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 하나
23: 16
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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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맥추 감사절로 지키는 주일 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인간이 행하여야 할 의무입니다.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삼하23:49,50)”
감사는 은혜 받은 자들이 마땅히 취할 태도이고, 은혜 받은 자들이 보답하는 행위이며, 구원 받은 자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가시다가 한 촌에서 열명의 문둥이를 만나게 되셨습니다. 문둥이들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 수용되어 살았고, 혹여라도 성한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게 되면 스스로 “우리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하여 접근치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문둥이들이 예수님을 보자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애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11-14절). 이는 그들의 병이 치유됨을 의미하며, 당시에는 제사장들만이 문둥병의 완치를 확인해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명의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몸이 낫는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하나 사마리아 문둥이만이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이 나은 것을 확인 받음을 제쳐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15-19절). 그 중에 하나,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 감사를 안 사람
그 중에 하나, 그는 감사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려야하는 불치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감사를 안다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없는 사람은 참그리스도인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문제는 감사를 알지 못함이요,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일에는 무지무식하고, 잊고 살지라도 감사는 알아야하고 잊지 않아야 합니다. 감사를 아는 것이 신앙이요 감사를 아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교인이면서 감사를 모르는 이유는 받고도 받은 줄을 모르기 때문이요, 심령이 완악한 까닭입니다. 세상 일만 열심히 생각하고 주님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아니하고 인간중심의 생활을 하는 까닭입니다. 한마디로 감사를 알지 못함은 불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9:25)”.
본래 소경이었던 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뜬 후, 바리새인들의 회유, 협박 속에서 한 말입니다.
미국의 큰 정신병원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정신병 환자들을 병원에 내려 놓고 차를 돌리려 하는데 병실 2층 창문에서 누가 그를 불렀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를 부르십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당신께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예, 말하세요” “당신은 건강한 정신을 가졌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 본 일이 있나요?”
그는 전기에 감전 된 듯 했고, 깊이 회개 했으며, 이를 자기 교회에서 간증했습니다.
“나는 15년동안 정신 병원에서 일하면서 매일 정신병 환자를 운송했건만 나의 건강한 정신에 대하여 한 번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감사치 못함은 회개거리입니다.
둘째 : 감사를 한 사람
그 중에 한 사람, 그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알았고, 안 감사를 즉시 행동으로 옮긴 자였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사례하니’라는 헬라어 ‘유카리스데오’는 단순한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라 깊은 환희와 감격에서 나온 감사를 뜻합니다. 그 중에 하나, 사마리아 문둥이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귀로만 들음에서 눈으로 보는, 실제로 체험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욥의 고백입니다.
행하려면 알아야 합니다. 감사를 알아야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아는 감사를 행동으로 옮김은 신앙의 바른 동작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감사함은 복된 미래를 열고, 감사치 않음은 열린 미래도 닫게 합니다. 지나간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면 새로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별명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림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감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감사는 아는 것에 멈춤지 아니하고 감사를 드리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두 천사에게 땅에 내려가 사람들의 기도를 모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천사는 하루 종일 기도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일을 마친 두 천사가 서로의 바구니를 살펴보았습니다. 헌데 한 천사의 바구니는 넘쳤고, 한 천사의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두 천사는 서로에게 물었답니다. “어떻게 해서 천사님의 바구니는 그렇게 넘치나요?” “사람들이 간구하는 소원들을 담았더니 이렇게 넘치는 군요” “그런데 천사님의 바구니는 왜 그리 비었나요?” “감사드리는 기도만 담았더니 이렇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해달라’ ‘저 것을 해달라’는 기도만 했지, ‘이렇게 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저렇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는 거의 없었어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감사생활은 하나의 과제, 곧 숙제입니다. 학생들이 숙제를 해야함은 당연한 것이나 잘 하는 학생도 있고, 안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전자요, 공부 못하는 학생이 후자임은 물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 생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감사 드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표리부동한 기독교인이요 위선자입니다. 아는 감사를 하는 감사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더 크게, 감사할 조건과 상황이 와집니다.
셋째 : 구원까지 받은 사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중에 하나, 사마리아 문둥이는 육체의 질병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 받았습니다. 허나 아홉 문둥이는 육의 치유함을 받기는 했으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영혼의 문제는 해결 받지 못했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의 책망이시며, 탄식이십니다. 사마리아 문둥이가 영과육, 모두 구원받기 까지의 단계입니다.
1단계 : 예수님께 대해 무지.
2단계 : 예수님의 소문을 들음
3단계 : 주님을 만남으로 저주의 병이 치유됨.
4단계 : 감사함을 앎.
5단계 : 감사를 드림.
6단계 : 구원에 이름.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아는 내적 감사에서, 하는 외적 감사로, 그리고 영적 구원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감사의 생활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입니다. 현재의 감사는 나를 더 올라가게 하고, 더 좋아지게 하며, 신앙을 깊게 만듭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가 감당해야 할 생의 몫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내 몫의 감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 다른 사랑’, 남다른 신앙인이 되어야 하나님으로부터 남 다른 사랑을 받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번에 집회를 한 일본 동경 유리가오까 복음교회는 300여명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성도가 늘어 교회를 확장해야 해서 교회 옆 땅 130평을 사야만 했답니다. 땅값은 3억엔, 우리나라 돈으로 30억, 그런데 놀랍게도 한 달만에 그 땅을 샀답니다. “우리 교인들이 모두 다 구원받은 감격속에서 내가 해야 될 내 몫의 감사가 있음을 알고, 한 마음으로 자기 몫의 감사를 함으로 이렇게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리가오까 교회 시바 목사님의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아버지의 은혜를 등지고, 아버지를 떠났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참한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께 대한 감사를 알고, 겸손히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옴으로 그의 생은 다시 회복되었고, 눈물 끝!, 불행 끝!이 되었습니다.
회개는 빠를수록 좋고, 은혜는 깨달을수록 귀합니다. 그 중에 하나, 사마리아 문둥이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셨습니다. 해서 그는 감사치 아니하는 아홉 문둥이를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만이라도 감사했습니다.
감사의 신앙생활은 오늘의 복을 미래의 구원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께선 감사하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잊음은 모든 것을 잃는 상실입니다. 감사 없이 사는 자의 미래는 실패와 불행이요, 종점은 회한입니다.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복되게 하시고, 온전케 해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것은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선 감사드리는 신앙인에게 구원, 부활의 소망, 영생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감사하는 신앙생활은 현재를 미래의 영광으로 전화시키는 삶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
사랑하는 성도들이시여! 여러분은 그 중 하나에 속하십니까? 아홉에 속하십니까?