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김미연
사계절 슬픔을 가라앉히고 있다
집 안에서 밀려난 것들
감추고 싶은 은밀한 것들
병든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방치된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담배연기로 실직을 견디던 사내도
베란다 구석에서 녹슬고 있다
아찔한 허공에서 바닥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베란다
발밑이 벼랑이다
난간을 치고 경계를 짓지만 찰나에 허공은 허물어진다
실내유리창 밖
집이 아닌 집
하는 일없이
베란다는 끝없이 일을 하고 있다
거실로 따라 들어가지 못한 베란다는
늘 외톨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패배는 싸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 승리와 패배의 최종심급은 힘이며, 힘은 모든 유기체의 근본본능이라고 할 수가 있다.
힘을 가진 자의 도덕은 자기 찬미의 도덕이며, 그는 모든 것을 발밑으로 내려다 보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찬양할 수가 있다. 이에 반하여, 힘이 없는 자의 도덕은 자기 체념의 도덕이며, 그는 모든 것을 하늘 높이 우러러 보며, 하염없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슬픔에 잠긴다.
거실은 주인의 거주 공간이고, 베란다는 하인의 거주 공간이다. 모든 삶의 이치가 승자독식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흐름에서 이탈하면 생존만이 최고인 삶, 즉, “사계절의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집 안에서 밀려난 것들/ 감추고 싶은 은밀한 것들/ 병든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방치된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담배연기로 실직을 견디던 사내도/ 베란다 구석에서 녹슬고 있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베란다는 아찔한 허공이며 발밑의 벼랑을 보며 늙어가고, “실내유리창 밖/ 집이 아닌 집”에서 난간을 치고 경계를 긋지만, 찰나에 허물어지는 운명을 안고 살아간다. “하는 일없이” “끝없이 일을” 하는 베란다, 언제, 어느 때나 거실로 들어갈 수 없는 베란다는 늘 외톨이일 수밖에 없다.
만인평등은 없다.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의 차이는 인간과 짐승과의 차이보다도 더 크다. 자연의 법칙은 힘의 세계이며, 이 힘의 세계를 구축하는 두 축은 거세법과 배제법이다. 거세법은 인간성을 제거하는 것을 말하고, 배제법은 상류사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것을 말한다. 적자생존, 요컨대 베란다는, 사회적 천민은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언제, 어느 때나 허공을 움켜쥐고 아찔한 벼랑만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김미연 시인은 거실과 베란다의 공간을 주목하고, 그 대립과 긴장을 통하여 삶의 무대에서 밀려나 생존만이 최고인 ‘베란다’라는 인물을 극적으로 연출해낸다. 늘 외톨이로, 쓸모없이, 쓸모없는 일을 쓸모있게 하는 사회적 천민의 운명이 ‘베란다’라고 할 수가 있다.
베란다, 베란다, 태생부터 배제법의 채찍을 맞고 이제는 거세법의 단두대로 사라져가야 할 운명이 김미연 시인의 [베란다]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