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秋夕)
남 도 국
70 여 년 그전 우리들의 추석날은 번거롭고 흥미로웠다.
갓과 두건, 두루마기와 하얀 고무신으로 차려입은 아버지를 따라 수곡 큰집으로 돌다리를 건너 제사지내러 갔었다. 유교 문화에 따라 남자들만 제사에 참여하게 되어있어 어머니와 형수들은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 지낸 후 돌아와 즐겨 먹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수곡 큰댁은 지금은 종합운동장으로 건설되어 흔적도 없ㅇ어지고, 우리 아버지 4촌과 6촌 8촌 남자들 모두 모이면 30여명, 아침 10시 경, 어른들은 안방에서 젊은이와 아이들은 마루에 둘러서서 제례를 드렸다.
아직 이른 햅쌀을 디딜방아로 찧어 밥과 송편을 짓고, 국거리는 열흘 전에 앉혀놓은 콩나물과 도라지, 제사상에 필수인 어물 문어와 대구, 언어, 연어, 생태 국, 닭 한 마리 통째로 삶고 찐 계란을 고스란히 목 (나무) 그릇에 담아 올리고 귀한 쇠고기 비싸게 시장에서 구입하여 꼬치에 꿰고 가마솥에 쪄서 올려놓고, 햇과일 사과, 대추, 밤, 감도 손으로 일일이 깎아 상에 올려놓으면 상이 내려앉을 듯 푸짐한 제사상이 마련되었다.
어른들은 모두 갓과 흰 두루마기, 기혼자들은 두루마기로, 미혼들은 깨끗한 평상복 차림, 아이들은 꼬까옷으로 차려입고 5대 조상들까지 절을 하며 명절 제사를 드렸다. 여자는 제사에 참여 못하고 음식만 정성들여 장만하고 준비 하느라 놋그릇 과 목각 접시들을 내어 닦고 씻고 수고만 하며 부엌에서 바라만 보고 있는 문화였다.
안방에 제사상 차리고, 제사는 어른들만 안방에서, 젊은이들은 마루에서, 3중으로 나란히 서서 절을 올리는데, 첫 번째 절 두 번을 한다. 이는 조상들을 제사에 초청하는 순서, 그 다음에는 조상들이 오셔서 음식을 잡수시게 밥그릇의 뚜껑을 열고 수저를 밥과 국위에 얹혀 놓고 드시게 하는 시간 약 3분 동안 엎드려 제사한다. 철 어린 나는 지루한 이 시간 잠에 취해 기침 신호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른들이 다 일어나는 시간에도 엎드려 있다가 혼났든 일이 기억난다. 세 번째는 잘 가시라는 인사로 선채로 반절로 절을 드리고, 큰집 자손 순번대로 놋잔에 약주를 부어 조상님께 드리는 순서가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수저를 내려놓고 두 번 절하므로 제사의 행사는 끝난다.
끝나면 제사에 참여한 후손들이 들러 앉아 음복 한다며 제사에 썼든 약주를 작은 놋잔에 담아 함께 각배한다. 그리고는 아침상이 거창하게 차려져 나오는 게 추석 명절의 제례였다. 가정에 따라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제사 후, 대부분 가족들은 선조들의 묘지를 방문하여 제초하고 과일과 음료를 부어 드리고 묘지에도 제사를 드리는 것도 일반 가문에서 실시하는 전통이었다.
천리 길 서울이나 전라도에서 추석 명절에 다녀가려면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천만 명의 사람들과 수백만 차량들이 이동하는 고속도로는 대 만원을 이루었고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귀향하는 길은 경부, 호남, 동해선 고속도로뿐이든 그 시대에는 차량 안에 갇혀서 앞차의 꽁무니를 따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길 밖으로 나오기도 힘들었다. 어떤 때 급한 용변 처리를 위하여 차선을 빠져 나가려는데 한 시간 이상 나가질 못하고 애를 먹었든 일이 기억난다. 한해는 경부선 하행선 대구 지점에 왔는데 차 엔진에서 연기가 나, 뒤따라오든 차의 급한 신호를 받고 급히 차선을 바꾸어 차를 세우고 물로 식히고 20분 간 쉬며 문제를 해결한 적도 있었다. 추석이나 음력 설 명절은 멀리서 고향을 찾아야하는 우리에겐 마치 전쟁을 치루는 각오로 나서야했든 힘든 행사였다.
동서남북으로 고속도로가 많이 생겨나고 고향을 오가는 차량들이 이리저리 분산되는 지금, 젊은이들은 그것조차도 번거롭게 고생스럽다며 가족끼리 해외로 휴양지로 떠나거나 역귀성하는 부모들이 많아짐으로 오늘의 추석 명절은 오히려 실용적이며 편안하고 즐거운 휴가철이라는 느낌이 든다.
군산을 떠나 익산 시내를, 서 대전을 경유하녀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서는 시간, 대구 지역과, 경주, 포항을 경유하고 흥해, 영덕을 운전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섰다 멈췄다하는 차량들의 틈새에 끼어 울진까지 오는데 빨라야 5 시간 반, 어떤 때는 아홉 시간 걸린 적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계실 적엔 그래도 형제 자매간 사이도 좋고 재미있었다. 양친 부모 다 돌아가신 후로는 만나기가 점점 멀어 지드니 30년 이상 지나고 나이가 첩첩이 쌓여가니 지금은 형제의 우애도 사랑도 희미하게 멀어져만 가는 게 현실이다.
그래도 여러 조카들 중 두 조카들은 매년 산소에 풀 내리려 고향을 찾아온다, 직장 생활에, 가정과 사회생활에 바쁘고 힘 들 텐데 제들 편리한 날을 택하여 대구에서 포항에서 두 조카 가족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다녀간다. 금년에는 일정 때문에 일요일 아침에 와서 작업 마치고 돌아가 버렸다. 혹시나 서운하게 했는가 싶어 가슴 아파했는데 돌아간 조카가 몸이 편찮아서 뵙지 못하고 돌아와 미안하다며 늦게 전화 왔다. 작년 까지는 어머님 묘소를 내가 손수 작업했는데, 여든을 넘고 보니 이제는 한계인 듯싶다. 사람을 사서 멀고 험한 곳의 아버님 묘소를 제초하고 가까운 어머님 묘소는 우리가 직접 했다.
아버님 세상 떠난 45주년 기일이 9월 20일 (음력 8월 11일), 우리 가족 둘이 조촐한 상 마련하여 추모예배를 드린 후, 9월 21일 금요일에 둘째, 셋째와 막네 딸이 살고 있는 군산에 가려한다. 우리 현제 중 가장 고령인 금년 92세의 셋째 형님을 만나 인사와 위로를 드리고 오랜 적 친구와 손자 손녀들 만나 즐겁게 편안하게 추석을 지내고 오련다.
모처럼 시원한 가을 들녘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풍성한 가을 향취를 맡으며, 전라도의 멋지고 맛스런 음식, 내가 좋아하는 큰 생선을 떠서 회로 먹고 머리와 뼈로 매운탕을, 막 잡아온 통통하게 살찐 꽃게 무침,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난다. 금년 추석에 나는 이렇게 즐겁고 행복 하련다.
2018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