안 여자와 쌍벽을 이루는 주님의 전사가 바로 민수기에 나오는 칼렙입니다. 가나안에 다녀온 정찰대의 보고가 둘로 나뉩니다. 주님의 참 전사, 칼렙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낙관적 견해를 펼치며 백성들을 고무시킵니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참 탄력 좋은 믿음의 반영입니다. 반면 그와 함께 다녀온 이들은 모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견해를 펼칩니다.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그대로 믿음 부족을 반영합니다. 아무리 돈 많고 무기 좋아도 이렇게 영적탄력이 떨어져 있으면, 영적전의를 상실하면 싸워도 백전백패입니다. 가나안 여자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겁보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선고가 참 준열합니다.
“나 주님이 말한다.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나를 거슬러 모여든 이 악한 공동체 전체는 이 광야에서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죽을 것이다.”
참으로 매일, 평생,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한결같이 봉헌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탄력좋은 믿음의 전사로 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탄력 좋은 주님의 믿음의 전사, 승리의 전사가 되어 영적 전장戰場인 인생 광야를 잘 통과하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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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모든 본당 신부들의 주보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엔나 사제 기념일 미사의 말씀은 믿음 이야기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서 마귀 들린 딸을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대답조차 않으시는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는 어머니의 애타고 절박한 심경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해 파견된 것이라고 하시니, 이방 여인의 마음이 적잖이 위축되었을 것 같지요.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지향을 시험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욕적으로 들렸을 법도 한데, 딸을 위해서라면 어떤 취급을 당하더라도 물러설 마음이 없습니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하신 가나안 땅 때문에 생긴 일화입니다.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민수 13,31)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민수 13,33)
가나안 땅은 이미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각 지파의 수장들을 모아 그 땅을 미리 정탐하게 하신 건, 점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해 보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비옥하고 풍요로운 가나안 땅을 확인하고 주님의 권능과 희망찬 미래를 꿈꾸게 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 백성이 가나안 땅을 보고 기쁨과 감사로 의기충전해서 행복할 거라 여기신 주님의 기대가 과했던 걸까요?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나머지 열 명의 수장은 가나안의 풍요와 주민들 풍체에 진즉에 기가 죽어 부정적이고 불길한 소문을 퍼뜨립니다.
스스로를 "메뚜기" 같다고 한 처참한 자기 비하는 아직 그들 안에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이 형성되지 못했음을 드러냅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거대강국 이집트의 노예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직 하느님께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 것이지요.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 14,28)
아직 주님께 대한 믿음이 영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우성치고 통곡하며 불평하자 주님께서 무척 언짢아 하십니다. 주님도 단단히 상처받으셨습니다. 당신 백성이 좋아하리라 믿고 기껏 펼쳐 보여주신 선물이건만, 열등 의식에 싸인 백성이 너무 부정적이고 배은망덕하게 반응했으니 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일의 정탐 기간을 사십 년의 광야살이로 되돌려 받습니다.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 여겨 주님의 약속을 무시했던 언사 그대로, 그들은 결국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지요.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과 구원의지를 불신하고 무시한 자기들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복음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탄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린 여인이 예수님의 경탄과 칭찬을 듣습니다. 그 옛날, 당신을 믿어주지 않았던 당신 백성으로 인해 상처 받으신 하느님께서, 지금 굳은 믿음을 고백한 이방 여인으로 인해 치유를 받으신 흡족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여인의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는 바가 실체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여기는 이가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믿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반면 이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듣고도 견고했지요. 그래서 믿음은 참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 모상이라는 건강한 자기 인식 안에서 주님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구원을 약속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지요. 성령 안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지금 여기서 선취하여 누리게 만드는 신비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저희 본당 신부님과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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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5)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티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 고장에서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안 여인의 첫 번째 굴욕입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에 대해 언급하자, 그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15,24)
가나안 여인의 두 번째 굴욕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15,26)
가나안 여인의 세 번째 굴욕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 굴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믿음이란 어떠한 굴욕에도 넘어지지 않는 것,
믿음의 대상에게 끈질지게 매달리는 것이라는 것을 가나안 여인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자존심은 강하고, 인내심은 약한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믿음이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오늘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작은 시골 본당에서 본당 사목을 하셨고, 겸손한 사제, 충실한 사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특히 정성을 다해 가나안 여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런 본당 사제들이 많아지기를 청하고,
어떠한 굴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믿음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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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십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마자 마귀가 호되게 걸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이 나타나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부인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다윗의 자손’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한꺼번에 사용하며 간청합니다. 얼마나 다급해서였을까요? 그녀는 예수님 일행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선민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자비를 얻으려면 수모를 참고 받아야 하거나, 유다인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은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 이야기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가르침(마태 15,1-20 참조) 다음에 나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음식 규정을 무색하게 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를 암시합니다. 또한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그녀의 딸을 고쳐 주시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는 민족이나 종교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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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이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가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게 하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이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고 답하신다. 그리고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크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 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 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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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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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강아지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마태오복음 15장에 있는 ‘어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는,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으로 변화된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의 딸이 마귀 들린 일은, 그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계기’로
작용한 일이고, 예수님께서 그의 딸을 고쳐 주신 일은, 그 여자의 믿음과
변화와는 별개의 일로서,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이야기의 끝에 있는,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라는 말씀 때문에, 그 여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겸손하고 끈질기게
간청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이야기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전부 다 살펴보아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1-23ㄱ).”
여기서 ‘티로와 시돈 지방’이라는 말과 ‘가나안 부인’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이방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 여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첫 번째 거절’입니다.
‘거절의 이유’는 뒤의 24절과 2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청하는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성찰하게 만들기 위한 침묵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이야기에도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모습이 나오는데(요한 8,6), 그 경우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또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성찰하게 만들기 위한 침묵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변화시켜 주기 위한 무언의 가르침이고,
간청에 대한 응답의 한 방식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했을 때, 원하는 응답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의 침묵’만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청을 거절하신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선 먼저 자신의 상태를, 그리고 자신의 간청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올바르게 믿고 있는가? 나의 간청은 올바른 간청인가?>
아마도 여자는 자기 딸을 고치려고 처음에는 자기가 믿는 종교를 포함해서
우상을 섬기는 종교들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을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하려면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에게서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15,23ㄴ-24).”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두 번째 거절’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안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즉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라는 권고입니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만 이해하고서 여자를 쫓아버리자고 말합니다.
(돌려보내자는 말은, 쫓아버리자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의 구원’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받게 됩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게 됩니다.
(딸을 고치는 것, 그것만이 지금 여자가 바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청하지 않은 ‘큰 은총’을,
즉 ‘하느님의 구원’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선 먼저 여자를 변화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5,25-26).”
아마도 여자는 예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고,
또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와달라고 청하는 여자의 말은 그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 ‘간절함’이 믿음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세 번째 거절’입니다.
그러나 뜻으로는,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들, 돼지들, 강아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강아지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여자의 입장을 생각해서 부드러운 표현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또 예수님도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지만,
그 은총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는 것은 은총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7-28).”
마침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고,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말은, “주님, 제가 강아지라는 것을(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로 해석됩니다.
여자가 받은 진짜 ‘큰 은총’은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변화되어서
그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딸이 나은 것은 그 다음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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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울타리를 뛰어넘는 사랑과 신앙의 다섯 단계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에 가셨을 때 그 고장 토박이인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요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으니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큰 소리로 청합니다(15,22). 그분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십니다(15,23).
그러자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사악하고 미신적인 것에 물든 죄 많은 종족으로 여겨지던 가나안의 그 부인을 돌려보내라고 말씀드립니다(15,23).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15,24)이라며 응하시지 않습니다.
가나안 부인은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거듭 청합니다(15,2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누릴 구원을 이방인들이 누릴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15,26).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을 따돌리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신앙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부인은 자신이 구원을 누릴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15,27) 하고 말씀드리며 자기 신앙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크고 깊은 믿음을 보고 그녀의 딸을 고쳐주십니다(15,28). 이처럼 그분께서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신앙을 지닌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당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형성된 교회 안팎의 수직적인 구조와 질서를 거슬러 예수님의 이런 보편적인 사랑을 온몸으로 살아냈습니다. 우리 또한 신앙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에게 다가가기를 꺼려하고 왜곡된 사고와 우월감, 배타적 의식을 지니고 살지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가나안 여인의 태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소외를 극복하고 신앙으로 나아가는 다섯 단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그녀는 자신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청했습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성향, 아집과 편견, 독단과 독선으로 가득 찬 자아, 현세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날 때 신앙에 이를 수 있는 까닭이지요.
다음으로 가나안 부인은 ‘소리 질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청하기에 앞서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예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 드러낸 것입니다(15,22).
셋째 단계는 기다림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자 자기 기준으로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침묵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기다리며 그분의 처분에 자신을 맡긴 것이지요.
넷째 단계는 다가감과 겸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녀를 돌려보내자고 하자, 그녀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5,25) 자기 딸을 낫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올바로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기에 자신을 낮추어 그분께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계속적인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신앙을 시험하시려고 곧바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믿었기에 거듭 청합니다. 이렇듯 간절하고도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울타리를 뛰어넘어 조건 없이 모두를 사랑하고, 가나안 여인처럼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며 겸손한 마음과 주님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확고한 신앙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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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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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마태오 14,22-36)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
일선 본당이나 사도직의 책임자로 살아가면서 정말 힘든 일 중에 하나가 꾸준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우나 고우나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최고급 VIP 고객으로 여기며, 꾸준히 그들 가운에 현존하려는 노력이 사목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본연의 임무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여기 저기 오라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책임자로 살다보니 기본적으로 눈도장 찍어야 할 곳도 상당합니다. 여기 저기 가고 싶은 곳도 많이 생깁니다. 그러다보면 자꾸 자리를 비우게 되고, 거기 맛을 들이다보면 주객이 전도되어 책임감 없는 사목자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신부님(1786~1859)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모릅니다. 그는 첫 주임사제로 발령받은 아르스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사목한 특별한 사제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신자들이라 해봐야 농사짓는 시골사람들 230여명밖에 안 되는 공소 같은 본당이었습니다. 더구나 본당 신자들의 신앙심은 밑바닥이어서 동료 신부들이 다들 부임하기 꺼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부임해가면서 2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두렵고 감지덕지해서 몸까지 떨었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영성생활 안에서 제 눈을 확 잡아끄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입니다. 그는 사목자로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단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 신자들의 영성생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나 럭셔리한 가재도구, 메이커 옷, 취미활동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은 거의 ‘유령의 집’과도 비슷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루 온종일 신자들 영성생활의 쇄신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심성의껏 고해성사에 전념하셨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마치도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듯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 지상에 단 한명의 죄인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영웅적 사도직을 수행했습니다.
만학도로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기적적으로 사제로 서품됩니다. 그러나 서품 즉시 시작된 가난하고 착한 목자로서의 삶은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별이 되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청빈한 생활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단 한 벌 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워낙 전반적으로 너덜거렸기에 수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신자들이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니 수단 하나 새로 해 입으라고 돈을 마련해드렸습니다.
꼭 새로 해 입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 옷 그대로였습니다. 화가 난 신자들이 다그쳤더니, 그 돈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준 후였습니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댄 적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신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왜 그렇게 하고 다니셨을까? 묵상해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떤 날 하루 24시간 가운데 18시간을 고해소 안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사제로서 고해소에만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은 6시간 가지고 미사도 봉헌해야 했습니다. 강론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잠도 자야했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목에 전념하느라, 영혼구령에 시간을 바치느라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아침식사는 언제나 우유 한잔이면 족했다고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 시간이 없으셨던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하루 한 끼로 때우셨답니다. 식사 시간은 길어봐야 5분 내외였답니다.
비안네 신부님 성덕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충실, 그것이 그분 성화의 비결이었습니다.
본당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지극정성으로 준비하고 경건하게 봉헌하는 것, 그리고 성체성사에 앞서 꼭 필요한 또 다른 성사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을 충실히 행함으로 인해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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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거짓말하지 마!”와 “난 거짓말을 싫어해”의 차이: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말고 새로 태어나게 하라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이방 여인이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며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때 이 여인은 개라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하며 자기 믿음을 증명합니다. 믿음은 분명 자신을 낮추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믿지 못합니다.
반면 믿으면 자아가 죽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죽음으로 타인을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강점기에 평안도 신천에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김익두입니다. 사람들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부터는 매일 동네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어, 저 사람은 얼만 전만해도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목사를 시험합니다. 문 앞에 와서 “예수 믿으세요.” 할 때, 설거지물을 얼굴에 확 뿌려버렸습니다.
“죽었나 살았나 보자.”
김익두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 살았으면 당신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믿음은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개라는 말을 듣고도 감정이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나안 여인이 발끈하여,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창조하신 백성을 ‘개’로 비유하시는 것은 좀 아니죠?”라고 말했다면 그 여인의 믿음은 거기까지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이해되지 못하는 행동과 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람들을 못마땅해하고 교정해주려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지 않으니까 가르치려 들고 고치려 드는 것입니다.
“네가 말을 더듬는 것은 네 생각의 속도가 혀의 속도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야.”
말더듬이인 아들에게 말을 더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전 회장 잭 웰치 어머니의 말입니다.
잭 웰치는 미국 최고의 능변가지만 어린 시절에는 말더듬이로 친구들의 놀림감이었습니다. 식당에서 참치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면 언제나 참치 샌드위치 두 개가 나올 정도로 주문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말 더듬는 탓에 영어로 참치를 뜻하는 튜나(tuna)를 ‘투 튜나’(two tuna)로 발음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이 말에 잭 웰치는 곧 자신감을 되찾고 말을 더듬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여겼고 스스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잭 웰치의 어머니가 아들의 말 더듬는 버릇을 직접 고쳐주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들은 더 주눅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어 아이가 스스로 하게 만들어야지 자신이 무언가 하게 만들려고 하면 아이의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저에게 공부하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공부하란 말을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부모는 더 잘하라고 합니다. 이런 지적을 해서 공부를 잘하게 되면 그 공적은 부모에게 돌아갑니다. 부모는 마치 잔소리를 해도 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잔소리는 자녀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무한으로 긍정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왠지 안 될 것 같은 부정이 끼어드니 자신이 개입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느님을 믿으면 사람도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믿으면 상대를 고치려 들지 않습니다. 기다려줍니다.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란 책을 쓴 저자 김민경 씨는 이 책을 통해 부모와 대화 없이 자란 어린 날을 떠올리며, 내 아이만큼은 ‘잘하면 칭찬, 못해도 격려’의 마인드로 밝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녀 교육서를 읽고, 코칭 리더십 등 다양한 강의를 통해 자녀 교육 노하우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믿는 만큼 자란다는 신념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으면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까요?
성호가 게임에 빠져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결국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때려주고 싶었지만, 차차 마음이 가라앉고 자신도 어렸을 때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댔고 군것질을 했고 남은 돈을 숨겨놓고 가슴 졸였던 기억을 떠올리니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엄마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엄마 김민경 씨는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엄마한테 말하지 그랬어. 엄마가 안 줄 것 같았어? 내일부터 2000원을 줄 테니까 1000원은 게임을 하고, 1000원은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러나 6시 전엔 꼭 들어와야 한다. 알았지?”
이렇게 아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성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에 빠져 초등학생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반에서 거의 꼴찌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 2가 되자, 게임 때문에 학교를 자퇴까지 하겠다고까지 말하던 아이가 갑자기 마음을 잡고 공부를 시작하더니 전교 1등을 하고,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이가 원래 머리가 좋았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자신의 가치가 얼마인지 엄마가 하는 행동을 통해 믿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엄마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생각에 자신도 자존감이 생기고 그 자존감을 증명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제게 신부님도 가르치지 않느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저도 개인적으로 각자의 삶을 판단하여 제 가르침을 적용한다면 분명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가르치면 그 사람의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넌 내가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 묵상을 나누는 것은 개인적으로 지적하고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는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바라시느냐만 말해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기가 걸음마를 하고 옹알이를 할 때 일일이 지적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걷고 말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범은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는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적하여 고쳐주려는 행위는 상대를 믿지 못해 상대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행위이고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행위입니다.
어렸을 때 제 어머니는 “거짓말하지 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마는 거짓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남을 지적하는 것은 변화시키려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쫓아오게 만드는 것은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변화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남을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적질과 가르침의 차이입니다.
믿지 못하면 지적하고 믿으면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걸음마를 보여주는 것과 걸음마를 지적하고 교정하려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말의 모범을 보이는 부모는 있어도 옹알이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려 할 때 아이는 자존감을 잃게 됩니다.
믿음은 무한한 긍정입니다. 믿는다면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믿음으로 내가 죽었음을 보여주십시오. 물론 믿어도 안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예수님께서도 유다 한 명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바꾸려 해서 바뀌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조차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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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모으기 위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혈연으로 이어진 이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듯,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모든 백상이 하느님께 모여들고하느님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해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제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에만 머물렀습니다.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이방인 여인을 모른 척하고예수님 여정에 방해가 된다고 물리치려 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모르면서자신의 일을 하느님의 일이라 착각했기에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하면서도하느님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제자들에게 하지 않으신 말씀을이방인 여인에게 하였습니다.그녀가 하느님께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으면서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그저 아는 것에 멈추지 않습니다.주어진 자격에 자연히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그분께 대한 간절함을 가질 때,비로소 성장하며 우리의 뜻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게 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한 마리마 비안네 성인 역시이러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하느님의 뜻이 모든 영혼의 구원임을 알고 계셨기에세상과 타협하고 자신과 타협하는 유혹을 넘어하느님의 일에 온전히 투신했습니다.
교구 사제였던 성인은고해성사를 통해 많은 이를 회개로 이끌었고열성적인 모습으로 많은 이를 하느님께 초대하였습니다.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머물기보다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비안네 성인 모든 교구 사제들의 주보성인이 되었고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제자의 유혹에서 벗어나
이방인 여인과 같은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사제들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할 수 있기를,
주어진 권한과 자격을 넘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과 열정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더 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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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왜 대단한 믿음일까?
중국 당나라의 관리 누사덕(婁師徳)은 마음이 넓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성품이 따뜻하고 너그러워 아무리 화나는 일이 생겨도 흔들림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이 높은 관직에 임용되자 따로 불러 “우리 형제가 함께 출세하고 여황제(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으면 남의 시샘이 클 터인데 너는 어찌 처신할 셈이냐”고 물었습니다.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화내지 않고 닦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를 것이야.” 화가 나서 침을 뱉었는데 그 자리에서 닦으면 더 크게 화를 낼 것이니, 닦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이 고사에서 유래한 게 ‘타면자건(唾面自乾)’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나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어땠는지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여인의 딸은 호되게 마귀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딸을 위해 어미로서 예수님께 간청을 드린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절규에 예수님께서는 보통 때와는 다른 태도를 견지하십니다. 보통 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측은한 마음에 어떻게 치유를 해 주셨을 법도 한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제자들이 와서 조금은 성가신 모양처럼 생각을 했는지 여인을 돌려보내자고 말씀을 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또 한 번 매몰차게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만을 위해서만 오셨다는 취지로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 이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참으로 참담했을 겁니다. 이때 아픈 딸을 둔 어미로서의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이방 여인이면서 예수님의 신원을 오히려 알아봤다면 오히려 예수님께서 더 감탄하셔야 하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태도인데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보통 사람과 같았다면 낙담을 했을 겁니다. 간절하게 호소를 했는데도 처음엔 침묵으로 일관하셨고 또 당신의 사명이 이방인과는 관련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또 다시 예수님께 청을 하게 됩니다. 이때 자세가 엎드려 절을 하였던 것입니다. 원어에는 이때 절을 하는 게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차례 절을 계속하며 간청을 했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러 모습을 상상해보시면 얼마나 절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박하게 애원을 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이젠 매몰차다고 하기보다는 모욕에 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모욕에 가까운 말을 들었지만 이 여인은 설령 자신은 그런 모욕을 받아서 모멸감을 느낄지라도 자기의 딸을 살릴 수 있다면 그런 모멸감도 감수하겠다는 굳은 각오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먹는다고 하는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탄복을 한 것입니다. 이 부스러기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단순한 부스러기가 아니였을 겁니다. 말이 부스러기였지 사실 불결한 부스러기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빵 같은 걸 먹을 때 빵을 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떼고 했고 그런 과정에서 소스와 같은 게 묻으면 빵으로 닦는 게 관습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서 그걸 개에게 던져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빵이 얼마나 더러운 것이었겠습니까?
여인이 그와 같은 말을 한 의도는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지금 그런 빵도 절실하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상징적으로는 위생상 불결한 빵과도 같지만 내면적인 뜻은 그만큼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절박하다는 심정을 단적으로 묘사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제자들에게 무언으로, 간접적으로도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 민족만에게만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비록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구원의 문은 열려 있다는 걸 자각시켜주는 면도 있었을 겁니다. 이 여인은 물론 절박해서도 그랬겠지만 그런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그런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단순히 굴욕으로만 볼 게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에도 나옵니다. 겸손을 배우는 데 아주 좋은 스승이 굴욕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우리 보통 사람은 그게 굴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여인은 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겸손으로 자비를 청했을 겁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청했기도 했지만 자비를 입는 대상은 자신의 딸이 아니고 자신이었습니다. 그 뜻은 자신의 딸이 당하는 고통을 자신이 똑같이 겪고 있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미의 간절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믿음의 기적은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도 매달리는 모습에서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타면자건과 같은 고사에서처럼 믿음은 굴욕 속에서도 인내를 해야 그게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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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게재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강만연 [fisherpeter] 210804. 05:47 ㅣNo.148802
사흘에 걸쳐서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를 유튜브로 3부작을 시청했습니다. 처음엔 3부작부터 먼저 봤습니다. 3부작을 보면서 생각한 게 있었습니다.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 짧은 삶의 가치가 보통 사람의 인생의 몇 배를 사신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김대건 신부님의 역으로 나온 탤런트를 잘 캐스팅한 것은 마치 신의 한 수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골상이 우리가 늘 보고 있는 신부님의 골상과 아주 흡사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드라마의 분위기에 압도된 느낌이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 것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가정 내에서 하는 신앙교육이 그 사람의 평생동안 하게 될 신앙생활의 초석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른 것도 느끼는 게 많았지만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도 신앙을 굳건하게 잘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아마도 어릴 때부터의 신앙의 기초가 잘 다져지면 훌륭하게 성장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친구는 아버지가 참수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울분을 쏟아냈습니다. 드라마 상으로 보면 물론 드라마에서 느낀 것입니다. 실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믿긴 믿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김대건 신부님의 부모님과는 믿음의 깊이가 조금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한양에서 프랑스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하는데 그곳에 가자고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께서 권유를 하는데 조금 뭔가 주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박해시대였기 때문에 혹시나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심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가지만 친척집에 갔는데 그만 체포되어서 참수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신앙 때문에 참수가 된 것은 아닙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도 박해 때문에 참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차이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아버님이 박해로 생명을 잃은 사실을 알고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렸지만 이미 그런 상황에 대해 각오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서 신부님의 내공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친구의 그런 태도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의 아버지도 배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참수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드라마 그자체에서만 본다면 친구의 아버지가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아들에게도 김대건 신부님 부모님처럼 독실한 신앙은 물려주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의 신앙이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평소 강인한 신앙관을 가졌다면 물론 마음이야 부모가 참수된다면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느님을 부정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대개 한 번쯤은 이 신부님이 어떤 신부님이셨는지는 강론이나 매일미사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의 삶을 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두 분다 우여곡절 끝에 사제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남긴 족적은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두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양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과 고통도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부님은 아니지만 이런 분들의 고결한 삶을 보면서 또 이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2000년 동안 하느님을 섬길 수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 땅에 존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그 기개와 용기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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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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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4일 수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ㅣ이영제 요셉 신부 집전
https://youtu.be/Spvu5sMbEns 35:39
2021. 8. 4.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8월 4일 수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매일미사
이영제 요셉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기획연구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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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미사
210804
i Kol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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