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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0) 이기양의 정면 도발
안정복, 손자뻘 후학 이기양에게 봉변을 당하다
늙은이의 잠꼬대
1784년 12월 14일에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는 이기양도 같이 보라는 취지였다. 이기양은 편지를 읽고 격분했다. 이기양의 어머니 송씨가 이기양의 두 아들이 천주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칭찬한 일을 거론한 내용이 그 편지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과 이방억은 당시 서학에 몰입하고 있었다. 특별히 이총억은 1779년 주어사 강학회는 물론, 명례방 집회에도 참석했던 신자였다. 할머니는 손자들이 서학 공부에 열심인 것이 흐뭇해서, 며느리인 둘째 아들 이기성의 처 광주 안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서 이 일을 자랑했던 듯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너도 천주학을 열심히 믿으라고 권유하기 위해 이 말을 썼을 텐데, 그 편지는 남아있지 않다.
안씨가 친정에 들렀다가 걱정 끝에 편지 내용을 발설했고, 조부인 안정복의 귀에까지 이 말이 들어갔다. 안정복은 다급한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이 사실을 권철신과 이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쑥 말해버렸던 것이다.
안정복은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 세 통에 대해 답장을 받지 못하자, 이기양에게도 잇달아 편지를 썼다. 1785년 봄에 쓴 편지에서는 “그간 권일신이 힘껏 서학을 권하였지만, 나는 귀 곁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로 들었다네. 그 뒤에 또 편지로 권면하는 말을 써 보냈더군. 서학이 너무도 진실하여 천하의 큰 근본이며, 통달한 도리가 오로지 여기에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더군.(向來省吾力勸此學, 余聞若過耳之風. 其後又貽書勸之, 語此學之眞眞實實, 至謂天下之大本, 達道專在於是)”이라고 썼다. 안정복의 사위였던 권일신이 지속적으로 장인을 찾아가서 서학을 믿을 것을 권유한 정황이 확인된다.
이 편지는 「순암집」에는 빠졌고, 초고인 「순암부부고(順菴覆稿)」 권 10에만 실려 있다. 「벽위편」에도 수록되었는데, “밤낮 아파 신음하며 죽기를 구해도 죽지를 못하니 과연 가련한 인생이라, 이는 곧 받게 될 지옥의 고통에 불과할 뿐이다”는 자조적 말까지 들어있었다. 가련한 인생이란 표현 밑에는 “이에 앞서 정약전이 이 어른이 가련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先是丁若銓謂此丈可憐故云)”라는 풀이가 달렸다. 막상 이 대목은 안정복이 이기양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 나온다. 「벽위편」이 편지 두 통을 짜깁기해서 하나로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벽위편」에 실린 자료는 원전 비평이 필요해 보인다.
또 3월 9일에 이기양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는 “지난번 종현(鍾峴)을 통해 받은 답장에 앙칼진 말이 많이 있더군. 내 생각에 공이 필시 내 말을 늙은이의 잠꼬대로 보는 듯하나, 어찌 깊이 허물하겠는가?(向者從鍾峴謝答, 多有觸犯之語, 想公必以老謬之語視之, 豈足深尤)”라 했다.
함정에 빠뜨리는 도둑으로 몰다니
편지가 거듭될수록 양측의 감정은 가파르게 고조되었다. 안정복이 6월 27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두 사람에게 서학에 대해 질문했건만 한 글자의 답장도 못 받았으니, 내가 그대들에게 버림받은 것을 실감하겠다고 말했다. 또 이 늙은이를 두고 사달을 일으키려는 재앙의 괴수가 되었다는 말이 파다하다는 풍문을 언급한 뒤, 다시 이렇게 썼다. “야소(耶蘇)란 세상을 구한다는 이름인데, 세상을 구한다면서 어리석음을 지도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 옳지, 어이 굳이 묻는데 대답도 않고 그 책을 숨겨 비밀로 해서,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 과연 천주가 세상을 구원하려는 뜻이란 말인가?” 어조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7월 15일에는 안정복을 찾아온 손님이 항간의 흉흉한 소문을 전하며 말을 조심하시라고 하자, 낙담해서 「폐구음(閉口吟)」이란 장시를 짓기까지 했다. 워낙 길어 듬성듬성 건너가며 읽으면 이렇다. “사람은 누구나 입 하나 있어, 말하고 먹는 것을 관장한다네. 두 가지는 없을 수 없는 거지만, 득실 따라 화와 복이 따라오누나. 듣자니 참다운 도리가 있어, 서방의 나라에서 건너왔다네. 젊은 선비 앞다퉈 믿고 따르니, 살펴보매 마음속이 좀을 먹는 듯. 벗이야 토론함을 귀히 여기니, 이 마음에 어이해 속임 있으랴. 한 마디도 알 수가 없다 하면서, 함정에 빠뜨리는 도둑 만드네. 평생 한 조각 깨끗한 마음, 밝고 곧아 간교한 꾸밈 없었지. 말과 행실 솔직함에 내맡겼거늘, 도리어 남에게 탄핵받다니. 세상에 날 알아줄 사람이 없어, 홀로 앉아 길게 탄식하누나.(人皆有一口, 只管言與食. 二者不可無, 失得隨禍福. 忽聞有眞道, 來自西方國. 士競信趨, 視之心內. 朋友貴講討, 此心豈有慝. 一言不能會, 便作陷人賊. 平生一片心, 白直無巧飾. 言行任坦率, 反爲人所劾. 世無知我者, 獨坐長太息.)”
그러고 나서도 분이 안 풀려 「탄시(歎時)」에서는, “서양서 온 학술이 자못 신령스러워, 한다하는 어진 이들 참된 도라 말들 하네. 고루한 나 끌어 주는 그 힘을 못 입으니, 하늘의 심판을 빌 데 없음 뉘우치네(西來一術頗靈神, 濟濟群賢說道眞. 固陋未蒙提力, 天臺審判悔無因)”라며 비꼬았고, 「삼절음(三絶吟)」에서는 “저촉되는 말 많으니 말을 응당 끊겠고, 편지조차 남 거슬러 편지마저 끊으리. 게다가 질병 안고 왕래마저 끊으니, 문밖과의 교유는 신발 소리 끊겼다네(言多觸諱言當絶, 書或人書亦絶. 且抱沈斷往還, 交遊門外音絶)”라고 자조하기까지 했다.
마음이 아파서 쓴다
계절이 바뀌어도 양측의 분노는 가파르게 고조되어만 갔다. 안정복의 「순암일기」는 앞서도 잠깐 소개했지만, 1785년 10월 10일의 일기에 마침내 폭발한 안정복과 이기양의 일전이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있다.(전문 탈초와 번역은 김현영, 「순암일기 차록(箚錄)-서학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제 51호(2017. 8)를 참조할 것.) 안정복은 양지(陽智) 현감 유순(柳詢)을 통해 이기양이 곧 찾아올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기다리던 중에 이윽고 관인의 행차가 마을로 들어서고, 권마성(勸馬聲)이 진동했다. 이기양은 가마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뜨락까지 들어왔다. 들어서는 서슬이 퍼랬다. 당시 안정복이 74세, 이기양은 42세였다. 어른을 만나러 오면서 가마를 탄 채 뜨락까지 들어오는 것은 명백한 도발적 행동이었다.
이기양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왜 우리 어머니 편지를 남에게 말하느냐고 앙칼지게 따지며 대들었다. 민망해진 안정복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이기양은 이런 법은 없다고 기세를 더 돋웠다. “제가 어르신께 전후로 모든 일에 전심을 다했는데, 매번 책망을 받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십수 번입니다. 어르신께서 조정에 계시면서 이런저런 말이 날 때도 제가 나서서 두둔했건만 어찌 제게 이렇게 하십니까?” 내간(內簡)을 밖에다 퍼뜨린 일로 안정복은 약점이 잡혀 계속 쩔쩔매야 했다. “지난번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사람들이 다 화심(禍心)이 있다고 말들 합니다. 제가 더는 못 참겠습니다.”
아무리 달래도 기세가 가라앉지 않았다. 갈 때도 이기양은 마당에서 가마를 탄 채로 나갔다. 둘은 다시는 얼굴을 안 볼 사람이 되어 헤어졌다. 그가 간 후 안정복은 그날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내가 그와는 나이 차가 크게 나서, 그의 아버지도 나를 존장(尊丈)이라 부르며 내 아들과 교제했고, 수십 년간 내게 스승의 예로 대했다. 뜻하지 않게 하루아침에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 하나로 나를 이렇게 대하니, 이것이 또한 천주학의 가르침인가? 천주학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그가 나를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니, 이는 천주학에서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돌아간 뒤에 마음이 아파서 쓴다.”
독서한 사람도 이렇게 합니까?
이날 이후 안정복은 거의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분노했다. 손자뻘에 가까운 후학에게 당한 느닷없는 봉변이 뼈아팠다. 이기양의 이 같은 도발적 행동은 그 즉시 남인들에게 소문이 쫙 퍼졌다. 이재기의 「눌암기략」에도 이때 일이 적혀있다.
“이기양이 문의 현감으로 있을 때 안정복이 이기양에게 편지를 써서, 그 아우더러 잡서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을 청하면서, 한글 편지를 가지고 증거로 삼았다. 대개 그 아우 이기성은 바로 순암의 손녀사위로, 사학에 빠져있었다. 그 어머니 심씨가 순암 며느리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외도에 빠지는 것을 걱정했으니, 어진 어머니라 말할 만하다. 순암이 이 말을 듣고는 편지 속에다 언급했던 것인데, 실제로는 이상한 일이랄 것도 없었다. 이기양이 성을 내며, 다른 날 가마를 타고 안방 문밖까지 와서 내리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남에게 규방 안의 일을 말하니, 독서한 사람도 이렇게 하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도 섞지 않고서 가마를 타고 가버렸다. 이 또한 변괴이다.”
안정복의 일기 내용과는 글의 결이 사뭇 다르다. 안정복이 「순암일기」에 쓴 것이 정전(正傳)이고, 이재기의 기록은 이 소문이 입을 옮겨가는 사이에 섞이고 부풀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당시 남인 내부에서 이 일을 지켜보던 평균적 시선이었다. 이기양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했던 걸까?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1) 안정복의 투혼
역사학자 안정복, 「칠극」 「기인십편 」 등 읽고 천주학 공박에 나서
- 안정복이 1784년에서 1786년까지의 책력 뒷면에 친필로 쓴 「안정복일기」 중에 자신이 집에 갖춰두고 작업하던 서책을 나열한 「자비서책질(自備書冊帙)」 목록이 있다. 그 중에 「천주실의」 2책, 「기인십편」 2책, 「영언여작」 1책, 「변학서독」 1책, 「직방외기」 2책이 포함돼 있다. 붉게 표시한 부분이 서학서 목록이다.
설득될 수도, 납득시키기도 힘든 문제
권철신의 절연과 이기양의 강력한 반발 앞에 노학자 안정복이 낙담한 모습은 참담하고 안쓰러웠다. 이때 안정복은 거의 멘붕 상태였다. 두 사람의 대응은 제 3자의 눈에도 확실히 지나쳤다. 특히 이기양의 도발은 남인 내부에서도 변괴란 소리가 나왔을 정도였다. 그들 내부에서 안정복의 논의가 자칫 큰 재앙을 부를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그만큼 높았음을 반증한다. 양측 사이에는 서학을 이해하는 입각점이 이미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지점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것은 결코 토론으로 좁혀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학계의 중진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두 사람에 대해, 안정복이 십여 년간 계속해서 재기만 넘치고 경솔하고 천박하다고까지 비난함으로써 문제를 키운 측면도 있었다. 양측은 타협점 없이 전부냐 전무냐를 두고 다퉜다. 각자 자기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중간 지점은 아예 없었다.
당시 권철신과 이기양 두 사람이 남인 소장 그룹 내에서 지닌 위상은 대단했다. 다산은 「녹암묘지명」에서 권철신에 대해 “공의 학문은 한결같이 효제충신을 종지로 삼아, 집에서는 부모에게 순명하여 뜻을 봉양하였고, 벗과 형제를 한 몸처럼 여겨 애쓰고 노력하였다. 그 문에 들어선 사람은 한 덩이 화기로운 기운이 가득 차 울려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에게 끼쳐오고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고 하고, 그가 서학으로 인해 고문을 받고 죽자, “아! 인후(仁厚)함은 기린 같고, 자애롭고 효성스럽기는 범과 원숭이 같으며, 지혜는 샛별 같고, 모습은 봄 구름 사이로 비치는 상서로운 햇빛 같았다. 형틀에서 죽어 저자에 버려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했다.
다산의 계부 정재진이 서학에 물든 조카들로 인해 분개하며 “권철신은 갈갈이 찢어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말한 뒤, “그렇지만 집안에서의 행실만큼은 훌륭했었다”고 하자, 정약전이 “집안에서의 행실이 훌륭한 사람을 어떻게 찢어 죽인단 말입니까?”라고 반발했을 만큼 권철신은 주변 모든 이의 존경과 기림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복암묘지명」에서 다산은 이기양에 대해 “공은 타고난 자질이 우뚝하고 괴걸스러웠다. 이마가 둥글게 튀어나왔고, 미목은 시원스레 넓었다. 코와 입, 광대뼈와 뺨이 모두 오똑하고 풍만하였다. 키는 8척이나 되고, 피부가 뽀얗고 훤칠했다. 수염은 몇 가닥뿐이었지만 변설은 장강대하와 같았다. 젊어서는 물러터진 것을 싫어했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적었다. 마지막 문장이 안정복과의 회동 시 앙칼진 그의 성정을 환기시킨다. 정조가 뒤늦게 그를 만난 뒤 “이기양을 얻었으니 내가 아무 걱정이 없다”고 했을 만큼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는 빈틈없는 문장과 명징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들이 스승뻘의 안정복에 대해 대화 거부와 절연을 선언한 것이 남인 내부에 일으킨 파장은 컸다. 1776년에 홍유한을 따라 남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들은 이미 서학을 받아들여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품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그들은 점차 성리학 내부의 해묵은 논쟁에 대해서도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이것은 이미 설득될 수도 없고, 상대를 납득시키기도 힘든 문제였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을사추조적발 사건은 안정복과 권철신 이기양과의 갈등이 점차 노골화되던 딱 그 시점에 터졌다. 안정복의 입장에서는 ‘그것 봐라!’ 할 일이었고, 신서파의 젊은 그룹들은 이 일의 배후에 안정복이 작용했다고 믿어,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기까지 했다. 정약전이 이 노인이 참 가련하다고 막말을 하고, 또 한편에서 지옥은 그런 늙은이를 위해 준비된 곳이라는 악담까지 나왔다. 신앙인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칠어서, 안정복은 천주는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데 너희가 그럴 수 있느냐고 말했을 정도였다. 안정복은 순식간에 남인 소장층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벽위편」에는 「안순암을사일기(安順庵乙巳日記)」의 한 자락이 인용되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내가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1784년 12월이었고, 1785년 3월에 천주학의 옥사가 있었다. 그 무리들이 대놓고 말하기를, ‘광주로 가는 길에서 정씨(鄭氏) 성을 가진 문관이 내게 이 편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진신(縉紳)들 사이에 전해 퍼뜨렸다. 형조판서가 이 말을 듣고서 옥사를 만들었다’고들 했다. 나의 권력이 능히 평생 알지도 못하는 재상을 시켜서 내가 길에서 들은 얘기를 믿게 해서 이 일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이 망령되이 모함하는 말을 더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현재 전하는 친필본 「안순암일기」에서는 어쩐 일인지 이 대목을 찾지 못하겠다.
일기에는 당시 안정복이 느꼈던 위기의식이 그대로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명례방 추조적발 당시 권일신이 쟁쟁한 집안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형조의 뜨락까지 쳐들어가서 당당하게 성상을 돌려달라고 항의한 데서도 보듯, 초기 서학을 신봉하던 그룹들은 좌고우면하여 눈치 보거나 주눅들지 않았고, 언제나 정면 돌파와 반대당에 대한 선제적 공격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냈다는 점이다. 적어도 1791년 진산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공서파의 목소리는 신서파의 일사불란한 대응 앞에 늘 무력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자세히 검토하겠다.
진격
1784년 겨울 이후 안정복은 젊은 남인 학자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보다 공세적으로 대응할 필요를 깊이 느꼈다. 그는 성호의 증손인 이재남(李載南, 1755~1835)과 이재적(李載績)에게 편지를 써서 판토하의 「칠극」을 빌려 왔다. 그 편지에서 안정복은 “지금 들으니 우리 무리 가운데 연소하고 재기가 있는 자들이 모두 양학(洋學)을 한다 하니, 그 이야기가 파다하여 덮을 수가 없다”고 써서, 「칠극」을 빌리려는 이유가 천주학에 대해 적극 대응키 위해 공부를 하려는 것임을 밝혔다. 막바로 유옥경(柳玉卿)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근래 들으니 양학이 크게 번성해서 아는 이들 중 재지(才識)로 자부하는 자들이 모두 그 가운데로 들어갔다고 하니, 그대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일세”라 하고는 「기인십편」과 「영언여작」 두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두 편지 모두 1784년 겨울에 쓴 글이었다. 이들 책자가 서학을 믿는 것과 관계없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안정복이 1784년에서 1786년까지의 책력 뒷면에 친필로 쓴 「안정복일기」 중에 「자비서책질(自備書冊帙)」 목록이 있다. 자신이 집에 갖춰두고 작업하던 서책을 나열한 것으로, 그 중에 「천주실의」 2책, 「기인십편」 2책, 「영언여작」 1책, 「변학서독(辨學書牘)」 1책, 「직방외기」 2책이 포함되었다.
1784년 초 겨울에 안정복은 심유(沈浟)의 요청에 따라 「천학설문(天學設問)」이란 글을 지었다. 남인 젊은 학자 그룹에서 천주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나자, 심유가 안정복에게 입장을 물었고, 이에 대해 대답한 글이었다. 글에는 역사학자 안정복의 해박한 면모가 잘 드러난다. 그는 천주학에 대한 평소 공부가 있었다. 중국 역대 사서에 나오는 천주교 관련 언급을 간추렸고, 지옥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으며, 「칠극」의 주장에 회의를 표시하고, 액륵와략(額肋臥略), 즉 성 그레고리오(Gegorius)와 산자(産子)라는 서양 사람의 이야기를 인용해가며 서학의 주장을 공박했다.
1784년 12월 14일에 권일신에게 보낸 편지에도 천주학에 대한 공격적 논설이 상당 부분 전재되었고, 편지 끝에 자신이 이미 지은 「천학설문」이란 글이 있는데, 베껴 써서 보내줄 여력이 없다면서, “하지만 모두 망령된 주장이라 어찌 그대들이 이미 정하여 배움을 이룬 것을 움직일 수 있겠느냐?(然皆妄說, 何能動公輩已定之成學耶?)”라고 썼다. 「천학설문」을 보내줘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편지를 받아 본 권철신은 더 이상의 토론이 무의미함을 깨달았고, 이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거듭 안정복의 편지를 받았던 사정은 앞서 살핀 그대로다. 그 와중에 1785년 3월에 명례방 추조적발 사건이 터졌다. 서학 문제의 심각성이 처음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안정복은 이 문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보아, 천주학에 대한 학술적인 공박을 통해 유학의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리하여 즉각 「천학설문」에서의 소박한 논의를 확대 발전시켜, 중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역대의 자취를 역사 기록 속에서 추려내 정리한 「천학고」를 쓰고, 천학에 대한 30여 조목의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정리한 「천학문답」의 집필에 돌입하였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2) 안정복의 「천학고」와 「천학문답」
유학의 칼끝으로 천주학 논박… 척사론의 사상적 배경 제공
- 안정복은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인 1780년대 초 성호학파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천주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자, 천주교를 뜻하는 ‘천학’은 중국에 이미 오래 전에 들어온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데 목적을 두고 「천학고」를 저술하였다. 「순암집」 권17에 수록되어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안정복은 「천학고」의 서두에서 이렇게 썼다. “계묘년(1783)과 갑진년(1784) 사이로부터, 재기가 있다는 젊은이들이 천학의 주장을 펴서 마치 상제가 친히 내려와 알려주고 시킨 듯이 하였다. 아! 일생 동안 중국 성인의 글만 읽다가 하루아침에 서로를 이끌어서 이단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3년을 배우고 돌아와 그 어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천학고」는 천주학이 중국에 전래된 내력이 이미 오래되었고, 이제 막 시작된 신학문이 결코 아님을 밝히는 데 집필의 목적이 있다. 글에는 알레니(艾儒略)의 「직방외기」,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적힌 한나라 때 이미 천주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음을 밝힌 사실을 제시하였고, 「한서(漢書)」와 「열자(列子)」, 「통전(通典)」, 「북사(北史)」. 「자치통감」, 「홍서(鴻書)」, 「오학편(吾學篇)」, 「명사(明史)」, 「경교고(景敎考)」, 「일지록(日知錄)」, 「속이담(續耳譚)」, 「지봉유설(芝峯類說)」 등 중국 역사서와 관련 문헌을 망라하여, 한나라 때부터 중국에 전해진 이슬람 문화권 종교의 자취를 낱낱이 찾아 파헤쳤다.
예를 들어 「후한서」에 실린 대진국(大秦國)에 대해 소개한 대목에서, “그 나라의 왕은 일정하지 않아서 어진 이를 선발하여 세운다. 돼지, 개, 나귀, 말 등의 고기를 안 먹고, 국왕과 부모 같은 높은 사람에게도 절하지 않는다. 귀신을 믿지 않고 하늘에 제사 지낼 뿐이다. 그 풍속이 매 7일마다 하루를 쉰다. 이날은 매매도 하지 않고 출납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술을 마시며 종일 노닥거린다”고 한 대목을 인용하고, 나아가 “7일마다 왕이 나와 예배를 올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 대중을 위해 이렇게 설법한다. ‘사람이 살아가기란 몹시 어렵고 하늘의 도리는 쉽지가 않다. 간사하고 잘못되며 겁박하고 훔치는 따위의 잗단 행실과 제멋대로 하는 말로 저만 편하고 남은 위태롭게 하며, 가난한 이를 속이고 천한 이를 못살게 구는 것, 이 가운데 하나라도 있으면 그 죄가 더없이 크다.’ 이에 온 나라가 교화되어 마치 물 흐르듯 그 말을 따랐다”는 대목을 인용했다.
이밖에 고국(苦國), 고창국(高昌國), 언기국(焉耆國), 조국(漕國), 강거국(康居國), 활국(滑國) 등 고대 문헌에 나오는 동투르키스탄, 타클라마칸과 투르판 일대의 이슬람 국가 관련 기록들을 낱낱이 찾아내어, 7일에 한 번씩 주일을 지키고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그들의 종교의식과 핵심 교리,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헤자즈 지방의 내륙 도시 묵덕나(默德那), 즉 메디나(Medinah) 지역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살폈다.
천주학은 새로운가?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엮었던 권위 있는 역사가로서, 중국 역대 기록에 대한 꼼꼼한 카드 작업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교리가 이미 한나라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고, 또 “내가 살피건대 개황(開皇) 이후로는 그들의 종교가 중국에 행해져서 건물을 지어 살았다. 도관(道觀)이나 사찰과도 다름이 없었는데 그 종교를 위주로 할 뿐이었다. 회창(會昌) 이후로는 그 종교가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다”는 등의 언급을 통해 중국에 들어온 이들의 종교가 어느 순간 자연적으로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썼다.
결국, 안정복은 「천학고」에서 천주교가 이미 고대 중국에 들어왔고, 이후로도 그들의 종교가 중국 역사서에 언급된 자취를 따라가며, 천주교가 결코 신학(新學)이 아니고, 파천황(破天荒)의 새로운 진리일 수 없음을 드러내고자 힘썼다. 글을 읽고 나면 안정복의 정보력에 먼저 압도된다. 이 한편의 글을 짓기 위해 그가 준비한 시간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명나라 때 전겸익(錢謙益)과 청초의 고염무(顧炎武) 같은 대학자들이 그들의 허황함을 입증한 증언을 남긴 것도 문헌에 명백하다. 그러니 이 천주학을 무슨 파천황의 새로운 진리인 양 과대 포장하여, 선철(先哲)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앞선 역사가 이미 증명한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천주학에 대한 34가지 질문과 응답
이어서 쓴 「천학문답」은 즉문즉답 식으로 혹자의 질문에 자신이 대답하는 문답식 설법으로 천주학에 대한 32가지 질의응답을 전개했다. 부록으로 다시 성호 이익의 서학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는 2차례 문답이 덧붙어, 모두 34가지 질의와 응답을 소개한 장편의 글이다.
앞쪽 질문에는 천주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주제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옛날에도 있었나? 왜 배척하나? 믿으면 왜 안 되나? 천학이란 유학과 어찌 다른가? 예수와 성인이 같지 않은가? 고금에 천학을 말한 자는 어찌 말했는가? 천학의 폐단이 무엇인가? 여기까지는 기본 입장에 대한 설명이다.
이어 천주교 교리를 구성하는 핵심 명제를 차례로 물었다. 현세와 후세란 무엇인가? 천당과 지옥의 주장은 어떠한가? 천학이 현세를 배척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인가? 삼구(三仇), 즉 세 가지 원수의 주장이 어째서 잘못인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원조와 재조(再祖)의 주장이란 무엇인가? 서사(西士)의 천학 공부는 어떤 내용인가? 불교가 천학에서 훔쳐갔다는 말이 사실인가? 천학의 역사는 온전한 데 반해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데 사실인가? 서사들의 소견과 역량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중국 성인의 가르침이 천학만 못하다는데 그런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야말로 지극한 인(仁)이 아니겠는가? 주자가 천(天)을 이(理)라 한 주장이 맞는가? 중국 선비들이 어째서 서사의 가르침을 따르는가? 중국의 글에도 천주란 표현이 나오는가? 「열자」에 나오는 서방 성인이 곧 천주가 아닌가? 세례를 받고 별호를 정하는 것은 어떤가? 삼혼설(三魂說)은 어떠한가? 천학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천학에서 말하는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숨돌릴 틈 없이 쏟아지는 질문을 늘어 세워 놓고, 안정복은 중국 고전에서 논거를 끌어오고, 방증 자료를 인용하여 차례로 논박했다. 저들과의 논쟁과 토론에 대비해, 유학 쪽에서 대응할 논리를 제공하겠다는 사명감이 깊게 담긴 글이었다. 논의는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보여준 문답 방식과 질문 내용을 끌어왔다. 조선 초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조 아래 불교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佛氏雜辨)」의 글쓰기와 그 성격이 완전히 똑같다. 예상 가능한 질문의 목록이 모두 공박 되면 그들의 허구성이 환히 밝혀져서 글은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천학의 무리가 이런 주장을 펼치거든 너희는 이렇게 반박하여 그들의 논리에 대항하라는 지침을 내려주려고 작정하고 쓴 글이었다.
안정복이 「천학문답」의 집필을 끝낸 것은 1785년의 가평일(嘉平日)이었다. 그해 일력상 이날은 음력 12월 20일이었다. 그해 3월의 추조적발 사건과 6월 이기양과의 일전을 치른 뒤, 안정복은 서학서를 곁에 쌓아두고서 그들의 교리를 구성하는 핵심 개념들을 추출하고, 그들의 설명 방식을 이해한 뒤, 유학의 칼끝으로 그 허점을 파고들어 명쾌한 분해를 시도했던 셈이다.
천주학에 대한 성호 이익의 입장
장강대하로 이어지던 문답이 다 끝나고, 안정복은 다시 부록에서 두 차례의 문답을 더 이었다. 성호 선생도 천주학을 믿었다는데 사실인가? 성호 선생이 마테오 리치를 성인이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안정복은 답변에서 선생의 진의를 악의적으로 왜곡한 거짓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들었다는 성호의 말로 성호의 입장을 변호했다.실제로 성호학파 내부에서 신서파와 공서파로 갈려 전쟁을 벌이게 된 원인 제공자는 바로 성호 자신이었다. 성호의 직계였던 이병휴와 홍유한, 이철환, 이가환 등은 서학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그 제자 권철신과 이기양, 이벽 등이 이 노선을 더욱 발전시켜 신서파의 흐름을 활짝 열었다. 그 반대쪽에 윤병규와 안정복, 황덕일 등 성호 우파의 흐름이 또 그만큼 굳건했다.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이 「서학변」을 지어 성호의 서학론에 대들고, 안정복의 가르침을 받은 안동의 남한조(南漢朝, 1744~1809)가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를 지어 안정복의 입장에 찬동했던 것은 성호의 서학에 대한 태도가 끝내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홍유한, 권철신, 이기양 등은 성호의 속내를 읽어 서학에 경사되었고, 안정복 등은 성호의 진의를 앞세워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남인 성호학파가 천주학의 수용과 반대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게 된 배경에는 성호 이익의 어정쩡한 태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촘촘한 논의가 필요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3) 주머니마다 쏟아져 나온 예수 성상(聖像)
“사학을 배우는 자들은 저마다 화상이 든 작은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놀라운 자료, 강세정의 「송담유록」
교회사학자 홍이섭 선생의 「한국 가톨릭사의 조기적(早期的) 자료에 대해서」란 글은 「가톨릭청년」 1962년 11월호에 실려있다. 초기 교회사 연구의 주요 자료인 「벽위편」과 진주 강씨 일문 문집의 자료 가치를 짧게 소개한 내용이다.
홍이섭은 특별히 강세정(姜世靖, 1743∼1818)의 「송담유록(松潭遺錄)」에 주목했다. 「송담유록」은 필사본 1책 53장 분량이다. 글에 따르면 제1장에서 22장 전면까지에, 성호의 서학에 관한 논의부터 신유교난(辛酉敎難)까지의 역사를 요약했고, 뒤쪽에는 서학 관련 상소문과 황사영 백서, 그리고 신후담의 「돈와서학변(遯窩西學辨)」을 수록했다.강세정은 자가 명초(明初), 호는 송담(松潭)이다. 아들은 대표적인 공서파 인물인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이다. 다산이 귀양간 지 14년 만에 해배의 기회가 왔을 때, 강준흠이 극렬한 반대 상소를 올려 4년을 유배지에서 더 보내야 했던 악연이 있다. 강준흠의 아들 강시영(姜時永, 1809∼1868)은 「벽위편」을 쓴 이기경(李基慶, 1756~1819)의 사위다. 강준흠이 지은 이기경의 묘지명이 「삼명집」에 실려 있기도 하다.
강세정은 다산이 쓴 「정헌묘지명」에 나온다. 1794년 여름, 강세정이 이가환에게 글을 보내 홍낙안의 죄상을 논하고, 아들 강준흠을 거두어 달라고 청한 일을 적었다. 다산은 특별한 맥락 없이 이 일을 굳이 거론했다. 강세정이 한때 이가환에게 홍낙안을 욕하면서까지 아들의 훈도와 교시를 부탁해놓고, 이후 돌변하여 신서파를 해코지하는 데 앞장선 것을 비난하기 위해서였다. 이럴 때 다산의 붓끝은 앙칼지고 매서웠다. 이재기의 「눌암기략」에도 강세정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필자는 최근 홍이섭 선생이 소개했던 강세정의 이 「송담유록」을 추적하여 확인했다. 책을 펼치자 듣도 보도 못한 초기 교회사의 중요한 기술들이 줄줄이 나와 크게 놀랐다. 성호 일문의 서학에 대한 지속적 관심, 권철신과 이존창에 관한 전혀 새로운 몇몇 사실들, 진산 사건의 이면 기록 등이 그것이다.
주머니마다 예수상이 나왔다
먼저 을사추조적발과 관련된 대목을 보자. “형조판서 김화진이 염탐한 바가 되어 김범우가 붙들려 와 감옥에 갇혔다. 장물(贓物) 중에 예수의 화상이 몹시 많았다. 사학(邪學)을 배우는 자들은 저마다 작은 주머니를 차고 있었고, 주머니 안에는 화상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바로 예수가 형벌을 받아 죽어 하늘로 올라간 뒤에, 서양 사람들이 그 모습을 그려 늘상 몸 가까이에 차고서, 아침저녁으로 경문을 외며 높여 받드는 것이다.
형조에서 집회 관련자 검거 후 장물을 조사할 때, 저마다 차고 있던 작은 주머니 속에서 예수의 형상이 그려진 상본(像本)이 쏟아져 나왔다. 호신부처럼 지녀 아침저녁으로 기도할 때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명례방 집회 참석자 대부분이 작은 크기의 예수 성화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것은 이제껏 처음 듣는 얘기다.
뒤쪽에 비슷한 내용이 다시 나온다. “여염의 여자들이 좇아서 사학(邪學)에 교화되었다. 그중에서도 과부들이 천당과 지옥의 주장을 깊이 믿어, 귀천을 따지지 않고 또한 많이들 빠져들었다. 또 모여서 강학하는 장소가 있어서 밤중을 틈타 왕래하였다. 매달마다 강습하고 예배 드리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각자 작은 주머니를 찼는데 천주의 화상이 들어 있었고, 반드시 편경을 넣어 두었다.
여성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갔고, 집회 장소와 집회 일자가 정해져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주머니 안에 앞서의 상본 외에 편경(片鏡)이 들어 있었다고 한 부분이다. 편경은 또 뭘까?
편경은 요사스런 거울
편경은 편면경(片面鏡)의 줄임말이다. 동경(銅鏡)처럼 한 면은 매끄럽고, 다른 한 면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사학징의」 끝에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의 집에서 압수해 와 불에 태운 물건 목록을 정리한 기록이 부록으로 실려있다.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가 그것이다. 이 압수 품목들은 초기 천주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단히 유용하고 유력한 기록이다.
서책에 대해서는 따로 살피겠고,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이 도상족자 3점과 소낭(小囊) 즉 작은 주머니 6개였다. 소낭의 바로 아래에는 “그 가운데 간혹 머리카락과 나무 조각, 잡다한 분말 등 요사한 물건이 들어 있다(其中或有頭髮木片雜粉末等妖邪之物)”는 설명이 나온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다시 윤현(尹鉉) 집안의 방구들장 밑에서 찾아낸 압수 품목 중에 목자목랍요상(木字木妖像) 1개와 요경(妖鏡) 1개, 소소경(小小鏡) 7개, 그리고 소소유원요상(小小鍮圓妖像) 2개가 보인다. 이 밖에도 소소수낭(小小繡囊) 2개와 소소낭(小小囊) 14개가 더 있다. 작은 주머니 14개는 새로 입교한 신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질과 모양은 유원(鍮圓) 또는 납()이다. 놋쇠 재질이거나 납() 즉 납과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 타원형 또는 원형의 형태 위에 요사스런 형상이 새겨진 물건이다. 이것이 바로 앞선 글에 나오는 편경의 실체다. 김희인(金喜仁)의 압수 품목에도 ‘납요상(妖像)’ 1개가 있다.
작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편경과 머리카락 등의 물건에 대해서는, 한신애의 딸 조혜의(趙惠義)가 1801년 2월에 형조에 붙잡혀 와서 취조받을 때 한 공초에 설명이 나온다.
“파내온 잡물 중 사람의 머리카락 및 자잘한 나무 조각은 바로 연전에 사학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의 두 발과 목이 잘릴 때 고였던 목침입니다. 작은 붉은 주머니 안에 주석 조각을 솜으로 싸서 채워 넣은 것은 이름을 ‘성두(盛斗)’라 합니다. 이것은 사학하는 사람들이 몸 주변에 의례 차고 다니는 것입니다.
「송담유록」 속 편경은 성두란 명칭으로 불렸고, 관에서는 이를 요경으로 불렀다. 모두 북경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물건이었다. 편경은 예수와 성모 또는 성인의 얼굴을 새긴 동전 크기의 작은 메달이다. 몸에 지니고 다니면 일종의 수호성인처럼 자신을 지켜준다는 신심이었다. 편경을 솜으로 싸서 보관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초기 교회의 신심
1856년에서 1865년 사이에 장 베르뇌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서한 중에 반입 요청 물품 목록이 있다. 1856년 11월 5일 편지에는 성모 칠고(七苦) 메달 10그로스(grosse)를 요청했다. 1그로스는 12다스, 즉 144개이니, 10그로스라면 1440개의 메달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셈이다. 예수 마리아와 사도 또는 세례명으로 자주 쓰이는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진 상본 200개를 보내달라는 부탁도 나온다. 1859년 11월 4일 편지에도 예수 마리아 상본 50개와 사도들과 성인 상본 400개, 그리고 칠고 메달 2그로스와 성모 메달 4그로스를 요청했다. 1864년 11월 25일 편지에서는 성모 성인 상본의 요청이 1000개로 늘었고, 1865년 12월 15일 편지에는 칠고 메달 큰 것 5그로스와 중간 것 10그로스, 기적의 성모 메달 큰 것 5개와 다른 모델 각 20개, 상본 컬러 1500장과 흑백 1000장 등을 요청하고 있다.(상세한 내용은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참조.)
편지 속에 성모칠고 메달에 대한 요청이 반복된다. 교회력으로 해마다 9월 15일은 성모칠고 주일인데,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수 때문에 겪게 되는 일곱 가지 큰 고통을 기리는 축일이다. 성모칠고 메달이란 그 형상을 편경에 새긴 것을 말한다. 초기 교회에서부터 성모 신앙이 대단히 중시되었다는 뜻이다.
최양업 신부도 1857년 9월 14일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교우들의 요구를 달랠 길이 없으니, 얇은 종이에 색채 없이 그린 조금 큰 상본과, 성모님 상본을 보내달라고 청했고, 성인 상본은 요셉, 베드로, 바오로, 요한, 야고보, 프란치스코, 안나, 아가타, 막달레나, 바르바라, 루치아, 체칠리아, 아나스타시아 등의 상본을 약 100프랑어치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작은 십자가와 성패(聖牌)도 함께 청했는데, 성패는 바로 편경의 다른 이름이다.
「송담유록」에서 뜻밖에 찾은 상본과 메달에 관한 기록은 명례방 집회 당시부터 이들의 신앙 활동과 행위가 상당히 체계와 계통을 갖춘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그들이 읽었던 교리서와 미사 전례도 그냥 일반적인 호기심의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4) 교회, 신분의 벽을 허물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홍낙민이 풀어준 노비의 아들이었다”
명례방 집회와 관련한 새로운 기록
강세정의 「송담유록」을 좀더 소개해야겠다. 성립기 조선 교회의 정황에 대한 몇 가지 기록들이다. “계묘년(1783) 겨울에 이동욱(李東郁, 1739~?)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들어가게 되자, 그의 아들 이승훈이 수행하였다. 조선관(朝鮮館)에 머물 적에 자주 천주당을 왕래하여 날마다 머물러 자고 돌아왔다고 한다.(당시 다른 사신을 수행했던 막료(幕僚) 비장(裨將)의 말이다.) 사서(邪書) 중에 이전에 나온 적이 없었던 허다한 책자들을 모두 사가지고 왔고, 그들이 가르치고 공부하는 방법까지 다 배워서 왔다. 이때 이후로 그 교법(敎法)이 크게 갖추어졌다.”
이승훈이 천주당에서 날마다 머물러 잠까지 자며 천주학을 배웠다는 내용이다. 강세정은 당시 연행에 수행했던 비장의 전언을 직접 들었던 듯하다. 여기에 더해 당시 이승훈이 수많은 천주교 관련 서적을 지니고, 교학 방법까지 다 익힌 채 돌아온 사실을 적었다. 실제 귀국 이듬해인 1785년 3월 명례방 집회 당시, 이들이 모두 예수 상본을 담은 주머니를 들고 있었고, 이미 「성경광익」과 「성년광익」 같은 책을 바탕으로 주일 미사까지 드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승훈이 귀국 시에 가져온 천주교 관련 물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뒤에 따로 살필 기회를 갖겠다.
명례방 집회 검거 이후 권일신이 이윤하, 이총억 등 5인과 함께 추조로 들어가서 성상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형조판서 김화진의 반응과 이후 이총억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누누이 호소하자, 형조판서가 그중 아무개와 아무개를 심문하고는 크게 꾸짖어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이름난 집안의 사대부의 자식인데, 어찌하여 이런 외교(外敎)로 들어갔더란 말이냐? 너희는 상민과는 다르므로 형벌이나 매질을 하지 않고 특별히 놓아 보내 준다. 다시는 이 학문을 하지 말거라.’ 단지 김범우만 엄형에 처하고 귀양 보냈다.”
다음 한 단락이 더 흥미를 끈다. 「송담유록」의 저자인 강세정은 같은 남인으로 이기양과도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하루는 그의 아들 이총억이 이웃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세정은 일부러 이총억이 머물던 곳으로 찾아가서 물었다. “네가 추조의 뜨락까지 들어갔다던데, 사대부는 산송(山訟)이 아니고는 그곳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네가 나이 어린 선비로 어찌하여 패악스러운 거동을 하는 게냐?” 이총억의 대답은 이랬다. “성상(聖像)에 재앙이 박두한지라 어쩔 수 없이 고하여 호소하였습니다.(禍迫聖像, 故不得不告訴云.)” 이 말을 듣고 강세정은, “네가 이미 예수를 두고 성상이라 하는 것을 보니 거기에 빠진 것이 심하구나” 하고는, 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러고 나서 “총억은 그 숙부인 이기성과 함께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물든 자이다”라는 말을 더 보탰다.
이기성의 놀랍고 해괴한 행동
이기성은 이기양의 동생이자, 안정복의 손녀사위였다. 안정복이 이 일로 이기양과 일전을 벌였던 일은 앞서도 살폈다. 이기성은 권일신이 형조에 찾아갔을 때 함께 갔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당시 관련 기록에서 그의 이름은 빠져 있다. 그가 5명과 함께 간 것이 아니라, 혼자서 따로 찾아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송담유록」에 그 이기성에 관한 기록이 더 나온다.
신사원(申史源)은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진산 현감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보다 앞선 1785년 8월에 예산현감으로 부임했다. 1787년 4월,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던 심환지가 올린 보고를 통해 볼 때, 신사원은 여러 마을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민(士民)의 말을 듣고, 읍리로 들어가 아전과 장교의 정상을 살펴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훌륭한 사또라고 칭찬했던,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송담유록」은 이렇게 말한다. “신사원이 뒤늦게 벼슬에 나아가 예산 현감이 되었다. 그 땅과 접해있는 천안 여소동(余蘇洞)에 이존창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홍낙민(洪樂敏, 1751~1801)이 속량해준 노비로, 자못 문필을 알아 홍낙민에게서 수업했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사학만 공부하여 근처에서 이름이 있었다. 상민은 말할 것도 없고 남녀노소가 서로서로 전하여 익혔다. 신사원이 공문을 보내 붙잡아서 천안의 감옥에다 가두었다.”
여소동은 여사울의 또 다른 표기다. 여사울은 천안에 속한 월경지로 예산군 안에 있었으므로 예산 현감 신사원이 이존창을 체포해서 천안으로 이송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존창이 처음으로 체포된 것은 1791년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그보다 4년 앞선 1787년에 이미 신사원에 의해 이존창이 체포되어 천안 감옥에 이송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 일이 1787년의 일인 것을 어찌 알 수 있는가? 다음 이어지는 기록 때문이다.
“이기성이 이 말을 듣고는 곧장 옥문 밖에 가서 이존창에게 절을 올린 뒤에, 자기도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천안 군수 조정옥(趙鼎玉, 1733~?)은 평소 이기성과 친숙했던 터라 불러와 몹시 꾸짖었지만 듣지 않았다. 온갖 방법으로 달래자 그제서야 떠나갔다. 이존창이 비록 상민이지만, 그의 서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독실했기 때문에, 사학을 하는 일파들이 마치 스승처럼 높여서 그를 섬겼다. 이기성이 예로써 대한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
「일성록」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조정옥이 천안 군수로 내려간 것이 1787년 2월 4일이고, 그해 11월 9일에 평양 서윤으로 전보되어 천안을 떠났다. 그러니까 이존창이 검거되어 천안 감옥에 갇힌 것은 1787년 2월에서 11월 사이의 일일 수밖에 없다. 신사원은 1785년 8월 10일에 예산현감으로 부임해, 1789년 6월 20일에 진산 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존창에 대한 새로운 사실
위 기록에서 우선 이존창이 홍낙민이 속량((贖良)해준 노비였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다. 사실 그간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았다. 뒤쪽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존창은 천안의 상한(常漢)으로 홍낙민이 속량시켜준 종의 아들이었다. 홍낙민과 이기양에게서 글을 배워, 글씨도 잘 썼고 시에도 능했다. 사학(邪學)에 조예가 깊어 인근을 교화시켰다. 마을 사람 중에 다른 고을의 양민과 혼인한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교화되어 사학을 하니, 덕산과 홍주, 예산과 청양, 정산의 사이가 온통 사학에 빠져들었다. 이에 한글로 전하여 가르쳤다”고 적었다. 이존창 자신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홍낙민 집안의 종이었고, 홍낙민이 그를 속량시켜 노비의 신분을 면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존창은 시문에 능하고 글씨까지 잘 썼을 뿐 아니라, 천주교에 대한 깊은 조예로 내포 일대가 천주학의 진앙지가 되게 했다고 썼다.
이존창이 천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이기양의 동생 이기성이 보인 행동은 참으로 뜻밖이어서 놀랍다. 우선 그는 명례방 사건 당시 형조에 뛰어들었던 것과 똑같이, 이번에는 멀리 천안 감옥까지 이존창을 찾아갔다. 찾아갔을 뿐 아니라, 옥문 밖에서 옥에 갇힌 이존창을 향해 큰절까지 올렸다. 양반이 종의 자식에게 큰절을 올린 셈이다. 그러고는 천안 군수 조정옥을 찾아가 자기도 이존창과 함께 죽여달라고 요청했다. 정작 기겁을 한 것은 천안 군수 조정옥이었다. 천안 군수 조정옥은 권철신의 매부였던 조정기(趙鼎基)와 가까운 친척이었고, 이기성과도 친숙하게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조정옥은 그런 이기성을 달래고 얼른 끝에야 겨우 돌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실로 이기성의 행동은 당시의 상식에 비추어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해괴한 일이었다.
이같은 정황은 당시 교회 내에서 이존창이 지녔던 위상에 대해 좀더 다르게 생각해야 함을 시사해준다. 이존창의 교계 내부에서의 위치는 분명히 신분을 뛰어넘는 그 어떤 아우라가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송담유록」이 적고 있는 다음 기록이다.
“홍낙민의 외종질인 조 아무개는 참판 조경진(趙景, 1579~1648)의 후예이고 상사(上舍) 조육(趙堉)의 손자였는데, 이존창의 딸을 취해 며느리로 삼았다. 홍낙민이 권유하여 성사되었다. 그들의 학문은 배움의 깊고 얕음을 가지고 높고 낮음의 차례로 삼을 뿐, 문벌의 고하는 따지지 않았으므로 서로 혼인을 통하기에 이르렀다. 사학이 세상의 도리를 그르치는 것이 이에 이르러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홍낙민은 외종질인 조 아무개에게 자기 집 천한 노비 출신인 이존창의 딸을 며느리로 데려갈 것을 권유해, 이 일을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노비 집안의 딸이 명문 대갓집의 며느리로 들어간 것도 놀라운데, 그것을 지체 높은 양반인 홍낙민이 나서서 주선했고, 그의 외종질이 이를 수락했다는 사실도 더 놀랍다. 조 아무개 또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분의 벽을 허물고,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교회 공동체의 꿈이 위태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평등한 세상을 복음을 통해 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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